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이 남긴 향기 / 최종호
아주 오랜만에 법정의 법문집 『일기일회』 를 꺼내 들었다. 그분이 쓴 글이나 관련 있는 책을 언젠가 다시 한 번 두루 읽어 보리라 마음먹은 바 있다. 의자에 앉아 서재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자꾸 선택해 달라고 하는 것 같아서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스님은 1992년 송광사 불임암을 떠나 17년 동안이나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지낸다. 화전민이 버리고 간 오두막에서 기거하며 촛불을 켜고 물을 길어다 밥을 지으며 생활한다. 맑은 가난 즉, 단순하고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고 실천한지라 남긴 향기를 새롭게 느껴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 책은 대중과 학인(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을 상대로 얘기한 내용을 글로 옮긴 것이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에서의 정기 법회(창건 법회), 여름과 겨울안거 결제와 해제일, 부처님 오신 날에 있었던 법문이 주를 이루지만 원불교 서울 청운회, 뉴욕 불광사, 청도군 운문사 초청 법회에서 들려준 귀한 말씀도 실려 있다. 불자를 상대하려면 교통이 불편한 그곳에서 나와야 하는데 번거롭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신도들과 시주한 분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길이라고 여겼단다.
그는 날씨가 궂은 날에도 지각하는 법이 없었다. 빗물이 많아지면 개울을 건너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기다리는 이들을 생각해서 그만큼 어스름 새벽에 길을 나섰던 것이다. 또,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길상사에서 머무르지 않고 돌아갔다고 한다. 거처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거리낌 없이 생활하려는 그분의 성정을 짐작할 수 있다. 길상사는 대원각이라는 요정의 터에 자리 잡았다. 주인이 법정 스님의 철학에 감화를 받아 시주해서 불교인들의 도량으로 거듭났는데, 지금의 형태를 갖추기까지 그분이 기여한 바가 크지만 이후, 운영에는 거리를 두었다고 한다.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말라. /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 남에게 이끌려 가지 않고, / 남을 이끄는 사람이 돼라.
<숫타니파타>의 ‘성인의 장’에서 그분이 가장 좋아했던 구절이다. 늦은 시각에도 거처로 돌아가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거리낌 없이 생활하는 그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2005년 10월 가을 정기 법회에서, 하루 일과를 묻는 질문에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예불하고 여섯 시에 차를 마신다. 오전에는 채소밭을 돌보고 이리저리 천천히 걷다가 글을 쓴다. 열두 시에 점심 공양하고 두 시까지 산책한다. 오후엔 좌선한 다음, 나뭇가지나 쌓인 낙엽을 치운다. 어둡기 전에 밥 먹고 일곱 시부터 아홉 시까지 촛불이나 등잔 밑에서 책을 읽거나 나가서 낙엽 지는 소리, 시냇물 흐르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라고 했다.
2008년 10월 가을 정기 법회에서는 250년 전, 장혼(張混)이라는 선비가 누린 맑은 복 여덟 가지를 소개하며 자신의 처지를 돌아본 얘기를 한다. 스승과 말벗이 될 수 있는 몇 권의 책, 입이 출출하거나 무료해지려고 할 때 개울물을 길어다 마시는 차, 삶에 탄력을 주는 음악, 일손을 기다리는 채소밭이 스님의 삶을 녹슬지 않게 받쳐 주는 맑은 복 네 가지다. 산중에서 혼자 지내면서도 나날이 새로울 수 있는 이유란다. 소욕지족(少慾知足)하며 간소하게 생활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2005년 8월 여름 안거 해제일, 자신에게 가장 보람되고 즐거웠던 시간을 꼽으라면, 아침저녁으로 개울물 소리를 들으며 묵묵히 앉아 있던 그 시간이라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귀를 맡기고 조용히 앉아 있을 때가 가장 기쁜 시간이란다. 한밤중에 깨어나서 시냇물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으면 더없이 마음이 평화롭고 정신이 투명해지는데 이를 선열위식(禪悅爲食)이라고 한다. 선의 기쁨으로 밥을 삼는다는 뜻이다. 자기 충전이자 순수한 자기 존재의 시간이므로 범인들도 그런 기회를 될 수 있으면 많이 누리라고 권한다.
간간히 밑줄이 그어져 있어 읽었다는 생각이 들지, 처음 대한 것처럼 내용이 새롭다. “그날이 그날인 것처럼 지내지 마십시오.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하시길 권합니다. 무가치한 일에 시간과 능력을 탕진하면 인생이 녹슬어 버립니다. 사람은 살아온 세월만큼 성숙해져야 합니다. 누구를 만날 때 시간을 살리고 있는지, 죽이고 있는지 안으로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은 이 봄날에 어떤 꽃을 피우고 있는지 한번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느슨하게 지내는 내게 죽비를 들고 크게 일침을 놓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