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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30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그리스도로 옷을 입다. キリストを身にまとう。
본문 로마서 13:11~14
롬 13:11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13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14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11 更に、あなたがたは今がどんな時であるかを知っています。あなたがたが眠りから覚めるべき時が既に来ています。今や、わたしたちが信仰に入ったころよりも、救いは近づいているからです。 12 夜は更け、日は近づいた。だから、闇の行いを脱ぎ捨てて光の武具を身に着けましょう。 13 日中を歩むように、品位をもって歩もうではありませんか。酒宴と酩酊、淫乱と好色、争いとねたみを捨て、 14 主イエス・キリストを身にまといなさい。欲望を満足させようとして、肉に心を用いてはなりません。
지난 주일에는 복음을 믿는 성도들이 주변의 인간관계를 통해 화평을 이루고, 거룩하게 사는 삶을 인도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요청하실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우리의 존재가치는 영생을 소유할 정도로 소중하기 때문이지요. 저와 여러분이 스스로의 가치를 귀중하게 여기는 만큼 거룩한 일상을 지킬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부터 교회력은 대림절(혹은 대강절)을 지키게 됩니다. 교회력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로부터 시작됩니다. 일반적인 사회에서는 한 해의 마무리를 하는 시기에 교회는 새해를 시작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지요. 특별히 예수님의 탄생을 신앙으로 고백하고 기념하는 성탄절을 예비하는 시기로 대림절 기간은 교회의 오랜 전통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를 맞이해서 앞으로 네 주간은 대림절기의 성서일과를 기준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 주일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에게 바른 시선과 영생의 세계관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특별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그리고 우리가 바라고 추구해야 할 시대를 보는 눈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눈을 갖고, 어떤 시선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서 자신의 삶과 운명이 바뀌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지금이 곧 “깨어나야 할 때”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요. 로마서는 거의 2,000년 전에 쓰여진 편지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깨어나야 할 때라는 말씀의 가르침은 유효합니다. 여기서 깨어나야 할 때란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구별해 놓으신 시간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성경은 창조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마지막 심판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계시지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의 마지막까지도 결정하시는 것이지요.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일까요?
이 시대는 과학기술이 인간의 삶에 가장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저와 여러분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휴대전화 기술의 발달은 우리의 삶을 평균 5년, 빠르게는 2년 단위로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너무도 빨라지는 환경의 변화와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많아지는 정보의 양은 한 순간도 휴대폰과 인터넷에서 우리의 손을 뗄 수 없게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인공지능, 즉 AI의 영향력은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 될 것입니다. 벌써 생활 속에 AI를 자유롭게 활용하기도 하고, 의존하기도 하는 세대가 이미 형성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인문학에서는 세대를 구분할 때 보통 30년 단위로 정합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10년 단위에서도 세대의 차이를 느낄 수 있을 정도라고 하지요. 우리의 세속사회는 정말로 빠르게 변하고, 그 차이도 굉장합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속도의 시대 흐름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인간의 내면세계에 일어나는 ‘욕구’,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시대가 급변해도 인간의 육신은 여전히 무엇인가를 먹어야 합니다. 또 내면에 채워야 할 무엇인가를 갈급해 하지요. 그리고 다음 세대를 남기려는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그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기 위한 것을 생산하려는 욕망도 있지요. 이런 욕구와 욕망에는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건전하고 선한 것에 대한 욕구도 있습니다. 이러한 내면의 욕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은 아무리 육신적인 욕구가 강하더라도 영적이고 내면적인 욕구를 채우지 않으면 삶의 이유와 의미를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변하고 시대가 달라져도 여전히 사람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영적인 관심사를 채우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회가 발전할수록 과학기술과 이성적 판단이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서 더욱 관심을 쏟는 세대가 나타날 것이라고 미래학자들은 예측합니다.
그에 따라 “종교부흥”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부흥”이란 진리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단지 이성과 지적인 판단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을 무턱대고 숭상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세대가 나타날 것을 이미 경고하였지요.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딤후 4:3)
오늘 본문의 11절 후반부에서는 “구원이 처음보다 가까이 왔다”는 표현이 있는데요.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종말의 때가 점점 다가온다는 뜻입니다. 시대가 발전하고 Ai가 모든 것의 정보를 알려주고, 안드로이드 로봇이 인간의 부족한 것을 보완하는 시대가 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마지막 심판의 날을 피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때를 안다”, 혹은 “깰 때가 되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언젠가 사람은 반드시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될 것임을 감각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현실감각이지만, 시대의 결론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영적감각 즉, 영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사 40:8)
이 말씀을 근거로 베드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벧전 1:24-25)
육신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없어져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와 “복음의 약속”은 영원토록 유효하다는 것이지요. 달리 말하면 세상이 아무리 복잡하게 변하고, 대단한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도 인간의 내면적인 욕구는 “진리”가 아니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리인 복음에 합당한 태도는 곧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추구하는 것이 곧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생명의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어떤 삶의 다양한 길이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 이외에 어떤 길도 우리에게 생기를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알지 못해서 사람들은 여러가지 방법들로 자기의 내면을 채워 보려고 합니다. 그 방법들을 어두움의 방법, 곧 밤의 방법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13절에 밤과 어두움의 방법을 추구하는 이들의 대표적인 생활습관을 말하고 계시는데요. 이 단어들을 말하면 우리 마음에 찔림이 있는 것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단정치 못한 행실, 호사한 연회, 술에 취하는 것, 음란한 것, 방탕한 것, 다투는 것, 시기하는 것을 대표적인 밤의 행실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물론 이 외에도 사람들이 저지르는 부도덕한 죄와 악행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하는 6가지 행동과 태도들은 시대가 변하고 세대가 달라져도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며, 그래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악덕인 것을 고백합니다.
단정하지 못한 행실이란 복음에 합당하지 않은 생활을 말하는 것인데요. 연이어 나오는 6가지 나쁜 행실을 한 가지로 묶어서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호사한 연회란 모든 과분한 행동들로 선을 넘는 것을 말합니다. 제 멋대로 행동함으로 질서나 규범을 고의적으로 범하면서 단순히 재미만을 구하는 것이지요.
술에 취하는 것은 말 그대로 술로 대표되는 세속문화에 몰입하여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기록된 세상의 본을 따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음란하다는 것은 말로 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성도덕에 관한 덕목이지요.
방탕하다는 것은 생활습관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도덕률의 규범을 넘나는 생활방식입니다.
또한 사람과 다투는 것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삶의 방법인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약 1:20)
왜냐하면 성내면 다투게 되고, 다투는 것은 곧 어두움과 밤의 행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내기 전에 분노하는 마음을 제어하라고 조언하시지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엡 4:26-27)
마지막으로, 시기하는 것도 어두움의 행실입니다. 모든 다툼과 거짓과 부도덕한 방법은 시기하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2)
이 말씀은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의 계명에 대해서 그 근본이 되는 미움에 대해 경고하신 말씀인데요. “살인”과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동일한 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미움의 씨앗이 되고, 결국 사람을 살인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여섯 가지의 단정하지 못한 어두움의 행실에 대해서, 거룩하게 창조된 우리는 경각심을 갖고 경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또한 이러한 태도들에 대해 분명히 회개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과거의 생활 가운데든지 현재의 생활에서든 지, 이렇게 단정하지 못하고 어두움의 행실들에 각자 정도는 다를지라도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구원의 날, 심판의 날에 가까워지는 지금 회개하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치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과거와 현재까지는 이 부도덕한 생활에 잠시 묶여 있었더라도 낙심하거나, 외면하거나, 불편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중 누구라도 영적으로 어두운 “밤의 시대”에 살면서 어두운 “밤의 행실”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 성경에서 고백하고 있는 “빛의 갑옷”을 입기로 결단하고 겸손하게 회개할 때에 빛이신 우리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힘을 주시고,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시편 119편 105절은 고백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5)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빛이 되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세상의 빛으로 살아계셨고,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
그리고 그 빛 이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제자들, 곧 우리도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마 5:14)
예수님을 따라, 그리고 예수님과 동행하며 사는 이들이 곧 빛이기에, 우리의 행실이 이 세상의 어두운 행실들을 모두 환하게 드러낼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스스로 그 빛이라는 의식을 갖지 못할 수도 있지요. 왜냐하면 육신의 행실을 보면 거룩하지도, 그렇다고 경건하지도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우리의 상태를 이렇게 비유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6-7)
하나님의 진리의 빛, 복음의 빛은 찬란하게 빛나고 값진 보배(보석)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신은 그 보배를 담고 있는 질그릇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지요. 이처럼 빛나는 보배를 담고 사는 그릇으로 살 때 세상의 어두움은 우리의 밝은 행실을 보고 눈이 부셔 견디지 못하여 시기하고 미워하고 멀리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창조하셨고 마침내 심판하실 주님께서 우리의 순종에 반드시 합당한 상급과 승리를 베푸실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빛의 갑옷을 입고,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삶은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너무 간단하고 명확합니다. 바로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시는 그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아침에 일어나 외출 준비를 할 때 머리도 만지고 얼굴도 씻고 로션도 바르지요. 옷은 또 얼마나 고민하며 입습니까?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외모에 대해서 그렇게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우리는 내면세계도 그렇게 신경 써서 관리하고 있을까요?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이라는 작은 이야기 책자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찾아오셔서 함께 사시게 되었다는 내용의 작은 소설인데요.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이 주인공이 예수님께 자신의 개인적인 공간을 하나씩 공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손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현관 앞에서 맞이할 때는 참으로 감격스러워하던 주인공이었는데요. 예수님께 공개가 되는 개인적인 공간이 조금씩 늘어날 때 매우 당황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점점 부담스러워 까지 하게 되지요.
어두움이 지배하는 밤의 삶에서 빛으로 환한 낮의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에는 이렇게 당황스러움과 부담스러움이라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할 때가 옵니다. 그 때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당황스러움의 산을 넘고, 부담스러움의 강을 건너는 능력이 되는 줄을 믿습니다.
빛의 갑옷을 입고 단정히 행하는 것을 ‘경건하다’고 말합니다. 경건한 삶은 바로 거룩한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소명은 바로 경건하게 살면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거룩하게 회복하신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심판의 날에 당신을 사람들 앞에서 인정하고 시인한 이들을 천사들 앞에서 인정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눅 12:8)
그러므로 구원의 여부는 주님께서 나를 인정하시는 지의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만, 자신감만으로 구원을 확신할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마지막 날에 구원받은 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계 19:7b-8)
그들은 모두 빛나고 깨끗한 옷을 입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빛나고 깨끗한 옷”이란 곧, 경건하고 거룩한 삶의 행실을 뜻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는데, 구원받은 사람인지의 분별은 경건한 삶의 열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경건한 삶을 억지로 살아야 구원을 겨우 받아낼 수 있다면 종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기에 경건하게 살게 되었다면 우리는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억지로 어떤 율법의 행위를 지키기 위해 애쓰고 몸부림 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기 위해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하는 것이 최선인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바울 다음으로 귀하게 여겨지는 인물로 성 어거스틴이라는 초기 기독교역사의 교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의 12절~13절을 읽으며 영적인 눈이 열렸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구절을 읽기 직전까지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갈망하였지만, 절망과 좌절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갈 바를 알지 못하며 슬픈 마음에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담장 너머에서 들려온 ‘톨레 레게, 톨레 레게(들고서 읽으라!)’라는 아이들의 천진한 노랫소리를 들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어떤 강한 힘에 이끌려 펼쳐 놓았던 성경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펼쳐져 있던 오늘의 본문을 읽으며 빛 가운데 거하는 기쁨과 감격으로 내면이 가득 채워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까지 저질렀던 모든 어두움의 삶을 회개하며 거듭난 삶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가기 전까지 우리는 불안한 상태에 거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로지 주님 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는 안전하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참된 빛의 갑옷을 입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 때 비로소 우리는 안정할 수 있습니다. 참된 안전은 주님과의 동행으로만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부터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기대하는 것은 영생의 빛을 기대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복음을 완성하시기 위해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기쁨과 감격과 즐거움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처럼 트리도 장식하고, 그 빛을 상징하는 초를 한 주에 한 개씩 켜면서 그 기대감을 표현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 그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을 결단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들 떠 있는 감정과 기분에 휩쓸리는 일상이 아니라, 어두움에 속한 모든 행실을 몰아 낼 빛을 기뻐하고 기대하며 기다리는 삶을 소망합니다. 빛 가운데 거하는 일상을 위해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손을 잡고 동행하는 행복한 일상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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