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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수경, 조용히 자신의 작업대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수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다시, 와니 쪽을 보면
정우: (책상 앞에 와니가 붙여 놓은 캐릭터 얼굴을 유심히 보며) ……. 으~음. 역시……. 괜찮은데? 잘 나오겠어.
정우와 와니가 책상 앞에 압정으로 붙여놓은 귀여운 캐릭터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와니와 준하 3
씬 21. INT. 영화사 사장실/ 사무실. 낮
사장실의 응접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는 준하. 고개를 돌려 사장의 말을 기다린다.
여전히 해 맑은 얼굴. 맞은편에 사장, 준하의 옆에는 프로듀서가 앉아 있다.
사장: (고개를 끄덕이며) 음~. (준하에게) 필요 이상으로 무겁다는 우려가 있으니까 신경 좀 써 주시고……. 근데 이거 장르는 뭐라고 해야 되나? 사랑, 우정, 배신의 느와르. 그냥 그러기엔 판타지 성격도 꽤 강하잖아?
프로듀서: 하드보일드 판타지. 어떠세요? 이 영화는 로맨스에 판타지의 맛이 잘 섞이는 게 꼭 필요한 거 같은데. 준하씨 생각은 어때?
준하: (당당하고 자신 있는 어투로) 전 그냥 ‘사람의 진심은 참 알기 어렵다.’ 뭐, 그런 걸 재밌게 써 볼려고 했는데요?
약간 썰렁해지는 사장과 프로듀서.
CUT TO
벽에는 영화 포스터들이 즐비하게 걸려있고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 파티션 사이로 오가는 사람들, 수화기를 들고 열심히 통화하는 사람들. 사장실에서 나와 프로듀서와 둘이서 얘기하는 준하.
프로듀서: 계약은 다음 고 나오면 하고 크게 바뀔 게 있으면 전화로 자주 하자고. 참, 연락은 어디로 하지? 집에 잘 없던데.
준하: (쪽지에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이 번호로 메시지 남겨 주세요. 자주 전화 드릴게요.
프로듀서: 참, 요즘 세상에……. 핸드폰 하나 해라. 해줄까?
준하: (웃으며) 해주시면 고맙게 받겠지만……. 그냥 없으면 안 될까요?
프로듀서: 뭐……. 안 될거야……. 그리고, 감독 확정되면 그때는 콘도 하나 잡아서 하자고. 의사소통도 그렇고 아무래도 집중력이 필요하니까.
준하: 신 감독님하고 또…….
프로듀서: 민병수라고 해외 유학판데 단편 만든 것만 보고는 아직 판단이 안서네.
고개를 끄덕이는 준하.
준하: 근데, 전 그냥 집에서 쓰는 게 제일 좋거든요?
프로듀서: (피식 웃으며) 김준하씨. 은근히 까다롭네. 순한 척 하면서 할 얘긴 다 하는구만.
씬 22. INT. 준하의 옥탑방. 낮
준하가 창문턱에 걸터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다.
준하의 작은 옥탑방은 책들이 빼곡하고 제법 그럴듯한 오디오와 수많은 L. P.가 특징적이다. 벽에는 한 장소에서 시간을 달리해서 찍은 풍경사진이며, 시장사람들, 운동하는 사람들(무술)의 사진들이 빼곡하게 붙여져 있다.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할 즈음에 붙여 놓았던 포스트잇들도 가득하다. 턴테이블 위에선 L. P.가 돌아가고 오디오에선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밖으로는 서울의 빌딩들이 보이고 도시의 소음들이 들려온다.
불쑥 일어나서 자신의 응답 전화기를 쑥 빼더니 둘둘 말아 가방에 넣는다.
CUT TO
책꽂이에서 소설책들을 골라 가방에 챙겨 넣는 준하. 어느 책에선가 사진 한 장이 그의 발밑으로 떨어진다. 와니가 회사 작업대에 앉아 일하고 있는 모습인데 몰래 찍은 듯 하다. 준하,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책상 앞 벽면에 사진을 붙인다.
씬 23. INT. 대형 할인매장. 낮
카트를 밀며 장을 보는 준하. 카트에는 이미 뭔가 담겨져 있다. (스파게티 재료)
주류코너에 서서 맥주 서 너 병을 싣고 가더니 ‘이게 아니지’ 하는 얼굴로 돌아서서 도로 내려놓고는 와인을 한 병 꺼낸다.
JUMP CUT
준하의 옆에서 네 살쯤 된 어떤 꼬마가 엄마에게 카트에 태워 달라고 떼를 쓰고 있다. 엄마의 카트에는 라면이나 휴지 등이 박스 째 빼곡히 들어차 있어서 자리가 없다.
준하가 자신의 카트에 담겨진 물건들을 주섬주섬 밀치더니 아이를 달랑 들어 태워서 속력을 내어 빠르게 밀어준다. 그리고는 자신도 뛰어가다가 팔걸이를 짚고 카트를 타고 있다. 활짝 웃는 아이와 준하.
씬 24. INT. 와니의 집 거실 / 부엌. 황혼녘.
거실 노트북에서는 계속 음악이 흐르고 주방에서 준하가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면서 저녁식탁을 준비한다. 움직이는 동안 준하는 계속 기분 좋은 듯이 고개로 리듬을 맞춰 흔들고 있다. 가스레인지 위 냄비에는 물이 끓고 있다. 소금을 한 줌 집어넣고 스파게티 몇 가락도 넣는다. 잠시 후 면을 젓가락으로 집어 올려 천장으로 던진다.
천장에 철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스파게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 때 거실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 뚜루루루. 뚜루루루루……. 준하, 슬쩍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지만 이내 무시한다. 전화벨은 계속 울린다. 방안의 구식 벨소리도 함께. 따르르릉. 따르르르릉……. 거실의 자동 응답기가 돌아간다.
‘지금은 부재중이오니 용건을 남겨주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삐익.
전화 속 목소리: %^&**%#$#@$^&*@&^%% (알아들을 수 없는 여자아이의 목소리)
준하, 다가와서 수화기를 든다.
준하: (장난스럽게) 아하! 니가 자꾸 전화한다는 문제의 아가씨구나?
여자아이 목소리: &^$#$#@$%^&*(**&&^%$#
준하: (혼잣말로) 음……. 아직 말도 못하는 녀석이 전화를.
여자아이 목소리: 엄마!
준하: 앗! 너, 엄마는 할 줄 아는구나? 이름이 뭐야아?
전화 속 목소리: #$%^&. (멀리서 전화기 쪽으로 다가오는 애기엄마 목소리) 소원아! 소원이 어디 전화하는거야아? 아유, 어쩜 그렇게 전화기를 좋아해? (딸깍 끊기는 전화)
준하: (머쓱해서 혼자 씨익 웃는다) ……. 소원이. 예쁜 이름이네.
수화기를 내려놓자 다시 울리는 전화벨.
준하: (수화기를 들며 상냥하게) 여보세요?
전화 속 목소리: …….
준하: 여보세요? 소원이니?
영민(전화 속 목소리): 저, 거기 이와니씨댁 아닌가요?
준하: (순간, 당황하며) 아, 죄송합니다. 맞는데요? 아직 퇴근 전입니다.
영민(전화 속 목소리): 누구……. 시죠?
준하: 네? (난처한 듯) 어-, 저는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인데요?
영민(전화 속 목소리): …….
준하: 말씀 남겨주시면 전해드리겠습니다.
영민(전화 속 목소리): ……. 동생입니다.
준하: 아! 유럽에 있는?…….
영민(전화 속 목소리): 다시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으려 한다)
준하: 잠깐만.
영민(전화 속 목소리): …….
준하: 난, 김준하라고 합니다.
영민(전화 속 목소리): ……. 네.
저쪽에서 먼저 전화가 ‘뚜우’ 끊기고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 해 보는 준하.
씬 25. EXT. 와니의 집 앞. 어스름한 저녁 (현재->과거->현재)
집으로 걸어오는 와니. 대문을 밀어 보지만 잠겨있다. 열쇠를 찾아보지만 없다. 가방을 뒤져봐도……. 없다. 난감해지는 와니. 어떻게 해야 되나 싶은 얼굴로 멀뚱히 서 있다.
그 때 어디선가 아름다운 여자목소리로 잔잔한 동요가 들려온다. 약간 언덕진 골목 끝에서 마치 땅에서 솟아오르듯 서서히 모습이 드러나는 건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어떤 여자이다. 조용히 동요를 읊조리는 여자의 모습은 아무래도 약간 기이하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하다. 멍하니 서서 바라보고 있는 와니. 여자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날 때쯤 여자의 뒤로 꼬마의 모습이 조금씩 솟아오른다. 일곱 살쯤으로 보이는 귀여운 여자아이. 왼쪽 뺨에 긁힌 상처가 있는 전체적으로 장난꾸러기 같은 인상이다. 엄마의 뒤를 따르고 있었고 엄마는 아이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고 있었던가 보다. 여자와 아이는 점점 와니 쪽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아빠~'를 부르며 달려온다. 와니, 뒤를 돌아본다. 와니의 뒤쪽에서 어떤 신사가 걸어오다 아이를 발견하고는 팔을 활짝 벌린다.
그리고 신사는 여자아이를 향해 '와니야' 라고 부르며 번쩍 안아 올린다. (와니의 시점으로 보이는 과거의 장면인데 과거의 사람들과 현재의 와니가 한 공간에 있다) 현재의 와니는 얼어붙은 듯 서서 그 광경을 본다. 신사의 뒤에는 여섯 살의 사내아이가 호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다. 낯선 사내아이를 발견한 어린 와니는 엄마의 뒤 쪽 편으로 숨듯이 뛰어가서 빼 꼼이 내다본다.
엄마: (사내아이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혀 얼굴을 바라보며 복잡한 심정인 듯한 눈빛으로) 너……. 기차 타고 왔니?
고개를 끄덕이는 어린 영민.
……. 이제부턴 내가 네 엄마다. 알겠니?
어린 영민 이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다. 엄마의 말을 듣고 놀란 눈이 되는 어린 와니.
어린 와니와 영민의 눈이 마주 친다. 어느새 엄마, 아빠는 사라진 공간에서 서로 쳐다보고 있는 어린 와니와 영민. 그 모습을 보고 있는 현재의 와니. 아무 표정도 없다.
하늘에서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고 서 있는 와니. 그녀의 머리위로 우산이 씌어진다. 와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보면 대문을 열고 나온 준하가 우산을 들고 서 있다. 골목에는 와니와 준하뿐 아무도 없다.
준하: (놀라며) 뭐해?
와니: 어! 없는 줄 알고. 벌써 온 거야?
준하: 벨이라도 눌러보지?
와니: 젖어버린 머리카락을 스윽 만지며) 비……. 오네…….
준하: 꼭 한 템포씩 느리다니까. 비 오네? 그럴 줄 알고 마중 가는 길이잖아. 제발 우산 좀 챙겨라.
와니, ‘헤’하는 표정으로 웃고는 집으로 들어간다. 준하, 집으로 들어가면서 고개를 돌려 골목을 보면 아무도 없다. 텅 빈 골목. 고개를 갸웃거려보는 준하.
씬 26. INT. 와니의 집 주방. 저녁
거실, 준하의 노트북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부엌 식탁에 마주앉아 식사를 하는 와니와 준하. 와니의 어깨에는 하얀 수건이 걸쳐져있고 머리가 아직 젖은 채다. 준하가 와인을 따라준다. 와니, 스파게티를 한 입 먹어본다.
준하: 괜찮아?
와니: 음. 맛있어. 언제 이런 걸 다 배웠어?
준하: 뭘, 기본이지.
와니: 그 동안은 왜 안 한 거야?
준하: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라구.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와니: !?…….
준하: 일 년전 오늘, 너희 회사 취재 가서 처음 너 봤잖아.
와니: (^^) 기억하고 있었어?
CUT TO
준하가 선물을 했는지 포장을 뜯어보고 있는 와니. 내용물은 여성용 모자이다.
준하: 너, 우산 잘 잊어먹으니까 아예 흐린 날은 쓰고 다녀라. 머리라도 덜 젖게.
와니: (모자를 써 보며) 좀 웃기지 않을까?
준하: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아~니.
와니: (민망하지만 기분 좋은 듯이 모자를 벗었다 다시 한 번 써 보고한다) …….
준하: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 아 참! 동생이 전화했었어. 이름이 영민이라 그랬나?
눈이 동그래지는 와니. 썼던 모자를 벗어 옆 의자에 내려놓고 고개를 푹 숙여 눈을 피한다. 준하는 마음대로 전화를 받은 자기 때문에 와니가 화난 것이라고 오해한다.
(와니의 눈치를 보고 변명하듯) 아니, 내가 응답 전화기를 가져 왔거든. 애기가 장난전화 한 거 받다가…….
와니: 아마 돌아온다고 연락 한 걸거야.
준하: 돌아온대? 언제?
와니: 가을에.
준하: 그래? 야~ 아. 오랜만에 보는 거지? 3년 됐다 그랬나? ……. 아, 근데 동생 오기 전에 나, 가야 되는 거 아닌가?
와니: (약간 돌출적으로 보일 만큼 목소리가 커지며) 아냐……. 여기 안 있을지도 몰라. 서울에 있고 싶어 할 거야. 친구들도 모두 거기 있고 또…….
와니, 말을 하다말고 고개를 숙이고 스파게티를 포크로 둘둘 만다. 와니의 반응에 약간 당황한 준하도 괜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접시에 두고 있다. 둘 사이에 침묵의 시간이 잠시 흐른다……. 순간, 부엌 천장에 붙어 있던 스파게티 국수 한 가락이 가스레인지 위에 비스듬히 걸쳐있던 냄비 뚜껑에 ‘척’ 떨어지며 뚜껑이 미끄러지면서 ‘챙그르르르’ 요란한 소리를 낸다. 동시에 괘종시계의 종소리도 댕. 울리기 시작한다. 깜짝 놀라 서로를 마주보는 두 사람.
카메라, 거실로 이동하면 거실의 한 쪽에서는 과거의 영민(18살)이 의자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괘종시계의 태엽을 감고 있다.
씬 27. INT. 와니의 방. 밤 (과거)
거실에서 괘종시계가 댕……. 댕……. 울리는 소리 이어진다. 19살의 와니는 양발을 개고 의자에 앉아 만화책의 그림을 베껴보고 있다가 쿵쿵거리며 나무 계단을 올라오는 영민(18살)의 발소리와 괘종시계 소리를 듣는다. 소리는 조금씩 고조되고 가만히 듣고 있던 와니는 조용히 미소 짓는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영민. 깜짝 놀라며 만화책을 가리는 와니. 와니의 방안엔 심야 라디오 방송이 나직이 흘러나오고 있다.(1993년도쯤의 방송 내용이…….)
와니: 야아! 엄만줄 알았잖아! (짐짓 화난 척) 그리고, 꼭 그렇게 쿵쿵거리며 다녀야겠어?
영민: 소리 들었으면, 뭘 놀래?
와니: 너 또, 마루시계 1시간 앞당겼지?
영민: (^^) 알았었어?
와니: 왜 그러는 건데?
영민: 왠지 하루에 한 시간씩 더 빨리 사는 것 같지 않아? ……. 빨리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되고 그랬으면 좋겠어. 근데 태엽이 풀려서 좀만 지나면 정상으로 돌아 가버려.
와니: (이해가 안 간다는 투로) 너, 빨리 어른 되고 싶니?
영민: 당연하지. 지금이 좋아?
와니: (^^;) 그, 글쎄…….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
영민: 흠! 흠! 이상하네…….
와니: 뭐가?
영민: 왜 내방이랑 냄새가 다르지. 향수 뿌렸어?
와니: 아~니. 무슨 냄새 나는데?
영민, 성큼 와니에게 다가와 자연스레 어깨에 손을 얹는다. 영민의 손이 닿자 와니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움찔한다. 영민도 약간 어색함을 느끼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고개를 숙여 와니의 목덜미 근처에 코를 대고 한껏 숨을 들이쉰다. 영민의 얼굴이 다가오자 어깨를 움츠리며 살구를 깨물었을 때 같은 표정을 짓는 와니.
와니: 무슨 냄새 나?
영민: (고개를 갸웃하며 어색함을 감추고) 그냥……. 여자냄샌가?
와니: 여자냄새? (도망치듯 방을 나가려던 영민을 보고) 어디 가?
영민: 응? 내 방.
와니: (마치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이며) 아…….
영민, 방을 나가고 눈을 말똥말똥 뜨고 가만히 있던 와니, 왼손을 들어 영민의 손이 닿았던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만져보고 고개를 숙여 자신의 품에서 냄새를 맡아본다.(‘아무 냄새도 안 나네 뭘’ 하는 표정이 되더니 ‘후아~’)
씬 28. INSERT. EXT. 와니집 외경. 밤
현관 위 지붕 밑에 매달린 풍경이 나직이 흔들리며 소리를 낸다……. 댕그랑……. 댕그랑…….
씬 29. EXT. 와니의 학교 앞. 밤 (과거)
깜깜한 밤. 교문을 나오는 여학생들. 그 틈에 친구들과 함께 나오는 와니가 보인다.
교문 앞에는 엄마들이 혹은 아빠들이 마중을 나와 있고 자가용으로 부모님과 함께 가기 위해 와니네 일행,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간다. 언덕을 걸어 내려오는데 학교 앞 환하게 불 켜진 문방구 앞에 와니를 기다리는 영민이 자전거를 잡고 서있다. 영민은 와니를 찾을 생각은 안하고 밀려드는 여학생들의 눈을 피해 뒤돌아 서서 가게 유리창 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서 있다. 친구들 영민을 보고
친구들: 쟤 뭐냐? 여고 앞에서.
와니, 친구들의 시선을 따라 문방구 앞을 바라보면 영민이 있다. 와니 얼굴에 슬그머니 미소가 퍼진다. 영민, 돌아보면서 와니를 발견하고 한 손을 스윽 들어 인사를 한다.
와니가 아릿한 이미지로 보던 준하의 포즈와 동일하다.
와니: (친구들에게) 나 먼저 갈게.
친구들: 야! 어디 가?
단숨에 영민에게로 뛰어 가는 와니. 영민도 와니를 보고 웃는다.
친구들: 우와아~! 이와니!
와니: (돌아보며) 내일 봐.
와니가 자전거의 뒷자리에 올라타자 영민이 출발한다.
CUT TO
자전거가 언덕을 따라 내려간다.
와니의 친구들 서넛이 맞은편 계단으로 우르르 뛰어 내려간다.(우스꽝스런 걸음으로)
CUT TO
가로등이 서있는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자전거. 계단을 뛰어 내려온 친구들이 와니와 영민이 탄 자전거가 지나가자 소리를 질러댄다. 와니가 뒤돌아보며 손까지 흔들어 댄다.
영민은 말없이 웃기만 하며 페달을 밟는다. 와니는 영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슬며시 영민의 등에 얼굴을 기대어 보는 와니. 깨끗하고 단정한 와니의 얼굴은 영민의 등에 기댄 채 멍하게 생각에 잠긴다. 아니, 아무 생각도 안하려는 듯하다.
씬 30. EXT. 와니 집 앞 골목. 밤 (과거)
부감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면, 와니집 앞 골목을 와니와 준하 4
씬 31. INT. 와니방. 신새벽
푸른빛이 들어오고 있는 와니의 방. 잠자고 있는 와니. 와니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눈을 뜨는 와니, 고개를 들어 옆을 보면 비어 있는 준하의 자리.
씬 32. INT. 와니집 거실. 신새벽
거실에서는 푸른 새벽빛이 들어오는 가운데 준하가 노트북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방문이 열리고 와니가 부스스한 얼굴로 베개를 품에 안고 터벅터벅 걸어 나와 일하고 있는 준하의 옆에 풀썩 드러눕는다. 그런 와니를 눈을 껌벅거리며 보고 있던 준하, 와니의 얼굴 가까이에 대고
준하: 와니야! 왜 그래? 쌀쌀해. 들어가서 자아.
그러자 와니가 손을 쭈욱 뻗어 준하의 목을 끌어안고 준하는 엉겁결에 와니의 옆에 눕는다. 와니, 준하의 목에 자신의 머리를 댄다. 준하의 가슴에다 숨을 쉬는 와니.
점차 호흡이 편안해진다.
와니: (혼잣말처럼) 준하야…….
준하: 응?
와니: (잠꼬대처럼 작게 중얼거린다) 준하야 준하 김 준하.
그런 와니를 가만히 안아주고 있는 준하.
씬 33. INSERT. EXT. 와니집 외경. 새벽
조금씩 흔들리는 풍경. 그 때 바람이 풀썩 불어 꽃잎이 날리고 풍경의 종소리는 심하게 흔들린다. 댕그랑. 댕그랑. 댕. 댕. 댕. 댕. 댕…….
씬 34. INT. 동화부실. 낮
점심 식사 후의 동화부실 분위기. 오락실에나 있는 커다랗고 제대로 된 D. D. R.기계가 갖춰져 있다. 수경이 춤을 추고 있는데 워낙 빼어난 솜씨에 애니메이터들이 둘러서서 탄성을 지르며 아주 즐겁고 소란스럽다. 그 옆에서 팔짱을 끼고 ‘흥’ 삐진 얼굴로 수경을 째려보고 서 있는 수미. 영숙은 책을 읽고 있다. 성재가 영숙의 커피까지 들고 슬그머니 다가가 서툰 수화로 말을 건다. ‘무슨 책 읽고 있어요?’ 같은. 도석은 거울을 보며 여러 가지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크게 분노하는 얼굴 혹은 크게 웃는 얼굴을 천천히 반복해서 재현을 해보며 그리고 있다. 정우가 원화 뭉치를 들고 동화부실에 들어선다. 수미가 정우를 발견하고,
수미: 어! 정우 선배님! 그거…….
정우: 그래, 원화 넘기러 왔다.
수미: 어머, 웬일이세요? 원화가 벌써 넘어오고? 달력 잘못 본 거 아녜요?
정우: 후배들 원성 들어가며 초치기하는 게 재밌어서 했는줄 아냐? 누렇게 뜬 이 얼굴 안 보여?
수미: 흥! 선배님. 만날 원화부만 쳐다보다가 마감 때면 똥줄 타는 게 누군데요. 도석이 좀 보세요. 쟤가 스물네 살로 보여요?
건너편에 앉아 거울을 보며 그림을 그리던 도석.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면 앞머리가 심하게 벗겨져 있다. 말문이 막히는 정우. 그런데 동화부실에 와니가 없다.
정우: 근데 이 작가 어디 갔냐?
씬 35. EXT. 회사 옥상. 낮
회사 옥상에 있는 평상에 가만히 누워 하늘을 보고 있는 와니. 손에는 생수 통을 들고…….
씬 36. INSERT. EXT. 하늘. 오후
청명한 하늘에 하얀 구름이 흘러간다.
씬 37. EXT. 와니집 마당. 늦은 오후
와니, 마당에 빨래를 널고 있다. 준하의 속옷이며 셔츠들, 청바지 등을 탁탁 털며 너는 와니.
CUT TO
대문을 열어둔 채로 맨발로 걸어 다니며 호스로 물을 뿌린다. 계단이며 화단이며 나무며……. 물줄기를 맞은 풍경도 요란하게 댕그랑거린다.
CUT TO
씬 37-1. INSERT. INT. 와니방. 늦은 오후
잠을 자고 있는 준하.
CUT TO
맑은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숨을 훅 들이쉬는 와니. ……. 자기 발목에 가만히 물길을 대본다. 와니의 다리가 말갛게 보인다. 이 때 커다란 달팽이가 와니 앞을 가로질러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다. 와니가 손가락을 내밀어 와니의 손가락을 타고 오르는 달팽이.
다른 손가락 끝을 대자 달팽이는 더듬이가 쑥 들어가면서 몸을 한껏 움츠린다. 와니의 시점으로 손가락 위의 달팽이가 화면 가득 커다랗게 보이다가 포커스 이동하면, 열어둔 대문가에 우뚝 서 있는 소양(24살)이 보인다.
소양: 언니!
와니: (엉거주춤 서며 동그래진 눈만 멀뚱멀뚱 댄다. 툭 떨어지는 달팽이) ……. 소양아.
소양: 언니……. 머리 많이 길었다……. (살짝 미소 짓는다)
와니: …….
어색하게 선 채로 웃어야 할지 아닐지 모르는 듯 애매한 표정을 짓는 와니.
소양: 언니! 그거…….
손짓으로 와니의 발을 가리키면 늘어뜨린 호스에서 물이 계속 흘러 와니의 발밑이 흥건하다. 퍼뜩, 정신을 차리는 와니가 호스를 갑자기 치켜들어 소양이 물세례를 받는다.
씬 38. INT. 거실. 황혼
찻잔을 앞에 두고 마주앉은 와니와 소양. 물세례를 받은 소양의 머리는 아직 젖어있다.
소양, 고개를 돌려 거실을 한 번 둘러보고는
소양: 이렇게 앉아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우리집 서울로 이사가고 처음이잖아. 분명히 바뀌긴 많이 바뀐 것 같은데 어째 마음이 편안한 게 꼭 옛날 같아.
와니: 바뀌었어. ……. 아주 많이.
이제 와니를 차분하게 바라보는 소양.
소양: 요즘도 만화 그려?
와니: 할 줄 아는 게 그거뿐이네 뭐…….
소양: 좋아 보여. 이젠 정말 프로겠네?
아무 대답 없이 소양을 쳐다보는 와니. 무표정하다.
소양: 나, 휴학했어. 언니.
와니: …….
소양: 자꾸 미루는 거야. 졸업 말이야. 뭘 해야 할지 모르겠거든.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와니: …….
석양이 노랗게 들어온 거실. 방문을 열고 나오는 준하, 잠에서 깬 부스스한 얼굴에 한쪽이 말려 올라간 추리닝에 런닝 차림이다. 주방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고 병에 담아놓은 물을 한 컵 따라 단숨에 마셔버린다. 시원하게 물을 마시고 난 준하,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는다. 그때 까진 몰랐는데 거실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준하를 빤히 보고 있는 소양과 와니의 모습이 거기 있는 것이다. 당황하는 준하. 허둥대며 삐죽 솟은 머리를 쓰다듬고 추리닝 바지를 추스려 내리며 머쓱해진다. 일어나 다가오는 소양.
소양: 안녕하세요? 윤소양이라구 해요. 와니 언니 후배구요…….
준하: 아, 김준하라고 합니다.
부스스하지만 당당하고 맑은 얼굴로 인사를 하는 준하.
CUT TO
소양, 찻잔을 만지작거린다. 와니, 소양의 잔에 뜨거운 물을 다시 넣어주는데 소양, 씩 미소 지으며
소양: 언니, 나 여기 며칠 있으면 안 될까?
눈만 동그래져서 한쪽 구석에 놓인 트렁크를 쳐다보는 와니.
와니: 저, 소양아…….
소양: 아빠한테 아직 휴학 얘길 못했어. 울 아빠 벌컥 화내시고 며칠만 지나면 괜찮잖아? 그러니까 전화하구……. (다시 살짝 미소 지으며) 방해 안 할게, 두 사람. 이층에 콕 박혀 있을거니까.
딱히 거절을 못하는 와니.
…….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봐두 돼? 설마, 결혼 한 거야?
와니: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냐, 그냥 같이 사는 거야.
소양: ……. 역시 언니는 용감한데가 있어.
소양의 말을 의미 있게 들었는지 물끄러미 바라보는 와니.
씬 39. INT. 2층 와니의 방. 황혼녘.
와니의 예전의 방은 거의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던 듯하다. 방안을 둘러보며 멀뚱히 서 있는 소양.
CUT TO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소양이 와니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 다른 곳은 예전 그대로인 듯한데 와니의 책상쪽은 텅 비어져 있다. 빈 책상 위에 액자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가족사진과 와니와 영민이 함께 찍은 사진이 액자에 꽂혀있다. 액자를 쳐다보고 있는 소양, 핸드폰 줄 끝에 장식처럼 달린 조그만 칼을 시계추처럼 흔들거리고 있다. 이 때 밖에서 불어온 바람이 창가의 커튼을 휘익 하고 출렁이게 하는가 싶더니 방문이 바람에 밀려 ‘쾅’ 하고 닫힌다. 깜짝 놀라 돌아보는 소양.
씬 40. INT. 와니집 부엌. 황혼녘
부엌에 서서 저녁식사를 준비하던 와니가 이층와니와 준하 5
씬 41. EXT. 운동장. 오후 (과거)
학교 운동장. 철봉을 턱에 대고 얼굴을 붉히며 버티는 소양. 그 아래에서 와니, 손목시계로 시간을 재다 맞은편의 영민을 보고 내리라는 모션을 취한다. 영민, 소양의 다리를 잡고 올려주고 있다가 놓아버린다.
소양: 안 돼. 내 턱! 터억!
영민이 다리를 놓자마자 바로 떨어져 내리는 소양, 손의 흙을 털며 일어난다.
소양: 너무해.
영민: 몇 초?
와니: 20초. 혼자는 2초.
영민: 용불용설이 맞다면 니 팔은 금방 퇴화될 거야.
소양: (팔을 주무르며) 턱 빠질까봐 무섭단 말야.
영민: 매달리기는 안 되겠다. 다른 거나 잘해.
CUT TO
운동장 한가운데서 스탑워치를 들고 지루한 얼굴을 하고 있는 영민. 소양이 힘겨운 얼굴로 운동장을 돌고 있다. 그 뒤로 와니의 모습도 보인다. 점점 두 사람의 간격이 좁혀진다. 소양에 비해 와니의 표정은 다소 여유 있어 보인다. 드디어 소양을 제치고 앞으로 나서는 와니 소양의 얼굴은 울상으로 변한다.
영민: 그만해! 더 뛰면 2바퀴도 차이나겠다.
소양이 풀썩 주저앉고 만다. 다가오는 와니를 향해 도저히 안 되겠다는 영민의 표정.
와니: 던지기 4미터에 윗몸 일으키기 5개, 오래 뛰기도 그냥 그렇고…….
영민, 귀엽게 인상을 찡그리는 소양을 보고 웃는다. 그리고는 소양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영민: 괜찮아. 그래봐야 1점 2점인데 뭐. 너, 공부는 잘 하잖아.
소양의 머리를 건드리는 영민을 바라보는 와니, 소양이 영민을 바라보고 웃는 환한 얼굴에 표정이 굳어버린다. 와니, 영민의 잠바를 영민에게 던지며
와니: 가자.
성큼성큼 먼저 걸어 가버리는 와니를 쳐다보는 영민의 시선. 와니가 던진 잠바에서 열쇠뭉치가 떨어진 것을 소양이 발견하고 줍는다. 열쇠고리에는 소양의 핸드폰에 매달려 있던 조그만 칼이 있다.
소양: 너무 귀엽다. 이거 어디다 써?
영민: (와니를 보다가 시선을 돌려) 프라모델 다듬는 칼. (그리곤 시선을 다시 와니 쪽으로 돌린다)
소양: 오빠 이거 나 줘.
영민: 가자 소양아. (멀리 가고 있는 와니 쪽으로 걸어간다)
소양: (영민을 따라가며) 오빠 이거 나 가진다.
영민: 그래.
소양, 좋아하며 칼을 고리에서 빼며 걷는다.
씬 42. EXT. 교문 앞. 오후 (과거)
와니, 혼자 앞서서 걷고 영민과 소양, 나란히 뒤따라간다.
소양: 언니! 우리 아이스크림 먹자. 내가 사올께.
가게를 향해 뛰어가는 소양. 둘, 뛰어가는 소양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영민: 운동 신경은 꽝이야. 걱정되네…….
와니: ……. 잘 어울려 보여. 소양이랑…….
영민: (와니를 쓰윽 보고) 무슨 소리야?
와니: (영민을 똑 바로 보고) 그렇지 않음 소양이한테 그러지 마.
영민: (정색을 하고) 뭘?
와니: 소양인 너한테 진심이야. 그러니까……. 너한텐 무의미한 한마디도…….
영민: (인상을 쓰며 말을 자른다) 그만해. 그런 일없을 테니까.
화난 듯 영민, 고개를 돌려버린다. 와니도 고개를 돌려버리고. 썰렁해진 두 사람.
소양, 양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서 걸어오고 있다. 그 위로 ‘타닥 타다닥’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 들린다.
씬 43. INT. 와니집 거실. 밤
거실에서 준하가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진지하고 열심히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준하……. 무심코 담배를 꺼내다가 참겠다는 듯 한 번 입맛을 다시며 도로 집어넣는 준하.
씬 44. EXT. 와니집 외경. 밤
이층 베란다에서는 소양이 나와 밤하늘을 보는지 허공을 보는지 먼 곳을 응시하고 현관에서는 준하가 허리도 풀어주고 목도 돌려보며 간단한 체조를 하고 와니방 창문 안으로는 애니메이션 작업용 책상에 앉아 그림은 안 그리고 엎드려 있는 와니가 보인다.
준하가 와니방에서 불빛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본다.
씬 45. INT. 와니방. 밤
눈을 말똥말똥 뜬 채 무슨 생각엔가 잠겨있는 와니. 엎드린 책상 밑에서 형광램프의 하얀빛이 와니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방문이 열리고 준하가 다가와서 와니의 뒤에 서서 와니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준하: 2시가 넘었어. 잠이 안와?
와니: 자야지……. (그러면서 부스스 일어나 그대로 매트리스로 가 눕는다) ……. 소양이, 며칠 있을 거야.
준하: (매트리스에 앉으며) 그게 걸려서 잠 못 자고 있는 거야?
와니: 몰라. ……. 아냐.
준하: 괜찮겠어?
와니: 준하씨 작업하는데 방해되진 않을 거야.
준하: 아니, 그거 말고. 나, 여기 있는 거 말야.
와니: (약간 날선 얼굴로 일어나 앉으며) 그걸 왜 준하씨가 신경 써?
준하: 아니, 나는……. (갑자기 생각난 듯) 어! 준하씨? 오랜만에 들으니까 왠지 낯설면서도 신선한데? 다시 한 번 불러봐.
와니: (다시 풀썩 누우며 말을 돌린다) 나, 내일부터는 바빠질 거야. 밤샘하고 올지도 모르고.
준하: 마감이구나?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이는 와니.
준하: (갑자기 와니의 품에 얼굴을 묻고 흠뻑 와니의 냄새를 들이마신다) …….
와니: (당황하며) 뭐해?
준하: 좋다. 니 냄새. 그거 알아? 연인들이 헤어지고 나면 이 체취가 떠오를 때 제일 못 견딘대……. 으……. 난 또 그 동안 어떻게 참지?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와니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깊숙이 껴안는다. 준하의 말은 그런 뉘앙스가 아니었지만 괜히 의미 있게 들리는 와니.
와니: (어색하게 몸을 빼며 피곤하다는 듯) 그만해.
와니의 태도에 민망해져버린 준하. 이 때 전화기가 ‘따르릉’ 울린다. 순간, 당황하는 얼굴이 되는 와니. 눈을 껌벅껌벅 대더니 몸을 돌려 누워버린다. 전화기는 계속 울리고.
준하: 전화 안 받아?
와니: 그냥 잘래. ……. (하지만 온통 소리에 집중해 있는 눈치다)
준하: 동생한테서 온 걸 거야. 다시 한다고 그랬어.
거실의 전화는 자동 응답기로 넘어가고 ‘삐이’ 신호음이 울렸지만 전화 속에서는 길거리의 차 지나는 소리 등 소음만 들리고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잠시 뒤 ‘딸깍’ 수화기 놓는 소리가 들린다. 준하, 몸을 돌리고 자는 듯 누워 있는 와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아무래도 와니의 태도에서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은 표정이다.
준하에게서 몸을 돌리고 있지만 눈을 뜨고 있는 와니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씬 46. INSERT. EXT. 와니집 전경. 오전
오전의 햇살이 집을 감싸고 있다. 새소리도 들리고. 담장 위로 여유롭게 지나가는 고양이.
씬 47. INT. 와니의 집 거실. 오전
하품을 하며 부엌으로 들어오는 소양. 작은 주전자를 가스레인지에 올리고 식탁을 보면, 와니가 차려놓고 간 상이 보인다. 간소하지만 정갈한 식탁. 고개를 돌려 냉장고를 보면 그 동안 와니가 써놓은 포스트잇이 여러 장 붙어 있다. 그걸 떼보는 소양.
‘나물은 냉장고에. 국은 점심 때 한 번 끓여놔.’
‘힘들어도 아침 꼭 챙겨먹어. 담배 좀 줄이고.’ 등등. 귀여운 캐릭터 그림에 말풍선을 그려 써놓은 와니의 쪽지들.
소양, 피식 웃더니 이내 복잡한 감정이 생기는 듯 어디랄 것도 없이 창밖을 내다본다.
CUT TO
식탁에 앉아 소양과 준하가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준하가 열심히 밥을 먹고 있는데 소양이 불쑥
소양: 같이 산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봐요.
준하, 밥을 먹다 말고 눈을 껌벅대며 소양을 바라본다.
나 이외의 사람이랑 단 둘이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같이 사는 거 이것도 꽤 괜찮은 것 같다구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한 준하, 하지만 이내 쾌활하게.
준하: 부럽죠?
그러면서 이내 밥을 계속 떠먹는다. 당당한 준하의 대답에 소양은 약간 의외라는 느낌을 갖다가 웃는다. 전화벨이 울린다. 밥을 먹다 고개를 돌려 전화기를 쳐다보고 있는 준하와 소양.
‘뚜루루루루…….’ 계속 벨이 울리는데 영민의 전화라고 짐작했는지 다소 긴장된 얼굴로 전화기를 쳐다만 보고 있는 준하. 소양, 의아한 듯 준하를 보다가
소양: 전화, 안 받아요?
준하: (약간 당황한 듯) 아!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누군지 보구요.
마침, 자동 응답기가 삐이~ 울리고
프로듀서(전화 목소리): 아-. 여기 영화삽니다. 준하씨 며칠 내로 한 번 봤으면 좋겠는데……. 급히 상의할 일이니까 내가 내려가도 되고.
씬 48. INT. 동화부실. 오전
수화기를 들고 있는 와니. 집에 전화를 하는 모양인데 전화기에서는 뚜뚜뚜 하며 통화중 신호음이 들린다. 전화를 끊고, 잠시 멍하니 앉아 있는 와니……. 작게 한숨을 폭 내쉬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슥, 슥 연필을 움직일 때마다 그려지는 애니메이션…….
씬 49. INT. 영민방. 낮 (과거)
방문이 열리면, 자신의 책상에 앉아서 프라모델 범선을 만들고 있는 영민이 보인다.
21살의 와니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종이 뭉치와 연필을 들고 들어온다. 영민방의 오디오에서는 음악이 나오고 있다.
영민: (약간 무뚝뚝하게) 왜?
와니: (역시 약간 무뚝뚝하게) 자세 좀 취해 줘. 잘 모르겠어서 그래.
CUT TO
창틀의 발코니(이중창인데 창과 창 사이에 공간의 여유가 꽤 있다)에 영민이 등을 기댄 채 오른쪽 다리는 세우고 그 무릎 위에는 머그잔을 든 오른팔을 자연스럽게 얹어놓고 있다. (순정만화풍으로) 와니는 의자에 종이 뭉치를 놓고 꿇어앉은 자세로 영민을 모델 삼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영민은 집중해서 만화를 그리고 있는 와니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와니가 한 호흡 쉬려고 고개를 들다 영민의 시선을 느낀다.
와니: 왜?
영민: 눈썹이 짝짝이야.
와니: 정말? (유리로 자신의 얼굴을 보려한다) 눈썹은 잘 못 그리겠어.
영민: 내가 그려볼게.
와니: (눈이 둥그레진다) 니가?
CUT TO
창틀에 걸터앉아 화장 지우는 크림으로 자신의 눈썹을 닦아내고 있는 와니. 그 앞에 붙어 서 있는 영민. 화장 연필을 들고. 두 사람, 창가로 밀려드는 햇빛을 받아서 하얗게 빛나 보인다.
와니: 제대로 해야 돼.
영민: 움직이지 마.
와니의 얼굴에, 눈에 닿는 영민의 손바닥. 영민, 눈썹을 그려나간다. 와니, 눈을 감는다. 영민의 손이 얼굴을 스칠 때마다 눈이나 볼의 근육이 긴장되어 파르르 떨린다…….
영민, 다 그려 놓고 눈감은 와니의 얼굴을 진지하게 쳐다보고 있다. 꽤 잘 그려진 와니의 눈썹. 마알간 와니의 눈감은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영민. 순간, 영민이 스윽 다가와 와니의 입술에 살짝 입술을 맞춘다. 번쩍. 눈이 동그래지는 와니. 숨이 ‘훅’ 막힌다. 살며시 떨어지는 영민. 와니는 코앞에 있는 진지한 영민의 눈과 마주치고 숨을 쉴 수가 없다. 두 사람의 긴장된 시선……. 창 밖에서 들려오는 오후의 나른한 새소리. 어색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감싸고. 서로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떨구고 마는 두 사람. 와니, 떨리는 손등으로 입술을 훔쳐내고 풀썩 창틀을 내려와서 방을 나가려 한다.
영민: 누나!
와니: …….
돌아보는 와니에게 창가에 있던 만화뭉치를 내미는 영민. 와니가 차마 영민을 마주보지 못하고 만화뭉치를 바라본다. 만화뭉치를 내밀고 있는 영민의 손도 떨리고 있다. 그냥 뒤돌아서 나와 버리는 와니. 와니의 만화뭉치를 들고 망연히 서 있는 영민.
씬 50. INT. 영민의 방. 오후
과거의 와니가 나간 후 반쯤 열려진 그 방문 뒤에서 준하의 얼굴이 쑥 나타난다. 그러나 텅 빈 현재의 방안. 그런데 오디오에서는 앞 씬과 이어진 그 음악이 계속 나오고 있다. 영민의 턴테이블이 있는 오디오 앞으로 다가가는 준하. 오디오 위의 앨범 재킷을 들어본다.
소양 (목소리): 판 좀 뒤집어 주실래요?
L. P.판 뒷면을 들여다보던 준하, 소양의 목소리에 자지러지게 놀란다. 바람이 불어 커튼이 휘날리면서 와니가 앉았던 창틀의 발코니에 찻잔을 들고 앉아 자동차 잡지를 읽고 있던 소양이 보인다.
준하: 어! 깜짝 놀랐잖아요. 거기서 뭐하는 거예요?
소양: 햇볕 쬐잖아요.
준하: (혼잣말처럼) 이상하네. 이 방 잠겼었는데……. 근데 주인도 없는 방 이렇게 막 들어와도 되나? 와니가 뭐라 그럴 텐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 슬금슬금 소양이 있는 창 쪽으로 가는 준하. 소양 너머로 보이는 동네 전경을 신기한 듯 보는 준하. 골목도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 다른 집들의 지붕도 보이고…….
준하 (목소리): 이 집에도 L. P. 판이 많네. 그런 거 하곤 영 담쌓고 사는 줄 알았더니.
오디오 옆 책장에 잔뜩인 레코드판들이 보인다. 준하, 방을 둘러보다가 책상 위 벽면의 영민이 잔뜩 붙여 놓은 사진들에 눈이 멎는다. 영민이 엄마, 아빠와 찍은 사진도 있고 와니와 찍은 사진도 있다. 그리고 소양과 와니의 사진도 있다. 학교에서 찍었는지 교복을 입은 소양과 와니는 팔짱을 끼고 활짝 웃고 있다.
소양(목소리): 아니에요. 저게 다 영민 오빠하고 언니가 사 모은 건데. 용돈만 받으면 샀으니까. 저 중에 내가 산 것도 몇 개있어요.
준하(목소리): (전혀 의외라는 듯) 그래요?
소양(목소리): 거실에 있는 범선 있죠? 그것두 영민 오빠가 만든 거예요. 프라모델 광이었거든요.
좀 더 어려 보이는 영민과 와니의 사진으로 천천히 들어가면, 두 사람의 포즈는 왠지 서로 부끄러워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해수욕장에서 와니가 모래사장 위에 ‘풀썩’ 주저앉으며 카메라를 쳐다보는 한 순간을 스냅으로 찍은 사진이 있다. 커다란 흰 면티가 반바지를 가려버린 와니의 무방비의 모습. 눈을 반짝 치켜뜨고 위를 보고 있는 와니의 표정이 무척이나 싱싱하고 아름답다.
준하: (사진을 보는 준하는 질투가 나는지) 프라모델이라 음……. 꼼꼼해 보이는 게 연약하게 생겼군…….
소양: 아니에요. 그건 어릴 때고, 그 사진보다 훨씬 남자답게 생겼어요. 그래두 범선 만들 때 손은 무지 예뻤는데…….
그렇게 말하는 소양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준하. 자신의 손을 펼쳐 뒤집어 본다.
소양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딴청을 한다.
준하: 아……. 알겠다.
소양: 뭘요?
준하: 많이 좋아했구나?
소양: (잠시 머뭇거리지만 이내 담백하게) 옙. 말수가 적고 그러면서도 친절하고 어른스럽고…….
준하: 곧 귀국한다고 그러는 거 같던데…….
소양: (순간, 멈칫하는 표정) ……. 알아요.
소양, 진지한 얼굴이 되더니 멀리 바깥쪽을 바라본다. 매미가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한다.
CUT TO
소양은 영민의 책장에서 뭔가 다른 책을 보고 있고, 준하는 영민의 책상 서랍을 슬며시 열어본다. 그 속에는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와니가 그린 만화뭉치다. 순정만화풍의 표지 그림에 ‘글 그림 이와니’ 라는 글도 보이고.
와니(목소리): 여기서 뭐해?
어느새 왔는지 문간에 서 있는 와니. 서늘한 얼굴.
준하: 어, 일찍 왔네?
와니: 뭐 가지러 왔어. 다시 가야 돼.
그러더니 준하가 보고 있던 만화뭉치를 집어 들고 음악을 끄고 판을 챙겨 제자리에 넣는 와니.
준하: (그러는 와니를 보면서) ……. 오디오는 거실에 내 놓고 들으면 좋지 않을까?
와니: (되도록이면 억제하려는 느낌으로 화를 내는 와니) 왜 남의 방에 들어오고 그래?
CUT TO
문을 꾹 눌러 잠그는 와니. 거의 쫓겨나다시피 방문 앞에 멀뚱히 서서 와니를 보는 준하와 소양. 당황스런 준하의 얼굴과 착잡해 보이는 소양의 얼굴.
준하: 굳이 잠글 거 뭐 있어? 거실에 내놓는 게 부담스러우면 방에 와서…….
와니: (말을 끊으며) 영민이 오면, 그 때 들으면 되잖아……. (애써 밝은 얼굴로) 밥 먹자. 나, 너무 배고파.
하지만, 이미 썰렁한 세 사람의 분위기.
에서 들려오는 ‘쾅’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든다.
천천히 다가오는 영민과 와니가 탄 자전거. 집에 다 왔지만 두 사람은 멈추지 않고 대문 앞을 지나쳐 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그렇게 집 앞을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마치 둘만의 시간을 연장하려는 듯이. 두 사람과 자전거는 가로등 불빛 때문에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한다.
와니와 준하 6
씬 51. INT. 와니집 거실. 밤
펼쳐진 노트북 화면에서는 아주 평범한 화면 보호기가 보이고 책상에 턱을 괸 채 딴 생각에 빠진 표정으로 장식장 위의 프라모델 범선과 유리 항아리의 몽당연필들을 바라보는 준하. 그의 손에서는 담배 연기가 오르고 있다.
CUT TO
밤중에 거실 청소를 하고 있는 준하. 진열장등의 먼지도 털고 걸레로 거실바닥을 오가며 닦고.
씬 52. EXT. 와니집 뒷마당/ 앞마당. 오전
뒷마당에서 준하가 비닐에 덮여있는 오래되어 먼지가 심하게 앉고 녹이 슨 낡은 자전거를 들쳐 낸다. 뜨거운 태양을 올려다보고…….
CUT TO
수세미에 비눗물을 묻혀 세차하듯이 자전거를 닦고 있는 준하. 갑자기 걸레질을 멈추더니 좌측 핸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못으로 긁어 새긴 듯한 영문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 ‘Y' 오른쪽 핸들을 스윽 보는 준하. ‘W'가 새겨져 있다. 잠깐 무심히 보고 있더니 이내 다시 걸레질을 한다.
씬 53. EXT. 학교 운동장/ 교문 앞. 낮 (현재->과거->현재)
자전거를 타고 학교 운동장을 달리는 준하. 힘껏 페달을 밟아 빠른 속도로 달리는 준하. 그런데 어느 순간 화면에는 자전거를 달리고 있는 영민의 모습이 잠깐 스치듯 보인다. 카메라, 운동장 바닥을 중심으로 속도감 있게 준하를 따라 움직인다.
CUT TO
자전거 체인이 벗겨진 모양이다. 나무 꼬챙이를 들고 손에 기름을 묻혀가며 체인을 끼워보려고 낑낑거리지만 여의치 않다. 그러다 화가 나는지 인상을 쓰며 자전거를 팽개치듯 넘어뜨려 버린다.
CUT TO
운동장 가에 있는 옥외 수도장에서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꿀꺽꿀꺽 물을 마시고 있는 준하
JUMP CUT
땀으로 젖어있는 준하가 수돗가에 발을 올려놓고 낡은 운동화 끈을 묶고 있다. 준하, 고개를 들어 학교의 전경을 스윽 훑어본다. 깔끔하고 예쁜 학교이다. 이 때 준하만 보이고 텅 비어 있던 학교 안 여기저기에서 여고생들의 웃음소리와 시끌벅적한 수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군데군데에서 실제로 여고생들의 모습이 스르륵 보이기 시작한다. (수돗가에 둘러서서 세수를 하기도하고 물을 마시기도 하는 여고생들. 청소를 하는 여고생들. 놀이에 열중해 있는 여고생들. 책을 읽고 있는 여고생들 등등) 어느새 교내에는 아름다운 여고생들로 가득하다. 그 중 잔디 위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한 무리의 학생들을 보면, 그들 속에 와니와 소양이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다. 미술부인 듯 여기저기 이젤이 펼쳐져 있다. 서로 번갈아 사진을 찍어주느라 왁자한 그녀들의 모습이 밝고 환하다.
CUT TO
준하가 체인이 벗겨진 자전거를 끌고 교문을 나와 경사진 길을 걸어 내려오고 있다.
그 길은 와니와 영민이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던 와니의 학교 앞길이다.
씬 54. INT. 전자상가 (용산이나 테크노마트). 낮
AV매장에서 준하가 DVD플레이어와 리시버앰프, 스피커 등 홈 씨어터 시스템을 보고 있다.
CUT TO
점원에게 가격을 묻는 준하
준하: 모두 얼마죠?
점원: 260은 받아야 되는데 풀세트로 구입하시니까 250만원까지 해 드리죠.
고개를 끄덕이지만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 표정이 역력한 준하.
씬 55. EXT. 거리. 낮
다소 한적한 거리를 걸어오고 있는 준하와 소양. 식료품과 생필품 등을 잔뜩 사서 들고 온다. 대부분 무거운 것은 준하가 가벼워 보이는 작은 짐은 소양이 들었다.
소양: 언니……. 첨에 어떻게 만났어요?
준하: 궁금해요? 뭐 별거 없는데…….
소양: 그래도 말해줘요. 어떻게 만난 거예요?
준하: 시나리오 취재하러 갔다가 만났어요.
소양: 으응, 인터뷰하다가 눈이 맞았군요? 아니면, 일부러 와니 언니를 찍고선…….?
준하: (^^) 반반이죠, 뭐. 대부분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소양: 처음이예요?
준하: 예?
소양: 첫사랑이냐구요?
준하: 아아~, (어색하게 웃으며) 하하하! 뭘 그런걸 물어보고 그러세요.
소양: 남자들은 이상해. 연애 적게 하면 부끄러운 일인가요?
준하: 아니, 그런 뜻이 아니구요. 음~ 첫사랑이라……. 꼬마 때요, 일곱 살쯤이었나? 동네 남자애들하고도 막 싸우는 왈가닥 여자애가 있었어요. 그 애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랬던 게 지금도 기억나요.
씬 56. INT. 패스트푸드점 (맥도날드 같은). 낮
패스트푸드점 창가 쪽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준하와 소양. 탁자 위에는 짐들과 소양의 핸드폰이 올려져 있다. 창밖으로는 뜨거운 열기를 식히려는 듯 패스트푸드점 유니폼을 입은 아가씨가 길거리에 물을 뿌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앞으로 노란 모자를 쓴 꼬마들이 여자 선생님들의 지시에 따라 삼삼오오 줄을 맞춰 지나간다. 맨 뒤에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맨 키기 작은 사내아이 하나가 몹시 더운 듯 헥헥거리며 간신히 일행을 따라가고 있다. (프롤로그에 애니메이션으로 등장했던 꼬마와 닮은)
소양 (목소리): 말은 걸어 봤어요?
고개를 가로젓는 준하.
소양: 뭐야? 그게 무슨 첫사랑이예요?
준하: 무슨 소리예요? 유치원만 다녀도 인생을 아는데.
소양: 그 뒤엔 어떻게 됐는데요?
준하: 우리 집이 딴 데로 이사를 가게 됐어요. 내 딴에는 마지막으로 인사나 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가슴을 졸이며 그 애 집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우당탕 하면서 문이 확 열리고 그 애가 불쑥 튀어나오는 거예요.
소양: (눈을 반짝) …….
준하: 근데 걔, 옷을 하나도 안 입고 있었어요.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막 울더라구요.
소양: 왜요?
준하: 뭘 잘못한 게 있었는지 엄마한테 쫓겨났나 봐요.
소양: 너무해.
준하: 나는 넘 당황해 가지고 어쩔 줄 모르고 서있는데, 순간 눈이 딱 마주쳐 버린 거예요.
소양: 그래서요?
준하: 왠지 날 원망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노려보는데 (^^) 무섭더라구요……. 도망갔죠 뭐.
소양: 애걔……. 그게 다예요?
준하: 군대 가기 전에 자전거 타고 여행하다가 문득 그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동네를 찾아봤죠.
소양: 어머! 만났어요?
준하: (피식 웃으며) 아뇨……. 그 애 집도 이살 갔나봐요.
씬 57. EXT. 애니메이션 회사 화단 앞. 낮
건물로 들어가려는 와니네 일행, 주차장 구석에서 싸우는 경찰복의 사내 현수와 정우를 발견한다.
수미: 어? 언니 저기 좀 봐요. 정우 선배 아니세요?
와니, 보면 정우와 현수가 크게 말다툼을 하고 있다.
성재: 정우형 지금 경찰하고 싸우는 거지?
수미: 누가 말려야 되는 거 아니야?
와니: 들어가자.
수미: 언니, 상대는 경찰이라구요, 경찰.
다들 쭉 늘어서 구경하는데 입장이 곤란한 와니도 엉거주춤 서서 정우의 싸움을 구경한다. 언성을 높이던 경찰복의 현수가 차로 걸어가더니 그대로 차에 올라타 출발해 버린다. 떠나는 차의 뒤에다 큰소리를 지르는 정우. ‘야! 정현수. 정현수’
그리곤 화를 삭이지 못하고 근처의 쓰레기 더미를 힘껏 차고는 사무실 입구 쪽으로 걸어 들어온다.
성재: (수미의 팔을 잡아끌며) 야, 온다. 들어가자.
수미: 무슨 일인지 물어나 봐야죠.
와니: (약간 큰소리로) 들어가자니까.
와니의 반응에 놀라 계면쩍은 얼굴을 보이며 마지못해 들어가는 수미. 그리고는 정작 와니 자신은 서서 걸어오는 정우를 바라보고 있다. 어디선가 ‘타닥타닥’ 타이프 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씬 58. INT. 서재. 낮 (과거)
타이프 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가운데 뿌연 담배연기가 보이고 영민은 조그마한 상에 앉아 타이프 된 원고를 읽고 있다. 원고를 읽다가 가끔 연필을 들어 수정을 한다.
맞은편 큰상에 앉아 입에는 담배를 물고 타이프를 치며 때때로 멈추는 아버지. 그러다 막히는지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한 팔을 턱에 괴고 원고를 내려다보는 모양이 된다. 아버지는 담배를 물고, 영민이는 연필을 물고. 카메라 뒤로 물러나면 두 부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와니. 손에는 깎다만 과일과 칼을 든 채로. (와니는 서로 닮은 아빠와 영민을 보면서 자신과 영민의 현실을 느끼고 있다) 조금 후, 원고에서 고개를 드는 아버지, 와니가 쳐다보는 것을 보고는
아버지: 어! 미안!
아버지, 얼른 와니 앞으로 가는 담배연기를 손으로 흩뜨려 자기 쪽으로 오게 한다.
아버지: 아무래도 환기를 좀 시켜야겠지?
그리고는 곁에 놓인 선풍기를 돌린다. 철망이 촘촘한 현대식이 아닌 요즘 장식용으로 쓰이는 구형 선풍기가 털털거리며 돌아간다. 창문으로 가 창밖을 향해 서서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다가 시선을 느끼고 영민을 보는 와니. 영민은 와니를 보고 있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다시 고개를 떨구고 원고에 열중하는 척 한다. 말없이 사과를 깎고 있는 와니의 자태가 무척 곱다. 햇빛을 받아 빛나는 목선이며 꼭 다물고 있는 입술 등이.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는 아빠. 빛이 가득 들어오는 서재의 풍경.
여전히 말이 없는 와니와 영민. 하지만, 서로에게 신경은 집중되어 있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벗겨져 나가는 사과 껍질과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씬 59. INT. 과거 와니의 방. 새벽 (과거)
동이 터 오는, 아직은 어두운 새벽녘. 와니는 이불도 덮지 않고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있다. 와니, 자고 있진 않은 듯, 몸을 뒤집어 오른팔에서 왼팔로 바꿔 베고 눕는다. 이때 누군가 이층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오래된 마룻바닥에 사람의 체중이 실려 ‘삐-이걱’대는 소리. 와니, 눈을 뜨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발소리가 와니의 방문 앞에까지 오다 잠시 멈춘다. 가만히 누워 긴장된 얼굴로 온통 그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와니. 문 바깥쪽의 영민도 조용히 와니의 방문 앞에 서있는 듯하다. 잠시 동안, 정적……. 잠시 후 이어지는 발소리, 점점 와니의 방에서 멀어져 간다. 한숨과 함께 눈을 조용히 감는 와니. 그 때 비트가 강한 커다란 음악 소리가 터져 나온다. 반짝 눈을 뜨는 와니.
씬 60. EXT. 와니집 외경. 새벽 (과거)
커다란 음악 소리는 영민의 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고 창가에 서서 밖을 보고 있는 영민이 보인다. 화면 더 커지면, 동네가 시끄럽도록 울리는 음악소리에 이웃집의 불이 하나 둘 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