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83) 희종 1
- 왕가의 전통은 잇게 되었으나...
부왕 신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희종은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이래 사라졌던 왕가의 전통을 이은 임금이 되었습니다. 의종은 왕권의 복구를 시도하다 이의민에게 살해되었고, 정중부가 멋대로 즉위시킨 명종은 최충헌이 폐위시키고 나서 내세운 왕이 신종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명종과 신종은 왕가의 전통이 아닌 무신들에 의해 만들어진 임금인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희종은 그 시작이 다릅니다. 죽음을 앞둔 신종은 비록 실권 없는 허수아비 임금일지언정 자신의 핏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였기에, 살아생전에 선위를 하고자 하였습니다. 자신이 죽고 나면 다음 왕의 자리는 오로지 최충헌의 말 한마디에 달린 일인지라 자신의 아들인 희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거듭거듭 선위의 뜻을 내비치며 간곡하게 청하였다 합니다. 부왕의 그러한 뜻을 잘 아는 희종은 몇 번을 사양하다가 끝내 눈물로써 선위를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희종은 신종과 선정왕후의 맏아들로 1181년 5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영. 초명은 덕(悳). 자는 불피(不陂)입니다. 1200년(신종3)에 태자로 책봉되고 1204년에 신종의 양위를 받아서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게 됩니다.
그러나 희종 역시 부왕인 신종과 마찬가지로 실질적인 왕권은 없었으며, 국사전반에 관한 모든 결정은 최충헌에 의해서 이뤄졌습니다. 희종은 즉위 후 최충헌을 “벽상 삼한 삼중대광 개부의 동삼사 수태사 무하시랑 동 중서 문하 평장사 상장군 상주국 판 병부어사 대사 태자 태사” 라는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길고 긴 관직을 내려 주었으며, 자신을 추대하여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해준 공로가 있다고 하여 최충헌을 언제나 특별 예우하였으며 “은문상국(恩門相國)”이라 불렀습니다.
희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최충헌에게 중서령(中書令)의 벼슬과 진강공(晉康公) 작을 내리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최충헌은 이를 정중히 사양합니다. 세상사에 닳고닳은 백여우 최충헌으로서는 지금도 세상만사가 자기 마음대로인데 굳이 호화찬란한 명칭 한 두가지 더 붙여봐야 세상의 눈총만 받을 뿐이지 실제로는 별로 이득이 되는 것이 없는데 굳이 여론의 타겟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최충헌을 꺾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높여주어 그에게 환심이나 사는 편이 낫겠다고 마음먹은 희종은 다음해에 또 중서령과 진강공 관작을 주려하였습니다. 그러나 희종의 마음을 간파한 듯 최충헌은 이번에도 공이란 작위는 최고위이며, 중서령이란 벼슬은 신하로서 더 없는 고관이라며 끝내 받지를 않았습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평가해 보면, 그는 명목상의 겉치레 예우에는 사양을 할 줄도 아는 두뇌가 명석하고 상황 판단력 또한 뛰어난 인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희종은 최충헌을 신하의 예로 대하지 않고 ‘은문상국’이란 특별한 호칭으로 부르기까지 하면서 극상의 예우를 해주었으나,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았던지 최충헌은 “흥녕부”라는 관청을 따로 설치하여 여기에 요속을 따로 두었고, 흥덕궁을 자신의 궁궐처럼 사용했습니다. 게다가 민가 1백여 채를 허물어 왕실 궁궐에 못지않은 대저택을 지어놓고 집에서 외국의 사신을 맞아 잔치를 베풀면 그 규모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초호화판이었습니다.
이처럼 최충헌은 실제로는 왕 위의 왕, 실제 모든 권력을 움켜쥔 상왕의 존재였던 것입니다.
고려왕조실록(84) 희종 2
- 최충헌의 암살기도.
정중부의 난이 일어난 후, 정중부에서 최충헌에 이른 60년간 무인들이 폐립한 왕은 모두 6명이나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최충헌이 갈아 치운 왕이 4명이나 됐던 것입니다. 그는 왕이 될 욕심까지는 갖지 않았지만, 왕을 갈아치우는 데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무신정권이 들어서서 고려의 정국을 농단한 지 39년째로 접어드는 해였습니다. 희종은 명종·신종과는 달리 적통자로서 별다른 문제없이 왕위에 오른 군주로서 정통성과 대의명분이 뚜렷했고, 이와 같은 배경은 왕권을 회복시킬 수 있었던 좋은 기반이었습니다.
게다가 희종 또한 최충헌의 독단에 크게 불만을 품고 있었으므로 최충헌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은 희종의 즉위와 함께 본격적으로 반기를 들고 일어서기 시작합니다.
희종이 즉위한 해인 1204년에 급사동정 지구수의 집에서 장군 이광실 등 30여 명이 모여 최충헌을 죽일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고, 1209년(희종5년) 4월에는 개경 부근의 청교역리 3명이 최충헌 부자를 살해하려다 실패하기도 했습니다. 암살 기도가 꼬리를 물자 최충헌은 영은관에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하여 자신을 죽이려는 반대자들을 색출하였습니다.
또한 반대파들을 척살해 버린 이후에도 최충헌은 교정도감을 해체하지 않고 자신의 독재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권력기구로 삼아버립니다. 최충헌은 무신들의 합좌기관인 중방을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전락시키고 대신 교정도감을 중심으로 모든 국사를 처리해 나갑니다. 최충헌은 교정도감을 통해 자신의 정권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을 모두 무력화 시켜버리고 권력 세습의 기틀을 마련하게 됩니다.
하지만 최충헌의 서슬 퍼런 독재정치 아래서도 또다시 그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진행되는데, 이때는 국왕 희종도 직접 가담하게 됩니다. 최충헌의 무단통치를 7년간이나 묵묵히 지켜보던 희종이 마침내 자신의 측근 내시들과 함께 모의하여 최충헌을 제거하기로 나선 것입니다.
1211년(희종7년) 12월 경자일, 희종을 만나러 수창궁으로 들어온 최충헌은 무방비 상태에서 습격을 당하게 됩니다. 급하게 몸을 피한 최충헌이 희종이 있는 곳을 달려가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희종은 외면하였습니다. 희종의 내심을 알아차린 최충헌은 급한 김에 지주방(知奏房, 궁중 출납창고) 문틈에 몸을 숨겨 간신히 목숨을 보전하였습니다.
이후 궁궐 밖에 있던 측근들의 도움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최충헌은 관련자들을 모두 처단하고 희종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쫓아버립니다. 이와 함께
태자 지는 인주(인천)로, 덕양후 서(희종의 아우)는 교동으로, 시녕후 위(희종의 차자)는 백령도로 각각 추방해 버립니다.
고려 왕 4명을 갈아치운 독재자 최충헌이지만, 결코 왕을 시해하지는 않았습니다. 무신의 난 때 의종을 죽인 이의민이 “왕을 시해한 자로” 낙인이 찍힌 것을 익히 보아온 탓일 것입니다.
남다른 안목과 식견을 지녔지만, 독재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하는 잔혹한 성품을 지닌 최충헌이 다른 무인정권과 달리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최충헌이 문신 출신으로 남다른 안목과 식견을 지니고 있었던 데다가, 권력을 나누던 친동생마저 죽일 수 있는 냉혹한 성품이 독재자로서 장수할 수 있는 기본 요건을 갖추고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아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최충헌은 강종의 서녀(왕이 되기 전에 첩실에게서 낳은 딸)를 둘째 부인으로 맞이하는 등 어느 제왕 못지않은 권력을 누리고 왕녀를 사실상은 첩으로까지 삼았던 최충헌은 눈에 거슬리는 자가 있으면 가차 없이 반역으로 몰아 죽였고, 국난의 위기에서도 사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횡포를 일삼기도 했습니다.
1218년(고종5년) 서북면 원수 조충과 병마사 김취려가 몽골·동진과 연합 전선을 펴서 거란군을 격퇴하고 돌아온 일이 있었는데, 최충헌은 오히
그들의 공을 시기하여 아무런 상훈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손영 등 10여 명의 장병이 주막에서 술을 마시며 “거란과 싸워 전공을 많이 세웠는데도 뇌물을 바치지 못해 벼슬을 못한다.”라고 한탄하였는데, 이 말을 전해들은 최충헌은 1백여 명이 넘는 불평분자를 색출하여 보정문 밖에서 죽여 버립니다. 이 무렵 낭장 기인보도 최충헌에게 불만을 품고 반란을 꾀하였다가 오히려 잡혀 죽게 됩니다.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작전 미스로 오히려 그에게 폐위 당하고 만 희종은 당시 31세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폐위되어 강화도로 쫓겨난 희종은 그 후 자연도(현재 영종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노년에는 법천정사로 옮겨져 1237년(고종24년) 8월 향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