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허공에의 질주>를 보고
송하연
스물넷. 독립이라는 말이 제일 무서운 나이다. 아는 것 하나 없는데 주변에서 자꾸 달리라고 성화다. 요즘은 영화든 책이든 보고 나면 감상을 끄집어내기 전에 그냥 흘려버린다. 깊은 생각은 외면하는 쪽이 마음 편하다. 나는 내 감상도 모르겠고, 1970년대 미국의 급진 운동은 더 모르겠다. 부모 심정은 아득하기만 하고 자식의 입장에 대해서도 그닥 할 말이 없다. 발제문을 쓰자니 트럭에 탄 영화가 나와 대니를 남겨둔 채 혼자 떠난 느낌이었다. 너는 이제 네 자전거를 타고 너의 글을 적으라면서.
6개월마다 이름을 바꾸고 도망 다니는 가족이 있다. 숨어지내는 신세지만 결코 비굴하지 않은 부모님. 그 옆에서 매번 소리 나지 않는 건반판을 챙겨 도망가는 첫째 대니, 팬티 차림으로 집안을 누비는 둘째 해리. 영화는 가족과 함께 옮겨 다니는 생활이 인생의 전부인 대니에게 정착을 꿈꾸게 만드는 것들이 생겨나며 전개된다. 작중 그의 상황을 영화 도입부에 빗댈 수도 있을 것 같다. 홈에서 시작해 홈으로 돌아오는 야구 경기. 반전운동으로 FBI의 수배자가 된 부모 밑에서 대니와 해리는 부모와 한 팀이 되어 베이스캠프를 함께 떠돌아왔다. 그에게 돌아갈 홈은 곧 가족이다. 가족과 헤어질 수 없어 그는 대학도, 음악도, 첫사랑도 포기해야만 한다.
대니를 이 경기에 초대한 부모 아더와 애니는 1971년 네이팜탄 연구소를 폭파한 혐의로 쫓기고 있다. 이 부부의 서사는 1960·70년대 미국에서 활동했던 급진 좌파 조직 웨더 언더그라운드(웨더맨)와 이어진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웨더맨은 그에 맞서 시위하고 농성하며 미국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주장한 무장 급진 운동 조직이다. 조직 이름은 밥 딜런의 노래 〈Subterranean Homesick Blues〉의 가사에서 따왔다. “You don't need a weatherman to know which way the wind blows.” (바람이 어디로 부는지 아는 데 기상예보관은 필요 없다) 기존 제도권 해석 대신 민중이 직접 현실을 판단하고 행동하겠다는 선언 아래 학생들이 우르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는 그 시절 이야기는 내게 왠지 판타지처럼 들린다. 마음을 울리는 이 슬로건에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열광했을까?
일평생 조직으로 똘똘 뭉쳐 권력과 투쟁해 온 아버지는 가족의 정체가 발각될 위기 앞에서 이곳에 남겠다는 아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다 가르쳤잖아! 조직은 깨지면 약해져. 우린 조직이야!” 아더도 절박했을 것 같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들을 잊어간다. 신념으로 내일을 그리던 청년들은 어느덧 중년이 되어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킬 수 없는 ‘거짓 인생’을 살고 있다. 그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조직 아닌 조직을 만들며 그 시절의 신념과 결속을 잇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신념에 종속된 대니에게 부모의 삶은 짐이었다. 새롭게 생기는 소중한 것들에 가족만이 채웠던 자리도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미래를 꿈꾸게 만드는 음악, 그를 필요로 하는 여자친구 로나…. 부모의 이상은 더 이상 공유할 수 없는 무게가 되었다.
아더와 애니 역시, 오래전에는 부모의 기대를 깨고 자신의 길을 걸어간 청년들이었다. 특히 애니가 14년 만에 아버지와 재회한 장면은 배우들의 감정선이 끝내줬다. 눈가가 촉촉해졌는데도 어딘가 완고한 눈빛으로 물러서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 둘을 보면 부녀가 참 닮은 것 같다. 줄리아드 음대에 가고 싶어 하는 손주 대니를 맡아달라는 부탁에 아버지의 표정이 착잡해진다. “네가 이렇게 대니를 다시 네가 버렸던 인생으로 돌려보내려고 하다니. 그 애를 데리고 있으면 어딜 가나 FBI가 따라올 거다. 넌 두 번 다시 그 앨 못 만나.” 젊은 날 부모를 떠났던 청년들은 이제 부모가 되어 자식을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했다.
사실 대니의 독립은 제대로 준비할 틈도 없이 이루어진다. 옛 지인의 검거 소식으로 가족들이 줄줄이 꼬리 잡힐까 싶어 도망가려는 시점에 때마침 그가 경찰과 총격전 도중 사망했다는 속보가 나왔기 때문이다.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하고 온 후, 익숙한 듯 가족의 트럭에 올라타려는 대니에게 아더는 말한다. “자전거에 타! 넌 이제 독립한다. 줄리아드에 가거라. 우린 또 만날 수 있어. 우리 모두 널 사랑한다. 그러니 세상에 좋은 일 좀 해봐라. 엄마 아빠도 열심히 했으니까.”
트럭이 대니를 남겨두고 떠나는 장면을 보자니 나까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다. 두 딸 중 첫째인 나는 유독 재수가 없었다. 하필 아빠가 스스로 펄쩍 뛰는 역린과 엄마가 신경 쓰는 본인의 결함을 다 가지고 있어서 늘 요주의 인물이었다. 내가 무언가를 시작하려 하면 아빠가 진지하게 하는 말이 “니 할 수 있겠나?”다. 비아냥이 아니라 진심이다. 내가 혼자 버스도 못 타는 줄 알고 몇 년 동안 매일 아침 나를 차에 태워 대학까지 데려다줄 만큼. 집에 있는 책을 펼치면 엄마가 귀퉁이에 휘갈겨 쓴 나에 대한 한탄과 해석이 심심찮게 나온다. 어제는 빨리 집을 나가라고 했다가, 오늘은 임용치고 네가 다른 지역에서 살 수 있겠냐고 걱정한다. 차라리 엄마 친구 있는 부산으로 가라고. 이건 가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 오래 방황했던 내게 아더의 마지막 대사는 참 홀가분하게 들렸다. 사회복지와 인문학 서적이 빼곡한 집안에서 자란 나는 그 책들의 저자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지만, 그만큼 공부를 잘하지 못해서 스스로 실패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동생이 예쁘다는 말을 들을 때 혼자 동떨어지는 나를 보고 내가 예쁜 여자가 되어야 하나 생각했지만, 바라는 만큼 살을 빼지 못해서 또 좌절했다. 그러다 작년쯤 비로소 알게 됐다. 나는 그냥, 내가 나를 위해 기준을 세우고 무언가 할 때 행복하다. 그걸 혼자 깨우쳤을 때 느낀 설렘이 다시 올라왔다. 너는 이제 우리가 답해줄 수 없는 길로 가라. 우리도 그럴 테니. 트럭이 대니를 두고 떠나며 말하는 것 같다. 대니도, 아더와 애니도, 멈추지 않고 어디론가 향할 것이다. 이별하는데, 그리 슬프지는 않다. 종착지는 다르더라도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만의 길을 헤맬 것을 아니까.
첫댓글 새벽이라 내일 일어나자마자 단톡방에 발제문 공유하겠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벼르던 서류더미 하나를 해치우려고 했는데… 그만 이 글을 열어버리는 바람에…
읽고나서 눈물 줄줄 흘리고 한 한 시간 누워있다가 씻고나서 이제야 정신 차렸네요.
발제문 감사히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