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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장 제도의 감리교와 제10대 변홍규 감독
1966년 9월 20일에 감리회 제10회 총회가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이 총회는 개회하고 2일 동안은 공전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남부연회 대표의 부정선거 문제 때문이었다. 또한 감독 선거에서 성화파, 호헌파, 정동파의 대립으로 총회가 끝나는 26일까지 39차의 선거를 치렀지만 총투표수의 3분의 2를 얻은 후보가 나오지 않았다. 계파정치의 폐해는 매번 반복되고 있었다. 그래서 각 계파에서는 회의진행 연구위원 9인을 선정하고 총회를 원만하게 이끌 수 있도록 위임했다. 이때 변홍규 측(호헌파)에서는 조용구, 박설봉 목사, 맹기영 장로가, 이환신 측(성화파)에서는 이봉구, 윤춘병, 라사행 목사가, 김광우 측(정동파)에서는 김지길, 김기창 목사, 강치안 장로가 선정되었다. 이들은 다음의 세 가지 건의안을 가결시켰다. 첫째 제10회 총회는 9월 26일에 오후 8시에 정회하고 10월 13일 오전 9시에 속회하여 10월 16일 오후 4시에 폐회한다. 둘째, 10월 13일에 속회하는 지방 총리원의 여비는 총리원 실행 이사회에서 지급한다. 셋째, 본 연구회는 다음 속회까지 존속한다. 가장 핵심적인 관심사항은 감독 선거인데 10월 13일 속회되는 총회에서 감독선거를 실시했다. 그러나 계파 정치의 극단의 폐해 현상이 또 나타났다. 총 111회 선거를 실시했으나 결국 당선자를 내지 못하고 ‘긴급제안’을 받아들이고 정기 총회는 폐회되었다.
각 계파에서는 파벌 감독선거의 파행원인을 분석했다. 교회 정치와 행정권한이 1인 감독에게 너무 집중되어 있는 것이 원인으로 분석했다. 이에 권력분산을 지향하는 정치 제도적 변화를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세 계파 간의 이견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은 19인 운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회는 1967년 1월 10일에 ‘총회 문제 해결방안’을 채택하고 다음 두 가지 안을 합의하였다. 첫째는 단일 감독 하에 각 연회별 연회장 제도를 두고 기존의 감독이 가지고 있던 인사권을 연회, 지방회, 구역회에 설치된 인사위원회에 넘긴다. 둘째는 총리원 기구를 간소화시킨다.
1967년 3월 2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제10회 총회 위임 특별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4년 뒤에는 다원제 감독제도를 실시할 소지를 마련했다. 3부 연회 연회장과 연회 총무를 두어 교회 선교사업을 연회 중심제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3월 4일에는 가장 관심거리인 감독선거에 들어갔다. 다행히 제3차 투표에서 변홍규 목사가 164표 중 125표를 얻어 제10대 감리교 감독으로 당선되었다. 실로 천신만고 끝에 얻어낸 결과였다.
변홍규(卞鴻圭) 감독은 1899년 5월 28일 충남 공주에서 출생했다. 선교사의 권유로 공주 영명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에는 만주 안동으로 가서 청도(淸島)에서 독일사람 루터교 목사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덕화서원(德華書院)에 입학하여 1919년에 졸업했다. 1926년 미국 미네소타 주 햄린(Hamline) 대학과 1928년 드류(Drew) 신학교를 졸업했다. 1929년 뉴워크 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1931년 드류신학교에서 구약학을 전공하여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31년부터 1933년에 하와이 호놀룰루 한인교회를 담임했고 1933년부터 1934년에 만주 하얼빈교회에서 목회했다.
1934년에 조선으로 돌아와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부임한 변홍규 목사는 1937년에 한국인 최초로 한국성서위원회 회장, 1939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감리교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특히 그는 신학교장으로 학교의 자립적 운영과 교역자 양성에 노력하였다. 그런데 1940년 6월에 신사참배, 창씨개명 등 일제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이를 비난하는 격문이 신학교 안에 살포되는 ‘감리교신학교 삐라사건’이 발생하여 그는 정일형(鄭一亨)과 함께 구속되었다. 학교는 그해 10월에 무기휴교 처분을 받았다.
3개월 후 석방된 변홍규 목사는 1941년~1943년에 종교교회, 1944년~1946년까지 동대문교회에서 목회했다. 동대문교회 담임목사로 재임할 때 1942년 12월 2일 개최된 특별총회에서 변홍규 목사는 정춘수 통리자에 이어 조선감리회 통리자로 선출되었다. 혁신파 간부들은 이번 총회를 제2회 총회라 불렀다. 이는 1941년 3월에 개최된 제8회 3부 연합연회 회기 중에 정회를 선포하고 10일에 개최하여 감리교혁신안을 통과시켜 새 감리교회를 창립한 임시 특별총회를 제1회 총회로 불렀기 때문이다.
총회가 가까워지자 정춘수 통리자의 혁신안에 반대해 온 류형기, 송흥국, 전진규, 조신일, 변홍규, 이규갑, 전효배, 문창모, 노진박 등 유력한 목사, 장로들이 모여 이 어려운 시국 동안에 무난히 교단을 이끌어 가려면 양주삼 박사를 통리자로 재추대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정일형과 류형기는 평안도로, 송흥국과 구성서는 황해도로, 전효배는 경기도 등 각 지방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혁신안 지지자들이 일본 경찰에 고발하여 이들은 ‘유언비어날조’란 죄명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렇게 반혁신자들이 재판받는 동안 예정대로 총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새로운 통리자로 김영섭 목사가 선출되었는데 혁신을 반대하는 소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김영섭 목사는 통리자를 사퇴하였고 총회는 휴회되고 산회되었다.
그 후 2개월이 지난 1942년 12월 2일에 혁신파들이 사전 모의를 하고 총회를 재 소집하여 변홍규 목사를 새로운 통리자로 선출하였다. 이는 변홍규의 무능으로 혁신파들이 자기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으며, 양주삼과 동서지간이니 양주삼의 혁신교단 반대를 누그러뜨리자는 이유 때문에 그를 통리자로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변홍규 통리자는 감리교 신앙고백을 정면 부인하고 일제의 전쟁수행을 위해 교리를 철저하게 왜곡하여 교회를 일제의 신사교회(神社敎會)로 뒤바꾸어 놓고 말았다. 혁신파들보다 더 일제에 아첨하였던 것이다.
이때 그는 일제의 전시체제 협조를 당부하고 비행기 헌납을 청원하는 물의를 빚기도 했다. 《기독교신문》에는 친일적 설교문을 기고했으며 1943년 2월에는 정인과, 양주삼 등과 함께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 미영격멸간담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렇게 변홍규 통리자가 감리교회를 독단적으로 운영하고 있을 때 교파통합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조선 감리교회와 일본 감리교회와의 합동이 좌절되었다. 그러자 국내 교파들끼리 서로 연합하는 문제가 호의적으로 수락되는 분위기였다. 1943년 1월 12일에 감리교, 장로회, 성결교, 구세군, 주한 일본교회가 연합하기로 정하고 그 대표자 회의에서 회장에 장로교 신삼일웅(新森一雄) 목사를, 서기 김종대(金鍾大) 목사를 정하고 구체적인 회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일제에 더 아부하려는 감리교단의 제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연합은 결렬되고 말았다. 그런데 1943년 5월 감리교와 장로회 경성노회가 합동하여 ‘일본기독교조선개혁교단’을 창립하였다. 통리자는 장로회 전필순 목사가 맡았지만 경성노회 부회장이던 김영주 목사가 “이 개혁교단이 총독부의 승인된 것인가?”라는 질문을 총독부에 문의하였다. 이에 총독부는 “교회 자의적인 것”이라고 답변하자 김영주 목사는 ‘일본기독교조선개혁교단’을 불법집단으로 규정하고 인정하지 않고 장로회 경성노회를 재건하였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감리교회 반(反) 정춘수 측에서도 반기를 들게 되어 결국 ‘일본기독교조선개혁교단’은 다시 ‘기독교조선감리교단’으로 환원되었다. 이로 인해 감리교와 장로회 연합의 혁신교단은 유야무야(有耶無耶) 되고 말았다.
1943년 7월 2일에 모인 임시총회에서 김영섭 목사가 통리자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반 정춘수 측의 강력한 반대로 김영섭 목사는 통리자 직을 사면하였는데, 1943년 10월에 총회를 유산시킨 반 혁신파 인사들이 감리교신학교에서 총회를 소집하고 전진규 목사를 통리자로 선임하여 냉천동에 감리교단을 복구시켰다. 그러나 일제를 반대하는 전 통리자의 생명이 길 수 없었다. 취임 10일 만에 강제 퇴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친일세력이 다시 등장하는 빌미를 제공하였고 1943년 10월 14일에 정춘수 통리자가 재선되어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 다시 시작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조선감리교단’의 종말이 오고 말았다. 일제가 강제로 한국의 모든 교회의 교파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1945년 7월 19일 각 교파 대표들이 정동제일교회에서 모여 새로운 하나의 교회를 탄생시켜 초대 통리자에 김관식 목사, 부통리자에 김응태 목사, 총무에 송창근 목사가 선임되어 총독부의 임명장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은 2주일 후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고 없어졌으니 일제가 전쟁에 패배하여 패전국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 기다리던 광복의 아침이 밝아 왔다. 한국 교회는 실로 길 잃고 방황하던 역사의 긴 터널을 통과한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해방 후 감리교회는 일제의 잔재 청산 문제를 놓고 심한 진통을 겪었다. 이로 인해 감리교회는 재건파와 복흥파로 양분되어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 재건파(再建派)는 일제의 잔재를 모두 없애고 교회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말에서 생긴 말이고 복흥파(復興派)는 일제에 동조하거나 가담한 것은 불가항력적이었다면서 변명하면서 1930년대의 교회로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이때 변홍규 목사는 재건파의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1945년 9월 초교파적 기독교 단일교단을 유지하기 위해 개최된 남부대회에서 김광우·나사행·이규갑 등과 함께 퇴장한 그는 감리교회 재건중앙위원회를 결성하여 감리교회의 재건을 선언하였다.
변홍규 목사는 1946년 재건된 감리교신학교의 제8대 교장에 취임한 그는 동부연회장으로도 선출되었다. 1948년 교장을 사임하고 남산교회에 부임하였다. 6.25 한국전쟁 때에는 부산에서 교회를 설립했고 서울 수복 후 대교교회와 남산교회에서 시무하였다. 감리교회가 통합된 후 1967년 특별총회에서는 성화파·호헌파·정동파 등이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제10대 감독에 선출되어 교단의 화합과 발전에 노력하였다. 일제시대에 한국교회의 어두웠던 역사의 중심에 변홍규 통리자는 시대가 낳은 아픈 유산이 아닐 수 없다. 그랬던 그가 다시 기독교 대한감리회 제10대 감독으로 당선된 것은 과거의 잘못을 다시 만회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없다.
변홍규 감독은 1967년 4월 5일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26회 중부연회를 주재하면서 제1대 연회장에 김광우 목사를 선출했다. 4월 4일 동대문교회에서 개최된 제18회 동부연회에서 제1대 연회장에 윤창덕 목사를 선임했다. 3월 29일~4월 2일에 대전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18회 남부연회에서 이강산 목사를 제1대 연회장으로 선출했다. 또한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제주도, 부산직할시를 하나로 묶어 삼남선교연회를 새로이 조직하고 관리책임자로 윤춘병 목사를 선임하여 연회장 시대를 마무리했다.
변홍규 감독이 재임 시 가장 뛰어난 역사적인 변화는 한국 감리교회가 재정적으로 완전히 미 감리회로부터 독립되었다는 것이다. 한국 감리교회는 1930년 남, 북 감리회가 합동하여 자치교회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미국 총회에서는 조선에 자치교회는 설립하지만 독립교회는 조직하지 않았으므로 세 교회연락 기관인 중앙협의회를 구성하여 선교사 초빙 문제, 훈련 문제, 선교비와 사업비 청구, 수취문제를 다루었다. 그런데 1967년 9월 미국 연합감리교회 해외선교부에서 새로운 선교 정책을 결의하였다. 그것은 각국의 감리회 총회의 자주적 결의권을 인정하며 선교지 재단과 재정 군을 그들에게 이양한다는 데서 온 정책의 변화였다. 그래서 한국 감리교회에서도 1968년 11월 4일부터 7일까지 온양에서 ‘선교정책협의회’를 열었다. 1968년 8월 28일 한국 감리교회는 일체의 선교 권한을 이양받고 완전 자립을 위한 막중한 사명을 잘 감당하겠다는 선서문을 변홍규 감독 외 21명의 협동위원회 이름으로 발표하여 성숙한 한국 감리교회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변홍규 목사는 그는 한국 감리교의 대표적인 보수주의 신학자이자 경건주의 신앙인이었다. 새벽 4시가 되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금요일 밤마다 철야기도를 했다. 양복 주머니에는 언제나 헬라어 성경이 있었다. 그는 “그의 일생을 평한다면 성서를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밖에 모르는 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란 평판을 들을 정도였다. 그의 학위논문 주제인 ‘聖’에 빗대어 ‘세인트 변(saint Pyun)’이란 별명이 붙었다. 감독의 임기가 1년이 남았지만 정년을 맞이한 변홍규 감독은 1970년 5월 감독 재임 시 정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LA한인성서학원 및 신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다. 콜로라도 주 뎀버시 한인교회 목사로 시무하던 중 1976년 7월 27일 향년 77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