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지은이:벌마로(김윤식)
그러던 어느 날 조금은 단조로운 생활패턴에 변화가 필요했던 영우에게 운명처럼
한 남자가 나타났다. 이름은 영머다. 영머와의 만남은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
바쁜 하루를 보내고 퇴근길에 부천역 근처에서 영머를 만나서 데이트를 즐기고
편한 마음으로 집에 가는 패턴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부천역에서 영우네 집까지 가는 버스가 늦은 시각까지 있어서 걱정 없이 영머와 데이트를 즐길 수 있어서 마음이 편했고, 영머의 자유로운 영혼이 부담스럽지 않아서 좋았다. 잦은 만남은 서로에게 정을 들게 만들었고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세상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지만, 이번에는 왠지 운명이 이 남자에게 이끌고 있음을 그녀는 직감하고 있었다. 이전에 남자를 사귈 땐 항상 수동적이던 영우였지만 이번엔 이 남자가 가진 뭔가가 그녀를 이끌었다. 그래서 영우가
만나자는 연락을 하고 데이트 비용은 영우의 지갑에서 나왔다. 당연히 두둑한 주머니 사정이 뒷받침 돼 주었기에 가능했다. 이 남자에게서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
이전의 그것과 다르게 이상하리만치 빨려 들어갔다.
영머와의 연애는 급속도로 발전했고 이심전심 결혼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단지 영머가 자신보다 한살이 어린것과 아직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미 빼앗겨 버린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다.
농사로 부농을 이룬 영우의 아버지는 요 근래 전혀 새로운 사업을 하시게 되었는데, 땅을 매입해서 주택을 짓고 분양을 하는 건축업이다. 그동안 경리 직원을 고용하여 회사를 운영 하셨는데, 그 직원이 행정착오를 일으켜 금전적으로 많은 손해를 입게 되었다. 직원을 내보내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직원을 물색하던 아버지가 영우에게 의중을 물었다. 영우는 그동안 직장을 다니면서 여러 사무기법을 익히고 터득했던 터라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권유에 영우도 아버지 일을 돕겠다고 하였다. 영우가 그런 결정을 쉽게 하게 된 동기는, 그동안 부평까지 먼 거리를 새벽에 출근하고 밤늦게야 돌아오는 생활이 반복되면서 몸이 지쳐가고 있었다. 그나마 우울할 때마다 찾았던 부평시내의 거리는 연애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싫어졌고, 거리에서 마주치는 낯익은 인연들이 부담스러웠다. 점점 생각이 확장되면서 부평의 거리에 흥미를 잃었다. 한 곳에서 싫증을 느끼기 시작하자 다른 곳도 연이어 도미노처럼 무너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회사일도 지루하고 하루의 시간이 길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돕기 위해 마음의 결정을 내린 영우가 그해 12월 회사를
그만두었다. 출근 마지막 날, 회사 일을 마무리하고 퇴근 후 회사동료들이 베풀어
준 송별회 식사자리에서 영우가 눈물을 보였다. 회사에서 일하며 동고동락을 함께 했던 동료들과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고 흐르는 세월의 부피만큼 깊게 쌓였던 많은 이야기들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게 영우는 정들었던 직장에서 일을 그만 두었고 방전이 돼서 지친 심신을 충전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영머가 입대하는 2월까지 쉬기로 했다. 그녀는 하루가
멀다하고 영머와 데이트를 했고 추억을 만들었다. 몹시도 추웠던 2월의 어느 날
영머는 군에 가고 영우는 또다시 혼자가 됐다.
영우가 아버지 회사에서 하는 일은 생각보다 범위가 넓었다. 모래 철근 시멘트
벽돌 목재 따위의 건축자재를 구매하고 대금을 지불하는 일, 인부들 임금 계산해서 지급하는 일, 세금 계산해서 세무서에 납부하는 일, 거의 모든 사무업무를 도맡아서 해야 했다. 그 많은 일들 중에서도 인부들 관리가 가장 어려웠는데, 인부들은 월급을 타고 나면 그 다음 날은 예고도 없이 결근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크게 급한 일이 없으면 상관없는데, 다음날 급하게 일을 진행해야 하는 경우에 핵심 인부들이 전부 출근을 하지 않을 때는 도리가 없었다.
영우가 고심 끝에 아이디어를 냈다. 그것은 월급 다음날 필요인원한테 일당의 한배 반의 급여를 지급하는 거였다. 그것은 의외로 효과가 있었고 커다란 고민거리가 사라졌다. 영우의 경영능력이 탁월해서인지 아니면 운이 좋아서인지는 몰라도
아버지 주택사업은 날로 번창하였다. 집을 짓기가 무섭게 팔렸고 수익금은 계산도 하기 벅차게 불어났다.
한동안 아버지 하시는 일이 너무 바빠서 일에 파묻혀 지내다 보니 다른 곳에는
관심을 가질 겨를도 없이 반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짬을 내어 생활에 여유를 찾고 번잡한 마음도 달래 보려는 요량으로 그전에 다니던 회사의 동료 직원들을 만나기로 마음먹고 미스 김 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에 영우의 전화를 받은
미스 김 언니의 반가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호들갑스럽게 들렸다. 미스 김
언니는 변함없이 에너지가 넘친다.
영우의 기억에 미스 김 언니는 모든 일을 자신이 주도적으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었다. 예전에 회사에서 함께 일할 때도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운 일도 똑
부러지게 해냈었다. 퇴근 후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하고 놀지를 결정할 때도
언제나 주저함이나 거침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여직원들은 그저 언니가 하자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별 무리가 없었고 즐겁고 신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스 김 언니와 만날 약속을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스스로를 더듬어 봤다.
영우자신은 심심한 것과 외로운 것은 구분을 잘 못하는 것 같았다. 물론 외로움이나 심심함이나 구분을 짓는다는 것도 무의미하지만 무엇이 됐든 그녀에게 누군가는 늘 옆에 있어줘야 마음이 편하다는 걸 영우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심심함이든 외로움이든 상관없이 미스 김 언니를 만나러 간다. 무언가 신나는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대감에 부푼 채,,,
들뜬 기분으로 버스에 오른 영우는 예전에 부평의 거리를 그려 보면서 창밖을 바라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길을 매일 지나던 곳이다. 거리의 가로수, 도로변 상점의 간판, 모든 것이 그대로다. 생각해 보면 회사를 그만둔 지 몇 달 밖에 않됐으니 눈에 띄게 바뀔 것이 있겠냐마는 그래도 아주 오래된 기억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거리의 풍경이 새롭게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얼마 전까지 영우가 다니던 회사 담장이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지난날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곳이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열정을 다해 일을 했었고 사연도 많았었다. 천천히 길을 걸었고 회사 정문이 눈앞에 가까워질수록 지난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기억은 이상하게도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 영우의 머리를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짧았던 날들이지만 이곳에서 일을 하며 겪었던
희로애락이 영우의 몸속 세포에 스며들어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영우는 그런 기억들을 한꺼번에 되살려 내고 있는 것이다.
예전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변함없이 회사를 잘 다니고 있었고 가장 친하게 지내던 미스 김 언니가 반가운 표정으로 맞아 주었다.
평소와 다르게 유난히 반기는 걸 보니, 미스 김 언니도 그동안 쌓였던 많은 이야기가 있어 보였다.
미스 김 언니는 자신이 처한 지금의 답답한 이야기를 영우를 보자마자 풀어놓았다. 사귀던 애인이 군에서 제대를 몇 달 앞둔 시점에 미스 김 언니네 어머님이 점을 봤나 보다. 그런데 충격적인 점괘를 듣고는 집안이 어수선해진 모양인데, 내용인즉 그 사람과 결혼을 하면 둘 중에 한 명은 죽는다는 것이다. 남녀의 결혼문제를 점집에 가서 상담하는 것도 문제지만 점괘를 그대로 믿고 사랑하는 두 사람의 사이를 혼란에 빠트리게 하는 어머니도 생각이 없으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게 몇 달을 어머니와 갈등을 빚어 온 미스 김 언니가 원치 않는 이별을 심각하게 고민 중이란다.
현재 애인은 군복무를 마치고 못다 한 대학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란다. 언니는
이별통보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인데 어머니의 반대가 너무 강하고 나쁜 이야기를 자주 듣다 보니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흔들려서 괴로워하며 하루하루 지내고 있단다.
미스 김 언니한테서 처음으로 갈등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았다. 영우가 기억하는 미스 김 언니의 예전 모습은 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고 활달했었다. 이처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낯설게만 보였다. 사랑하는 마음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갈등을 겪고 고민하는 것은 언니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자신도 일년 전 무속인 말에 이별을 해야 했던 경험이 있었지만 언니에게 위로가 될만한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영우는 언니가 눈치채지 못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들은 오랜만에 예전에 자주 가서 놀던 부평의 돌고래 고고장을 가기로 하고
부평의 거리로 나섰다. 동료들은 마냥 좋아서, 길을 걷는 동안에도 입을 가만 두지 않고 재잘거렸다.
영우의 눈에 들어온 부평 번화가는 그전에 놀던 거리 그대로다. 비슷한 또래의
청춘들도 거리에 가득했다. 길모퉁이 진선미 음악다방도 그 자리에 그대로 지키고 있었고 문밖으로 흘러나오는 음악도 정겹게 들렸다. 작은 주점들, 포장마차, 옷가게, 길가의 액세서리 노점, 어느 것 하나 변한 게 없이 옛 향기를 품은 채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영우가 다시 찾아오면 낯설어할까 봐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의 눈에 모든 풍경이 반가웠다. 단지 변한 게 있다면 영우자신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사연과 아픔이 있었고 몸과 마음이 성숙해 버렸다.
“어쩜 그전 그대로네”
“그렇지 않아 네가 없으니까 거리가 갑자기 썰렁해진 기분이야”
“아이, 무슨 내가 없다고 그래, 언니만 그렇게 느끼는 거겠지”
“나만 그런가?”
미스 김은 영우의 말에 호응하며 동료들을 이끌었다. 먼저 약간의 알코올과 허전한 배를 채우기로 하고 근처의 자주 가던 학사 주점으로 향했다. 영우의 눈에 들어온 주점의 낯익은 분위기가 정겨웠다. 달랑 네 개 밖에 없는 테이블, 벽에는 낚서 투성이, 묵뚝뚝한 듯 하면서도 아낌없이 주는 아저씨, 여기도 예전모습 그대로이다. 그래봤자 1년도 안 지난 시간인데, 영우는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고 그래서 많은 시간이 흘렀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주점에서 알코올로 입술을 적신 그녀들은 고고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랜만에 찾아간 돌고래 고고장 역시 변함없이 기분을 들뜨게 한다. 그래서 좋다. 디스코 팝송을 멋지게 부르는 여자가수의 흥겨운 노래, 엄청난 크기의 스피커에서 내뿜는 사운드,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청춘들, 모든 것이 흥겨웠다. 그녀들은 무대 앞으로 몰려 나갔고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그녀들이 빙 둘러서서 마주보며 춤을 추는 틈 사이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종규오빠다. 깜짝 놀란 영우에게 다가와 귀에 대고 뭐라고 하는데, 귀청을 때리는 음악소리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일행은 대화를 하기 위해 그녀들이
잡은 테이블로 옮겼다. 종규는 그녀들이 입장할 때부터 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들 테이블로 종규 혜철 광준 이렇게 세 명의 남자들이 합석했다. 반가웠다. 그들을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재가 될 때까지
젊음을 불태우려는 듯 음악이 바뀔 때마다 부르스와 디스코를 번갈아 추면서 유흥을 즐겼다. 거의 탈진되기 일보 직전까지 춤을 추며 흥겨워하던 일행은 계획했던 시간보다 일찍 밖으로 나와 종규의 자취방으로 장소를 옮겼다.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금세 방바닥에 술자리가 펼쳐졌고 각자 쌓였던 많은 이야기보따리가 펼쳐졌다. 미스 김 언니의 연애이야기를 남자들도 살짝 알고 있었던 모양인지 현재 연애진행 상황을 물었고 언니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작은 미스 김도 애인이 생겨서 열애 중이고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오히려 남자들은 아무도 애인이 없었단다. 게다가 광준은 사귀던 애인과 안타깝게도 헤어졌단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음악다방 디제이들은 애인을 사귈 수 있는 조건이 풍부한데도 불구하고 외로운 경우가 많았다. 음악하고 기타 잘 치고
목소리 좋고 여자들에게는 한 번쯤 사귀어 보고 싶은 대상1순위인데도 불구하고
늘 외로워했다.
자신의 신상에 대해 머뭇거리던 미스 김 언니는 결혼이 심각한 고민거리라는 말을 했고 그들 중에서는 영우만 안정적으로 마음이 가벼웠다. 남자들은 결혼에 대한 개념이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장난치고 웃고 떠드는 모습이 심각한 고민거리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영우의 입장에서 보면 두세 살 더 먹은 오빠뻘 들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친구이거나 때로는 동생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우는 풍부한 연애 경험과 이별의 아픔을 겪으며 여자로서 정신적
성숙함을 키웠던 거다. 그녀는 몇 년 전 영우가 아니다. 사랑과 이별을 경험했던
조금은 성숙한 여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순수 그 자체의 모습은 아니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