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조한 언어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생성론
언어 안에 영혼이 맴돈다. 언어 안에서 영혼은 치솟아 오르지도 못하고, 사실은 가라앉지도 못한다. 그리하여 이 들뜬 영혼은 언어의 심장이 되는데, 그 안에서 진동의 주기를 산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내린다.” 우리는 이 시를 청진하면서 함께 떤다. 이 강설(降雪)은 호사(好事)인가, 악사(惡事)인가? 긍정의 바인가 부정의 바인가? 이 물음은 우선은‘때문에’ 등속보다 훨씬 약화된 원인성을 나타내는 한국어 특유의 어미 ‘~서’가 이끄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연결 고리가 약한 원인과 결과를 앞뒤로 나타내는데, 게다가 여기서 ‘사랑’과 ‘눈, 의식과 자연이라는 상이한 차원의 항들이 같은 평면 위에서 인과를 새기고 있으니 우리에게 진의가 바로 다가올 수 없다. 예를 들어; 가난한 내가 사랑하니 언제나처럼 나를 버린 자연이 눈마저 내리게 하는 것, 자연이 나타샤가 오기 힘들게 언제나처럼 내 바람을 거스르는 것이니,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는 반복은 마치 주문처럼, 역설적으로 나타샤가 오지 않으리라는 심정을 드러낸다. 이어서 그러나 거의 바로 우리는 반대의 해설을 듣는다; 가난한 내가 사랑하니 이날만은 자연이 나를 챙겨서 백설이 분분하는 운취를 만들어내는 것, 이국의 여자 나타샤와도 어울리는 이 이경(異景)은 나탸샤와 내가 새롭게 일굴 정분이 쓰일 백지이여라. 나타샤는 틀림없이 지금 오고 있다. 결국은 이 시의 의식, 이 시의 사람은 이 긍정과 부정 사이를 내내 진동한다. 이 진동 자체가 이 시가 그리는 바인 고로, 이 사람은 초조하게 원탁에서 소주잔을 떨어뜨리며 다리를 떨고 있겠다. 보라 이 실존은 이 긍정과 부정의 교차점으로 영원회귀하며 마치 압정처럼 박혀 있다. 이 언어가 종이 위에 있듯이 찍혀있다. 가난한 나는 사랑은 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가, 가난하는 나는 사랑만은 하지 않아야 하는 사람이었다가... 이러한 교차 자체가 이 시의 의미이다.
이 시가 아니더라도, 항상 의미는 극성을 상정할 때에만 오직 형성된다. ‘어중간함’은 어중감함의 긍정과 어중간함의 부정 속에서 어쩐 적당한 의미가 탐색된다. 일상의 언어는 항상 그 적당한 자리가 암암리에 지정되어 있어서 이 극성 사이를 내뱉어진 말 자체가 오가지 않는다. 그렇지만 일상어가 덜 흔들릴지라도, 얼어붙어 있는 영혼일지언정, 영혼은 여기에도 있다. 그리고 시인들은 이 영혼을 다시 녹여서 흔들리게 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이 언어는 이 사람의 초조와 함께 의미를 생산한다. 그것은 요컨대 극성들이 생산된다는 것이다. 이 영원회귀의 회로는 자석의 남북극처럼 경로가 노정되는 것이라고 우리가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이 언어가 ‘이다’와 ‘아니다’의 방향을 늘 그리기 때문이지, 어떻게 두더라도 언제나 한방향으로 돌려세워져 있기 때문은 아니다. 우리가 허다한 글쓰기들에서 언제나 보고 있듯이 언어는 어떤 남북극도 만들어 낼 수 있다. 요컨대 언어의 방향성은 ‘이다’의 형이상학을 따르지만, 언어의 존재는 “있다”의 존재론을 건립한다. 언어는 언제나 ‘무엇’이지만 지금 ‘있다’. 언어는 현상(現象)이면서도 현황(現況)이다(공리이면서도 원리, 현상학(phenomenologie)이면서도 실천주의(pragmatisme), 논(logos)이면서도 술 (pragma, πρᾶγμα )]. 언어는 “고조곤히 이야기”하면서도 그저“응앙응앙”운다. 그리하여 의미의 자장이 사방으로 그려지면 이 실존을 결점으로 무한히 교차해간다.
이러한 관점에서 항상 존재론은 하나의 드라마다. 존재가 있고 존재 앞에 선 사람은 이 존재자를 초조하게 만든다. 존재자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그렇거나 아니거나 한 존재 앞에 선 사람의 사유의 길로 강제로 끌고 간다. 사실 그것은 명백히 형이상학의 폭력이기도 하다. 그리고 얼마만큼 적당한 원환을 그리게 한 뒤에 존재가 존재 자기 자신을 알맞게 흉내내게(simulacre) 한 뒤에 다시 실존의 자리에 있게 돌려세운다. 이렇게 한 편의 드라마가 존재 앞에 선 사람의 사유로서 상영되는데, 얼마 되지 않아 기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반대편의 원환을 이미 통과했다는 것을 극작가와 구경꾼들 모두 알아챈다. 이번에 구경꾼은 극작가를 초조하게 한다. 이렇게 언어는 담론장을 짠다. 언어가 담론 장에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드라마 자체가 담론장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조건 안에서, 언어는 사회 구조를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실존을 기투하는 것이다.
언어 안에서 원인과 결과 그리고 결과와 원인은 내내 생성된다. 사실은 새로운 원인성 자체가 생성된다. 이것은 쉬운 말도 쉬운 작업도 아니다. 이 시대는 과학적 원인들만을 우선해서 사실로서 승인하는 과학적 원인성들이 지배하는 시대이다. 과학이 권력인 시대이다. 과학이라서가 아니라 권력은 늘 사실들을 다루기 쉽도록 죽어있도록 압박한다. 과거에는 유교가 그 노릇을 했다. 하지만 문학이 백석의 시와 더불어 말하듯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 자체를 건립할 수 있다. 과학의 작업보다 훨씬 더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그 난해한 작업이 이 시대 문학가들의 사명이다. 문학적 사실은 세상의 다양한 원인성을 복원한다. 어리숙한 사유가와 구경꾼들은 착각하기 쉬운데, 이는 단순히 예술가에게 허구의 제작이 무한정하게 허용된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뜻한다 : 문학은 시대의 권력이 거세할 수 없는 우리 영혼의 원인성, 우리 영혼의 진동을 끊임없이 우선 발굴할 뿐만 아니라 이어서 생산하고, 그러니까 표현하고, 끝내 사실을 살아있게 해야 한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1912-1996?)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1938.
첫댓글 마지막 문단에서 이 글이 과학적원인성에 대한 저항을 거론한 것은 오해의 여지가 다분하다. 진실로는 과학에결탁한권력, 권력에결탁한과학,이 문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짧지 않은 정치경제학의 각주가 필요하다. //내 손은 sf소설에는 잘 가지 않는다, 특별히 편견이 있다기보다, 아닌 장르의 읽어야할 소설도 넘쳐나는데 구태여 찾아서 읽지 않게된다. //말할 필요도없이 논평은 깊이 읽고해박한 사람이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