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인 바디매오의 신앙 / 렘 31:7-9, 막 10:46-52
우리나라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의 축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 정도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까 지금은 건강에 가장 큰 관심을 쏟고 있다. 너도 나도 몸에 좋다는 것은 해외에서까지 구해다 먹는 볼썽 사나운 모습도 보인다. 운동과 오락에 관련된 산업이 번창한다. 이는 부요와 건강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조건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본문에는 건강하지도 못하고 부요하지도 못한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맹인 거지 바디매오이다. 그는 시력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경제력도 없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볼 때 그는 불행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실상은 불행하지 않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마침내 구원에 도달하는 기적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이 시간 살펴볼 내용은 맹인 바디매오가 어떻게 불행을 극복하고 구원의 기적을 체험하는 자리에 이를 수 있었나 하는 점이다.
1. 맹인 바디매오는 구세주를 기대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변화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무수히 많이 언급되어 있다. 그런대 그들이 다 변화되지는 않았다. 주님을 만나고도 여전히 좌 가운데 있는 이들이 있고, 반면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운명과 삶의 근원을 뒤바꾸는 사람이 있다. 무슨 차이인가? 변화된 사람들의 경우 그들은 예수님을 만날 때 호기심과 더불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에수께 어떤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은 큰 의미없이 무리 틈에 끼어 주님을 만났던 사람들과 큰 차이를 드러내었다. 예수께서는 고향 마을인 나사렛에서는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아마도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께서 같은 고향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분을 너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 목공일을 하면서 성장한 청년 예수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목수 이상의 존재로 보지 못하는 그들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예수님의 역사하심을 가로막는 요인이었음에 틀림없다. 기대가 없으므로 예수께서는 아무 기적도 행하지 않으셨다.
지난 시대의 청교도들은 토요일날 설레이는 마음으로 주일을 기다렸다고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린다는 것은 그들의 삶에서 최고의 환희였다. 그들은 주일을 기다리고 준비하였다가 주일날 아침에 자녀들과 함께 교회에 나감으로써 살아있는 신앙교육을 하였다. 예배에서 진정한 축복을 경험하려면 ‘예배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사실보다는 ‘예배에 어떤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참석하느냐’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대하며 교회에 출석하는가? 생명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일을 맞기를 바란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에 대해 많은 정보를 입수해 놓은 듯하다. 그는 예수께 특별한 기대를 걸고 나아왔다. 47절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그는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외쳤다. 나사렛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주 하찮은 도시로 여기는 마을이다. 유대인들끼리도 나사렛 사람들이라면 대단히 깔보았다. 요 1:46절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는 이 천대받는 나사렛 사람이셨다. ‘나사렛 사람’이란 말은 다분히 조롱하는 어투가 들어간 말이다. 그런데 맹인 바디매오는 주님을 ‘나사렛 에수’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아는 대로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소위 메시야 호칭이다. 구약시대부터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 예언되어 있었다. 바디매오에게는 그분은 평범한 교사나 인간이 아니라 다윗의 후손으로서 우리의 운명과 문제를 해결할 구세주일 것이다라는 구세주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마디매오는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평범한 정보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성서의 계시에 따라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구주로 확신하는가?
하나님을 만남으로 삶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좋은 비결은 ‘마지막 의식’을 갖는 것이다. 바디매오가 주께 바라는 기대는 마지막 기대이다.
그가 이렇게 간절하게 주님을 기대할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주변 환경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어 주를 찾게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맹인인데다 거지였기 때문에 더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불행한 환경을 반드시 불행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건강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건강이 저주이다. 부요하고 똑똑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없다고 느낀다면, 그 똑똑함과 부가 저주이다. 자신의 불행한 조건이 예수님을 찾게 했다면 그 불행은 오히려 축복의 요인이다. 자신의 궁핍한 처지를 깨달아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분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로에 축구 황제 펠레를 기념하는 축구장이 있다. 펠레 축구장이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한복판에 산이 있고 그 산 꼭대기에 ‘그리스도의 상’이라는 유명한 예수님의 상이 있다. 그런데 상을 쳐다보는데 아무리 고개를 들고 봐도 전체가 다 보이지 않는다. 그때 안내원이 관광객들에게 무릎을 꿇고 위를 올려다보라고 안내한다. 무릎을 꿇고 보면 예수님 상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어쩌면 주님은 무릎을 꿇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분일지 모른다. 나의 부족함을 절실하게 깨닫고 겸손하게 주 앞에 엎드릴 때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바디매오처럼 구세주를 간절히 열망할 때 삶 가운데 변화가 일어난다. 예수님을 구주로 기대할 때 생동감 있는 믿음을 소유할 수 있다.
2. 맹인 바디매오는 세상의 비웃음을 극복했다.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했을 때 무리들이 어떤 반응을 나타냈는지 48절을 보자.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신앙생활을 할 때 세상 사람들의 박수 갈채를 기대하지 마라. 세상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신앙의 결단은 고독하다. 기독교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결단을 가리켜 ‘이 일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외톨이의 결단’이라고 말했다. 그 결단에는 아무런 동조자도 없다. 당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도 신앙의 길에는 동반자가 아니라 적이 되어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신앙의 결단은 언제나 고독한 결단이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당신만의 결단이다. 신앙은 주님 앞에서 각 개인이 고백해야 할 문제이다. 세상이 무슨 말을 하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든 상관없이 흔들림 없는 신앙을 소유해야 한다. 바디매오를 보라. 그는 사람들이 뭐라 하든 개의치 않고 예수님을 불렀다. 전보다 더욱 크게 소리쳤다. 사람들이 그를 말렸을 때 잠잠했다면 그는 자신의 불행을 그대로 안은 채 일생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는 자세로 더욱 열심으로 신앙에 대한 해답을 추구했다.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극복한 것이 그의 삶에 놀라운 기적을 선사했다.
3. 맹인 바디매오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구했다.
바디매오가 애타게 주님을 불렀을 때 자비로운 예수께서 그를 돌아보셨다. 그리고 그에게 물으셨다. 51절상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때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나 그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를 주께 아뢰었다. 51절하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보기를 원하나이다.’
서양 속담에 ‘차선은 최선이 적이다’라는 말이 있다. 좋은 일이 가장 좋은 일의 가능성을 없애는 경우가 있다는 뜻이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우선순위의 혼란에 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이고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하는지, 기준을 잡지 못하고 있다. 가치관의 상실로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하찮은 일에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결국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 숙제로 계속 남게 된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다른 일을 포기하는 희생까지 감수해야 한다.
바디매오는 눈을 뜨고자 하는 중대한 소원 앞에 다른 것은 과감히 내어버리는 용기를 발휘했다. 50절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바디매오는 가장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겉옷을 버리고 예수께 뛰어갔다. 겉옷을 내어버린 일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거든 바디매오가 거지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어쩌면 이 겉옷은 그의 전재산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자기의 전재산을 버리고 더 귀한 일을 선택했다. 바디매오는 구할 것을 구했다. 가장 중요한 것을 구했다. 결국 눈을 뜨게 되는 기적으로 바디매오의 소원이 이루어 졌다. 본문에서 제일 중요한 메시지는 바디메오가 눈을 뜬 다음에 한 행동에 나타나 있다. 5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그는 길에서 예수님을 따랐다. 만일 맹인이던 당신이 눈을 떴다면 무슨 일부터 하겠는가? 바디매오도 눈을 뜨면 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시력을 회복하자마자 예수님을 따랐다. 바디매오가 눈을 뜨고 처음 본 사람은 예수님이었을 것이다. 자기를 고쳐준 예수님을 평생을 따라야 할 분으로 첫눈에 알아본 바디매오의 신앙이 놀랍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세주를 바라보는 신앙의 눈을 가졌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바디매오와 같이 생애를 걸고 따라야 할 분으로 예수님을 섬기고 있는가? 신앙이란 예수님을 따라서 사는 것이다. 주께서 내 삶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며 바디매오처럼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라. 이것이 당신의 삶을 바꿔 놓을 위대한 기적의 출발이다. (1995-0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