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공원에 설치된 ' 이상룡 선생 구국(救國) 기념비문' 이종주 前 대구시장이 쓰셨다.
아래 ‘이상룡 선생 구국(救國) 기념비문’은 대구광역시장을 역임하신 이종주(1935. 3. 27∼2023. 5. 17) 님게서는 1963년 대구시 총무과 재직 시절 이상룡 선생 후손이면서 대구시에서 뛰어난 문장가요, 서예가로서 인정을 받았으며, ‘석주 이상룡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후학 이은상 님이 지으신 비문을 이종주 님이 쓰도록 결정한 후 경상북도와 대구시가 후원을 하여 훌륭하게 쓰신 그 비문이 현재 대구달성공원에 우뚝 서 있습니다.
비문은 달성공원 남쪽 낮은 언덕에 다소 높게 설치되어 방문객도 유심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터라 자료를 찾아 비문 전문을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이 올립니다.
이상룡 선생 구국(救國) 기념비문
몸을 풍우 속에 던져 일생을 조국광복에 바치고 뜻과 업적을 남겨 이름을 후세에 드리운 이가 계시니 석주 이상룡 선생이 그 이시다. 1858년 11월 24일 경북 안동읍 법흥리에서 나시니 본관은 철성이요, 철령군 황(璜)의 30대손으로 아버지는 승복, 어머니는 안동 권씨인데 일찍 퇴계선생의 학통을 이은 서산 김홍락 선생에게서 유학을 배우고 천문지리 병학에까지 깊은 연구를 쌓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는 학교를 세워 청년들에게 새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더니 마침내 1910년 조국의 국권이 무너지자 밤낮이어 통곡하다가 문득 사당에 고별하고 청년들을 격려한 뒤, 아우 봉희와 외아들 준형을 데리고 서울의 동지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니 때는 54세 되던 1911년 1월이었다.
그로부터 남만주 회인현을 비롯하여 동화, 유하, 서란 등지로 옮겨 다니며 교포들의 살길을 마련하기에 애쓰고 또 여러 동지와 함께 신흥학교를 세워 청년교육과 군관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1915년에는 독립운동의 총본영으로 군정 부를 창설했다가 뒤에 이름을 서로군정서라 고치고 최고책임자인 독판이 되시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만주에 침입하므로 독판의 명령으로 독립군을 출병시켜 청산리 봉오리 갑산리에서 승첩을 거두게 하고 도 길림독군과 회담하여 교포의 길림성 거주를 자유롭게 하는 외교상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었다.
1925년 68세에 때에는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여 정부 안의 사상적 분열을 조화시키기에 적극 노력하다가 울분이 그대로 병을 이루어 사직하고 도로 서란으로 돌아와 마침내 1932년 5월 12일 75세를 일기로 만 리 이역의 외로운 혼이 되시었다.
5년 뒤에는 아우마저 하르빈에서 별세하고 아들은 외로이 고향으로 돌아와 거하다가 2차 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의 세력이 팽창해 가므로 조국의 독립을 비관한 끝에 1942년에 단도로써 자결하여 어버이의 뒤를 따랐으며, 그 밖에 아우 상동과 종숙 승화 승히 조카 형국 운형 인형들도 일제에 항거하다가 혹은 옥고, 혹은 옥사하니 세상이 일러 과연 의열의 가문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이제껏 선생 형제를 반장(返葬)하지 못한 것을 뼈아프게 여기더니 이제 고국 동포들이 힘을 모아 기념비를 세워 선생의 높은 뜻을 길이 받들고자 내게 글을 청하므로 나는 이에 그 날의 사적을 대강 적고 다시 옷깃을 가다듬어 노래를 바치노니
사직이 무너지자 압록강을 울며 건너
찬바람 만주벌에 흰머리 날리시며
한평생 조국광복을 꿈속에도 비시더니
저기가 어디관대 그 땅에 묻히신고
그 소원 오늘 님은 정작 안계시네
혼을랑 돌아오소서 길이 여기 곕소서
1963년 5월
후학 이은상은 글을 짓고
성산 이기윤은 앞을 쓰고
종(宗) 후학(後學) 종주는 뒤를 쓰고
경상북도와 대구시는 후원하고
석주 이상룡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세우다
(관련 사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