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피 글을 본 친구가 전체 나무를 보여주어야지 누가 수피에 관심을 갖느냐고 말했다. 수피 글을 쓰는 것은 즉흥적이었다. 생존 차원에서 나무 공부가 필요한데 아직도 나무가 그닥 와닿지 않는다. 나무에 감정이입을 시켜 생명력을 얻어낼 감흥도 없다. 여전히 나무는 수동적으로 한곳에 머물러 있는 정적인 물자체다. 그래도 가까이 하려고 그림을 시도했다. 정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찾은 게 글쓰기다.
왜 하필 수피일까? 과정으로 정해본 것이었다. 수피, 꽃, 잎, 열매, 수형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아마 또 바뀔 것이다. 다가가고 싶은 꽃이나 잎이 보이면 담아서 글로 써볼 것이다. 언젠가 나무와 감각적 물아일체가 되어 괜찮은 산문 하나 만들어 볼 것이다. 재미도 없고 관심도 없는 수피 이야기, 나를 위해 이어간다.
팽나무 수피를 본다. 얼룩져 있는 것이 만지기가 꺼려진다. 손으로 훑으면 검은 비듬이 뚝뚝 떨어질 것 같다. 저 안에서 물이 흐르고 양분이 흐르고 생장을 한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봄에 잎을 펼쳐 지구 생명의 원천인 광합성에서 필수요소라는 게 부적합해 보인다. 모양도 색감도 지저분하니 기능적 가치가 평가 절하된다.
억지로 인간사와 연결시켜 본다. 수피는 우리의 피부와 같다. 피부색은 인종 차별의 시작이었고, 이는 지구 어느 곳에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검은 석유는 환영을 받지만 검은 피부는 억압당했다. 수피가 보기 안 좋아도 좋은 목재는 환영받고, 좋지 않은 목재는 여전히 팽 당한다. 수피 속에 감추어진 목재의 질을 알아내느라 얼마나 고생들 많았을까. 하지만 나처럼 그런 거 모르는 사람은 그저 색깔로 수피를 분간한다. 그럼 정말 가까이 하고 싶은 수피는 있을까? 계속 봐야겠다.
팽나무 어원을 보자. “열매를 팽총의 탄환으로 사용할 때 날아가는 소리가 팽~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무엇이 먼저일까? 우연히 팽나무 열매를 나무총 총알로 쓰는데 그 소리가 ‘팽~’해서 그 총을 팽총이라고 했고, 그 나무를 팽나무로 했다고? 헷갈린다. 더군다나 팽총을 본 적도 없다.
팽나무 수피를 다시 본다. 여전히 얼룩져 있다. 시선이 오래 가지 않는다. 약간의 지식과 정보로 추론적 연결을 시도하지만 눈을 떼고 싶다. 아니 고개 올려 나머지를 보는 게 좋을 듯하다. 하지만 아직 잎이 나지 않았다. 지금은 내게서 팽 당하는 팽나무일 뿐이다. 그늘진 날 다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