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와 유성객사
유성구 구암동에 유성현터가 있다.
현터에는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들이 묵어가는 객사가 있었다.
지금은 헐려서 볼 수 없지만 이 객사는 조선시대 어사로 명성을 떨쳤던 박문수와 인연이 깊었던 곳이다.
박문수가 과거에 급제한 것은 그의 나이 33세가 되던 해였다.
경종 3년(1723) 증광병과에 급제한 뒤에 설서(說書), 검열(檢閱), 기사관(記事官)등 내직을 주로 맡았다.
박문수는 매우 총명하고 명철하여 영조의 신임을 독차지하였다.
그는 병조정랑 사서(司書)로 있을 때 청주에서 일어난 이인좌의 난에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 결과로 영조는 1727년 박문수를 영남 감진어사(監賑御史)로 내보내었다.
감진어사란 진휼(賑恤)을 감독하는 어사를 말한다.
즉 흉년에 굶주리는 백성을 구하는 일을 감독하기 위하여 파견하는 어사를 말하는 것이다.
그 결과 영남 감진어사로 제수받은 박문수는 길을 재촉하였다.
박문수는 천안 유구 공주 노성을 거쳐 연산, 진산, 금산, 무주로 해서 대구에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박문수가 공주에 도착하자 생각이 바뀌었다.
(조상의 산소가 가까운데 그냥 지나갈 수는 없지 않은가?)
박문수는 공주에서 노성으로 가던 발길을 유성으로 돌렸다.
유성에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묘가 있었던 것이다.
박문수는 해가 다 저물어서야 유성에 도착하였다.
우선 유성객사 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선영에 가서 성묘을 한 다음 노성으로 갈 계획이었다.
유성 현감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저녁밥을 먹고 담소를 나누다가 이제 잠을 자게 되었다.
그런데 유성 현감은 박문수를 객사에 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거처하는 사랑채로 안내하려는 것이었다.
“어사님, 누추하지만 오늘밤은 제 집에서 주무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객사에서 자겠소.”
“객사가 좀……”
“객사가 어떻다는 말이요.”
“.....”
“무슨 말인지 말해보시오.”
현감은 한참동안 망설이다가 드디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객사에 묵는 관리들이 변을 당하는 일이 있어서…….”
“그게 무슨 말이요?”
현감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박문수가 다그치는 바람에 대답을 했다.
그에 의하면 무슨 연고인지는 모르지만 객사에서 잠을 자던 사람이 두 사람이나 죽어서 나왔다는 것이다.
박문수는 어사로서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현 감에게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일른 다음 객사로 들어갔다.
객사는 그동안 얼마나 사용하지 않았는지 스산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오늘 밤 자다가 무슨 일이 일어 날른지 모른다.
박문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담대하게 자리에 누웠다.
밤이 깊어갔다.
초경이 지나고 이제 삼경이 가까워졌다.
박문수는 잠을 자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어느새 졸음이 오고 있었다.
한참 잠이 들려고 하는데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박문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그 자리에 누운채로 눈을 살포시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촛불이 흔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미하게 움직이더니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마치 선녀가 춤을 추듯이 하느적 하느적 하는 것이었다.
(필시 무슨 일이 있으려는구나!)
박문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경계하는 마음을 늦추지 않았다.
그때였다.
천장이 순식간에 찢어지면서 남자의 다리 두 개가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 순간 박문수는 불끈 일어나 두 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끌어 않았던 두 다리는 간 곳이 없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박문수는 다시 마음을 안정시키며 둘러보니 천장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박문수는 이튿날 일어나자마자 현감을 시켜 천장 위를 살살이 뒤지게 하였다.
그 결과 천장에 올라갔던 아전이 커다란 돈자루를 들고 내려왔다.
오래된 엽전이 자루에 가득하게 들어 있었다.
어느 현감이 몰래 감추어 놓았던 것을 잊고 있었던 돈이었다.
그 돈이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니까 사람으로 둔갑하여 내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사실도 모르고 사람 다리를 보면 기절부터 하였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다시는 기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