|
[역사란 무엇인가] Chapter 2_58-61p_2021년 9월 28일(화)
Chapter 2_13_58p The Society and Individual
No ideas, no revolution, no liberalism: Namier chose to give us a brilliant portrait of an age still safe - though not to d remain safe for long-from all these dangers. But Namier's choice of a second subject was equally significant. Namier by-passed the great modern revolutions, English, French, and Russian-he wrote nothing of substance on any of them-and elected to give us a penetrating study of the European revolution of 1848-a revolution that failed, a set-back all over Europe for the rising hopes of liberalism, a demonstration of the hollowness of ideas in face of armed force, of democrats when confronted with soldiers. 어떤 이념, 어떤 혁명, 어떤 자유주의도 없는 조용하고 화려한 시절을 그는 선택했다. 네이미어의 두 번째 선택도 똑같이 의미 있었다. 네이미어는 지나쳤다. 위대한 근대 혁명들인, 영국혁명, 프랑스 혁명, 그리고 러시아 혁명등. 그리고 그는 그것들에 대한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선택했다. 우리에게 주기 위해서 1948년 유럽 혁명의 심도있는 연구를 위해서. 그 혁명은 실패한 혁명이었다. 전 유럽에 자유주의 열기가 퍼져 나가던 시점에서의 반동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념의 공허에 대한 예를 보여 주었다. 무장한 군인들 앞에서 이념의 공허함에. 그리고 군인들과 대치한 민주주의자들의 공허함의 예를 보여 주었다.
The intrusion of ideas into the serious business of politics is futile and dangerous: Namier rubbed in the moral by calling this humiliating failure 'the revolution of the intellectuals'. 심각한 정치의 영역에 이념이 침투하는 것은 소용없고 위험한 것이다. 네이미어는 이 굴욕적인 실패를 ‘지성의 혁명’이라 불렀다.
Nor is our conclusion a matter of inference alone; for, though Namier wrote nothing systematic on the philosophy of history, 단지 추론의 문제에만도 아니다. 네이미어는 역사철학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것을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he expressed himself in an essay published a few years ago with his usual clarity and incisiveness. 그는 어떤 에세이에서 아래와 같이 간결하고 신랄하게 표현했다.
'The less, therefore,' he wrote, ‘man clogs the free play of his mind with political doctrine and dogma, the better for his thinking.' 인간은 정치적인 독트린과 도그마에 덜 묶일수록 그의 사고는 더 좋아진다.
And, after mentioning, and not rejecting, the charge that he had taken the mind out of history, he went on: 그가 역사에서 마음을 제거했다는 공격을 언급한 뒤,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는 계속했다.
Chapter 2_14_59p The Society and Individual
Some political philosophers complain of a 'tired lull' and the absence at present of argument on general politics in this country; practical solutions are sought for concrete problems, while programmes and ideals are forgotten by both parties. Some political philosophers complain of a 'tired lull' and the absence at present of argument on general politics in this country; But to me this attitude seems to betoken a greater national maturity, and I can only wish that it may long continue undisturbed by the workings of political philosophy. I do not want at the moment to join issue with this view: I will reserve that for a later lecture. 구체적인 문제들을 위해서 실제적인 솔루션을 찾으려 노력한다. 반면에 강령과 이상들은 양당에 의해 잊혀진다. 그러나 나에게 이와 같은 태도는 더 큰 국가적인 성숙의 증거인 듯 보인다. 나는 오직 바란다. 그것이 오랫동안 방해받지 않고 지속되도록, 정치 철학의 작업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오래 도록, 나는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는 이슈에 참석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나중의 강의를 위해서 잠깐 미뤄놓고자 한다.
My purpose here is merely to illustrate two important truths: first, that, you cannot fully understand or appreciate the work of the historian unless you have first grasped the standpoint from which he himself approached it; secondly, that that standpoint is itself rooted in a social and historical background. 여기서 내 목적은 두 개의 중요한 사실을 쉽게 설명하는 것이다. 첫 번째, 당신은 이해하거나 음미할 수 없다. 역사가의 작업을 만약 당신이 어떤 관점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 관점으로 그 스스로 그 작업에 접근한다. 둘째 그 관점은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뿌리 두고 있다는 것이다.
Do not forget that, as Marx once said, the educator himself has to be educated; in modern jargon, the brain of the brain-washer has itself been washed. The historian, before he begins to write history, is the product of history. 잊지 마라. 마르크스가 얘기했듯이, 교육자가는 그 자신이 교육되어야 한다. 현대적인 용어를 사용하면 뇌를 씻어내려야 사람은 자기 자신이 먼저 씻겨져야 한다. 역사가는 역사책을 쓰기 시작하기 전부터 역사의 산물이다.
The historians of whom I have just spoken - Grote and Mommsen, Trevelyan and Namier - were each of them cast, so to speak, in a single social and political mould; no marked change of outlook occurs between their earlier and later work. 방금 내가 말한 역사가들은 그로테, 몸젠, 트레벨리언 그리고 네이미어다. 그들은 각각 말하자면 단일한 하나의 사회적 정치적 환경에서 지냈다. 어떠한 눈에 띄는 전망에 대한 변화가 그들의 초기작과 후기작 사이에 나타나지 않았다.
Chapter 2_15_60p The Society and Individual
But some historians in periods of rapid change have reflected in their writings not one society and one social order, but a succession of different orders. The best example known to me of this is the great German historian Meinecke(1862년~1954년), whose span of life and work was unusually long, and covered a series of revolutionary and catastrophic changes in the fortunes of his country. Here we have in effect three different Meinecke(1862년~1954년)s, each the spokesman; of a different historical epoch, and each speaking through one of his three major works. The Meinecke(1862년~1954년) of Weltburgetthum and Nationalstaat, published in 1907, confidently sees the realization of German national ideals in the Bismarckian Reich and-like many nineteenth-century thinkers, from Mazzini onwards-identities nationalism with the highest form of universalism: 격변하는 시기의 어떤 역사가들은 하나의 사회, 하나의 질서가 아닌 일련의 여러 가지 질서들을 그들의 글에 반영한다. 나에게 가장 좋은 예는 위대한 독일 역사가 마이네케다. 그의 생애와 작업 기간은 아주 길다. 그리고 그 시기동안 일련의 혁명적이고 재난적인 변화들을 그의 나라에서 겪었다. 여기 우리는 결과적으로 세 명의 마이네케를 보게 될 것이다. 각각은 다른 역사적 시대를 대변한다. 그리고 그의 작업들에 그것이 나타나 있다. 1907년에 발행된 <세계 시민주의와 민족국가>에서 그는 자신있게 비스마르크 시대에서 독일 국가 이상들을 실현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19세기 많은 사상가들과 같이 민족주의를 세계주의의 최고로 보았다. ‘마치니’ 이래로.
this is the product of the baroque Wilhelmine sequel to the age of Bismarck. 이것은 비스마르크 시대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빌헬름 시대의 산물이다.
The Meinecke(1862년~1954년) of Die idee der Staatsrason, published in 1925 speaks with the divided and bewildered mind of the Weimar Republic: 1925년에 출간된 <민족적 이성의 이념> 이란 책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분할된 혼란스런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the world of politics has become an arena of unresolved conflict between raison d'etat and a morality which is external to politics, but which cannot in the last resort override the life and security of the state. 정치의 세계는 국가적 이성과 정치 외적요소인 도덕사이의 해결되지 않은 갈등의 장이다. 그러나
Chapter 2_16_61p The Society and Individual
Finally the Meinecke(1862년~1954년) of Die Entstehung des Historismus(역사주의 성립), published in 1936 when he had been swept from his academic honours by the Nazi flood, utters a cry of despair, rejecting a historicism which appears to recognize that 'Whatever is, is right' and tossing uneasily between the historical relative and a super-rational absolute. Last of all, when Meinecke(1862년~1954년) in his old age had seen his country succumb to a military defeat more crushing than that of 1918, he relapsed helplessly in Die Deutsche Katastrophe of 1946 into the belief in a history at the mercy of blind, inexorable chance.' The psychologist or the biographer would be interested here in Meinecke(1862년~1954년)'s development as an individual: 마침내 마이네케는 1936년 발간된 <역사주의 성립>이라는 책에서, 그 때 그는 나찌 광풍에 휩쓸려 학문적 명예를 박탈당했었다. 그는 절망적으로 외쳤다. 역사주의를 거부하면서, 역사주의에서는 존재하는 것은 모두 옳다고 인정하는 듯하다.(이것을 인정하게 되면 그 당시 존재한 나찌 정권을 옳다고 인정하게 되는 것이니). 역사적 상대적과 초이성의 절대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마지막으로 노년에 마이네케는 그의 국가가 군사적 패배를 하고 항복하는 것을 보았다. 1918년보다 더 절망적으로. 그는 무기력하게 <독일의 파국>이라는 책에서 맹목적이고 무자지한 우연에 의해 좌우된다고 하면서 절망스러워 했다. 심리학자나 전기 저자는 개인적인 관점에서 마이케네의 전개 과정을 관심스러워 할지 모른다.
what interests the historian is the way in which Meinecke(1862년~1954년) reflects back three-or even four-successive, and sharply contrasted, periods of present time into the historical past. 역사가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세 번 또는 네 번이나 연속적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현재 시기들의 시간들을 역사적 과거 속으로 되돌아보는 방식이다.
Or let us take a distinguished example nearer home. In the iconoclastic 1930s, when the Liberal Party had just been snuffed out as an effective force in British politics, Professor Butterfield wrote a book called The Whig Interpretation of History, which enjoyed a great and deserved success. 우리에게 좀 더 가까운 뚜렷이 드러나는 예를 들어 보자. 1930년 우상파괴의 시대에는 노동당은 영국 정치에서 효과적인 힘을 쓴다는 면에서는 무시당했다. 버터필드 교수는 휘그 역사해석이라는 책을 썼다. 그것은 큰 인기와 끌었다.
It was a remarkable book in many ways - not least because, though it denounced the Whig Interpretation over some 130 pages, it did not (so far as I can discover without the help of an index) name a single Whig except Fox, who was no historian, or a single historian save Acton, who was no Whig. 이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눈에 띄는 책이다. 130페이지 전체에서 휘그적 해석을 비난했다. 색인의 도움 없이 찾아본 바에 의하면 그는 폭스를 제외하고는 한 사람의 휘그도 언급하지 않았다. 폭스는 역사가가 아니었다. 그리고 액튼을 제외하고는 역사가는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휘그가 아니었다. 1, 2, 3, 4(폭스_휘그지만 역사가 아님), 5, 6, 7(액튼_역사가지만 휘그 아님)8- 나머지 6명은 휘그도 아니고 역사가도 아님. 휘그적 역사해석 공격한다고 해 놓고.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