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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다. 毎日、聖書を調べる。(2021년 11월 21일 주일예배)
본문: 사도행전 17:10~15
17: 10 ○신도들은 곧 바로 그날 밤으로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다. 두 사람은 거기에 이르러서, 유대 사람의 회당으로 들어갔다. 11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12 따라서, 그들 가운데서 믿게 된 사람이 많이 생겼다. 또 지체가 높은 그리스 여자들과 남자들 가운데서도 믿게 된 사람이 적지 않았다. 13 데살로니가의 유대사람들은, 바울이 베뢰아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알고서, 거기에도 가서, 무리를 선동하여 소동을 벌였다. 14 그 때에 신도들이 곧바로 바울을 바닷가로 떠나보냈다. 그러나 실라와 디모데는 거기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15 바울을 안내하는 사람들이 바울을 아테네까지 인도하였다. 그들은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가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그에게로 와야 한다는 지시를 받아 가지고, 베뢰아로 떠나갔다.
10. 兄弟たちは、直ちに夜のうちにパウロとシラスをベレアへ送り出した。二人はそこへ到着すると、ユダヤ人の会堂に入った。11. ここのユダヤ人たちは、テサロニケのユダヤ人よりも素直で、非常に熱心に御言葉を受け入れ、そのとおりかどうか、毎日、聖書を調べていた。12. そこで、そのうちの多くの人が信じ、ギリシア人の上流婦人や男たちも少なからず信仰に入った。13. ところが、テサロニケのユダヤ人たちは、ベレアでもパウロによって神の言葉が宣べ伝えられていることを知ると、そこへも押しかけて来て、群衆を扇動し騒がせた。14. それで、兄弟たちは直ちにパウロを送り出して、海岸の地方へ行かせたが、シラスとテモテはベレアに残った。15. パウロに付き添った人々は、彼をアテネまで連れて行った。そしてできるだけ早く来るようにという、シラスとテモテに対するパウロの指示を受けて帰って行ったた。
지난 한 주간도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았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 사랑과 은혜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예배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이 매사에 순조롭고, 큰 문제가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아울러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임에도 변함없이 일상생활이 허락되는 것은 더더욱 놀라운 은혜인 것을 믿습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데살로니가에서 있었던 소동과 소란의 중심에 있었던 바울처럼, 우리도 지금 세대의 시대정신을 소란하게 하는 복음의 주인공임을 확인하였습니다. 흘러가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힘찬 연어들과 같이 성도는 그릇된 세속의 가치관을 거슬러 오르는 용감한 존재들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주님께서 넘치게 붓고 계시는 은혜와 사랑을 다시금 회복하시는 기회를 붙드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바울의 전도여행을 안내하는 지도를 보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일 함께 읽었던 본문의 마지막에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이 일으킨 소동으로 소란한 와중에 몸을 숨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이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로 이동하였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지도] 베뢰아는 바로 이 곳입니다. 오늘날에는 ‘베리아’라고 부르고 있는데요. 데살로니가에서 약 80킬로미터 떨어진 도시입니다. 바로 옆에 있지는 않지만, 지금까지의 여행경로와 비하면 비교적 가까운 곳이지요.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에서 경험한 동족인 유대인들에 의한 소란과 소동을 피신하는 중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뢰아에서도 또 다시 회당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려는 사명을 잊지 않았지요. 지난 주일에도 함께 나누었지만, 그의 몸과 생활습관에 이미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생각에 순종하는 자세와 태도가 뿌리내렸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베뢰아의 회당에서 만난 유대인들은 데살로니가에서 만난 유대인들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더 고상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이 말은 유게네스(eugenes)라는 헬라어로, 직역하면 ‘태생이 좋은’, 혹은 ‘품위가 있는’, ‘신분이 높은’, ‘성품이 훌륭한’이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람들의 태도와 자세가 매우 신사적이고 거칠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너그럽고 신중한 태도의 습관이 몸이 배인 사람들이 공동체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베뢰아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구약의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는 교훈을 삶에서 실재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지켰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해 준 복음이 정말 성경의 이치에 합당한지 분별하기 위해서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상고하다’는 표현은 아나크리노(anakrino)라는 헬라이인데요. 심도 있게 연구하고, 심사하고, 실험하여 실증하려는 모습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베뢰아의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서는 그냥 섣부르게 유불리만 따지거나 혹은 경솔하게 판단하여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던 것이지요. 과연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그 내용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내용과 합당한지의 여부를 공부하고 연구하고 실험하여 현실에서 적용을 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매우 중요한 자세가 바로 이런 배움의 자세인데요. 배움에는 겸손한 태도가 필수적입니다. 겸손하게 낮아지지 않으면 배울 수가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배우겠다는 사람은 가르치는 선생의 태도와 말투, 혹은 외모를 함부로 평가하거나, 가볍게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광야를 통과하여 이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의 입을 통해 명령하셨습니다. 자녀들을 가르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함으로 영원한 복을 물려받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신 31:13)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주님께로부터 배울 때의 자세를 함께 멍에를 매는 것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9)
예수님의 겸손함을 본보기로 삼아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겸손한 자세를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상식적으로도 배우려는 사람은 겸손한 태도가 필수적입니다. 더구나 주님께 배우려는 마음은 더더욱 이렇게 낮아지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뢰아의 유대인들은 타고난 좋은 성품에 더하여 매일 성경 말씀과 복음의 관계를 상고하고 연구하였던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믿고 구원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된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타고난 성품이 좋은 이들만 구원받기 쉽거나 더 구원에 가까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좋은 성품과 인품 때문에 복음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왜냐하면 성품이 좋고, 인격에 흠이 없는 이들은 대체로 자신이 정말로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좋은 성품으로 착하게 살고 도덕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자신은 흠과 죄가 없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결국 자신과 같은 인품을 갖지 못하고, 죄와 흠이 있는 사람을 정죄하게 되지요. 그러므로 성품이 좋다는 것이 곧 구원에 가까이 있다거나, 구원의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타고난 성품과 사람됨이 좋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좋은 성품을 타고난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좋은 내면의 바탕으로 베뢰아의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배우는 데에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어떤 성품과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내면에 매일 무엇을 채워 넣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베뢰아의 유대인들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날마다 성경말씀을 자세히 살펴 깊이 있게 연구하고 또한 현실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으면 겸손한 마음과 자세로 그 뜻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 성경을 상고하는 목적인 것이지요.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은 아무리 강조하고, 아무리 자주 반복해서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자주 반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복음서에는 천국에 대한 매우 다양한 비유들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 중에 씨를 뿌리는 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3절~23절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간단히 말씀을 드리면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러 가서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을 길에 떨어지고, 어떤 것은 자갈밭에 떨어지고, 어떤 것은 가시밭에, 또 어떤 것은 좋은 밭에 뿌려졌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시기를 ...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 13:23)
씨앗은 좋은 밭에 뿌려져야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즉,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 열매를 맺는 좋은 밭과 같은 내면세계를 가질 수 있도록 관리를 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는 맺는 좋은 밭과 같은 내면세계를 지키도록 관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의 삶을 현실에서 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베뢰아의 유대인들처럼 좋은 성품과 고상한 인품을 가진 이들을 만난 것도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더욱 좋은 것은 그들이 매일 날마다 말씀을 상고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로 훈련하고 연습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많은 사람들이 베뢰아에서 회심하고 믿음으로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천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누구라도 원칙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권한과 특권을 빼앗길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 3:20)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란 모두 말씀의 씨앗이 뿌려진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줄기를 내고, 잎과 꽃이 펴서, 마침내 천국의 열매를 맺고, 수확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마음 밭을 관리해야 합니다. 길가와 같거나, 자갈밭과 같거나, 가시밭과 같이 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자라나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의 마음을 성실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열매 없는 빈궁한 일상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각자의 마음 밭에 뿌려지고, 그 마음에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주님께서 부으시는 은혜가 풍요롭게 채워지고, 결국 풍성한 열매를 수확하게 됩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매일 말씀을 상고하는 일은 곧 주님과의 동행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한사도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그리고 그 하나님이신 말씀이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예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진정으로 주님과 동행하기 원하신다면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 됩니다. 기억하는 것에 자신이 없으시면, 주님의 말씀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알면 됩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알고 싶다면 언제든 성경을 펼치면 되지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아침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묵상은 말씀을 입으로 계속 되뇌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육신으로 체감되기 어렵기에 구체적으로 성경의 문자로 표현해 주신 것입니다. 성경책의 종이와 잉크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얇고 고급 진 종이에 인쇄된 이 잉크들의 나열을 읽으며 하나님의 체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문자들을 읽는 나의 입술과 내 목소리의 울림을 통해 주님의 살아계심을 체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말소리의 울림이 내 뼈와 살에 울려 깊숙이 새겨지는 것을 믿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상고하면 주님께서 나와 동행하고 계심을 더욱 실감나게 체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이해하기 위해서만 읽는 것이 아니라고 제가 누누이 말씀을 드립니다. 말씀을 읽기 위해서 우리가 성경을 펼치거나, 성경앱을 열거나, 드라마 성경의 플레이버튼을 누릅니다. 그 때에 물론 당장의 깨달음이나 해답을 찾는 일도 없고, 감동도 미약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렇게 펼치고, 열고, 듣는 그 시간들 자체가 곧 주님과의 행복한 동행을 이어가는 시간들이고, 주님의 임재 안에서 사는 인생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시간의 연속이 곧 우리의 인생이기 때문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느낌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시는 곳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과의 채널이나 주파수를 맞추지 않으면 마치 길가, 자갈밭, 가시밭에 떨어진 씨앗과 같은 처지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님을 내 스케줄에 억지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컨디션의 시간에 말씀을 펼치고, 읽고, 묵상하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매일 상고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당신을 나타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지켜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바울은 베뢰아에서도 봉변을 당합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내려와서 행패를 부린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을 통해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바울을 더 남쪽으로 피신시킵니다. 여기 지도에 보시면 오늘날 그리스의 수도로서 유명한 도시인 ‘아테네’까지 피신하게 되는데요. 얼마나 서둘러 급박하게 바울만 피신을 했으면 함께 움직여야 할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남아있을 정도였지요. 오늘 본문의 마지막은 이제 바울이 아테네에서 경험할 일을 예고하며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이 아테네에서 바울이 경험을 통해 배워야 할 말씀은 다음 주일에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뢰아에서 바울은 성품과 인품이 신사적인 사람들을 만나 순조롭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베뢰아의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지적으로도 철저하게 검증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이 결국 참된 진리인 것을 실제 삶을 통해 인정하고 많은 이들이 믿게 됩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극렬히 반대하던 유대인들이 찾아와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뢰아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자체적인 저항이나 소동은 없었지만, 다시금 그 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베뢰아의 유대인들은 말씀을 매일 상고함으로 말씀이신 주님과 동행하는 순종과 단련된 믿음의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매일 성경 말씀을 상고하고, 반복하여 읽고, 깊이 생각함으로 우리 마음 밭을 좋은 밭으로 잘 지켜 나아가는 것을 저는 갈망합니다. 말씀이신 주님과 동행하며 행복한 매일의 일상을 누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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