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죽기전에 꼭 한번 가고 싶었던 곳이 있는가요?
나는 평생 바쁘게 살아오면서 늘 마음 속으로
언젠가는 한번, 아니 죽기전에 꼭 한번은 가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옛날 남자들의 군대다
육군 3군사령부 20사단 62연대 7158포병대대 제2포대, 소위 최하 말단 포대다!!
내가 40여년전에 첫 근무하던 최전방 중부전선에 위치한 최하 말단 포대라 산골 깊숙한 곳에 있었다
그래도 주소도 있다 "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내산리, 신탄리 일대다 " 번지는 모른다
내나이 20대 69학번이 서울서 대학 3학년을 마칠 무렵 병역의무 고민에 빠젔다
부모님이 4남매중 장남인 내가 태어 나기전 위로 형3명이 모두 암울한 시기에 홍역이다 뭐다 하여
모두 저세상으로 보내고 나서 태여 났기에 그냥 또다시 가슴에 묻을까봐 출생 신고도 하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다 그후 남동생이 출생하자 한꺼번에 출생 신고를 하는 바람에 호적상 형제 나이가
차이 없는 불상사로 군에 영장이라도 나올라치면 형제가 함께 입대를 해야 할 판이다
해서, 결단을 내렸다 내가 먼저 자원 입대하기로 !!
그기다 나는 든든한 육군 본부 원스타 별빽?이 있지 않았든가?
육군 기술병 지원 입대 합격 통지서를 받고 입대하는 날
아침 부모님께 큰절를 올리고는 친구들과 함께 (공군 헌병 휴가중인 친구 이상기씨 외2명)
미리 장발 머리 빡빡 깍고 씩씩하게 논산훈련소에 혼자 단독 입영길에 올랐다
당시에는 완행 입영 열차를 타고 함께 입대 하든 시절이라 논산 훈련소가 어디에 붙어 있는 줄도
모르면서 대구서 논산 훈련소로 단독 입대하기란 교통편이 좋지 않든 시절이라 여간 힘든 일이
아니였으며 배웅한 친구들은 다음날 늦게 되서야 귀가하였다는 소식과 함께 ...,
그러나, 논산 훈련소의 생활은 어느 대한 민국 남자와 다를 바 없는 새까만 쫄병으로 머리속이 텅빈,
소위 맨붕 상태로 나 자신을 돌아 볼 겨를도 없이 황산벌 논산훈련소 28연대에서 대한 민국
육군으로 나도 모른다, 그냥 진짜 사나이로 다시 태여 났단다, 정말 씩씩 했든가 보다 ,
어느듯 훈련소를 마치는 날
대한민국 육군으로 각종 훈련으로 논산훈련소를 무사히 마치고는 각부대로 배치 하기위하여
모두가 따블백에 개인 관물를 넣어 짊어지고는 각기 다른 꿈을 꾸며 배속 부대로 팔려나가면서,
때로는 기대감과 두려움으로, 눈물과 안도의 모습으로, 모두가 묵묵히 묵묵히 완행 열차편으로
북으로 남으로 흩어 지고 있었다.
나는 서울방향 열차에 몸이 실렸다
그렇다, 당연히 나는 육군 본부 원스타 별빽이 있지 않는가!!
늘상 입대만 하믄 전혀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도 분명히 책임진다는 별빽 친구가 있지 않았는가??
그렇다, 특히 당시 군에서는 고향만 같아도 대단한 빽으로 통하든 시절이 아니 였든가!
더구나 별빽 친구 덕분에 대학 다닐때는 수시로 육군 본부도 구경하곤 하는 영광도 있었는데
서울 육군 본부는 아니더라도 설마 서울 외곽으로 라도 배치 되리라는 확신 속에
밤새 용산역 용사의 집에 도착하니 창밖에 멀리 육군 본부 건물이 보이고 내일이면 소위 저곳으로
배치 되리라는 기대감에 따블백을 끌어 안고 하룻밤을 보내고 나니
웬걸, 새벽부터 또다시 각부대로 배치하는 군번이 불려지고 줄를 서서 또다른 열차로 실려가고
있었다,
의정부 103 보충대다 !!
의정부 소재 103보충대란 곳에 첨 도착하니 이곳도 서울 근교라 안도의 한숨속에 후반기 보충대
2주간 교육을 받고는 또다시 기대와는 점점 멀어지며 북으로 북으로 연천군 전곡에 위치한 20사단 사령부로 실려가고 그기서 또 62연대로 팔려 왔다
62연대에서 보충병으로 또 3일간 밥을 얻어먹고 어느날 아침 천막이 덮힌 부식을 공급하는 트럭
차량 짐칸에 홀로 각종 부식 더미속에 실려 하얀 춘설이 온몸에 싹신을 쑤시며 흩날리는 매서운
추위속에 이산골 저산골 비포장도로를 돌고 돌아 각 부대에 부식을 나르다가, 마지막으로 떨어진
곳이 추억의 자대 78 포병대대다
그기서 또 다시 대대에서 제2 말단 포대로 팔려왔다다!! 소위 알파, 브라보, 챠리, 중 부라보 포대!!
아~~!!
당시에는 무학이나 초등학교 졸업자들 까지도 모두가 신성한 병역의무를 수행하든 시절,
국민의 한사람으로써 대학 3학년을 마친 교만에 빠진 한 인재가 말단 포대에서 105미리 곡사포
포경과 포 타이어나 딱고 있어야 하는 자괴감으로 눈앞이 캄캄 했다,
그래도 나에게는 군입대 라도 하기만 하면 무슨 특혜라도 듬뿍 줄것처럼 하든 육군본부 원스타
별빽이 든든히 있었는데 그놈의 별빽은 내마음 속에서만 기대와 희망이였지 머나먼 중부 전선
최전방, 어느 산골에 내 팽개친 하잖은 한인간의 존재감에 잠 못드는 밤을 무수히 많이 보내야만
했다,
최전방 음산한 차거운 밤하늘에 쏟아지는 아름다운 별들 마저 왜그리 눈물 겨운지 서러워 울기도
많이도 울었노라!!
전방부대에서 보는 원스타 별은 그저 똥별에 지나지 않는 것을...,
40년전 옛날의 남자들의 군대 생활
그자체가 남자들의 생활이였며 두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추억이리라 만,
곤하게 잠든밤, 세벽1~2시나 되였을까 무엇때문에? 왜그랬을까? 잠자는 쫄병을 깨워 서울서 대학
다니다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줄빳다를 맞는 날이면 씨뻘겋게 멍들은 엉덩이로 몇날 몇일를
화장실 가기도 힘들어 하기도 하였고, (후일 줄빳다의 주도자가 바로 위 선임 이였다니)
따뜻한 물이 없어 손톱밑은 갈라저 심장의 박힌 가시보다 더 아파와 아리고 쓰린 자대 생활하며
제래식 화장실에 똥을 누고 나면 송곳탑처럼 얼어 붙어 튀어 올라온 뾰쪽한 똥 고드름을 삽으로
내리치고 서야 볼일를 봐야 하는 혹독한 전방 추위와의 싸움,
겨드랑이에,사타구니에 줄줄이 매달아 놓은 DDT 살충제 이약 주머니를 무색 할 정도로 들끓는
이를 잡아 들고 검열 점호를 받아야 하는 혹독한 전방부대 생활이 아련이 눈물겹게 그립기도
하구나.
호랑이작전 (GOP내 부대와 1년씩 부대 전체를 교대 이동 작전)으로 위장하여 밤새 철책선 안으로 부대 이동 작전을 마치고 아침 식사를 마치기전 벌써 대남 방송에서 " 78포병 부대 장병여러분
부대 이동에 수고가 많았다"는 손바닥 보듯 섬찍한 북한군의 남파 방송에 휴전선을 실감하기도
하였고,
그럴수록 밤새 싸늘한 총부리를 잡고 경계근무를 설때는 더없는 애국자인양 변해 있었고,
머나먼 고향땅은 무한한 애향심으로 가득한 남자로, 부모형제 그리울 때는 더없는 열열 효자 처럼
만들어버린 군대생활 ,
휴가 갔다온 전우의 선물로 히멀건 국물에 한줌의 미원(소위MSG) 맛이 그렇게도 맛이 있었으며
훈련 갔다 오는길에 훔처 따온 풋고추 한개의 엄청난 양념 맛은 어느 일류 주방장인들 인정 할까?
그래도 서서히 실력을 인정 받아 교육계, 서무계 업무도 훌륭히 수행 하였으며 그 덕분에 전기도
없는 호얏불 밑에서 열심히 한 3년을 근무한 댓가로 제대후 나도 모르는 사이 안경을 써고 있었다
게시판, 큰바위 등에 "때려잡자 김일성, 처부수자 공산당" 등등 수많은 구호를 쓰서 남겼으니
북한 공산당의 제1호 공적 이였을거고, 당시에는 상장, 표창장을 붓글씨로 쓰든 시절이라 내가
쓰준 멋진 부대 표창장,상장은 모든 전우들를 즐겁게 하였으리라,
고참이 되고는 본부 대대 돌팔이 의무병에게 사제 담배 1보루 상납하고 어설픈 포경수술의 영광도 있었고 일등병 상병까지는 편지도, 면회도 오더니만 병장 진급과 함께 꺼꾸로 신고 떠나버린
첫사랑의 고무신으로 인생의 쓴맛도 보았도다,
요즘에는 상상도 못 하겠지만 일년에 한두번 휴가를 올까 말까 하든 당시 군생활 36개월을
(나는 대학교련혜택으로 34개월) 최전방에 가두어 둔체 소위 고무신 꺼꾸로 신고 떠나간
첫사랑 여인들의 인간성을 한번도 의심해 보기는 커녕 행복하길 빌고 빌었든 대한민국 국군,
진짜 사나이들의 순수함을 알아 주기나 할까??
그래도 중부 전선 최전방 그멀리 비포장 길를
대구에서 고속버스로 ▶ 동대문 터미널 ▶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의정부▶ 연천▶대광리로
면회 와 주면 몇시간이나 걸리는 산길를 걸어 걸어 잠시 면회하고 용기를 주고 돌아 가신분들,
특히 떡보다리 식을까봐 깜깜한 세벽, 한걸음으로 면회 오신 어머니!!
새까맣게 타고 꽤제제 하게 볼품 없는 쫄다구 아들 모습에 한없는 눈물를 보이실때는 오히려
위로 해드리는 의젓한 대한민국 육군 일등병 아들의 모습에 대견해 하시든 어머니!!
당시 불편하고 허접한 최전방까지 면회 와주신,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청주 한씨 한달선 여사님 외 몇몇 친구들께 이제사 이글를 통해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 어머니, 사랑 합니다!!
면회 와준 몇몇 친구야 고맙다! 정말 고마웠다 !!"
이제 40년이 훌~적 지난 그곳
죽기 전에 꼭 한번 가고싶다 , 얼마나 변했을까?
과연 그곳이 또다시 나를 반겨나 줄까??
버릇 없는 김정은의 도발이 시작 되면 이 노병은 기꺼히 그곳으로 달려 가리라!!
( 출처 : www.dkcool.com 자유게시판 )
당당한 우리 포대의 주력포 105mm 곡사포다!
최대한 폼잡았다만 후줄건한 인민군 상거지 따로 없네
저멀리 부대가 보이고 이제 식당들도 있다, 포장도 되고, 생소 할 뿐이다
개울 건너 부대가 있었는데 전혀 모르겠다 다리도 놓여 있다, 개울가 징금다리였는데??
부대로 가는 군인들, 도로도 멋지네
부대 초입 입구에서 30년 가까이 장사 했단다, 첩첩산골 비포장길이 40년 발전상이네
결혼하여 30대에 내산리로 들어와서 장사 했다는 차순희 사장님께 사단이 빠뀌어 부대가 없어젔다는둥
그동안의 변화에 많은 설명을 들었다 (내가 제대하고 10년후에 들어 왔나보다)
전엔 20사단이였는데 5사단 열쇠 부대로 바뀐 상징
부대 이름도 생소하다, 기억이 없네
경원선 마지막 역 그런데 백마역이 하나 더 생겼단다
역사도 이쁘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