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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현
2007-11-16 17:57:55
동쪽으로 음죽현(陰竹縣)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 충청도(忠淸道) 진천현(鎭川縣) 경계까지 26리이며, 서쪽으로 안성군(安城郡) 경계까지 23리이고, 북쪽으로 양지현(陽智縣) 경계까지 49리이며, 서울까지 1백 7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개차산군(皆次山郡)인데, 신라에서 고쳐 개산(介山)으로 일컬었다. 고려 초년에 죽주(竹州)로 고치었고, 성종(成宗)이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이 폐하였다. 현종(顯宗) 9년에 광주(廣州)에 붙였으며,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현감으로 만들었다. 무릇 군(郡)과 현(縣)의 이름이 주(州) 자(字)를 가진 것은, 도호부 이하는 모두 산(山)과 천(川)의 글자로 대신하여 부(府)ㆍ목(牧)과 구별하였다. 뒤의 것은 이것과 같다. 세종 16년에 충청도로부터 옮겨 경기(京畿)에 예속시켰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개차산(皆次山)ㆍ개산(介山)ㆍ음평(陰平)ㆍ연창(延昌)ㆍ죽주(竹州).
【성씨】본현(本縣) 최(崔)ㆍ안(安)ㆍ양(梁)ㆍ이(李)ㆍ유(庾)ㆍ민(閔)ㆍ김(金)ㆍ박(朴)ㆍ음(陰).
【산천】 건지산(巾之山) 현 북쪽 40리 지점에 있다. 정배산(鼎陪山)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 돌을 이고 있는데, 그 돌 구멍에 흰 뱀이 있어 매년 큰 물이 질 때를 타서, 천민천(天民川)에 내려와 사람과 가축의 우환이 되었다. 칠현산(七賢山)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구봉산(九峯山) 현 서쪽 22리 지점에 있다. 비봉산(飛鳳山) 현 북쪽 4리 되는 곳에 있다. 생현(栍峴) 현 동쪽 15리 지점이며, 이천부(利川府) 경계에 있다. 천민천(天民川)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근원이 건지(巾之)ㆍ정배(鼎培) 두 산에서 나와, 여주(驪州) 여강(驪江)으로 들어간다. 대사천(大寺川) 현 남쪽 1리 되는 곳에 있다. 근원이 칠현(七賢)ㆍ구봉(九峯) 두 산에서 나와 천민천(天民川)과 합한다. 월라정지(月羅井池)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토산】 자기(磁器)ㆍ도기(陶器).
【봉수】 건지산(巾之山) 봉수(烽燧) 동쪽으로 충청도 충주(忠州) 망이산(望夷山)에 응하고, 서쪽은 용인현(龍仁縣) 보개산(寶蓋山)에 응한다.
【누정】 봉서루(鳳棲樓) 각사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현 서쪽 3리 지점에 있다.
【역원】 분행역(分行驛) 현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 고려 김황원(金黃元)이 대간(大諫)이 되어서 여러 번 일을 말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 성산(星山) 원으로 나가는데, 길이 이 역말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이재(李載)가 남방으로부터 돌아오자, 이에 시를 지어 주기를, “나뉘어 가는 길 위에서인들 어찌 시가 없을쏜가. 머물러 사신에게 주어서 생각하는 것을 부치노라. 갈대 잎은 쓸쓸하니 가을 물 나라요, 강산(江山)은 아득하고 머니 석양 때로다. 옛 사람을 볼 수가 없으니 이제 부질없이 탄식하네. 지난 일을 좇기가 어려우니 다만 스스로 슬퍼하노라. 참으로 그렇구나. 죄를 당하여 장사(長沙)로 귀양가는 손이, 관직은 낮고 나이는 늙어 귀밑털이 세었도다.” 하였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누른 진흙 벽(壁) 뒤에 옛날의 시(詩)를 남겼더니, 뭉개어서 자취가 없어서 기억할 수 없네. 수양버들은 아직도 일찍이 가던 길에 늘어져 있고, 강산은 오히려 옛날 놀던 때와 같구나. 젊은 미인은 어디 있는가. 부질없이 추억하네. 흰 머리로 두 번 오니 못내 슬프기만 하구나. 부절(符節)을 가지고 다른 해에 비록 이른다 하더라도, 누(樓)에 오를 만한 근력이 먼저 쇠할까 두렵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청사로 가려 놓은 한 수(首) 시를 읽어 파하고, 인간만사를 시험삼아 곰곰이 생각하네. 만일 후진(後進)이 선진(先進)을 따르는 것을 잊는다면, 모름지기 지금 때를 가지고 옛 때를 배우라. 관직이 승진되지 못하는 것을 어찌 족히 탄식하랴. 귀밑털이 쓸쓸한 것도 슬퍼할 것이 없네. 평생에 다만 하늘이 장차 무너뜨릴까 두려워하여, 초(楚) 나라 손이 미친 듯이 봉(鳳)의 덕이 쇠한 것을 노래하였네.” 하였다.
○ 고려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저물녘에 영곡봉(靈鵠峯) 앞 길을 지나서, 아침에는 분행루(分行樓) 위에 이르러 읊조리네. 꽃은 벌의 수염을 접하여 붉은 것을 반쯤 토하고, 버들은 꾀꼬리 나래를 감추어 푸른 것이 처음으로 깊도다. 한 툇마루의 봄빛은 무궁한 흥이요, 천리의 사신은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로다. 머리를 중원(中原)으로 돌이키매 사람은 보지 못하는데, 흰 구름은 땅에 나직하고 나무는 찝찝하도다.” 하였다. 좌찬역(佐贊驛) 현 북쪽 50리 지점에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성을 나온 것을 알괘라 몇 날인고, 길에 오르니 서늘한 하늘이 기쁘도다. 곤곤(袞袞)하게 세월이 빠르고 쓸쓸하게 풍우가 연하였도다. 공명(功名)은 말 등 위에서 수고로웠고, 돌아갈 뜻은 갈매기 옆에 떨어지네. 이미 부귀도 구할 수 없으니, 억지로 채찍을 잡는 것 말하지 말라.” 하였다. 태평원(太平院) 현 동쪽 5리 되는 곳에 있다. 보현원(普賢院)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통리원(通梨院) 현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장항원(獐項院) 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이원(梨院) 현 서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불우】 칠장사(七長寺) 칠현산(七賢山)에 있다.
○ 신우(辛禑) 9년에 왜적이 함부로 내지(內地)로 들어오므로, 충주 개천사(開天寺)에 감추어 둔 사적(史籍)을 여기에다 옮기었다.
○ 권근(權近)이 수찬(修撰) 배중원(裵仲員)을 보내어 사적을 포쇄(曝晒)하는 서(序)에, “본조가 바다 동쪽을 차지한 지 수백 년에, 처음에는 국사(國史)를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감추었는데, 대개 후세에 난리를 만나서 잃어버릴까 염려함이다. 가야산이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가장 멀고 험하며, 해인사가 가야산에 있어서는 가장 궁벽하고 깊이 막혔기 때문에, 국가에 비록 변이 있어도 난이 일찍이 미치지 않았으니, 조종(祖宗)의 염려가 심원(深遠)하였다. 근래에는 왜적을 제어함에 기율(紀律)을 잃어서, 깊이 들어와 주와 현을 도둑질하므로 가야가 거의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홍무(洪武) 기미년 가을에 그 사적을 선산(善山)의 득익사(得益寺)로 옮겼고, 신유년 가을에 조령(鳥嶺)을 넘어 북쪽으로 와서, 충주(忠州)의 개천사(開天寺)에 수운하였으며, 이번 계해년 여름에 왜적이 또 충주의 옆 고을에 침입하자, 7월에 또 개천사로부터 죽주(竹州)의 칠장사(七長寺)로 옮기었으니, 땅의 험하고 먼 것도 믿을 수 없다. 적이 감히 깊이 들어오는 것이 이와 같으니, 아, 이것으로 세상이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하였다. 비족사(飛足寺) 구봉산(九峯山)에 있다. 장광사(長光寺)ㆍ지통사(智通寺) 모두 비봉산(飛鳳山)에 있다. 응석사(凝石寺) 생현(栍峴) 서쪽에 있다. 고려 명종(明宗)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소향사(燒香使)로 이 절에 이르렀다. 절 중의 꿈에 태조(太祖)가 명종(明宗)에게 아홀(芽笏) 하나를 주고, 아울러 시를 주기를, “네게 한 아흘을 주노니, 법사(法師)가 모시어 떠나지 않으리라. 거년(居年)은 구구구(九九九)요, 향위(享位)는 칠칠이(七七二)이다.” 하였는데, 명종은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 뒤에 왕위에 올라 재위(在位)한 지 28년에 최충헌(崔忠獻)이 폐하게 되었으니, 그 응험(應驗)이 틀리지 않았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현 북쪽 3리 지점에 있다. 여단(厲壇) 현 북쪽에 있다.
【총묘】 박원형(朴元亨)의 묘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안규(安珪)의 묘 현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고적】죽주고성(竹州古城) 현 동쪽 5리 되는 태평원(太平院) 북쪽에 있다. 돌로 쌓았고 둘레가 3천 8백 74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고려 고종(高宗) 13년에 송문주(宋文冑)가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이 되었는데, 몽고가 죽주성에 이르러 항복을 권유하므로, 성중의 사졸이 나가 쳐서 쫓았다. 몽고가 다시 포(砲)로 성의 사변을 공격하자 성문이 곧 무너졌다. 성중에서도 또한 포를 가지고 마주 공격하자, 몽고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몽고는 또 사람의 기름을 준비하여 짚에 부어 불을 놓아 공격하므로, 성중의 사졸이 일시에 문을 열고 돌격하니, 죽은 몽고군이 이루 셀 수가 없었다. 몽고는 여러 방법으로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문주(文冑)가 구주(龜州)에 있을 때에는, 몽고의 성에 공격하는 술책을 익히 알았기 때문에, 그 계획을 먼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어서, 문득 군사들에게 고하기를, “오늘은 적이 반드시 아무 기계를 쓸 것이니, 우리는 마땅히 아무 기계를 준비하여 응해야 한다.” 하였다. 적이 이르러 과연 그 말과 같으니, 성중에서 모두 귀신이라고 일렀다. 만선사(萬善寺)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절은 푸른 풀에 싸이어 침침하고, 길은 푸른 덩굴 속에 들어가 깊숙하다. 골이 좁으니 한가한 구름이 모이고, 정원이 거칠으니 모진 불길이 침노한다. 새벽 바람에 목탁 소리 잦고, 저녁 달은 못 가운데 잠겼도다. 푸른 산아 잘 있거라, 벼슬을 그만두면 다시 찾아오련다.” 하였다. 연창관(延昌館) 함부림(咸傅霖)의 시에, “내가 편평하니 들이 넓은 것을 알겠고, 꽃이 떨어지니 봄이 깊은 것을 깨닫도다. 손의 길 연창관 소나무 바람이 내 꿈을 맑혀 준다.” 하였다. 봉업사(奉業寺) 비봉산(飛鳳山) 아래에 있다. 고려 때에 태조(太祖)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는데, 공민왕(恭愍王) 12년 2월에 거가(車駕)가 청주(淸州)를 떠나서, 이 절에 들러 진전(眞殿)에 참알(參謁)하였다. 지금은 석탑만 남아 있다.
【명환】고려 서원(徐遠) 정치한 공적이 있어 지금까지 칭송하고 사모한다. 송문주(宋文冑) 고성(古城)의 주(註)에 보라.
【인물】고려 박인량(朴寅亮) 문종(文宗) 때에 과거에 올랐다. 요(遼) 나라가 일찍이 압록강(鴨綠江)을 지나 경계를 범하려 하자, 문종이 사신을 보내어 중지하기를 청하였는데, 인량이 진정표(陳情表)를 짓기를, “넓은 하늘 밑이 임금의 땅 임금의 신하 아님이 없는데, 한 자 남짓한 땅을 무얼 반드시 내 영토니 내 다스림이니 하랴.”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문양(汶陽)의 옛 밭을 돌려주었으니, 피폐(疲弊)한 고을을 어루만져 편안히 한 것이요, 장사(長沙)의 졸(拙)한 소매를 돌리어서 융성한 때에 뛰고 춤추었다.” 하였는데, 요 나라 임금이 이 글을 보고 그 일을 중지하였다. 숙종(肅宗) 때에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고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박경인(朴景仁) 인량(寅亮)의 아들이다. 젊어서는 힘써 배워서 과거에 올랐고, 여러 번 옮겨 좌습유(左拾遺)가 되었는데, 언론이 강하고 곧아서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는 일이 없으니, 당시의 의논이 중하게 여기었다. 벼슬이 좌복야(左僕射)에 이르고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박경백(朴景伯) 경인(景仁)의 아우이다. 선종(宣宗) 때에 장원으로 과거에 뽑히어, 벼슬이 상서(尙書)에 이르렀다. 박경산(朴景山) 경백(景伯)의 아우이다. 예종(睿宗) 때에 과거 제이명(第二名)으로 뽑히어 벼슬이 대경(大卿)에 이르렀다. 박서(朴犀) 고종(高宗) 때 사람인데 구주성(龜州城)을 지켜 공이 있었다. 벼슬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구성(龜城) 편에 자세하다. 박효수(朴孝修) 본래 맑은 절조(節操)가 있었다. 여러 번 벼슬을 옮겨 대언(代言)에 이르렀다. 윤신걸(尹莘傑)을 대신하여 선비를 뽑았는데, 임금이 그 청백한 것을 아름답게 여겨, 은병(銀甁) 50개와 쌀 백 석을 하사하고, 학사연(學士宴)을 베풀게 하니, 효수(孝修)의 맑은 절조가 더욱 나타났다. 뒤에 연창군(延昌君)을 봉하였다. 박전지(朴全之) 나이 20살이 못 되어 과거에 올랐다.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 명사들과 교유하여, 고금ㆍ산천ㆍ풍토를 상론(商論)하기를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같이 하였다. 원 나라에서 정동성도사(征東省都事)를 제수하였는데, 돌아온 뒤에 충선왕(忠宣王)이 항상 좌우를 물리치고 전지와 더불어 정사를 꾀하고 의논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치어 정승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박원(朴遠) 전지(全之)의 아들이다. 숙종(肅宗) 때에 과거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쳐, 우부대언(右副代言)과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박정유(朴挺蕤) 성품이 너그럽고 넓었다. 숙종(肅宗) 때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이르고 시호는 충질(忠質)이다. 안전(安戩) 젊어서 과거에 올라 벼슬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고, 경상(慶尙)ㆍ충청(忠淸)ㆍ서북(西北) 삼도(三道)의 도지휘사(都指揮使)를 지냈다. 안한평(安漢平) 벼슬이 문하찬성사 연흥부원군(門下贊成事延興府院君)에 이르고 시호는 양량(襄良)이다. 안극인(安克仁) 한평(漢平)의 손자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중대광 우문관 대제학(重大匡右文館大提學)에 이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공민왕(恭愍王) 정비(定妃)의 아버지이다.본조 안숙로(安淑老) 극인(克仁)의 아들이다. 벼슬이 서북면(西北面)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에 이르렀다. 안등(安騰) 극인(克仁)의 손자이다. 벼슬이 도승지(都承旨)와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냈으며, 시호는 정경(貞景)이다. 안망지(安望之) 숙로(淑老)의 아들이다. 벼슬이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안맹담(安孟聃) 망지(望之)의 아들인데, 세종(世宗)의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장가들어 연창위(延昌尉)로 봉하였으며,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박원형(朴元亨) 과거에 오르고 좌익익대(左翼翊戴) 공신에 참여하고, 벼슬은 의정부 영의정 연성부원군(議政府領議政延城府院君)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고, 예종(睿宗)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안초(安超) 과거에 올라 벼슬이 형조 참판(刑曹叅判)에 이르렀다. 일찍이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마침 흉년이 들었으므로 마음껏 진휼하고 공급하여, 한 지방이 그 덕으로 온전히 살아났다.『신증』 박안성(朴安性) 원형(元亨)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안(靖安)이다.
【제영】 상마세월심(桑麻歲月深) 홍여방(洪汝方)의 시에, “산과 물은 구름과 연기가 늙었고, 뽕나무와 삼은 세월이 깊도다. 봄 노래와 나무하는 피리 모두가 태평한 마음이네.” 하였다. 계류안안심(溪流岸岸深) 최사로(崔士老)의 시에, “단비는 촌마다 족하고, 시내 흐름은 언덕마다 깊도다. 나는 것, 잠겨 있는 것, 움직이는 것, 심어져 있는 것 모두가 한결같이 봄 마음이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중종(中宗) 38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고, 선조(宣祖) 17년에 현(縣)으로 내렸다가 29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읍호 음평(陰平) 고려 성종(成宗)때에 정했다. 연창(延昌).
【관원】 도호부사(都護府使) 여주진 관병마 동첨절제사(驪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ㆍ수어후영장(守禦後營將)ㆍ토포사(討捕使)를 겸한다.
【영아】 수어후영(守禦後營) 인조(仁祖) 조에 후영(後營)을 여주에 세웠다가 후에 이 곳으로 옮겼다. 후에는 영장(營將)이 본부사(本府使)를 겸하였다. 군병(軍兵) 속읍(屬邑)은 죽산(竹山)ㆍ여주(驪州)ㆍ음죽(陰竹)ㆍ안성(安城)ㆍ양성(陽城)ㆍ양지(陽智)이다.
【방면】 부내일(府內一) 끝이 5리이다. 부내이(府內二) 끝이 10리이다. 서일도(西一道)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서이도(西二道)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서삼도(西三道)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원일도(遠一道) 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원삼도(遠三道)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근일도(近一道)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근삼도(近三道)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천남일도(川南一道)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천남이도(川南二道)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천북일도(川北一道)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천북이도(川北二道)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산동(山東) 동쪽으로 22리이다. 산서 서쪽으로 25리이다. 산내(山內) 남쪽으로 20리이다. 산외 서쪽으로 20리이다.
출처 : 김인선옹기꽃화분
글쓴이 : 용이예요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