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믿고 변화된 것
2023. 11. 5(주일낮예배) 로마서 7:19-25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하면 예우가 100여가지가 바뀐다고 한다. 제일 먼저 청와대에서 대통령에게 삼정도를 받는다. 그리고 자동차에 성판이 붙고, 국군 행사 때 의장대가 일성기를 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경례를 받을 때 장성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13발의 예포가 터진다. 그리고 퇴직 후에는 대령과는 전혀 다른 연금을 받게 되고, 사망하면 국립묘지 장성묘에 안장될 수 있다.
대기업에서 부장에서 이사(임원)로 승진하면 바뀌는 것도 엄청나다. 부장에서 이사로 승진하면 차량이 바뀌고, 개인사무실을 가진다. 그리고 개인비서가 있어서 업무를 전담하여 돕는 사람도 주어진다. 물론 품위유지비도 받는다. 이렇게 군인이 장성이 되고, 직장인이 이사가 되면 삶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불신자에서 신자가 되면 어떤 변화가 있겠는가? 불신자에서 신자가 되면 술과 담배를 끊고, 일요일이 주일이 된다. 그래서 일요일이라 부를 때는 늦잠도 자고, 또 가족과 여행도 간다. 그런데 주일이 되는 순간 아침에 일찍 일어나 교회에 가야 하고, 또 한번씩은 집에서도 하지 않는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기도 한다.
군에서 장성이 되고, 회사에서 이사가 되는 것과 좀 많이 다르지 않는가? 그런데 사도 바울을 보면 이것보다 훨씬 다른 변화가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오늘 생각해 보려 한다. 먼저 빌립보서 3장 5-6절을 읽기 바란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빌 3:5-6)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다는 말은 생활 양식과 기질 면에서 이스라엘 전통으로 내려오는 관습에 충실한 사람이다는 뜻이다. 그리고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유대교의 전통에 그 누구보다 더 열심인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에 자긍심을 가지고, 또 바리새인으로 열심히 유대전통을 지켰던 바울은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유대율법주의자였던 바울은 나는 의인이다 라고 고함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바울의 고백은 달라진다. 오늘 본문인 로마서 7장을 보면 바울은 지체 안에서 하나님의 법(마음의 법)과 죄의 법(또 다른 한 법)이 싸운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은 하나님의 법을 더 즐거워하는데, 실제로 삶에서는 죄의 법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한다(7:19)고 고백하고, 더 나아가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고 탄식한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바울의 모습이다. 예수를 믿기 전의 바울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라는 자긍심이 있었다. 그리고 바리새인으로 열심을 가지고 율법을 지켰기에 나는 의로운 사람이다는 자신감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난 바울은 내가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한다고 그는 안타까움으로 가득찬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습이 거꾸로 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제가 강도사 때 아주 친한 친구가 저 포함 3가정이었다. 그때 저는 부산동교회에서 강도사 사역을 하였고, 한명의 친구는 남천교회에서 강도사 사역을 하였다. 우리 둘은 사택도 아주 좁았고, 또 전임사역을 처음하였기 때문에 정신 없이 바쁘게 사역을 하고 있었는데, 한 명의 친구는 성지공고 교목으로 사역하고 있었다. 군면제였던 이 친구는 우리보다 빨리 대학원을 졸업하고 학교 교목으로 사역하였는데, 학교에서 사택을 40-50평 되는 넓은 집을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은 그 친구 집에서 만났다. 그래서 교회 사역이 힘든 일, 또 대학 다닐 때 재미있었던 일을 서로 이야기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는데, 그 집에 가면 정말 이상한 일이 있었다. 넓은 집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여기저기가 어지러워지면 제 친구가 방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친구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친구가 라면을 끓이고, 또 다 먹고 나면 걸레로 방을 닦는 것이었다. 참고로 저와 남천교회에서 사역하는 친구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저와 남천교회 다니는 친구는 내 아내는 남편을 너무 잘 만났다고 늘 그렇게 말하였다. 특히 저는 이소영은 태어나서 잘 한 것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이 공범식을 만난 것이다고 진심을 다하여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혹시나 방을 한번 닦으면 그 일은 전교인에게 알려서 나의 업적을 자랑하였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우리 중에 사례도 많고 또 제일 넓은 집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 그 친구는 나는 명미에게 늘 미안하다 하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생각에 누가 좋은 남편처럼 보이는가? 바울은 가난한 사람 한번 도와주는 것을 온 사람이 다 보는 사거리에서 하였다. 그리고 하루에 3번 기도할 때 손을 높이 들고 자랑하듯 하였고, 박하와 회향과 근채까지 십일조를 하였는데, 그것은 바울의 신앙에 자긍심이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나는 이런 사람이다! 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 앞에 더 섬기고 싶고, 더 사랑을 표현하고 싶은데,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그렇게 하지 못함에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으면 변화되는 모습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놀라운 변화가 있는가? 아모스를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 기록되고 있다. 그래서 암 1:3-2:3에 보면 이스라엘과 인접하여 있는 6개 나라인 다메섹, 블레셋, 두로, 애돔, 암몬, 모압의 죄를 지적하면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OO 의 서너가지 죄로 말미암아 라는 말로 각 나라의 심판을 시작한다. 여기서 서너가지 죄는 죄가 가득찼고, 또 넘어섰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에게 3은 완전수이다. 그러므로 죄가 3가지라는 말은 죄가 완전해 졌다는 것이고, 또 죄가 4가지가 되었다는 말은 완전을 넘어섰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심판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유다백성에게도 똑같이 서너가지 죄로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유다의 한가지 죄목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암 2장 4절을 보면 알 수 있다.
(암 2: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안식일도 철저히 지키는 신앙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대의 죄를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않았다(암 2:4)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을 멸시하고, 또 율례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가? 제가 군입대 후 훈련소에서 가장 많은 편지를 받았다. 왜냐하면 제가 브니엘교회에서 전도사 사역을 하다 입대했는데, 그때 함께 사역했던 목사님이 브니엘중학교 교목이었기 때문이다. 목사님이 학생들에게 위문편지 쓰기를 숙제로 내어 주었는지 전교생이 다 저에게 편지를 보내었다. 그런데 그 편지는 저에게 아무런 감동이 되지 못했는데, 한통의 편지는 저를 기다리게 하였다.
누구 편지였겠는가? 의무감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쓰는 그 편지에 감동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의무감으로 행하는 그 신앙은 하나님께 아무런 기쁨과 감격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여서 나의 사랑이 부족합니다는 그 안타까움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그 섬김이 참된 섬김이고, 참된 신앙생활이 되는 것이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변화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로마서 7장 25절을 보기 바란다.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뜬금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찬송을 부르고 있다. 바울이 이렇게 찬송을 부르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은 여전히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바울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음을 알기에 그 사랑이 더 크고 고마웠던 것이다. 그래서 안타까움이 큰 만큼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더 큰 신앙생활을 바울은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것이 변화된 성도의 삶이다. 성도는 자신이 온전하여졌기 때문에, 또 무엇을 많이 행하였기 때문에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때로는 연약하여 무너질 때도 있고, 또 실수와 실패할 때도 있다. 그런데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을 알기에 감사하고, 찬양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변화가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 중심에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안타까움도 되고, 또 감사도 되는 그런 복되고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