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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묘(墓)
이송연
봄꽃이 서 있는 곳에 그녀가 있다. 나는 그녀가 보고 싶으면 꽃동산을 따라 언덕을 오른다. 서로 손을 잡은 연인들이 꽃을 보며 걷는다.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사진을 찍는 연인도 보인다. 나비가 사뿐사뿐 꽃잎을 보고 있다.
동천가에 앉아 빵조각을 던져놓고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송사리 떼를 보며 데이트를 즐기던 남녀가 눈앞에 걸어간다. 나는 남자와 여자를 돌려 세워 확인한다. 긴 생머리 휘날리며 수국 꽃처럼 웃던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그렇게 서둘러 가고 싶었던 곳은 어디였을까? 나는 친구의 주선으로 3월초 이른 봄에 다섯 살 터울인 그녀와 맞선을 봤다. 팔십 년대는 순천 시내에서 맞선을 보고나면 죽두봉을 가거나 산장을 가는 것이 일반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였다. 조금 더 발전하면 완행열차를 타고 여수 오동도를 갔었다. 맞선을 본 날 이루어진 첫 데이트는 몹시 수줍어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와 나는 서로 떨어져서 걸었고 약속이나 하듯이 죽두봉을 향했다. 동천다리를 건너면 좌측으로 동 순천역이 있고 역 앞 오솔길에는 서천을 향해 벚꽃 가로수가 심어져 있다. 동천을 가로지르는 덴바람은 봄이 와도 겨울을 물고 있었다. 벚꽃가지는 물이 통통 올라 성장하고 있는 듯 생기가 돌았다.
서로에게 호감이 넘나들어 우리는 자주 만났다. 초기 데이트는 동천 길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겨울이 물러나고 봄날이 따뜻하게 흘러왔다. 벚꽃가지를 무수히 드나들던 봄바람은 꽃망울을 흔들며 도리질을 한다. 간지러운 잇몸이 폭죽처럼 터져 꽃잎이 피어났다. 그녀는 벚꽃 봉우리를 보며 환호를 질렀다. 손뼉을 치며 두 팔을 벌리고 벚꽃을 향해 탄성을 지르는 그녀가 말괄량이 삐삐처럼 사랑스러웠다. 나는 꽃을 좋아하지 않아도 그녀와 같이 보는 꽃이어서 그 꽃들이 아름다웠다. 그녀 뺨이 벚꽃숭어리처럼 탐스러워 입술을 볼에 대보고 싶어 그녀 곁에 다가가 살며시 손을 잡았다. 그녀는 꽃에 정신이 팔려 내가 잡은 손을 뿌리치고 꽃송이를 두 손으로 잡고 향기를 맡는다. 그녀가 살짝 야속하여 잡은 손이 부끄러웠지만 기뻐하는 그녀를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꽃을 좋아한다고 했다. 특히 야생화를 좋아해서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꽃을 보는 것이 취미라고 했다. 마당에 다양한 들꽃을 심어 놓고 사계절 꽃과 함께 살고 싶은 것이 그녀의 소원이라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마당 넓은 집에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녀는 꽃 이름을 많이 알고 있었다. 야생화 이름을 들려주던 기억이 아카시아 향기처럼 스친다.
“양지꽃, 제비꽃, 매발톱 꽃, 노루귀꽃…….
그녀는 그 곳에서도 꽃 이름을 기억할까?
“나비처럼 날고 싶어요. 바깥세상이 나를 잊었어요.”
아내를 바깥세상에서 데려온 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나와 결혼을 한 후 바깥세상으로 나가지 못했다. 바깥세상이 그녀를 잊어버려서 나도 그녀를 잃어버렸을까?
“동천 길에 벚꽃이 피었을까요? 향림사 앞에도 벚꽃이 피었겠다.”
아내는 몇 년 동안은 바깥세상을 알고 싶어 했다.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 했고 여행을 가고 싶어 했다. 그녀는 집안에 있는 것보다 밖으로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언제부턴가 아내는 바깥세상을 벗어던졌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기억이 희미해지고 후줄근하게 떨어져 어딘가로 버려졌을까?
나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버스회사 운전사였다. 그녀를 만날수록 머릿속은 그녀로 가득 차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데이트 할 시간이 여의치 않아 기사들 눈치를 봐가며 근무 조를 바꿔 그녀를 만났다. 근무 조 바꿀 핑계를 모두 남용해서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회사 나가기가 싫을 때도 있었다. 그녀는 내 마음을 아는지 저녁 무렵이면 내가 운행한 버스를 탔고 첫 좌석에 앉아 차고지에 차를 입고시킬 때까지 함께 있었다.
그녀를 버스에 태우고 다니는 데이트는 꽃향기가 넘실거렸고, 동동거리는 심장의 떨림은 목화솜처럼 포근했다. 그녀는 들꽃처럼 순수하고 앙증맞았다. 우리가 만난 지 한 달이 지났을 때 장인어른 될 분이 내가 근무하는 회사로 찾아왔다. 나는 그를 근처 다방으로 안내했다.
“내 딸을 만나지 마시게 건달행세를 했다는데 어떻게 딸자식을 주겠는가? 섭섭해도 어쩔 수 없네.”
그는 담담하게 말하고 커피도 마시지 않은 채 찻값을 계산하고 나가버렸다. 욱하는 성격을 다스리지 못한 혈기왕성한 시절에 주먹깨나 쓰고 살았던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순천 소도시에서 알려고 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내 과거였다. 딸자식을 시집보낼 부모가 사윗감 과거를 캐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위 감으로 낙제점을 받고나자 교량이 끊겨 추락한 것처럼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나는 그날 버스 노선 운행도 펑크 내고 술을 마셨다. 하늘도 내 마음을 아는지 억수비가 쏟아졌다. 얼마나 퍼 마셨는지 기억이 없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아침이 되었고 낯선 곳이어서 벌떡 일어났다. 경찰서 유치장이었다. 나는 유치장 창살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동그란 얼굴에 줄무늬 뿔테 안경을 쓴 사내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사내를 보며 내가 왜 여기 있냐고 물었다. 그는 나를 밖으로 나와라 했다. 그는 앞장섰고 나는 그를 따라 교통 계 조사실로 들어갔다. 그는 나를 의자에 앉으라 했다. 그가 내 앞 책상에 앉더니 이번 사건을 맡게 된 김 형사라고 소개했다.
“김경태 씨, 음주 운전을 왜 했습니까? 피해자가 건널목에서 즉사했는데 기억나십니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남의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턱이 덜덜 떨렸다.
“아이가 초록 불일 때 건너는 것을 본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형사님 말도 안돼요? 제가 언제?”
“어젯밤 일곱 시 무렵 S초등학교 앞 건널목에서 음주사고 냈잖아요?”
“제가요?”
“사고를 내고 현장에서 만취상태로 잠들어 있는 것을 검거 했습니다.”
말도 안 돼? 내가 아이를 죽이다니? 나는 너무 억울했다. 바지 사이로 줄줄 흘러내리는 액체를 따라 병아리콩알 같은 눈물이 볼을 타고 입술로 떨어졌다.
“김경태 당신은 도로교통법을 위반을 했고 음주 운전으로 초등학교 2학년 여자 아이를 죽였습니다. 할 말 있습니까?”
“제가 아이를 죽이다니요?”
“목격자가 있습니다. 아이 엄마가 목격자이기도 하고요.”
“아이 엄마가 보는 앞에서 제가 아이를 죽였단 말인가요?”
“김경태 씨 승용차에 아이를 친 흔적이 있습니다. 증거자료로 사진 첨부했습니다.”
나는 정신이 혼미했다. 나는 며칠 전 개를 친 적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알 수 있는 자국이라 차일피일 미루고 고치지 않았었다. 설마 그 자국이……. 아이를 친 자국과 겹쳤단 말인가? 나는 고장 난 선풍기처럼 덜덜 떨며 경찰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산사태 속에 내 몸은 매몰되었다. 나는 포획된 짐승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두 눈만 깜박거린다. 죽은 아이는 학교 근처 속셈학원을 다녀오던 길이었고 아이 엄마는 아이가 학원을 마치고 건널목을 건너오면 장사를 마치고 아이랑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하루는 그날 멈춰버렸을 것이다.
“산 사람을 살리려고……. 그들 심정이 어떻겠느냐? 합의서를 받아왔다.”
교통사고 합의서를 내밀 던 어머니 목소리가 떨렸다. 심장을 절구로 찢는 통증 같은 것이 보였다. 내 눈에 물이 끓어 넘쳤다. 그 사건으로 부모의 평생 재산인 상가주택을 팔았고 징역 6개월을 살았다. 징역형을 받은 삶은 세상과 단절된 터널이었다. 아무도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을 것 같은 허무에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내 인생은 덫에 걸렸다. 아들 때문에 편안한 노후를 잃어버린 부모님, 살인자와 전과자라는 멍에를 지고 남은 삶을 살아 낼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내손에서 떠나가고 있었다. 감방에 앉아 죽을 궁리를 했다. 청산가리를 털어 넣고 목숨을 끊고 싶었다. 나는 내가 교통사고를 냈다는 사실을 받아드릴 수가 없었다. 기억상실증처럼 그 순간이 뭉텅 사라져 머리는 혼란스럽고 내 마음은 오락가락 걷잡을 수가 없다. 죽은 아이를 생각하면 미안함에 미칠 것 같다가도 아이를 죽인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머리는 깨질 듯 아팠다. 때로는 알 수 없는 그 날의 수수깨끼를 풀고 싶었다.
고통을 이에 악물 때면 나를 사지로 내몬 그녀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를 향해 칼을 꽂는 상상을 했다. 나는 밤마다 그녀 아버지 심장에 비수를 꽂으면서 일그러졌고 죽어가는 모습을 들여다보며 평정을 찾곤 했다. 증오로 가득 찬 내 얼굴은 살인마 가죽이다. 음주운전을 하게 된 이유도 지금의 이 현실도 그녀 아버지 때문이다. 그녀의 아버지를 수없이 죽이면서 나는 선(善)에서 폐쇄 되었다. 내가 복역을 마치고 교도소를 나왔을 때 그녀가 두부를 사 들고 교도소 앞에 서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내민 두부를 내동댕이치고 그녀를 노려봤다. 그녀의 눈물이 내 가슴에 햇살이 되어 고였다. 비탈진 산동네로 옮겨진 부모 집 골방에서 교통사고 현장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하루 종일 누워 지냈다. 부모님은 아이 부모를 찾아가 용서해 줄때까지 빌라고 성화였다.
“뭘 빌어? 보상해 주었잖소?
나는 기억이 캄캄하여 화를 냈다.
“그런 말 하면 죄받는다. 가서 죽을죄를 지었다고 빌어라?”
“에이 씨, 죄 값 받고 나왔는데 시끄럽소.”
나는 퉁명스럽게 내뱉고 돌아누웠다. 어머니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부모를 찾아가라고 했다. 나는 아이 부모를 찾아 가지 않았다. 아이는 이미 죽었고 금전 보상도 했고 징역도 살고 나왔기 때문에 끔찍한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아이부모를 찾아가 힘든 상황을 되풀이 하고 싶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쉬지 않고 아이가 생각났다.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날도 그녀도 아이도…….
그러나 나를 뜻대로 조정할 수 없어 벌컥벌컥 짜증이 났다. 누군가 끔찍한 일을 저지른 나를 알아볼까봐 낮에는 방에만 있다가 캄캄한 밤이 되면 거리로 나와 어슬렁거렸다. 술기운을 빌어 사고지점을 찾았다. 아이가 울며 달려 나올 것 같아 정신없이 도망쳤다. 나는 그 일로 운전대를 잡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 그 사건이 되풀이 될 것 같아 두려웠다. 내 몸에 막이 씌워진 것처럼 숨이 막힌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는 것 같아 초조하다. 명예회복을 하고 아무 일 없던 예전의 나로 돌아갈 방법을 궁리했다. 친구를 하나씩 불러 내 술 한 잔 사달라고 했다. 취기가 오르면 내가 아이를 죽이고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 하소연했다.
“그러니까 음주운전은 왜 해서 그러나?”
“기억이 없단 말일세.”
“음주운전은 습관이야.”
친구는 음주운전을 한 인간들 때문에 신세 망친사람이 한두 명이냐고 나를 조롱하듯 비아냥거렸다. 그러면 나는 화가 더 솟았다. 친구를 붙들고 그 사건은 기억도 없고, 함정에 빠진 것 같다고, 설명하고 또 설명하면서 너 나 믿지? 하고 되물었다.
“정신 차려 친구야, 네 맘이 그런들 누가 알아, 부모를 찾아가서 잘못을 빌어”
“내가 죽인 것은 아이였어. 부모는 이미 보상했다고.”
나를 충고하던 친구들은 술 한 잔 사주는 것을 끝으로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점차 사람을 피하느라 움츠러들였다. 일가친척들도 차즘 나를 멀리하며 수군대는 것만 같았다. 순천 시민을 찾아다니면서 이번 사건은 누군가의 모함이고 나와 무관하며 억울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나도 모르는 일이었다고?”
나는 나를 향해 소리치며 울먹였다. 그날 일은 필름이 끊겼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 일은 악마의 농간일 것이다. 내가 승용차를 몰고 그 시간에 왜 거기를 지나가다가 도로 위에서 잠이 들었는지? 범법자가 되었고 새싹처럼 피어나던 어린 생명을 죽였다. 얼굴도 모르는 그 아이가 목에 걸렸다. 나날이 도가니로 빠져들수록 맞선을 봤던 그녀가 보고 싶었다. 나는 그녀를 잊으려고 술을 마셨고 그녀 아버지가 생각나면 또 술을 마셨다. 술에 찌들어 살다보니 인생이 낭떠러지에 떨어져 망나니 형상이다. 나는 모자를 눌러 쓰고 허깨비처럼 밖으로 나왔다. 철물점에 들러 칼 한 자루를 샀다. 숫돌에 칼날을 세울 때 그녀의 미소와 그의 냉소가 겹쳤다.
한밤중 그녀의 집 담을 넘어 안방으로 침투했다. 잠들어 있는 그녀의 아버지를 힘으로 결박하고 그녀 어머니 손을 테이프로 묶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벌벌 떨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나를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칼날은 그녀 아버지 목젖을 겨냥하고 내 손은 버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어르신, 제가 징역 살다 왔습니다. 그날 어르신이 반대만 안했어도 술을 마시지 않았고 음주운전으로 아이를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 인생 개떡이 돼버렸습니다.”
내 목소리에 잠에서 깼는지 그녀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를 죽이세요. 모든 게 저로 인해 생겼습니다. 그 칼로 저를 찔러 주세요.”
나는 그녀를 그녀 방으로 끌고 가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하고 말았다. 그녀는 아무런 거부의사도 없이 내가 행하는 짓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녀의 볼에 맑은 눈물이 주렁주렁 떨어졌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황급히 집으로 돌아와 그녀에게 했던 짓을 후회하며 울부짖었다. 그녀 생각으로 가슴이 미여졌다. 그녀를 잊으려 해도 그녀 생각으로 밤잠을 설쳤고 눈가에 그녀만 보였다. 입은 소태가 되었고 음식을 넘길 수 없었다. 나는 열병을 앓았고 초췌해졌다. 그녀 집 앞을 서성였고 때로는 대문을 기웃거렸다. 여자의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직장을 잡아야지. 처자식을 먹여 살릴 것 아닌가? 취직을 하게”
직장이 있으면 결혼을 허락 하겠다는 말투로 들렸다. 나는 그분의 손을 덥석 잡고 눈물을 후드득 떨어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직장을 구하러 다녔다. 배운 것 없고 재주 없는 백수가 할 수 있는 일은 막노동밖에 없었다. 막노동을 내밀고 결혼 허락을 받아 낼 수는 없었다.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 가는 곳마다 운전면허를 요구했고 기술이나 자격증을 요구했다. 구직을 나서면 전에는 뭣을 했냐고 물었다. 나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현기증이 나 말을 버벅거렸다.
내가 음주운전으로 살인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시선으로 볼까? 그것도 어린아이를……. 부모가 보는 앞에서 말이다. 위기에서 내가 살 돌파구는 그녀였다. 나는 그녀만 있으면 희망이 생길 것 같아 그녀와 결혼을 해야 했다. 내가 근무했던 운수회사로 갔다. 운수회사 사장은 건너, 건너 안면이 있던 형님이었다. 회사에 자리 하나 마련해 달라고 부탁할 심사였다. 사장은 운전 말고는 내가 일할 마땅한 자리가 없다고 거절 했다. 나는 순간 울컥 했다.
“형님 제가 사고 내서 안 되는 겁니까?”
“그것도 그거지만, 차라리 운전을 하게, 기다렸다가 운전면허 취득해서 다시 오게.”
갑자기 그녀와 결혼 할 대안이 떠올랐다.
“형님 월급 없어도 좋은 게, 감투 하나만 주십시오? 총무라든가. 사무장이라든가.”
“감투를 어디다 쓰려고 그런가?”
“제가 점찍은 여자가 있습니다. 결혼만 하면 그깟 감투, 내 놓겠습니다.”
“좋네, 그렇게 하소”
여자 때문이라고 말하자 형님은 흔쾌히 허락했다.
“형님, 명함 새겨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게.”
나는 명함에 동천운수 사무장이라고 새겼다. 명함을 들고 장인어른 될 분을 찾아 갔다.
“정숙이 뱃속에 자네 아이가 들어 있다고 하네, 지난일은 잊고 잘 살았으면 좋겠네.”
내가 그날 그녀 몸에 생명을 심었다는 것이다. 장인어른의 허락을 받아 그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살림은 산동네 달 방에서 시작했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네. 좋을 날 있을 거네. 김 서방을 믿네.”
장인어른의 격려에 몹시도 부끄러웠다. 직업이 없는 나는 아침밥을 먹고 밖으로 나와 저녁 퇴근시간에 맞춰 집으로 들어갔다. 날마다 거짓으로 직장을 나간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었다. 월급을 가져다주지 못해 아내 눈치가 보였다. 나는 용기를 내 아내에게 회사를 그만 뒀음을 알렸다. 도둑이 들어 관리하고 있던 공금을 모두 잃었다는 거짓말을 했다. 월급도 모두 공금 갚는데 털어 넣고 나머지는 그만 두는 것으로 종결 지었다고 했다. 능숙한 거짓말에 내 스스로 놀랬다.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 뒀다고 말한 후 마음이 홀가분하여 아내와 있는 시간이 많았다. 아내는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볼 뿐 묻지는 않았다. 나는 산입에 거미줄 치냐고 도둑 발 저린 것처럼 큰소리를 쳤다. 장인 장모는 딸을 결혼시킨 달부터 쌀과 부식거리를 대주곤 했다.
“빨리 기반 잡으라고 대주는 것이니 열심히 살게.”
고마우면서도 가슴에 음식이 얹혀 편하지 않았다. 아내는 친정에서 가져온 쌀과 찬으로만 밥상을 차렸다. 장모님 음식 솜씨가 좋아선지 아내 음식솜씨도 좋았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두렵고 겁이 났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해 막노동을 나갈까도 생각했지만 인맥이 끊어져 남 앞에 나설 자신이 없었다.
임신을 한 아내는 친정에서 쌀을 가져오면 쌀 일부를 팔아 밀가루를 한포 샀다. 우리는 칼국수와 수제비로 끼니를 때울 때가 많았다. 아내가 만든 밀가루 음식은 내 입에 맞아 매일 해줘도 질리지 않았다.
“여보 우리 분식가게 내볼까요?”
아내는 나를 설득하며 장사를 해보자고 했다. 아내는 배가 불러 오르자 미래가 걱정이 되었는지 가게를 보러 가자고 졸랐다. 우리는 생활정보지를 들고 가게를 보러 다녔고 돈이 없는 관계로 변두리만 찾았다. 방이 하나 딸린 다섯 평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아내는 가게가 맘에 들었는지 그 가게를 결정하자고 했다. 가게는 소액의 보증금에 월세를 내는 가게였다. 결혼 예물을 팔고도 보증금 낼 돈이 모자랄 것인데 걱정이 되었다.
결혼예물이래야 아내 금반지 두 돈과 내 반지 석돈 넥타이핀이 전부였다. 아내는 어디서 돈을 구해왔는지 보증금을 내고 장사에 필요한 도구를 장만했다.
“결혼 하면 살림살이 사려고 처녀 때 모아둔 돈이 있었어요. 빌린 돈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산동네 달 방에서 신혼 방을 차렸으니 살림살이 살돈이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칼국수와 수제비 글씨를 가게 유리창에 큼지막하게 새겼다. 가게 목이 좋은 자리가 아니어서 손님은 가끔 있었다. 아내는 손님을 기다리느라 다섯 평 밖을 나가지 않았다. 늦은 저녁까지 손님을 기다렸고 시장은 내가 봐다 주었다. 서툰 장사가 시간이 흐르면서 능숙해졌고 아내의 음식 맛에 다시 찾은 손님이 늘었다.
“여보 바깥세상이 궁금해요. 하루 가게 쉬고 봄나들이 다녀오면 어떨까요?”
1년을 휴일 없이 지내던 아내가 나가고 싶어 했다.
“가긴 어딜 가. 누구 때문에 이러고 사는데?”
나는 아내 말을 칼처럼 막았다.
“살기위해 장사도 하는 거잖아요. 봄, 가을 한번 씩 나들이 갔으면 좋겠는데 안 될까요?”
“속 편한 소리 하고 있네, 내가 놀러 다닌다하면 남들이 뭐라 하겠어. 다 당신 아버지 때문이야.”
내 속을 모르는 아내가 답답했다. 음주사고로 아이를 죽였는데 희희낙락 놀러 다니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는가? 장사를 하면서 아내는 가끔 씩 꽃이 생각나는지 지금은 능소화가 피었을 거라고 했다. 때로는 어느 집 담장에 노란 장미꽃이 피었냐고 물었다. 나는 꽃을 좋아하지 않아 아내 말에 시큰둥하고 지나갔다. 아내는 아이를 낳는 날도 장사를 했다. 아내 몸이 걱정이 됐지만 괜찮다고 말해서 나는 아내가 장사를 해도 말리지 않았다. 여러 해가 지나자 단골이 생겨, 먹고 사는 걱정이 줄었다. 아내는 아이를 업고 장사를 했고 아이가 잠이 들면 밀가루 반죽에 매달렸다. 나는 가게 손님용 탁자에 앉아 신문을 보거나, 밖으로 나가 시장을 한 바퀴 돌고 오는 일상이었다. 연락을 끊었던 친구들이 연락을 했다. 저녁시간에 가끔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고 돌아 왔다.
“여보 오늘 바빴는데 누구랑 술 마셨어요?”
“그걸 알아서 뭐하게.”
“저는 당신이 술 마시는 게 싫어요.”
“왜 돈 아까워서, 누구 때문에 내가 이러고 사는데, 다 당신 아버지 때문이잖아.”
나를 찾아오는 친구들이 늘었다. 나는 지난날 신뢰를 찾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고 술을 샀다. 내가 가게에 없어도 그녀는 아이를 들쳐 업고 장사를 해냈다. 아내는 내가 저녁이면 장사 일을 돕지 않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트집 잡았다.
“여보 너무 힘들어요. 아이들이 어리잖아요. 당신이 도와줄 수 없어요?”
“장사를 하자는 사람은 당신이었어. 자신 있어서 그랬던 것 아니었어?”
아내는 심술이 난 얼굴로 입을 닫았다. 그후로 아내는 나들이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첫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난 가을이었다. 아내가 유치원에서 아이 편에 보낸 안내문을 내밀었다. 나는 안내문을 읽지 않고 옆으로 밀었다.
“여보 아이 유치원에서 자연학습을 학부모랑 간다고 하는데 가게 하루 쉬면 안 될까요?”
“장사 마치고 가, 지금 제정신이야?”
그것은 가지 마라는 말이었다. 그녀를 참 사랑했다. 그런데 그녀만 보면 삐딱한 마음이 생기고 화가 불쑥 치미는 것이었다. 그녀가 내 인생을 망가뜨린 것 같아 괜 시래 화가 난 것이다.
아내가 장사를 시작한지 이십오 년이 흘렀다. 아내가 열심히 장사를 한 탓이었는지 통장에 돈이 제법 모였다. 두 아이는 실업고를 나와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허름한 식당을 벗어나 폼 나는 장사를 하고 싶었다. 아내에게 내 의사를 통보했을 때 아내는 가게를 오래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제 나이가 이제 오십이에요. 오래 하고 싶지 않아요. 하던 데서 삼년만 더 하고 쉬고 싶어요.”
나는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신도시 번화가에 가게를 임대했다. 실내인테리어를 젊은 세대에 맞게 꾸미고 종업원을 뽑고 유니폼을 입혔다. 칼국수 수제비 메뉴에다 돈가스 스파게티를 추가했다. 아내는 여전히 주방에서 분주하다. 메뉴가 늘었으니 일이 더 많아졌을 것이다. 가게 매출은 이사 전보다 몇 갑절 늘었다. 가게를 옮기고 나서부터 아내는 표정이 없었다. 우리는 눈 맞추는 일도 잠자리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내 앞에서는 육체적 성욕도 일어나지 않아 밖에서 풀었다. 아내 품은 늘 음식 냄새로 찌들었고 내 품을 떠나 있었다. 아내의 일과는 밤 열두시가 넘어야 끝이 났고 아침 일곱 시면 가게를 열었다. 기계처럼 딱딱하게 변해버린 아내가 멀게 만 느껴졌다.
벚꽃이 피는 봄이 오면 아내가 생각날 때가 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 동천을 돌았다. 아내에게 꽃이 피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내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들면 “여보 바빠요 나중에 해요?” 로 마무리 지었다.
아내는 모두가 쉬는 시간에도 늘 바삐 뭔가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공휴일이면 가게로 찾아와 엄마도 일주일에 한번 씩 정규휴일로 쉬게 해달라고 졸랐다. 아내는 가게를 쉴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은 돌아가면서 쉴 수 있어도 엄마는 주방장이어서 쉴 수 없다고 아이들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바깥세상이 나를 버린 지 오래다.”
아내는 이 말만 되풀이 했다.
“아빠 정말 너무 하세요. 엄마 쉬게 하시고 주방장 구하세요? 지금까지 몇 년이에요?”
“엄마 예순 살 되면 쉬게 될 거다. 아빠나이 예순다섯이면 그만 할 생각이니까.”
“아빠는 독재자에요. 엄마를 군림하는 독재자.”
“가게 정리하면 죽는 날까지 쉴 텐데 젊을 때는 일을 해야지.”
“엄마는 단 하루도 쉬는 날이 없잖아요.”
아내가 쉬면 가게 문을 닫아야 한다. 한 달 나가는 것이 얼만데 가게 문을 닫을 수 없다.
“바깥세상이 나를 버렸다.”
아내 얼굴에 혈색이 없다. 여러 번 들었던 말인데도 오늘따라 아내가 던진 말이 가슴에 들어와서 나가지 않는다. 가게 수입은 많아도 나가는 것이 많았다. 보증금과 시설비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충당했지만 월세가 딸려 있어 매달 버거웠다. 종업원 월급과 사대보험까지 내고 나면 이사하기 전이나 별 다르지 않았다. 주위에서 사장이라고 존경을 표하면 어깨가 으쓱했고 그것으로 만족했다. 나는 지인들이 우러러 보는 자영업 성공 인이 되었다.
“여보, 이제 쉬고 싶어요”
아내가 날벼락 같은 선전포고를 했다. 나는 전원주택 구입할 꿈이 있었고, 내 나이 육십 다섯 살에 은퇴할 계획까지 미리 짜 뒀다. 내 계획을 알고 있었던 아내가 식당 일을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쉬고 싶다는 아내를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몇 년 만 더 식당을 하자고 졸라도 아내는 싫다는 것이다.
“하루도 가게를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만 일 할래요.”
“그러는 이유가 뭔데?”
갑자기 반란을 하는 그녀가 정분(情分)이 나서 그러나 의심이 들었다.
“어떤 놈이 그러라고 하던?”
아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제기랄, 주방장 월급이 얼만데?”
주방장 월급을 거론해도 아내는 싫다고 한다. 나는 임시 주방장을 구해 놓고 주방장 월급을 아내에게 주겠다고 달랬다. 아내가 그렇게 고집이 셌던가? 어르고 달래도 아내는 식당을 나오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 아내가 없는 식당은 온기가 사라졌고 그녀가 주방에 없다는 불안감에 음식이 제대로 만들어 졌는지 손님들 표정을 살폈다. 더러는 주방장을 바꿨냐고 묻는 이도 있었다. 나는 장사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면 가만히 앉아 있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하루 종일 뭐 했는데?”
그녀는 나를 투명인간 취급을 한다. 물어도 대답을 않는다.
“나 몰래 어떤 놈이 생겼어?”
나는 맘에도 없는 억지소리를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내와 같이 있는 시간이 고역이었다. 나도 아내도 할 말이 없었다. 장사를 시작하면서 부부간의 대화가 끊어졌다. 하루 종일 같은 공간에서 살았는데 너무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그동안 아내는 식당 밖을 나가지 않고 주방 전등불 아래서 수제비와 칼국수를 만들어 냈다. 아내는 일하느라 친구도 모두 끊어졌고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내와 내가 처음 가게를 냈을 때 우리는 묵시적으로 365일 가게를 열어야 된다고 결정 한 것처럼 휴일 없이 장사 하는 것을 당연시 했다. 장사 초기에는 먹고 살기 급급해서 쉬지 않고 가게 문을 열었고 먹고 살 만큼 여유가 생기자 다달이 나가는 월세가 아까워 수제비 한 그릇을 팔더라도 가게 문을 열었다.
지난날 아내는 하루 24시간 가게에 대기 상태였고 근무 중이었다. 힘을 모두 소진해 버려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을까? 아내가 번 아웃 증후군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내는 하루 종일 집에서 무엇을 할까? 나는 가게에서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다. 밝고 환한 것을 좋아했던 아내가 아침에 해가 떠오르는 것이 싫다고 했다. 아침이면 아내는 햇살을 피해 이불 속에 파묻혀 꼼짝도 않고 누워있다. 내가 가게로 출근하려고 신발을 신고 있을 무렵 아내가 검은 천을 사다 달라고 했다. 아내는 천으로 커튼을 만들어 달았다. 아내가 궁금해 손님이 뜸한 낮 시간에 집에 들어가면 아내는 커튼을 치고 전등을 켜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전등을 끄면 실내는 캄캄한 밤이었다. 내가 커튼을 치우면 커튼자락을 잡고 놓지 않았다.
“그래 여태껏 못 잔 잠을 몰아서 자봐.”
아내가 실컷 자고 싶어서 커튼을 쳤나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가게로 나왔다. 나는 하루 세끼를 가게에서 때우느라 아내가 만든 음식을 집에서 먹지 않았다. 그녀는 야위어갔고 언제나 무슨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내 없이 하는 장사는 뒤죽박죽이었다. 주방은 버려지는 음식 재료가 넘쳐났고 주문이 들어가면 음식 나오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손님들은 음식이 늦게 나온다고 투덜거렸고 나는 지쳐갔다. 경비를 제하고 나면 손에 쥐는 돈이 내 일당 수준이었다. 아내와 일할 때는 주방장 월급이 나가지 않아 여유로웠다. 나날이 변해가는 아내를 보면서 아내가 침묵을 무기삼아 전쟁을 걸어온 것처럼 보였다.
“어디 아파?”
내가 그녀에게 너무 무심한 생각이 들어 물어보면 대답을 하지 않는다. 아내가 주방으로 돌아 와야 가게가 안정될 것 같았다. 아내를 가게에 나오게 하려고 집으로 뛰어가면 아내는 딴 세상에 사는 것처럼 세수도 하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는다. 머리는 빗질을 하지 않아 엉켜 있다. 아내의 몰골을 보고 다시 가게로 나설 때면 아내가 구질구질하고 벗어둔 헌옷 같았다. 이슬비가 새벽부터 내리는 날이었다. 비가 오는 날은 칼국수와 수제비 손님이 많이 온다. 일이 바빴지만 집에 무슨 일이 있을 것만 같아 불안했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집으로 달렸다. 아내가 쓰러져 있었다. 나는 그녀를 들쳐 업고 택시에 태워 병원으로 달렸다.
“수면제 과다 복용입니다. 자살을 기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의사 말을 듣고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아내에게 일을 안 하고 사니까 편해서 그런다고 일을 하라했다. 죽을힘으로 못 할게 뭐가 있냐고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었다. 가게는 나날이 손님이 줄었고 적자가 이어졌다.
“정숙이가 농약을 마셨어요.”
점심 장사를 하다가말고 k병원으로 달렸다. 처형이 전화를 한 것이다. 동생이 걱정돼서 들렸는데 농약을 먹은 것 같다고 했다. 빨리 발견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지만 나를 골탕 먹이는 것 같아 화가 치밀었다. 나는 그녀가 썼던 유서를 들여다보며 할 말을 잃었다.
‘답답해요. 훨훨 날고 싶어요.’
마지막 하고 싶은 말이 이것밖에 없었을까? 자식들이 병원으로 달려갔는지 가게를 찾아왔다.
“아빠 가게 문 닫으세요. 엄마 잘 못되면 우리는 못 살아요. 제발 요 아빠.”
농약자살 사건 이후 자식들의 성화에 가게를 시설비 절반도 못 건진 헐값에 팔았다. 사실 아내 없이 장사 하느라 지쳐 있었고 다달이 나가는 경비가 많아 적자가 쌓여서 하루라도 빨리 문 닫는 것이 이득이었다. 나는 아내 핑계를 대고 가게 문을 닫았다. 아내 곁에서 그녀를 감시하고 있다. 아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이 없다.
“훨훨 날고 싶어요. 바깥세상이 나를 잊었어요.”
예전에 했던 아내의 말이 내 머릿속에서 활개를 쳤다. 아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 하면 그녀는 주저앉아 일어서지 않았다. 아내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동천 둑을 같이 걸었다. 동천도 모두 변해버려 그녀는 낯선 곳을 보듯 말이 없다. 아내를 죽두봉 공원으로 데려 갔다. 죽도봉도 그녀는 낯설어 했다. 순천 어디에도 그녀를 데리고 다닐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아내는 하루 종일 입을 다물고 살았다. 초점 없는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풀려 있다. 아내를 홀로 둘 수 없는 날이 이어졌다. 나는 술 한 잔 마시러 나갈 수도 없었고 사우나 한번 갈 수가 없어 갑갑했다.
자전거 타고 동천을 한 바퀴 도는 것이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내 맘대로 나갈 수 없게 되자 화가 치밀어 아내를 향해 차라리 죽어 버려라고 고함을 질렀다. 하루 종일 아내를 따라 다녀야 했다.
가게를 그만 둔 후로 씻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 내가 가게를 그만두기 전부터 그녀 몸은 씻지 않았는지 시큼한 냄새와 채취가 흘렀다. 나는 창문을 열어 공기를 환기시켰다. 머리카락에 기름때가 끼고 몰골은 노숙자처럼 꾀죄죄하다. 아내를 씻기려고 옷을 벗기려 들면 아내는 옷을 벗지 않으려고 양손을 겨드랑이에 끼고 나를 빤히 본다. 나는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벗지 않는 옷을 가위라 잘라서 맨몸의 아내를 욕조에 담갔다. 아내 몸에서 우동 면처럼 굵은 때가 쏟아졌다.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몸은 젊은 시절 징표 한 장 남기지 않고 삭아 있었다.
“내가 그토록 가슴 태우며 사랑했던 여자가 당신이었어?”
나는 이태리타월로 아내의 알몸을 문질렀다. 뜨거움을 불태웠던 그녀의 음부는 산자락을 들어낸 벌거숭이 산이었다. 내 손은 야윈 그녀의 허벅지에 한동안 멈췄다. 젊고 탱글탱글했던 그녀가 수분도 윤기도 사라져버린 낙엽이다. 아내가 이렇게 변할 동안 나는 그녀를 위해 무엇을 했던가? 아내의 손을 잡았다. 벚꽃망울을 만지던 그 곱던 손은 어디로 갔을까? 손마디가 나무토막처럼 굵고 굽어 있다. 투박한 그녀의 손은 부엌데기 손이었다. 닳고 닳은 손가락 뼈마디가 울퉁불퉁하다. 서먹서먹한 손이다 그녀의 체온 또한 낯설다.
아내의 다리에서 내 눈이 뜨거워졌다. 꽃을 향해 뛰어 다니던 그 다리는..., 지렁이처럼 꾸불거리는 퍼런 혈맥들, 아내의 다리는 튀어나온 혈관들로 뒤엉켜 있었다. 아내의 몸을 들여다 본 날이 언제였던가? 나는 아내 몸 구석구석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두 아이를 임신하고도 그녀는 주방에 서서 일을 했다. 그녀는 앉는 법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나는 아내를 빚에 저당 잡힌 여자로 대했다. 아내는 이기적인 남편을 만나 서서히 망가지고 있었다.
“여보 미안해, 내가 잘할게.”
뜨거운 것이 내 목젖을 밀고 올라왔고 나는 아내 몸을 씻기면서 숨죽여 울고 있었다. 아내는 꽃다운 나이에 나를 만나 오십 중반이 되도록 주방에서 살았다. 가스불 앞에서 수제비를 떼 넣고 칼국수를 끓이고……. 모든 것이 당신 아버지 때문이라는 내 감옥 안에서 마디가 삭정이 되도록 일을 해왔다.
들꽃의 싱그러움에 통통 튀던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동년배 보다 십여 년은 더 늙어버린 아내, 나는 그녀에게 친구도 이웃도 모두 단절시켰다. 내가 그녀를 감금하고 지배하며 단 하루도 바깥세상으로 보내 주지 않았다.
자식들이 어버이날 온다는 기별을 했다. 나는 아내와 함께 교외로 나가 드라이브를 하고 외식을 할 생각이다. 고급 스테이크를 먹고 와인도 한잔 할 계획을 세웠다. 아내가 좋아하는 야생화 카페에 앉아 차도 마실 예정이다. 야생화 카페는 지인을 통해 미리 알아뒀다. 아내에게 처녀 때 감성을 되돌려 꿈을 찾아 주고 싶었다.
“여보, 우리 애들이 온 다네.”
아내는 아이들이 온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미소를 보였다. 그 미소는 낯설게 내 가슴에 들어온다. 내 아내도 웃을 수 있는 여자였다. 언제부턴가 나는 그런 사소한 것들을 잊어버렸고 아내를 가장으로 내 몰았다.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근사한 나들이가 될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뜻 모를 뻐근함이 저려온다. 지금까지 살면서 아이들과 외식 한번 하지 않았고 추억한번 만들어 주지 못했다. 늦었지만 이제는 가족을 위해 살고 싶다.
“아빠 톨게이트에요. 집으로 가고 있어요.”
딸아이 전화였다. 나는 아이들이 당도하기 전에 돈을 찾아두고 싶었다. 아내를 두고 나갈 수 없어서 아이들이 집에 도착할 무렵까지 기다렸다.
“여보 십분만 혼자 있어? 나 은행 다녀올게.”
아이들 도착시간을 짐작하면서 돈을 찾기 위해 근처 은행으로 갔다. 아들과 딸이 집으로 오고 있었고 아내도 자식들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십 분이내면 은행에 다녀올 수 있다. 어쩌면 아이들은 내가 도착하기 전에 집에 와 있을 수도 있다. 내가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은행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정확히 8분20초가 걸렸다. 엘리베이터 버튼이 8층에 멈춰 있었다. 아이들이 도착했을 것 같아 번호버튼을 누르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아들과 딸이 달려 나왔다.
“아빠, 엄마가 안 보이는데?”
등줄기에 칼날이 깊게 지나갔다. 나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 농약냄새가 확 풍겼다. 입에 거품을 물고 아내가 쓰러져 있었다. 아내의 눈동자는 흰자위 째 벌러덩 뒤집어져 있다. 그녀 옆에 농약 잔유물이 쏟아져 있었다. 아내를 병원으로 이송해 위세척을 했다.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했다. 아내는 보름간 신음하다 저 세상으로 떠났다. 외출을 하지 않던 그녀가 어디서 구했는지 그녀는 맹독성 농약을 털어 먹었다.
내가 식당을 그만둔 뒤에는 24시간 아내와 지냈다. 이발소에도 아내를 데리고 다녔고 은행에도 아내를 데리고 다녔다. 아이들이 오는 그 잠깐 사이에 농약을 사러갈 시간은 없었다. 농약 방은 주로 웃시장이나 아랫시장에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는 삼십분 이상 소요되는 거리였다. 아내는 오래전에 농약을 준비했던 것 같다. 아이들이 집으로 오고 있었는데 그 시간에 그것을 먹어야 할 만큼 중대한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빠, 엄마를 왜 혼자 두고 나가셨어요?”
자식들의 원망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엄마는 아빠가 죽였어요. 다 아시죠?”
“그래 내가 죽였다.”
아내를 죽인 사람은 나다. 자식들은 아빠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무능력하여 아내만 보고 살았다. 물고기가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것처럼 내 인생을 거슬러 올라 되돌리고 싶다. 그녀와 맞선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녀 아버지가 반대를 하지 않았더라면, 음주운전으로 아이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뭔가 잘못 돼버린 인생이다. 엉킨 실타래를 어디서 푼단 말인가? 나는 국화꽃 위에 있는 영정사진의 아내를 보고 있다.
“왜 그렇게 갔어? 이제 잘 하려고 했는데.”
나의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장인어른이 딸을 보내러 장례식장으로 들어왔다. 장인이 뚜벅뚜벅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나는 장인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김 서방 이제 시원한가? 정말 자네 사위 삼기 싫었네. 내가 자네에게 딸을 줬던 것은 내 판단(判斷)으로 자네 인생이 어긋나서 미안해서였네.”
장인은 그 말을 던지고 아내 영정 앞에 섰다.
“열심히 살았다. 고생 많았다. 훨훨 날아가거라.”
아내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나를 보는 조문객의 눈초리가 그날 아이를 죽였던 소문처럼 매섭다.
“형부, 언니 뜯어먹고 살아서 좋았어요?”
“우리나라 법에 종업원도 한주에 한번은 쉬게 하는데 어찌 그리 독한가? 그러니까 어린것을 죽이고도 살았지?”
장모는 내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딸자식을 저런 놈한테 허락을 하고…….”
장인 가슴을 때리며 장모가 고꾸라진다.
“제부, 자네가 내 동생 무덤이었네.”
무덤 속으로 왜 시집을 보냈냐고 장인을 원망하는 아내 자매들을 보면서 아내 죽음이 슬프지 않았다. 나는 자살을 한 아내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했는데 아내는 아니었단 말인가? 나는 아이를 죽였고 아내는 자신을 죽였다. 얼마나 독하면 자신을 죽일 수 있을까? 나는 음주운전으로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 아이를 죽이고 그 사건에서 하루도 자유롭지 못했다. 마음 편하게 아내만 뜯어먹고 살았냐고 물어도 할 말이 없다. 어떻게 사람을 죽이고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뻔뻔하게 잘 사냐고 뒷 담화를 해도 살아서 감수해야 할 내 일이었다. 아내의 자살로 아내가 죽은 원인도 나고 가해자도 내가 되었다. 남겨진 가족을 사랑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내는 남편도 자식도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 목숨 제 손으로 끊는데 별수 있습니까? 한정숙이를 원망 하십시오.”
나는 눈물을 튕기며 처가 식구를 향해 고함을 쳤다. 그동안 참아왔던 울분이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쏟아졌다.
“아빠, 엄마는 우울증 환자였어요. 스스로 그렇게 되셨을까요?”
“내가 우울증을 만들었단 말이냐?”
“그래 자네가 만들었지 누가 만들었겠는가? 김 서방, 내 딸이 얼마나 밝고 활달하고 맑은 아가씨였는가? 자네도 알 것 아닌가?”
“아빠가 엄마를 아내로 대해 주신 적 없잖아요? 평생을 죄인취급하면서 노동력을 뜯어먹고 살았잖아요?”
아이와 장모의 원망을 들으며 멍하니 앉아 있는 내 앞에 처형이 마주 앉았다. 그녀는 소주를 따라 마시더니 내게 소주잔을 내민다.
“우리 정숙이가 김 서방 자네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기는 아는가?”
“사랑 요? 사랑하는데 자살을 해요?”
“자네가 사랑 좀 주지 그랬는가? 사랑하지 않았으면 자네를 선택하지 않았을 거네.”
그녀는 내가 한 몹쓸 짓으로 그녀 자궁에 아이가 잉태 되었을 때 아이를 버리지 않고 나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버린 몸으로 어떻게 시집을 가서 살겠느냐고 아이를 낳는다고 고집을 꺾지 않아서 결혼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처형이 그 말을 전하면서 자식이 원하지 않은데 그 조건의 남자에게 딸자식을 시집보낼 부모가 있었겠느냐고 물었다.
아내에게 사랑을 주지 못했던 후회가 회오리를 던졌다. 나는 지난날을 더듬어 아내가 죽은 원인을 밝혀내고 싶었다. 그 아이 부모는 어떻게 살았을까? 아내가 죽은 것은 그 아이가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 아이만 죽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내를 괴롭히며 살진 않았을 것이다. 그 부모가 저주를 해서 내 인생이 틀어졌을 것이다.
피해자만 억울하냐고 따져보고 싶었다. 가해자는 그러고 싶어서 그랬냐고 그래서 나는 한평생 이렇게밖에 살지 못했노라고 말하고 싶다. 이제 아내가 죽었으니 두려운 것도 없고 미안함도 모르는 파렴치한이 되어도 상관없다. 누가 내 인생을 구렁텅이로 내몰았는지 어디서부터 뭐가 잘 못 되었는지 철면피 뒤집어쓰고 알아야 했다.
그 아이 엄마는 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니는 길목 노상에서 떡볶이를 팔고 있었다고 했다. 그 날도 떡볶이 팔던 것을 정리하다가 사고를 목격했다는 것이다. 나는 노모를 찾아가 합의서를 받으러 갈 때 그들이 어디에 살았느냐고 물었다.
“이제 철이 들긴 하는 거냐? 너무 늦었다. 그때 사죄하라고 그렇게 말했을 때 듣지.”
노모는 오래 돼서 몇 동 몇 호에 사는지는 기억이 없다고 말하면서 K임대 아파트라고 했다.
“사죄도, 용서도, 때가 있는 것이다. 너무 늦었다. 헛걸음 말거라?”
노모는 아파트를 알려 주면서도 가지 말라고 말렸다. 나는 그들이 살고 있는 K임대아파트 관리사무소를 찾았다.
“실례합니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몇 동 몇 호에 사는 누구를 찾으십니까?”
“그걸 모르니까 관리사무소에 찾으러 왔지, 알면 뭐 하러 온답니까?”
나는 쏘아 붙이며 의자에 앉았다. 육십 세가량 되어 보이는 관리소장은 여자였다. 그녀는 하이 톤 목소리로 매우 상냥했다.
“삼천세대 이상 살아서 동 호수 모르면 찾기가 힘들 거예요.”
“삼십여 년 전 저기 초등학교 앞에서 떡볶이 팔던 아줌마 기억나십니까?”
“그 사람은 왜?”
“아는 먼 친척입니다. 왕래한지가 하도 오래 되서 찾아보려고요.”
“방송도 탔는데 아무리 멀리 살아도 그렇지…….”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그 가족이 우리 아파트에 살았는데 지금은 안 살죠.”
관리소장은 그 가족을 잘 알고 있는 듯 말하면서 지금은 모르는 것처럼 말했다.
“어디로 이사 간 줄은 아십니까?”
상냥하던 그녀의 얼굴에 먹구름이 분노를 몰고 오듯 붉어졌다.
“ 그 집 딸이 교통사고로 죽었잖아요. 그 후로 그 집 쑥대밭이 되었어요.”
“보상을 받았을 텐데, 그러면 남은 가족은 살잖아요.”
나는 보험회사에서 받은 보상과 내 부모님 재산을 떠올리며 넓은 아파트로 이사해서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보상 요, 자식이 눈앞에서 죽었는데 그깟 보상이 뭔 필요가 있답니까?”
“보상 받은 돈으로 이사를 갔나요?”
“죽을 때까지 우리 아파트에 살았습니다.”
“죽다니요? 누가 또 죽었습니까?”
“운전자가 잘못했다고 빌었으면 살았을지도 모르죠? 합의까지 해줬는데, 고작 6개월 징역 살고 낮 짝도 안보이니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운전자 얼굴 보면 딸 생각이 더 나지 않았을까요?”
“그건 아니죠. 잘못했다고 손발이 닿도록 빌면 울분이라도 털어졌겠지요.”
“고의가 아니고 사고였겠죠?”
“사고여도 빌었어야죠? 그 아이 넋이라도 달래게 빌었으면…….”
“가족 중 누가 죽었습니까?”
“아이 죽고 이 년을 못 채우고 엄마가 딸을 데리고 동반 자살 했잖아요?”
“아니 왜요?”
“딸자식 죽음을 목격하고 어떤 엄마가 제정신으로 살수 있답니까? 충격으로 돈 거지요.”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 딸자식 죽음을 목격하고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이고 목숨을 끊어야 하는 엄마를 만들었다. 내가 비극의 원인이면서 가해자 입장을 두둔하고 그들을 찾아 나섰다.
“아빠는 살아 있나요?”
“아빠는 살아 있을 거예요. 고향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고향이 어딘지 아십니까?”
나는 남아 있는 유족에게 늦게라도 사죄를 하고 싶었다.
“그분 고향친구가 우리 아파트에 경비를 서고 있어요. 그분에게 물어 보세요?”
나는 주소를 들고 그가 살고 있는 황전면으로 갔다. 철망이 드리워진 야산과 아담한 집 한 채, 가축우리가 보였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개들이 요란하게 짖었다.
“여기요? 안에 계십니까?”
“우리 집은 뭣 헐라고 그렇게 잡아 흔드십니까?
내 뒤통수에서 일흔쯤 되어 보이는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벙거지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턱수염을 기른 도인 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손에 막걸리가 담긴 허연 봉지가 들려 있었다.
“k아파트에서 사시다 이사 오신 분 맞죠?”
“그렇소, 그런데 누구십니까?”
나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너무 늦게 용서를 빌러 왔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헛기침을 해댔다.
“언젠가 한번은 나도 만날 생각을 하고 살았소. 들어갑시다.”
노인을 따라 그가 사는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앞에 다시 무릎을 꿇었다.
“어르신 죽어야 마땅할 죄인입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진즉 오지 못해 죄송합니다.”
노인은 사발에 막걸리를 따라 내 앞에 내밀고 벌컥벌컥 마셨다.
“나도 죽기 전에 밝히고 싶었소. 내가 며칠 새 아저씨 집을 수소문해 찾아가려던 참이었소.”
노인은 막걸리 잔을 몇 잔 더 마시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아내가 장사를 끝내는 시간이면 노가다 일을 마치고 아이와 아내를 태우러 그곳으로 갔었지요. 그 날도 식구를 태우러 갔었고 아이는 아빠차를 확인하고 도로를 가로질러 달렸나 봐요. 그것은 정말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비가 많이 와서 길이 미끄러웠고, 노가다가 일을 쉬어서, 고스톱 판이 벌어졌고, 낮술을 마셔서…….
때 맞춰 승용차 한 대가 건널목에 멈춰 있었고 저는 덜덜 떨려 제정신이 아니었죠. 아내는 아이를 병원으로 실어다 달라는 부탁을 하러 승용차로 뛰어 갔지요. 아내가 승용차 문을 열었을 때 술 냄새가 코를 찔렀고 승용차 안에 운전사는 잠이 들어 있었답니다.”
“그래서 아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이를 업고 뛰어가다가 택시를 잡았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숨이 멎어 있었습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됩니다.”
나는 꿇었던 무릎을 털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면 잠들어 있는 저를…….”
“죄송합니다. 사고가 났던 1985년 그때는 그 곳에 CCTV가 없었잖아요. 아내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었는데 경찰에서 믿어버렸습니다. 우리는 그 일로 매일 싸웠습니다. 어떻게 자식을 못 알아보고 죽였냐고 아내는 매일 저를 괴롭혔습니다. 나는 나날이 지쳤고 서로 그만 살자고 결정을 내렸지요. 아내와 심하게 싸운 그날 저는 경비하는 친구와 술을 마셨고 늦게 귀가 했을 때 딸아이와 아내는 싸늘한 시신이었습니다. 아내가 죽었기 때문에 밝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가정도 아내도 두 딸도 모두 요.”
“저는 요, 제 인생은 요, 제 아내는 요, 저도 모두 잃었습니다.”
나는 너무 격분해서 목소리가 천둥처럼 떨렸다. 어머니가 사죄하러 가라할 때 갔으면 그녀는 내 누명을 벗겨줬을까? 놓쳐버린 날들이 가슴을 치며 빠져 나간다.
“술 때문이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우리 부모님 재산은 요 합의금으로 드린 돈은 요?”
“아내와 아이가 죽었는데 내가 뭔 정신으로 그 돈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이 땅 사고 남은 돈은 저승 가서 잘 쓰라고 망자 옷 태울 때 태워줬습니다.”
나는 노인의 멱살을 잡고 목을 조였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콜록거렸다. 기침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노인의 입에 검붉은 피가 품어져 나왔다.
“죄받아서 나도 저승길 예약해뒀소. 가기 전에 남은 재산이라도 돌려 드리리다.”
나는 노인을 향해 욕설을 하며 미친 황소처럼 마당을 뛰어 다녔다. 생기 있고 발랄했던 여자, 그 여자가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도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까? 술 마시고 운전대를 잡는 버릇이 없었더라면 인생이 달아졌을 것이다. 내 잘못을 시인하고 그녀 아버지를 찾아가 설득했더라면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었다. 그녀는 내가 음주운전을 한 순간 무덤 속으로 고개를 쳐 박기 시작했는데 알지 못했다. 몸통과 다리가 빨려 들어와 숨이 막혔을 것이다. 얼마나 살기위해 바동거렸을까? 바동거릴 힘조차 없었을 때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 무덤이 나였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나는 심지도 않은 곡식을 아내 등골을 빼서 거둬들였다. 씨도 뿌리지 않은 곡식을 채워주려고 굽어진 손가락, 부풀어진 정맥, 때늦은 후회에 빗소리만 요란하다.
내 안에서 그녀를 꺼내주고 싶다. 죽어서도 내 안에 갇혀서 바깥세상을 보지 못하는 아내가 사무쳤다.
“정숙아 바깥세상으로 보내줄게. 훨훨 날아가.”
나는 되찾은 땅으로 거처를 옮겼다. 야산에 그녀의 무덤을 만들고 꽃동산을 만들었다. 마당 넓은 집에서 살게 해주겠다던 약속을 그녀가 죽어서 지킨 셈이다.
“한정숙의 묘(墓)”
한정숙의 묘지 주변에는 철따라 야생화가 필 것이다. 그녀가 나비가 되어 꽃향기를 맡으며 사뿐히 날아다녔으면 좋겠다. 나는 그녀를 아내의 묘(墓)로 들여보내고 시묘 살이를 시작했다. (끝)
전남 순천 출생,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소설창작연구소회원, 한국소설가협회회원, 순천동천문학회원, 2015년 11월 문학세계 아들의 방으로 등단, 발표작품 ->소설미학 적도의 꽃 연재 중, 파리왕국, 아내의 묘, 붉은 장미, 너를 버리는 동안에, 까만 눈, 교집합, 처음 가는 길, 홍홍, 참을수 없는 사랑, 파도타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