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4 주일설교
하나님과 공동운명체
시편 79:9~13
어제는 전국민이 약에 취한 것처럼 행복해했습니다. 우리나라 축구가 16강에 올라간다고 해서 국민들에게 단돈 만 원도 안 생기지만 그렇게 행복해할 수가 없습니다. SNS는 물론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축구 이야기를 했습니다.
참고로, 16강이 됨에 따라 축구팀의 상금은 엄청나게 오릅니다. 예선 탈락팀은 122억 원을 받지만 16강은 176억 원으로 54억 원이 늘어납니다. 만일 8강에 오르면 230억 원으로 예선 탈락팀의 약 두 배이고 4강에 오르면 339억 원이 됩니다. 그런데 국가대표팀이 이기면 축협과 감코진, 선수들만 좋은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이 좋아서 거의 미쳐버립니다.
왜냐하면, 축구선수나 일반 국민이나 같은 나라 국민은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에 그들의 승리가 나의 승리이고 그들의 기쁨이 나의 기쁨입니다. 반면에 축구팀이 지면 전 국민이 불행해집니다. 우리나라 경제가 망해도 모두가 힘들어집니다. 특히 우리나라 군대가 전투에서 진다면 나라가 망합니다. 이처럼 하나의 나라는 철저히 공동운명체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 사람이 강한 나라에서 강한 지도자와 공동운명체가 되면 평안하고 행복하지만, 가난한 나라 국민이 되면 하루에 1달러로 살아야 합니다. 가난한 나라 국민들은 나라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기에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좋은 지도자 덕분에 국민총생산 35,000달러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도자 덕분이 아니라 근면한 국민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북한은 남한보다 지하자원도 많고, 해방 당시 수력발전소도 더 많았으나 작년 국민총생산 1059달러밖에 안 되어 북한 이탈 주민이 33,000명이나 되었습니다. 지도자는 그만큼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태어날 때 나라를 고를 수 없고 지도자도 원하는 대로 선택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선택할 수 있고 내가 꽉 붙들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표면적으로는 나의 선택과 결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를 선택한 여러분은 일평생, 그리고 자손 대대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라의 3요소는 주권, 영토, 국민입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는 영토와 국민은 있으나 주권이 없었기에 손기정 선수가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 나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주권, 영토, 국민 가운데 주권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로 주권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역적이 됩니다. 그 사람의 가슴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죠.
좋은 나라가 되려면 왕도 좋아야 하고 백성도 왕을 잘 따라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 왕께서는 지극히 선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며 그의 백성을 가장 사랑하시고 최고의 법령으로 다스리시는 전능한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오로지 그분의 선하심을 신뢰하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교훈과 법도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때로 이해가 안 되거나 내 생각과 완전 달라도 그분은 의지하고 살면 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사드락/메삭/아벳느고 이 세 명의 청년이 왕의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아서 체포되어 왔을 때 왕이 다시 기회를 주겠다고 했는데 당당히 거부했습니다.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아서 자기들을 풀무 불에 던진다면 하나님이 보호하실 것이며 만일 하나님이 보호하지 않아서 죽더라도 우상에게는 절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죽도록 버려두더라도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당시 사/메/아는 하나님이 보호하셨지만, 로마 시대에 하나님이 사도들과 수많은 성도가 순교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로마가 복음에 굴복하게 하셨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어떻게 하시든지 하나님의 계획은 다 선함을 믿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목사님, 그렇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는 망해요. 그렇게 해서는 세상을 못 살아요.”
만일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망하더라도 하나님과 공동운명체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힘들게 살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까요?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사람이 태양 빛도 약하게 못 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가립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알아서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내가 힘들게 고생하면 하나님이 더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급과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아멘.
오늘 본문은 시편 79편인데 아삽의 시입니다. 아삽은 평생에 경험하지 말아야 하는 비참한 현실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적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유다의 백성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으나 아무도 매장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새들과 들짐승이 시신을 뜯어먹었습니다.
원수들은 유다를 조롱했고 유다가 섬기는 여호와라는 신은 가짜 신이며 그들을 보호하는 하나님은 없다고 하나님까지 싸잡아 저주했습니다.
시 79:1~4, 10을 읽겠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보호하시는 유다가 어쩌다가 이렇게 비참하게 되어버렸을까? 이 지경이 되도록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아삽은 그 원인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유다에 대해 진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 유다의 범죄 때문입니다.
시 79:8-9을 읽겠습니다.
여기서 아삽은 조상들의 죄(8절)와 자기들의 죄(9절)를 같은 죄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조상들의 죄의 결과는 후손들이 입기 때문이고 조상들을 본받아서 똑같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 때문인지 따지기보다 책임지고 회개하며 해결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교훈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유다는 하나님과 공동운명체라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은 1절부터 나오는데 9절부터는 적나라하게 나옵니다.
1절에서 아삽은 유다를 “주의 기업의 땅”이라고 표현합니다. 기업은 하나님이 물려주신 땅이라는 고백입니다. 즉 아삽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비록 유다는 그 언약을 깨뜨려서 징벌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은 홀로 언약에 신실하신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을 주님의 성전이라고 부르고 유다 백성을 주님의 종들, 주의 성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야기 아시죠? 아버지가 뜨거운 목욕탕에서 시원하다고 하는 말을 믿고 아들이 들어갔다가 뜨거우니까 세상에 믿을 놈 한 놈도 없다고 했는데 아버지까 한 대를 때렸더니 때리면 지 새끼 아프지 내 새끼 아프냐고 했다잖아요. 그 아들놈은 버릇은 없지만 믿음은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아삽이 지금 하나님께 그렇게 엉겨붙고 있습니다. 조상들과 자기들이 죄를 지어서 벌을 받으면서 언제까지 계속 화를 내고 벌을 줄 것이냐고 탄원합니다. 그리고 그런 노여움은 저 하나님을 모르는 원수들에게나 쏟으시라고 기도합니다.
5~6절을 읽습니다.
아삽이 하나님께 그렇게 요구하는 데는 그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다 백성과 하나님은 공동운명체라는 믿음입니다. 아무리 유다가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사람은 갈대아 사람이 아니라 유다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불신자가 착해도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하지 않습니다. 비록 종종 못된 짓을 해도 신자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9절에서 아삽은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마치 화가 나서 매로 때리는 아버지를 향해 자상하신 아버지, 호~ 해주세요. 약 발라 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9절을 읽습니다.
10절에서는 이방인들에게 복수를 해 달라고 합니다.
11절에서는 자기들에게 벌을 내리지 마시라고 합니다.
12절에서는 주님을 비방한 원수를 철저히 벌을 주시라고 합니다. 여기서 “칠 배”는 ‘철저히, 완전히’ 라는 뜻입니다.
10~12절을 읽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품으로 파고들어 뻔뻔하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눈물을 닦아 주시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노하셨던 그 벌을 이방인에게 내리시는 분입니다. 자식을 때리던 막대기를 꺾어 아궁이에 던져 버리는 분이십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아브라함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가서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했을 때 바로 사라를 첩으로 데려갔습니다. 그 당시에 남의 누이를 데려가고 많은 은과 가축을 선물로 주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 남의 아내를 빼앗아가는 것은 잘못입니다.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했으므로 바로는 잘못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의 집에 벌을 내렸습니다. 잘못은 아브라함이 하고 벌은 바로가 받은 사실을 아삽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믿음이 생기는 것에 하나님이 관심이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회/성도는 자주 죄를 짓고 하나님을 실망하게 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욕합니다. 때로는 교회에 아무런 보호자가 없는 줄 알고 교회를 박해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교회 편을 드십니다. 비록 교회가 죄를 지었어도 교회는 하나님과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신들입니다. 내가 내 자식을 혼내더라도 남이 내 자식 함부로 건드리는 것은 못 참는 것이 우리 하나님, 우리 아버지입니다.
비록 못난 짓을 해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식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을 무시하지 마시고 옆의 신자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의 자식 무시하면 그 댁 아버지가 화내십니다. 제가 물으면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하나님인데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아삽처럼 뻔뻔하게 하나님의 언약을 요구하며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이 시의 절정은 13절입니다. 13절을 시작하는 첫머리에 히브리어로 와우(וַ)가 있습니다. ‘와우(וַ)’는 그리고, 그러면, 그래서 등을 의미하는 접속사입니다. “영예”는 테힐라(תְּהִלָּה)라는 단어인데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13절은 이렇게 읽으면 좋습니다.
“그리하시면,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자의 양인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광을 대대에 전하겠습니다.”
이는 주기도문의 마지막을 생각나게 합니다. 주기도문 마지막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끝납니다. 헬라어 원문을 정확히 옮기면 이런 뜻입니다.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아삽이 이렇게 기도하는 이유는, 주기도문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좀 편해지자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 다 하나님을 위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어떤 광고업자가 A회사에 찾아와서 자기에게 돈을 주면 온 세상에 A회사는 좋은 회사이고 제품도 믿을만하다고 광고하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때 A회사에서는 기꺼이 광고비를 지불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가슴과 등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홍보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 덕분에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공동운명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우리도 잘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제발 한 푼 달라고 하지 말고 뻔뻔하고 당당하게 기도하세요. 동시에 등에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창피하게 살지 말고 멋있게 사시기 바랍니다.
함께 찬양합시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