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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감사 / 대상 29:10-19, 살후 2:16-3:5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이다. 한해 동안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를 드린다. 추수감사주일이 언제부터 생겨 났나? 엊그제 금요일 구역예배 공과에는 미국의 역사와 함께 350년간 전해져 내려온 미국의 전통적 축제라고 했다. 17세기 초 영국의 청교도들이 국교회에 의하여 무서운 박해를 받았다. 그래서 피난처를 찾는데 1) 교회는 있으되 법황이 없는 곳. 2) 나라는 있으되 왕이 없는 곳. 3)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곳. 4) 영어가 쓰이는 곳. 5) 땅이 비옥하고 시냇물이 맑게 흐르는 곳을 찾았다. 이곳이 바로 아메리카 대륙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배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첫농사를 지어 추수의 감격, 신앙의 자유에 댜한 감사 등 감사 감사하며 축제로 지낸 것이 최초의 추수감사절이었다. 후에 미국 법으로 11월 셋째주 목요일을 전국적으로 추수감사절로 지키도록 했다. 이 절기가 미국 선교사에 의해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11월 셋째주일에 추수감사절을 지키게 된 것이다. 그러면 추수감사절은 성서적인 배경은 없고, 미국의 축제일을 우리가 본따서 따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추수를 하면 꼭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드렸다. 그런데 하나의 절기로 지키게 된 것은 출애굽 이후의 일이다. 출 23:16절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34:22절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세말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출의 말씀처럼 수장절 곧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절기이다. 그러므로 기쁘고 즐겁게 지키는 것이 믿는 우리들의 도리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 본문인 대상 29장은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위해 백성들이 재물과 자재를 준비한 뒤, 다윗이 백성과 더불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말씀이다. 우리는 오늘 감사절을 지키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인 다윗의 기도를 살펴보겠다.
1.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역대상하는 한국 교회에서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이다. 사실 대상 1장부터 이어지는 족보는 지루하게 9장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모두 지루해 하며 책을 덮어버리게 된다. 역대상하는 내용적으로 사무엘서와 열왕기 때의 이스라엘과 유대 역사를 다시 써 놓은 것이다. 우리나라 성서에는 역대기를 역사서로 취급해서 열왕기 다음에 수록하고 있으나 히브리 성서에는 성문서로 분류되어 구약성서 맨 마지막에 실려 있다. 역대기가 히브리 성서의 맨 마지막에 실려 있는 것은 그 책이 그만큼 늦게 편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기원천 4백여 년경에 편집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때는 바벨론 포로지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서 스룹바벨 성전을 중심으로 율법공동체를 형성하던 시기였다. 이 무렵 이들 이스라엘 민족의 당면 과제는 이방문화에 시달리면서 어떻게 여호와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역대기를 쓴 역사가는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형성한 다윗 왕조의 역사를 재구성하면서 다윗을 이성적이고도 경건한 왕으로 묘사하여 흩어진 당대 사람들의 마음을 붙들 수 있는 신앙의 사표로 제시하고 있다.
대상 29장 처음에는 다윗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 위하여 백성들에게 건축헌금 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도 건축헌금하는 일은 다반사인만큼 그 자체가 새로운 일일 수는 없다. 역사적인 상황이야 어떻든 백성들은 즐거이 드렸고, 성심껏 여호와께 바쳤다고 본문은 진술한다. 예전 5,6공 시절, 청와대에서 재벌들에게 기부금을 거뒀더니 재벌들이 앞다투어 돈을 냈다는 사실이 후일 청문회에서 밝혀진 적이 있다. 권력을 가진 자가 요청하는 것을 거절할 수 없어서 내는 것은 자발적인 기부행위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니 다윗왕의 헌금강요도 강제적이었으며, 우리가 국가에 바치는 주민세나 교육세 같이 조세형식을 띠었을지도 모른다. 역대기 사가는 그같은 객관적인 사실 규명은 문제삼고 있지 않다. 그가 글을 쓰고 있을 때 다윗 왕조는 이미 역사에서 사라진 추억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그는 예배자로서의 다윗의 모습을 가급적 있는 그대로 재구성해서 당대의 귀감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다윗은 백성들이 자진해서 헌금을 바치는 것을 보고 감사기도를 드린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찬송으로 시작한다. 10절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그런 다음 기도는 현재 자신의 입장에 대한 반성을 통한 감사로 이어진다. 13-14절상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우리는 이 기도문 중에서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라는 대목을 주목해 봐야 한다. 다윗은 누구인가? 다윗은 이새의 8아들 중 막내였다. 그리고 그는 한낱 목동에 불과햇다. 그리고 한 때는 사울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곧 미움을 사게 되어 들판에 쫓기는 벼룩처럼 동가숙서가숙하는 신세가 되었다. 잠시 블레셋의 용병으로 있다가 사울이 죽은 다음 고향으로 돌아와 왕으로 추대받았지만 이스라엘 12지파 중 겨우 유다지파의 왕이 되었다. 그후 북왕국의 추종으로 명실공히 통일왕국의 왕이 되었으나 뜻하지 않은 자리 싸움으로 왕세자들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권력다툼이 이어졌고 걸국은 아들에게 쫓겨 맨발로 감람산을 탈출해 나오는 수모도 겪게 되었다.
다윗의 일생은 자기 주먹만 믿고 일평생 사는 갱의 삶과도 같았다. 그가 말년에 자기의 일생을 회고해 보며 이제 더 이상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될 예루살렘 성에 말뚝을 박고, 그곳에서 자기 아들 솔로몬과 그 후손이 대대로 왕이 되었으며, 또 여호와 하나님의 가호를 받을 수 있는 성전을 건립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사무엘서는 그의 왕위 선택을 이같이 표현하고 있다. 삼하 7:8절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그리거고 그가 다스리는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인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불쌍한 백성이었지만 용케 바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시내광야로 탈출해 왔으나 그곳에서 40여년 세월을 허송해야 했다. 그리고 팔레스틴에 발을 붙이는데는 성공했으나 뿌리를 내리는데는 200여년이란 긴 세월이 필요했다. 부족동맹체라는 명맥만 유지하며 사사시대에는 계속하여 주변 국가들에게 시련을 당했다. 사울이 시작한 미비한 나라를 다윗이 이제사 굳건히 나라의 틀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2.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다윗은 자신이 이제껏 걸어온 길을 회상해 보며 또 이스라엘이 어떻게 한 나라로 자리가 잡히게 되었는가를 생각할 때 감회가 넘쳐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가지 분명한 것은 다윗이 잘나서 또는 그 백성이 훌륭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이다. 1년 전에 TV 연예 프로그램에 어느 정치인이 출연하여 자신의 힘들었던 정치 여정을 얘기한 적이 있다. 그때 사회자가 ‘아 그러니까 지금 여기까지 오셨군요’라고 말하자 그는 ‘방숭국에서 불러 주었으니까 여기까지 왔지요’ 하고는 재치있게 받아 넘겨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신명기 역사가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정착해서 살게 된 것이 결코 이스라엘이 옳기 때문도 아니고 또 수가 많아서도 아님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사실 신명기의 역사는, 이스라엘은 목이 곧은 백성으로 여러 차례 하나님의 벌을 받았어야 할 족속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라는 찬송을 부를 수 있을만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땅에서 살 수 있었다.
다윗은 이제 그와 그의 백성이 하나님이 은총을 입어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일에 일익을 감당항 수 있게 된 것을 감사드린다. 다윗왕에 대한 평가가 여러모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만 고대 동방세계의 군주들이 모두 자신의 힘으로 나라를 세웠다고 장담하며 전공비를 세웠지만, 그래도 다윗은 모든 공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데서 역대기 사가는 그의 겸손한 미덕을 찾고 있다. 다윗왕 전까지는 이스라엘이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지만 그가 비로소 그 약한 나라를 팔레스틴 일대의 강한 제국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객관적인 역사가 입증하는 바이다. 물론 이같은 과정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희생자를 냈겠느냐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긴 하나 이스라엘의 역사상 황금시대를 맞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이것은 현재 중동의 이스라엘이 다윗 시대를 그들 역사의 전성기로 우러러보고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잇고, 이스라엘의 국기가 흰 바탕에 푸른 빛을 띤 다윗의 별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다윗의 속마음이야 어떻든 그는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모든 것이 하나님 덕분이라고 기도를 드리고 있다. 여기서 다윗의 속마음 운운하는 것은 이른바 비평가들이 지적하는 자신의 왕조 체계를 굳히기 위한 눈가림이 아니냐는 비판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역대기 사가는 그같은 축면을 초월해 다윗을 겸손한 예배자로 그리고 있다. 시 8편의 기자가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4-5)라고 기도드린 것 같이 다윗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귀, 영화, 권세 그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주셨음을 감사하는 것이다.
3.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다윗이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기도드린 것은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바쳤다는 뜻이 된다. 다윗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그것을 다시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이다. 다윗은 없는 것을 더보태어 과장되게, 하나님 앞에 자랑하기 위해 자신을 떠벌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인간이 어찌 하나님과 경쟁하겠나? 사실 선축헌금을 할 때 자신의 분수에 넘게 헌금하는 이들은 하나님보다는 교회안의 다른 사랍들을 더 의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자신이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의도가 있는지도 모른다. 디윗이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말했을 때 재산상으로는 빈손이 된다. 욥의 말대로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을 짓는 중차대한 대역사를 계획하면서 그 자금과 재료 조달을 위해 백성들이 성금을 바친 것에 감격하여 다윗이 한 말 곧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다는 말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주께 속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서 버는 돈이나 모아 두는 저금도 사실은 모두 주님이 주시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이런 면에서 불로소득으로 얻은 이익은 그야말로 검은 돈이 될 것이며, 국가경제가 이같은 지하경제에 좌우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빌리그래함의 부흥집회 때의 18번이라 할 수 있는 대표적 찬송은 282장 ‘큰 죄에 빠진 날 위해 주 보혈 흘려주시고 또 나를 오라 하시니 주께로 거저 갑니다’이다. 저도 고교 시절 빌리그래함 전도집회 때 연합성가대의 일원으로 참석했는데 결신자들이 앞에 나올 때 이 찬송을 계속 부르던 기억이 난다. 이 찬송의 영어 가사의 첫 구절은 ‘Just as I am without one plea’이다. 우리 말로 해석하면 ‘아무런 변명없이 나 있는 그대로’가 될 것이다. 우리말 찬송가 가사에는 그 원래의 의미가 잘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이 노래를 지은 엘리오트 여사는 반신불구로 고생하며 영적인 방황을 하다가 대리 사제인 아버지를 찾아온 어느 전도자와 그리스도에게로 나가는 문제를 의논하다 ‘당신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가십시오’라는 그분의 말에 감명을 받고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감사절에 우리는 다윗처럼 있는 그대로를 감사드리자. 우리는 흥부처럼 죽기 전에 쌀밥과 고깃국을 실컷 먹어 보았으면, 또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같은 미녀와 연애를 한번 해 보았으면, 또는 알렉산더처럼 세상을 한번 호령해 보았으면, 아니면 99간짜리 집에 한번 살아보았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을 가끔 한다. 우리의 욕심은 끝이 없다. 내가 갖고 싶은 것, 내가 해보고 싶은 것, 그것이 채워진 다음에야 하나님을 생각하고 세상을 생각한다면 그때는 너무나 늦다. 감사절은 우리 있는 모습 그대로를 주님께 바치며 감사해야 할 것을 요청하는 때이다. 우리는 다윗의 단순한 기도가 곧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래야 한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1996-0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