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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 고개를 넘어가는 광야의 시험
예수 그리스도는 30세가 되어 육적인 외조부 헬리의 기업을 상속받고 족보에 이름을 올려서 누가복음 족보를 시작하였습니다(눅 3:23). 누가복음 족보는 30년 전에 아기 예수가 조상들의 기업이 있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서(눅 2:11,12), 30세에 그 베들레헴 기업을 상속을 받았으므로 족보가 사실상 완성(종결)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인 기업이 하나님의 독생자요, 상속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돌아가서 온전하게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업의 온전한 회복과 족보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한 한 가정에 역사에 불과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소유물인 세상의 모든 기업이 온전하게 회복되어 세계 만민에게도 그 기업이 돌아가야 합니다(마 20:1, 21:41,43). 그래서 모두가 토지 경작(직업)의 자유와 토지기업에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생존권을 보장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막 4:1). 그리고 삶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업의 주인으로, 상속자로 인정하고, 나라의 통치도 그의 주권에 맡겨야 합니다(마 6:10). 이것이 희년법으로 보는 가시적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서 토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율법으로 정해놓은 희년을 세계 만민에게 선포해야 합니다(레 25:10, 사 61:1,2, 눅 4:18,19). 그런데 이 희년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큰 고개 하나를 넘어야 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시험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광야의 세 가지 시험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눅 4:1~3)
마귀는 보이지는 않는 영적인 실체입니다. 마귀는 천지창조 초기 에덴에서부터 있었습니다(창 3:1). 첫 사람 아담이 물질에 대한 탐심으로 마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선악과를 취하여서 사람에게 죄가 들어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요단강에서 죄를 사하는 세례를 받습니다. 다음은 마귀의 시험을 받습니다. 이 마귀는 사람을 유혹하여 영적인 문제에서 물질 문제와 현실 문제까지를 흔들고 무너지게 하는 사악한 실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려면 이 마귀와 대적하여 이겨내는 시험을 먼저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마귀의 시험은 영과 정신계의 주인이신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광야로 인도하여 시작하고 있습니다.
성령에 이끌린 시험은 40일 동안 계속됩니다. 마귀에게 받는 시험이긴 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영적 훈련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40일 기간의 고난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신 9:9), 엘리야가 바알 신 추종자와 전투 후 이세벨을 피해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왕상 19:8). 학개가 성전 건축을 위해 들인 기도에도 40일이 걸렸습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받는 4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40일 동안 주리신 예수에게 마귀는 먼저 돌로 떡을 만들라고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로 떡을 만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하므로 지금 주린 배를 채워줄 떡을 돌로 한번 만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제문제를 해결하여 보라는 시험입니다. 예수님이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돌로 떡을 만들려면 만들 수는 있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에 대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4:4에서 신명기 8:3의 말씀을 인용하여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떡이 전부가 아니며, 참된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최초의 사람 아담은 먹는 열매를 보고 탐심을 이기지 못하고,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지만, 예수님은 먹을 음식에 대하여 말씀으로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은 사단을 대적하는 성령의 검이며, 사람의 심령 골수를 찔러 쪼개는 힘을 가졌습니다(엡 6:17. 히 4:12). 그래서 말씀은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도구이며, 구원의 길이요, 삶의 방향을 잡아주는 빛이요(시 119:105), 나침판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마귀가 돌로 떡을 만들라는 말은 창조질서를 어기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으시지만, 그런 능력으로 자신이 창조하신 세상 질서를 어기지는 않으십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도 일회성 기적에 국한된 것입니다. 평소에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이 돌이 남아있겠습니까? 돌은 시간이 지나면 마모되어 모래가 되고 흙이 되기도 합니다. 돌은 양식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성전을 짓거나 성벽을 쌓는 데 쓰이는 건축 재료입니다. 고층 건물은 단단한 암반이 주춧돌 역할을 합니다. 암석은 지질학적으로 지구의 나이를 알려주는 나이테와 과학 정보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돌을 떡의 재료로 사용하여 소모해 버린다면, 물질계는 창조질서를 어기는 행위라서 다른 문제가 다시 발생하게 됩니다.
떡은 매년 땅과 사람의 노동을 통해 생산되는 쌀과 곡식, 열매를 재료로 사용하여 만듭니다. 그래야 재료가 연속적으로 공급되어 사람이 먹는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먹는 문제를 해결하여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도(출 16:8,12), 유월절 집회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오병이어 기적도(요 6:4~13) 경제를 근본에서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창조질서를 어기는 주문으로 예수님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돌로 떡을 만들면 세상의 경제문제눈 모두 해결한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잘못입니다. 돌로 떡을 만들면 돌이 사라지기 때문에 다시 돌을 만들어야 하므로 또다른 경제문제만 생겨서 경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경제의 근본 해법은 말씀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먹는 양식에 대하여 말씀으로 해결책을 제시하신 것은 다른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겪게 되는 경제문제의 궁극적 해법은 말씀인 성경에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희년법입니다. 사람이 먹는 양식은 물론이고, 사람이 사용하는 모든 재화나 서비스는 돌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땅으로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창 1:11). 모든 양식과 물질, 서비스, 우리가 초 단위로 마시는 공기까지도 땅이 생산하고, 공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땅을 주면서 그 땅을 다스리는 기간(6년)과 쉬는 기간(7년째, 안식년)을 알려주셨습니다. 땅은 사람과 달리 쉬는 해에도 떡을 만들 수 있는 열매를 냅니다(레 25:5,6).
그리고 그 땅은 시한부(희년까지)로만 팔고 사고(레 25:15,16), 아주(영구로) 팔지는 못하게 합니다(레 25:23). 팔린 토지는 무르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런 법을 어기면 사람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양식을 내는 토지에 대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 희년법을 주셨습니다. 사람이 삶에서 겪게 되는 경제문제는 토지문제를 해결하는 희년법을 따라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경제문제는 돌로 떡을 만들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희년법이 들어있는 말씀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마귀가 제시한 1단계의 경제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욕구의 5단계설과 마귀의 3단계 시험
그다음에 마귀는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내게 절을 하면 이 모든 권세를 주겠다고 합니다(눅 5,6). 힘을 가진 자들이 잘 빠지게 되는 권력욕을 채워주겠다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는 하나님만 섬기라고 대응합니다. 힘(부, 권력, 능력)을 가지면, 그 힘을 욕심을 채우기 위해 쓰지 말고, 낮아져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하나님이 너를 지켜줄 것이라고 합니다눅 4:9~11).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거나 죽지 않는다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게 되고, 이것이 계속된다면 박수를 받게 되고,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명예의 욕심을 채워주는 유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며 마귀의 유혹을 물리칩니다. 사람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하나님을 사사롭게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욕심으로 시작합니다. 식용이 금지된 열매이지만, 그 열매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습니다(창 3:6).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은 그 선악과를 취하여 범죄로 빠져듭니다. “사람은 말을 타면 종을 부리고 싶어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임상심리학자 매슬로우(A. H. Maslow)가 자신의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1943년에 욕구 5단계설을 발표했습니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사람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식생과 관련되는 생리적 욕구(1단계), 안전과 안정의 욕구(2단계), 사회적 인정의 욕구(3단계), 존경의 욕구(4단계), 자기실현의 욕구(5단계) 등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러한 인간의 욕구를 5단계가 아닌 3단계로 묶어서 예수님께 시험을 했습니다.
혹자는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선악과 이야기는 신화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다는 것은 욕심에 대한 우리의 오래된 속담을 보아도, 유명한 심리학자가 밝혀낸 욕구의 5단계 과정을 보더라도 이것은 신화가 아니고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매사에 탐욕을 품고 살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의 욕심은 성자의 칭호를 받은 사람이든, 난초 화분 하나도 소유하지 않으려고 했던 어느 스님의 마음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인이든 구분 없이 가진 인간의 본질적 특성입니다. 사람도 동물의 일종이기에 가지는 하나의 본능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절제가 동물적인 탐욕의 본능을 이겨내지 못한다 뜻입니다. 어쩌면 재산에 대한 탐욕과 재물의 축적에 대한 심리적 욕구는 동물들보다 더 심합니다. 동물은 자기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양식 욕심을 부리지 않지만, 사람은 배가 불러도 양식을 곳간에 쌓아두기 좋아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 주관대로 살기를 좋아하고, 하나님은 믿어도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며 살기 쉽습니다(마 6:19~24). 그래서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중심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마 6:33).
마귀의 시험과 희년법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병들게 하고, 물질계를 혼탁하게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탐욕을 이기지 못하고 우상을 섬겨서 초래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탐심이 곧 우상숭배라고 합니다(골 3:5). 우상 숭배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받지 못합니다(엡 5:5). 이스라엘 정치와 사회를 부패시켜서 나라까지 패망하게 한 가장 큰 이유가 바알 신 숭배와 그 바알 신 추정자들이 주도한 정치나 경제 제도이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실패한 원인이 바알 신 숭배 하나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 요인 중의 하나를 말하면, 가장 큰 요인이 바알 신 숭배와 관련되고 있습니다. 이 신은 인간의 탐심을 부추기며 이를 가장 잘 이용할 줄 아는 신입니다. 이 신은 마귀가 예수님께 시험을 했던 물질욕을 채워주고, 권력욕과 명예욕을 채워주는 신입니다. 우리도 이런 것을 보면 에덴동산의 아담 부부처럼 항상 먹음직, 보암직, 지혜로울 만큼 탐스러운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런데 바알 신은 실제로 이런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은 가진 신은 아니지만, 이런 것을 미끼로 삼아 탐심을 가진 사람을 미혹하는 데는 교활하고, 능숙한 기교를 가진 신입니다.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하여 인간의 역사를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람들은 희년법에 대하여는 세상 어느 제도보다 강하고 끈질기게 오래 동안 저항하고 있습니다. 족보, 특히 마태복음 족보에서 나타나는 인간(왕들)의 삶은 바알 신과 제도를 따라서 실패하는 역사를 성경 전체를 통하여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실을 족보의 구속사를 통하여 확인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탐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시한 희년법에 대해서는 끈질긴 무시와 저항과 거부로 일관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탐심으로 이어온 역사는 지금 예수님께 갖고 나온 마귀의 시험과 직접 관련되어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 시험을 한 마귀 또는 이 마귀가 부리는 신이 바로 희년법을 지키지 못하게 한 바알 신입니다.
이 바알 신이 사람을 미혹하여 하나님이 제정한 희년법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희년법은 부와 권력을 쌓기 어렵고, 바알 제도를 따라야 부의 축적이 쉽기 때문입니다. 원래 바알 신은 가나안 주민이 숭배하던 다산과 풍요를 추구하는 농경 신이며, 우상입니다. 여기에 북이스라엘에서 아모리 왕조가 무역도시 시돈에서 수입한 상업 신 바알까지 들여왔습니다(왕상 16:31~33). 그래서 북이스라엘이 바알 신 숭배로 먼저 패망하고, 그다음이 남왕국 유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북이스라엘처럼 바알 신의 오염으로 패망했습니다.
예수님이 넘어야 할 세 가지 시험과 고개
예수님이 받으신 광야의 시험과 인간의 탐욕이 초래한 죄악된 세상을 이겨내려면, 크게 세 가지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첫째가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선악과 시험을 이겨야 하는 고개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 시험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잉태한 채 태어났고, 그 죄로 인하여 지금까지 살고는 있지만, 자주 실족하고, 끝내 죽어야 할 처지입니다(창 2:16,17).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가진 탐심, 곧 육의 혈통을 받지 않고, 성령의 잉태로 탄생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출생부터 원죄를 타고 나지 않으셨으므로 첫 고개인 선악과의 고개를 스스로 넘으신 분입니다.
두 번째가 지금 보고 있는 광야에서의 40일 시험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특히 희년 선포를 며칠 앞두고 받은 40일 시험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패망한 나라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이 법을 제정한 이래 아직 한번도 시행하지 못한 희년을 성취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금까지 희년법에 대해 강하게, 그리고 교묘하게 거부감을 드러내며, 그 시행을 방해한 바알 우상과 그 바알 우상을 부리고 있는 우상의 괴수, 마귀의 시험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선포할 희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만민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년 선포로 당면한 생존의 문제를 해결 받고 온전한 자유의 혜택을 누려야 합니다. 그래서 희년은 작게 보면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하는 역사이며, 크게 보면 세상 만민에게 희년을 선포하여 생존과 자유를 주는 하나님 나라와 직접 관련되어 있습니다. 희년은 정신계나 추상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영적이라는 틀로 묶어두거나 제한할 수 없습니다. 희년은 종교인이나 정신계만 생각하는 사람들의 관념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며, 현재 생활에 필요한 실제적 현상(제도나 환경)을 말합니다. 성경 희년법은 원래 3,500년 전에 제정할 당시부터 삶에 필요한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희년 선포는 그러한 실제적인 권한을 가진 자가 만민에게 공개로 선언을 해야 그 선언이 현실적으로 유효하고, 적용도 가능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40일 시험은 바로 이런 희년을 향하여 넘어야 하는 힘든 고개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 희년을 선포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희년법을 지키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마귀에게 험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의 시험을 금식기도로 이겨내고, 사람들은 넘지를 못하는 희년 고개를 넘어십니다.
그다음 시험은 희년을 선포한 뒤에 마지막으로 있을 십자가 고개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게 될 일주일 동안의 고난 기간을 말합니다. 이 세번째 수난은 예수님이 넘어야 할 가장 큰 고통이며, 험난한 고개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고통과 희생으로 천하 만민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또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희년이 성립할 수 있도록 값을 치러서 죗값, 몸값, 땅값을 모두 소멸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고개는 부활을 향하여 넘어야 하는 고개이며, 영원한 기업과 자유가 보장되는 고개입니다.
예수님이 마구간 출생으로 겪는 신분의 비천함에서 받아야 하는 멸시와 헤롯의 위협에 따른 신변의 안전을 위한 피신과 고통은(눅 2:7, 마 2:16), 그래도 인간의 죄와 관련된 작은 단계의 고난이고, 고개이었습니다. 공생애와 희년 선포를 앞둔 40일 금식과 시험은 세상 만민에게 살아서 자유를 누리게 하는 좀 더 큰 고통이고, 고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건은 이 모든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이를 온전하게, 그리고 영구적으로 해결하야 하는 가장 크고, 거룩한 고통이며, 힘든 고개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을 살리시려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세 번의 큰 고개를 친히 넘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의 희년 선포는 40일 광야 시험 후 공생애를 시작하는 초기에 있었고,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기 3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희년을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갈릴리로 가셨는데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그 가르침은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들어가서 성경을 읽으시되 이사야의 글을 펴서 이렇게 쓰인 데를 찾아서 읽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사 61:1,2)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속하는 날’에 성령이 임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희년을 선포하신 성경 본문입니다. 희년 선포에서 앞서 먼저 주의 성령이 임했습니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이 날은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백성들의 죄를 사하는 날입니다. 그날 나사렛 회당에 성령이 임했습니다(눅 4:16,18).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년 선포 사역에는 하나님, 성령님, 그리고 그 선포자 예수님 이렇게 삼위일체로 함께 하신 사역입니다.
또한, 희년 선포는 경제와 물질을 다루는 사역이지만, 영혼부터 먼저 깨끗하게 하고 시작합니다. 이것이 죄를 사하는 ‘속하는 날(욤 키푸림)’이며, 죄와 빚, 몸과 땅도 속량을 하는 날입니다. 신앙공동체는 영혼만 관심을 가지지만, 생활공동체에서는 영혼은 물론이고 물질과 경제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메시아가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예수님께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기름을 바르는 것은 장막이나 성구와 같이 거룩하게 성별을 요할 때(창 31:10, 민 7:11)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주실 때에 바릅니다. 아론과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을 받았을 때(출 40:13),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삼상 6:12,13, 삼하 2:4,5:3).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서 특별한 사명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제사장과 왕들은 하나님이 세운 사람(모세,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으나 희년을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직접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희년을 예언할 때도 기름 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사 61:1).
이처럼 희년 사역은 특별한 것이며, 제사장이나 왕이 하는 평소의 사역과 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희년을 선포한 왕은 없으며, 희년 선포를 촉구하거나 입에 담은 제사장도 없었습니다. 희년법에 관련된 사역은 기업 무르기나 속량을 준행하는 다말과 룻과 같은 이방 여성이 하거나 선지자들이 그 이행을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구체적 행적을 남기지는 않은 누가복음 족보에서 나단 계보의 사람들이 희년법을 준수했습니다.
종교 업무를 담당하는 제사장들은 자기들의 기업이 없어서 그러한지 몰라도 거의 모두 희년을 모르거나 알아도 관심은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원래 제사장들이 가지고 있었는 데, 그 이유는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계명의 준수나 희년법의 순종을 알려주고, 지도하게 했었습니다(신 31:9~13). 그래서 희년법은 제사장들의 책이라고 할 수 있는 레위기서에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이런 책임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은 레위기 앞 부분에 있는 제사법만 지키고, 뒷 부분에 있는 희년법은 가르치지 않고 덮어두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종교(제사나 예배)는 알아도 생활에 필요한 희년법은 거의가 모릅니다. 구약시대에 기업이 없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가졌던 희년법에 대한 관점은 지금도 신앙공동체가 가지는 희년법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과 비슷합니다. 아니 오늘날의 신앙공동체는 레위인들처럼 기업마저 없기 때문에 너무 비슷하여서 빵틀처럼 닮았다고 해야할 정도입니다.
왕들은 희년을 선포하는 대신 오히려 희년과는 상반된 바알 법을 받아들여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하고 나라까지 망하게 합니다. 희년을 선포하고 지도해야 할 지도자들 희년을 없애버렸고, 희년법을 준행해야 할 백성들도 그릇된 지도자를 따라서 바알 신과 제도를 추종하며 빗나간 삶을 살았습니다.
희년은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희년은 한 나라 전체에서 백성들이 함께 맞이하는 큰 행사입니다. 49년, 50년 만에 한 번 돌아오는 행사입니다. 경제활동에서 안식일부터 시작하는 안식 제도는 빚 탕감과 같은 경제 문제가 일부 해결되는 안식년을 거치면서 커집니다. 그러면서 경제 구원은 범위가 더 커지면서 마지막 절차로 종결되는데 그 종착지가 바로 희년입니다. 그래서 희년은 부자에게도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요한 절차이고,기쁜 소식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쁜 소식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복음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왜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까? 이사야는 본문에서 ‘가난한 자’를 ‘겸손(온유)한 자’까지 포함시켜 말했는데, 예수님은 왜 본문을 ‘가난한 자’로 범위를 구체화시켜서 말씀을 하셨을까요?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레 25:8~10)
희년은 원래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토지를 평등하게 분배한 상태의 때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희년의 상태가 시간이 지나면서 가정에서 남편이 죽거나 아내가 중병이 들거나 특별한 사유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몸과 토지를 팔아서(저당 잡혀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몸과 기업이 팔리면 당자자는 자유가 제약되고, 가족들은 생계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몸과 땅을 판(잡힌) 경우 가까운 형제나 동족이 속량(무르기)으로 자유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형제나 동족이 이 속량을 해 주지 않으면 몸은 안식년, 기업은 희년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희년이 되면 몸도 풀리고 기업도 돌아오기 때문에 가족들은 모두가 자유의 몸으로 만나게 됩니다. 몸이 풀려 신체적 자유가, 기업이 돌아와서 경제적 자유가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희년이 선포되면 가난한 자가 기쁜 소식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을 없애는 경제적 사건과 기업을 잃어버린 약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주게 되는 사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희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시장원리입니다. 지금도 유명 선수나 인기 연예인들은 자기와 소속사가 서로 계약을 하고 그 조건에 따라 활동을 합니다. 그러면 그 계약자는 기한이 지나야 자유롭게 됩니다. 이와 같이 희년법에서 몸이 팔릴 때나 땅을 저당 잡힐 때는 계약 기한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계약에서 기한 만료일이 안식년이고, 희년입니다. 값을 치른 거래가 기한을 마쳐서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값을 치르는 무르기, 곧 성경이 말하는 속량도 시장원리입니다. 그래서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평년의 무르기나 안식년, 희년이 모두 시장원리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혹자는 희년이 오면 모두가 평등한 상태로 자유로움을 얻는다고 하니 희년 제도가 정부가 개입하는 반시장적 경제 제도이거나 사회주의 또는 국가주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토지의 영구 거래를 금지한 레위기 25:23에 대해서는 토지 국유화나 집산체제, 곧 공산주의와 다름이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보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토지는 국공유화를 하거나 사유로 해도 정부가 강하게 규제(거래, 가격, 세금)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반면, 보수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소유의 규제를 매우 싫어하고, 바알 추종자들이 채택하는 소유가격을 강하게 신봉합니다.
성경을 진리로 믿는 그리스도인들마저 대화를 해 보면 실제로 희년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래서 이를 전하는 자들도 희년에 대해서는 아예 입을 다물어버립니다. 전달 책임자가 입을 다물어버린 저의에는 희년법을 입에 담다가는 그 집단의 정서적 거부나 이념적 오해를 받기가 싫다는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희년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태도일 것입니다.
희년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줍니다.
희년은 포로된 자가 풀려납니다. 본문을 말 그대로 풀이하면 포로는 타인에게 잡혀서 끌려간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것이 먼저 떠오를 수 있습니다. 또 힘이나 폭력에 의해서 부당하게 잡혀있는 사람들도 포로입니다. 크게 보면 로마의 철권 통치를 받는 유대인 모두가 포로입니다. 물론, 이런 이유로 포로로 잡혀갔으면 풀려나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포로는 희년법 기준으로 볼 때 몸이 팔린 것을 말한다고 봐야 합니다. 지금은 몸을 팔고 사지 않아도, 임금 하나로 노동력을 팔고 사는 방법을 모두 알지만, 구약시대의 노동시장은 임금 대신 노동력을 가진 몸값을 매겨서 팔고 샀습니다. 여기에 인권이 보장을 받지 못하고 힘과 돈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보니 몸이 강제로 팔리거나 부당하게 노예 신분으로 팔려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동족은 노예로 삼을 수 없지만, 그래도 노동력 거래가 노동을 일시불로 지불하는 몸값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자유 계약을 하더라도 그 몸값은 기한이 만료되어야 풀리게 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들이 소속사에 잡혀있는 몸값(이적료)과 계약 기간이 그러합니다. 여기에 구약시대는 부자가 가난한 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부당하게 고용계약을 체결하고 종처럼 부려온 것이 그 시대에 일반적 양상입니다.
그래서 희년법은 동족을 종처럼 부리지 말고 품꾼처럼 대하라고 하고 있으며(레 25:39,40), 선지자들이 동족을 노예처럼 대우하는 것에 대하여 강하게 질타합니다(렘 34:13,14,17, 느 5:8).
지금 예수님이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려는 희년 선포는 이런 포로와 노예, 그리고 정상적인 노동시장에서 몸값으로 잡혀있는 모든 자가 해당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몸값이 발생하지 않는 노동제도, 곧 몸값 없는 희년 상태의 노동시장을 비유로 가르쳐 주시고, 이것을 천국이라고 하십니다(마 20:1).
희년은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합니다.
예수님은 희년을 선포하면서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한다고 합니다. 희년은 경제에 관한 내용인데 사람의 눈을 떠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눈을 뜨게 한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실제로 육의 눈이 먼 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요 9:6,7). 그러나 여기서 눈먼 자는 육의 눈을 뜻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눈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눈을 말합니다. 이에는 성령이 임해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고전 12:3).
그런데 누가복음 4:18에서 눈먼 자는 영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희년과 관련되어서 눈이 먼 자를 말합니다. 이사야서 42:7은 이에 대하여 소경이 눈을 떠서 갇힌 자가 옥에서 풀리고, 어두움에 처한 사람도 간(옥)에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영적인 자유, 그리고 경제적인 자유를 주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적인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를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면 해결이 됩니다. 그다음 남은 것이 경제적인 문제에서 해방되는 자유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는 때가 희년입니다.
필자는 처음 희년 선포에 눈먼 자가 다시 본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 하고 의문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희년법을 연구하다 보니 사람은 땅과 희년에 대하여 실제로 눈이 멀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땅과 경제에 대하여 눈이 감겨있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땅을 창조한 후 사람을 만들어서 사람에게 그 땅의 다스림을 맡겼습니다(창 1:28). 그래서 창조질서는 하나님과 땅과 사람의 삼수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읽더라도 하나님과 사람이라는 이수구조로만 세상을 보려고 합니다. 농사를 지어도, 공장에서 생산활동을 해도 사람들은 나의 노력으로 생산한 것이라고만 여깁니다. 신앙을 가진 자는 여기에서 더하여 하나님이 그 생산물을 주셨다는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과 신앙고백에는 농산품과 공산품을 생산하는 데에 땅이 기여한 부분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이 바로 우리가 땅에 대한 눈이 감겨져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사람은 경제활동에서 토지가 가진 물리적 성질이 시장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모르고 있습니다. 땅값이 실물가격인지, 금융물 가격인지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시간 흐름으로 원금이 커지는 땅값과 시간 흐름으로 원금이 작아지는 자동차 가격의 성질이 근본에서 다른 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팔고 사는 두 가지 물질에서 경제적 성질 차이를 과학적으로 식별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돈을 바꾸는 행위에 대하여 “강도의 소굴”이라고 청소를 했던 이유를 모릅니다. 순도가 낮은 데나리온화를 순도가 높은 세겔화로 바꾸어 주면서 웃돈(premium)을 붙인 것이 강도짓이 되는 것을 잘 모릅니다. 액면가격과 거래가격의 차이가 실물로 실현이 되는지 되지 않는지를 식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가짜 돈인 가상화폐가 세상에 나와서 사람의 영혼을 훔치고 가산을 탕진하게 하며 금융시장을 불안하게 하거나 위기로 몰고 갑니다.
(한국의 테라 루나 파산과 범죄, 미국 SVB은행의 파산은 실물 없는 가짜 돈 거래가 커져서 일어난 금융사고임).
이것은 모두 사람이 토지 물리적 성질과 땅값을 과학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실수에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경제학자나 경제 전문가들도 이런 점은 거의 모릅니다. 그래서 이 실수는 사람들이 하는 실수 중에 생활경제에서 당해야 하는 아주 큰 실수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땅이 사람이 만든 물질과는 기본 성질부터 다르다는 점을 몰라서 눈이 감겨 버린 결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보아도 희년과 경제법에 대한 계명은 눈여겨보지 않습니다. 심지어 롤랑 드보나 반 셀름, 모르겐스테른(J. Morgenstern) 같은 학자는 희년은 현실적으로 실천 가능성이 없는 "골등품" 또는 “죽은 문서라”고 평을 합니다(김명호, 희년연구, 1992, 22쪽). 이것은 희년이 들어있는 성경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반성경적 표현이며, 창조질서인 과학까지 부정하는 무지입니다. 이런 생각은 희년을 맞이해야 할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40일 동안 그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도 땅을 보지는 못하는 광야의 정탐꾼들과 백성들과 같은 영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가복음 4:18에서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는 것”은 첫째로 나사렛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한 자가 구세주요, 메시아임을 아는 것이 영의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희년의 선포로 땅과 경제질서를 희년법의 시장원리로 바로잡아 주어야 비로소 세상에서 삶의 문제가 해결되고 세상의 경제 질서가 회복되는 것을 아는 것이 육의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눈이 뜨여야만 예수님이 보이며, 육의 눈이 뜨여야만 희년과 경제가 보이게 됩니다.
희년은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합니다.
희년은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합니다. 이사야서 61:1에서 ‘마음 상한 자’가 누가복음 4:18에서 ‘눌린 자’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눌린 자란 죄를 지어 심리적으로 편하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상처를 받아서 마음이 상한 자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눌린 자를 희년법과 관련지어 보면 주로 빚진 자의 심리 상태를 뜻합니다. 여기서 빚은 사업 자금을 빌려서 진 빚을 말하기보다 가난하여 생활비로 진 빚을 말합니다. 가난하여 몸이 팔린 경우 빚을 지게 됩니다. 가난하여 생업의 터전으로 분배받은 기업을 팔리면(저당 잡히면) 지게 되는 빚을 말합니다. 땅값은 미래 생산된 실물에 대한 청구권이지, 현재 가치를 쓸 수 있는 실물은 아닙니다. 그래서 땅은 레위기 희년법대로 시한부로 팔던, 희년법의 금지 규정을 어겨서 영구로 팔던 발생한 가격은 100% 전액이 영구 금융가격입니다. 땅값은 실물이 아니므로 영구로 갚아야 할(실물을 주고 받아야 할) 채권 채무일 뿐입니다.
사람이 이런 빚을 지게 되면 진 빚은 갚아야 하기에 마음이 눌리고, 몸이 팔리어 있으면 몸이 눌리고, 양식을 얻어서 생업을 꾸려야 할 땅이 팔려있으면, 생활고에 눌리게 됩니다. 그래서 빚은 짐을 짊어지듯이 “빚을 졌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빚으로 인한 정신적 눌림은 모두 인간의 죄로 인하여 발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1년에 한 번 돌아오는 속량절(욤 키푸림, 죄 속량 + 경제 속량)에 죄와 빚을 없애고 눌림의 짐을 벗어야 합니다. 곧 속하는 날은 죄도 속하고, 빚도 속하고, 몸도 속하고, 땅도 속해야 합니다. 이렇게 값을 치러서 죄와 빚을 없애버려야 진정한 자유가 회복되게 됩니다. 그래서 희년을 선포하는 날은 바로 이날, 7월 10일 속량절입니다(레 25:8~10). 이 속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에서 중요하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이 속량의 방식을 따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주의 “은혜의 해”는 “열납(수용, 인정)의 해”로 이해해야 합니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9)
누가복음 4:19에서 “은혜의 해”로 번역한 것은 번역부터 문제가 있으므로, “열납의 해(acceptable year)”로 바꾸어 이해해야 합니다. 킹제임스성경은 “기뻐 받으시는 해”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렇게 바꾸어 번역하거나 이해를 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누가복음 4:19에서 단어의 뜻이 “은혜”와는 다릅니다. 은혜로 번역한 단어는 헬라어로 ‘데크토스’이며, 이 말의 뜻은 원래 “수용하다”, “인정하다”, "수락하다", “받아드린다”의 뜻을 가집니다. 은혜란 단어는 헬라어 ‘카리스(grace)’로 누가복음 4:22에서 “은혜로운 말”이라는 표현에서 나옵니다. 곧 누가복음 4:19의 ‘데크토스(acceptable)’를 바로 뒤에 있는 4:22의 ‘카리스(grace, gracious)’와 같은 말과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번역은 잘못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경제 부분에서 이런 번역은 세 곳 정도 있습니다. 주가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빚”을 “죄”로 번역한 것(마 6:12, 눅 11:4)과 십자가의 일곱 말씀 중에 마지막 말씀, “다 이루었다(요 19:30)”는 “다 지불하였다”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제 용어를 정신 용어로 바꾸어 번역합니다. 우리는 경제 용어가 나와도 그 단어를 종교적(영적) 또는 정신적 용어로 바꾸어 번역하거나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희년법은 물론 성경이 말하는 경제는 우리 의삶에서 자꾸 멀어지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둘째, 은혜는 사건의 당사자가 행위나 대가 없이 공짜로 얻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열납은 사건의 당사자가 행한 행위나 대가를 인정하고 승인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곧 이루어진 결과에서 대가의 지불 없이 공짜로 되는 것과 대가를 지불하여 승인을 받는 것은 서로 상반된 개념입니다.
셋째, 희년은 값을 치러서 문제를 해결하는 시장원리이자, 경제원리입니다. 죄값도 짐승이 피를 흘려 죽든지 예수님이 고귀한 십자가 희생이 있어야 구원을 이룹니다. 팔린 몸이 자유하려면 값을 치러서 팔린 상태이었던 몸값을 속량해야 합니다. 땅도 팔렸으면 값을 치른 무르기로 땅값을 없애버려야 땅이 풀려나서 사람이 자유하게 됩니다. 희년은 기한이 차서 그동안 묶여 있던 죄와 빚은 모두 값으로 속량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희년은 공짜로 이루어지는 정부원리나 공산주의 원리가 아니고 반드시 값을 치르는 사유재산제와 시장원리로 자유하게 됩니다.
넷째, 출애굽 역사에도 약속의 땅은 공짜가 아닙니다. 내가 들어갈 그 땅을 발로 밟아야만 들어가게 됩니다(수 1:3). 발로 밟아서 그 땅에 들어가야 나에게 땅이 돌아오고, 희년을 맞을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땅과 희년은 공짜가 아니고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 계명을 준행해야만 얻게 됩니다. 그런데 광야교회의 백성들은 약속의 땅도 홍해의 기적처럼 공짜로 주는 줄만 알았다가 약속의 땅은 발도 딛지 못하고 광야에서만 살아야 했고, 거기서 죽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구원은 믿음으로 얻기 때문에 공짜이지만, 기업은 믿는 자가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여 상급으로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공짜가 아니고, 침노를 하는 자가 들어갑니다(마 11:12). 광야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공짜로 주어지기만을 바라면, 우리에게 희년이 없고, 하나님의 나라도 주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4:19에서 번역한 은혜의 해, 곧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는 살펴본 4가지 경우를 보듯이 공짜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값을 치른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시는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를 지켜낼 수가 있고, 참다운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동차를 한 대 사 줍니다. 아버지는 차가 다닐 수 있도록 길도 닦아주었습니다. 그러면 아들은 차를 모는 방법과 운전 기술과 소양을 배우고 익혀서 아버지가 주신 차를 몰면서 그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들이 운전 배우기를 꺼리거나 싫어하고, 운전은 위험하다면서 그 차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차를 사 주셨으니 운전도 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아들에게 아버지는 운전까지 해 주는 것이 아니고 ,선물로 준 자동차마저 도로 빼앗아버릴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말하는 세 가지 비유(열처녀, 달란트, 양과 염소)의 결말이 이런 것입니다.
이러한 아들에게는 차를 사 주고, 길을 닦아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차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자원만 낭비합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차를 사 주고 길을 닦아준 것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힘이 들어도 운전을 배워서 주신 차를 유용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들이 순종에 따른 유익이 돌아오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베풀어준 은혜도 바로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4:19가 말하는 주의 열납의 해(은혜의 해)는 예를 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사 준 자동차는 공짜이므로 은혜가 맞지만, 아들이 주신 차를 운전해서 그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아버지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주고, 희년법을 계명으로 제정하여 그 계명을 지키라고 하였지만, 사람들이 이 계명을 준행하지 않으면 희년이 올 수가 없습니다. 희년에 대한 "은혜의 해"와 "열납의 해"가 가진 의미의 차이는 이와 같습니다.
희년 선포는 모두가 거부합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눅 4:24)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범죄로 세상이 어지러울 때 하나님이 보낸 비공식 지도자입니다. 공식 지도자는 왕과 제사장들입니다. 백성들은 선지자가 비공식 지도자이므로 신분이나 지위에 대하여 긴가민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준다고 하고, 모든 사람에게 자유를 준다는 말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은혜로운 말에 놀라지만, 예수님을 보고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하면서 의심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그들이 희년 선포에 놀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신분에서 하는 말이 기이하고 놀라와서 하는 반응들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본문 4:24에서 “환영”이라는 말은 4:19에서 “열납”이나 “수용”으로 번역해야 하는 “데크토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고향 사람들도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며, 선포한 희년을 수용하지는(환영을 받지는) 못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인용한 엘리야와 엘리사는 북이스라엘에서 아합 왕이 이세벨을 통하여 바알 숭배가 시작된 때 부름을 받은 선지자입니다. 아합 왕은 바알 숭배자인 아내 이세벨의 말을 듣고 나봇을 포도원을 자기 소유믈로 매입하려 들었고, 이것이 희년법을 지키려는 나봇의 거부로 여의치 않게 되자, 그를 죽이고 포도원을 강탈했습니다(열상 21:2,3,14,16). 성경에서 바알 숭배로 희년법이 파기된 대표적 사례입니다.
선지자의 말은 그 시대에 바알 숭배로 타락한 지도자나 이를 따르는 백성들과는 다릅니다. 선지자는 시대를 미리 내다보는 사람입니다. 선지자는 지도자와 백성들에게 바알 숭배를 강하게 질타하고, 여호와의 계명과 희년법 준행을 촉구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지자의 훈계를 받아들이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선지자를 핍박하고 죽입니다(히 11:36,37).
그리고 하나님은 많은 과부들 중에 북이스라엘에서 있는 시돈 사람 사렙다(사르밧) 과부 한 사람에게만 보내심을 받았고, 또 많은 나병 환자들 중에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한 사람에게만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합니다(눅 4:25,26,27). 고향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밀어뜨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와중에서 피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한 후 그 반응을 본 고향 사람들에게 이렇게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역사적으로 있었던 사실의 직시입니다. 그 당시 지도자나 백성들은 선지자를 홀대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바알 신을 섬기고 여호와의 계명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렙다 과부 한 사람과 수리아 사람 한 사람에게만 선지자를 보내어 긍휼을 베풀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이 선포한 희년에 대한 나사렛 사람들의 영성과 선포된 희년에 대한 반응이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는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희년법은 예수님이 직접 희년을 선포해도 백성들은 면전에서 거부합니다. 백성들은 희년이 무엇인지 모르니 자기 앞에 온 메시아도 보지를 못합니다. 메시아가 자기 기업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날 때는 그 지역 사람들이 아기 예수를 몰랐습니다. 그때도 그들의 영성과 희년법에 대한 이해도는 희년을 맞은 나사렛 회당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이와 같이 희년은 첫 희년에도 거부하는 양상은 같았습니다. 출애굽 백성들은 가나안 진입 당시에도 약속의 땅에서 맞을 수 있었던 첫 희년을 거부했습니다. 60만 성인 남성들 중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을 빼고는 모두 거부했습니다(민 14:36~38). 그리고 희년법은 바알 신을 끌어드린 왕정시대에도 지도자와 백성들은 거의 모두 거부하고 바알법을 따랐습니다. 선지자가 희년법의 준행을 촉구해도 그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습니다.
희년은 희년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그 희년을 이렇게 직접 선포해도 그들은 거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사렛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한 그 날, 1년 중에 한번, 아니면 49년, 50년마다 한번 돌아오는 날임에도 그 날이 무슨 날인지를 모릅니다. 그들의 눈에는 희년이 보이지 않으니 곁에 있는 메시아도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희년을 모르면 영의 눈과 육의 눈이 동시에 감겨 버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