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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회주의
이스트번 메자로스 지음,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연구소 옮김, 한울아카데미 2012.
21세기에 사회주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이다. 하나는 과거(소련, 동유럽 등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역주)에 대한 비판적 평가의 필요성에서, 또 하나는 예상되는 근본적인 변화 전략 속에 포함되어야 할 기본적인 필요조건을 확인하는 불가피한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제기된다. 이 작업은 매우 절박하게 수행되어야 한다. 기존의 사회신진대사 질서에 대해 가장 악질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만이 현재 진행 중인 파괴적인 발전 추세에 대한 대응의 절박함을 부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사회주의 변혁에서 요구되는 주요 목표와 특징을 미래의 실행 가능한 전략을 수립할 때 입각해야 할 지향원리orienting principles로 간략하게 제시할 것이다. 여기에서 서술되는 특정한 논점들의 순서는 뒤의 것이 반드시 앞의 것에 종속된다든지 하는 중요도의 순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쟁점들의 바로 그 본질 때문에 중요도 순서로 서열을 매기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왜곡될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회주의 변혁의 규정적 특징들은 긴밀하게 통합된 전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특징들 모두는 서로를 규정하고 전면적인 연관을 맺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지탱하고 또한 서로를 지탱해준다는 측면에서 ‘아르키메데스의 점’이다. 달리 말하면, 그 특징들은 모두 전반적인 전략에서 장기적으로 어느 것도 소홀히 하거나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동등하게 중요하다. 이는 사회주의 변혁이라는 여행을 시작할 때 그 특징들이 얼마나 직접적으로 관련되는가에 관계없이 그러하다.29-30
그럼에도 그 특징들이 별개의 논점으로 서술되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상대적으로 동질적인 요소들을 동일한 표제標題하에 함께 묶어내는 것이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전체의 복합적 상호연관이, 조금 동떨어지고 다소 대조적인 일련의 매개들을 그들 고유의 특정한 맥락 속에서 활동시킴으로써만 수립될 수 있을 때 특히 그러하다. 그리고 둘째, 진정으로 영속적인 사회주의 변혁의 특정한 특징과 필요조건들을 실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똑같을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주장되는 변화의 일부는 당연히 다른 것들보다 상당히 일찍 실행될 것이다. 그러나 매우 어려운 목표의 경우 그 실현에 불가피하게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할지라도, 요구되는 근본변혁이 온전히 성공하려면 바로 처음부터 핵심적인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만간 전체 기획은 궤도를 이탈하거나 훼손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여행의 전반적인 목적지를 명확히 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그와 함께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전략적 방침과 필요한 나침반 없이는 성공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 걸친 사회민주주의의 재앙적인 역사적 실패는 이 지점을 우리에게 강력하게 상기시켜주고 경고해준다.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실패는 ‘목표는 중요하지 않고, 운동이 모든 것이다’라는 거짓된 만병통치약 때문이기도 했다. 이 문구는 사회민주주의의 애초의 개량주의적 강령이 지배질서의 가장 불합리한 측면까지도 지켜주는 반동적인 것으로 변질되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30-31
기존의 파괴적인 사회신진대사 통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분명 우리가 요구하는 것 중 한 측면일 뿐이다. 자본 시스템에 대한 부정은 확실히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 기획의 긍정적인 측면이 그 부정을 보완할 때에만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즉 대안적인 사회재생산 질서의 점진적인 창출이 그것이다. 여기서 대안적이라는 것은 장기적인 역사적 견지에서도 참으로 지속 가능할 뿐 아니라 애초부터 인간에 의해 통제 가능하고 실행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접근방식은 불가피하게 복합적이고 뒤얽힌 사회적 과정을 가리키는데, 이 사회적 과정은 사회주의 변혁의 모든 개별 목표와 필요조건을 개방된 역사적 과업에서 필요한 한 부분으로 정의한다. 이는 사회주의가 ‘유토피아적인 폐쇄된 시스템’(이상Ideal이나 이념에 따라 고정되고 완결된 시스템: 역주)이어서 옹호될 수 없는 독재 수단에 의해 기껏해야 일시적으로만 현실에 부과될 수 있기 때문에 실패할 운명이라는, 사회주의에 쏟아지는 자의적인 비난과는 정반대이다. 초점이 되는 어느 시기에나 특정 목적들이 상호 간에 서로를 규정하고, 그러한 상호 규정을 통해 유기적으로 전체를 발전시킴으로써 특정 목적들은 명시적이든 아니든 항상 전반적인 기획을 표현함과 동시에 심화되고 풍부해질 뿐 아니라 강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본래 사회주의의 목표와 필요조건이 사회적 과정에서 내재적으로 규정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는 사실 사회주의에 쏟아지는 자의적인 비난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이런 조건하에서 21세기 사회주의 변혁의 주요 목표와 필요조건은 지금부터 우리가 논의하는 바와 같은 특징을 갖는다.32
불가역성: 역사적으로 지속 가능한 대안 질서의 불가피함
우리는 그간의 역사에서 몇몇 주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의미 있는 사회 변화를 가져오는 데 숭고한 노력을 바쳤던 수많은 사례뿐 아니라, 원래 의도한 대로 이루어진 부분적인 몇몇 성공 사례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성공은 모두 조만간 변화 이전 상태의 의존관계가 복원됨으로써 역전된 적이 너무도 자주 있었다. 그렇게 역전되는 주요 원인은 때때로 사회 상층부 인사들의 부분적 교체가 있어도 역사를 통해 이러저러한 형태로 재생산 되어온 구조적 불평등의 숙명적 관성이 발현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조적 불평등이 짧거나 긴 쇠사슬을 달고 있는 닻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즉 주요한 역사적 격변기에 배의 일부 선원들이 아무리 굳세게 마음먹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해도 구조적 불평등이 항해에서 그로부터 더 나아갈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지점으로 배를 끊임없이 끌어당기는 닻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기존 질서에 의해 지배되어온 민중의 궁핍은 역사적으로 규정되고 인간의 힘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인데도, 정기적으로 인재人災가 아니라 천재天災로 개념화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합리화되었다. 심지어 어느 모로 보나 구조적 불평등의 만연이 결코 유익하지 않다고 인정되어야 할 때조차도 그러했다.33
이런 종류의 합리화−그리고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의 정당화−의 필연적 귀결은 (‘인간 본성’과 잘 부합된다고 하는) 사회적 불의不義가 변치 않는 자연의 규정으로서 불변이고 이치에 맞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변이라는 생각 자체가 분명히 인식 가능하고 절박한 역사적 변화의 증거에 의해 의문에 붙여진다면 어떻게 될까? 왜냐하면 사악한 사회경제적 힘에 의한 파괴적인 개입이 지속됨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구상의 자연 자체가 파국적으로 훼손되고 있는 사실은 물론이고, 인간의 역사적 시간은 자연의 불변성으로는 측정할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자마자 반反역사적인 정당화의 추론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서, 인간 역사를 끝장내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위험천만한 사회적 적대관계를 발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진정한 역사적 시간의 잠재력과 한계 내에 순응하는 것이 불가피해진다. 그 시점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서 있는 시점이다. 지금 우리가 요청하는 치유책인 지속 가능한 대안적 사회질서 형태와 동시에 그것을 불가역적으로 만들기 위한 적절한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오늘날 피할 수 없는 역사적 도전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냉소적이고 자의적으로 상상된 것이 아닌, 명백하게 통제할 수 없는 ‘실제의’ 대량살상무기가 축적되어 배치되고 있고, 다른 한편 자본이 가공할 만큼 자연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류의 존망이 걸린 이런 독특한 역사적 시간의 절박성을 감안하면 인류가 마치 그런 현실을 교정할 수 있는 시간을 무한히 갖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그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더욱 파괴적인 사회질서로 되돌아가는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기 때문이다.34
자본 시스템의 심각한 구조적 위기를 전제하면, 오늘날 우리에게 남은 유력한 양자택일은 사회주의냐 아니면 야만이냐이다. 그 야만이 인류의 완전한 절멸은 아닐지라도, 이런 부담스러운 역사적 사실 때문에, ‘최소저항노선’의 수용과 그에 따른 사회주의 운동의 수세적 대응에서 비롯된 과거의 실패와는 대비되는, 어떤 계기에도 뒤집혀질 수 없을 일련의 일관된 전략을 추구할 것이 요청된다. 동시에 지속 가능한 사회주의 변혁의 목표는 아주 일시적으로만 유지될 수 있는 ‘자본주의의 전복’이 아니라 사회신진대사 과정에서의 자본의 근절根絶로 확실히 방향이 전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20세기 소련형型 사회에서 목격했듯이, 물려받은 시스템의 낡은 구조가 분명히 소생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소생은 자본주의가 실제로 복원되었던 해당 사회들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도 잠재적으로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실제로 인류 전체에 그런 결과를 가져온 이유는 사회주의 세력이 이데올로기적 무력화로 인해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자본 시스템 전반의 구조적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훨씬 더 근본적인 조건들은 간과된 반면, 일부 지역에서 자본주의의 복원이 거둔 상대적인 성공(예컨대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 역주)은 전혀 균형감각 없이 내면화된 데서 이 이데올로기적 무력화는 비롯된다.35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부분적 패배로 인해 예전보다 더 강력하게 재출현하는 자본주의의 힘에 대해 경고하며, 자본의 그러한 복원력과 대비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요구되는 지향이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고 말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역주] 항상 자기 자신을 비판하고, 진행 도중에 끊임없이 걸음을 멈추며, 완수된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되돌아와서 다시 새로이 시작하는데, 자신이 처음에 시도한 것의 불완전함과 허약함, 빈약함을 가차 없이 철저하게 비웃는다. 또한 이 혁명이 자신들의 적敵을 땅에다 메다꽂는 것은 다만 그 적이 땅에서 새로운 힘을 흡수하여 더욱 거대해져서 자신들에게 대항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인 듯하다. 이 혁명들은 언제나, 자신의 목적이 너무나 거대하다는 것에 놀라 거듭 뒤로 물러난다. 그러다가 마침내 어떠한 반전反轉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이 생겨 상황 자체가 다음과 같은 외침이 나오게 되면 이런 물러섬은 끝난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마르크스가 이 글을 쓸 때인 1852년에,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라는 피할 수 없는 명령이 인류의 잠재적인 자기 파괴의 위협이 명백히 임박한, 심각한 사회ㆍ역사적 비상상황에서 제기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그는 불가역적인 사회주의 변혁의 실행 가능한 전망을 진단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두 가지 주요 고려사항을 확인해내는 데는 성공했다. 첫째로, 그리스 신화에서 안티우스가 그랬듯이, “지구로부터 새로운 힘을 끌어와 다시 일어서는” 자본의 궁극적으로 가장 위협적인 능력의 인정인데, 따라서 더욱더 파괴적으로 되는 역사적인 적[자본: 역주]의 힘을 영속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적절한 전략적 조치들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지배적인 자본주의 국가들이 자신들의 시스템의 ‘생산적 생존력’을 입증하기 위해 대량학살 전쟁을 수행할 때 특히 그렇다. 그리고 두 번째로,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최소저항 노선’을 추구하는 것이 더는 이치에 맞지 않고, 도약하려는 시도가 불가피해지는 시기가 도래한다는 깨달음이다. 우리 시대의 역사적으로 비상한 상황으로 인해 마르크스의 두 번째 고려사항에서 변경되어야 할 것은, 오늘날 ‘최소저항 노선’을 추구하는 것은 “이치에 더는 맞지 않을”뿐 아니라, 사회의식의 최전선에서 자멸적인 것으로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뿐이다.38
*최소저항 노선line of least resistance 19세기 말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운동에서 경제주의자들이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경제투쟁으로 제한해야 하고 정치투쟁은 혁명적 인텔리나 대학생에게 맡겨야 하며, 노동자정당도 ‘최소저항 노선’에 따른 전술을 구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데서 유래한다. 노동자들은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를 인식할 수 없고, 그들 자신의 생활을 통해 자신의 이해관계만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의식을 확산시키는 것은 오로지 물질적 조건 자체이고, 따라서 ‘어린애’ 같은 노동자들은 고상하고 추상적인 이념이 아니라 실제적 개량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으므로, 이들의 ‘최소저항 노선’은 경제적 성격을 지닌 노동자 자신의 투쟁을 추종하는 것을 의미했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1902)에서 ‘최소저항 노선’을 “부르주아 노동조합주의 노선”이라고 비판했다. 레닌은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의 융합이라는 관점에서 “최소저항 노선을 따르는 운동”은 “자생적 운동”으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지배될 수밖에 없다며 경제주의자들이 자생성에 굴종하는 것을 비판했다. 이처럼 ‘최소저항 노선’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기계적으로 분리하는 점에서 오류일 뿐 아니라, 노동자계급을 ‘어린애’처럼 물질적 이해관계에만 집착한다고 보는 잘못된 엘리트주의적 대중관에 입각하고 있다. ‘최소저항 노선’은 정치투쟁의 내용을 경제적인 것으로 한정한 정치적 조합주의 또는 정치적 경제주의 노선으로서, 사회변혁을 포기한 개량주의 노선이다.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