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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사제 서품 25주년
1995년 2월 2일 주의 봉헌 축일에 만 33살 사제로 서품되었다. 신학교 생활 6년을 마치고 서품식을 준비하면서 선택한 성구가 루가복음(공동번역) “예수님께서는 따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셔서 기도를 드리셨다.”(5:16)라는 말씀이다. 신학생 때 ‘기도만 하면 뭐해? 실제로 고쳐주던지 뭔가 해줘야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갈등하며 방황했었다. 왜냐하면, 매일같이 하는 것이 기도고 매일같이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기도인 신학교 생활에서 ‘과연 이렇게 기도하면 뭐가 달라지고 무슨 변화가 오나?’라는 의문을 은밀히 품으며 살았다. 신학생이라 ‘말로만 기도하면 뭐해요?’라고 대놓고 질문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사회변혁과 민주화라는 당시 시대상에 따라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던 것일까? 그랬던 내가 사제 생활 성구로 선택한 복음 말씀이 루가복음 5장 16절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따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셔서 기도를 드리셨다.”
이 말씀을 선택할 때에도 스스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기도에 대해 그런 갈등과 의문을 품고 있던 내게 이 성경 구절은 내 마음에 떡하니 들어오는 순간 다른 말씀을 막고 못 들어오게 하는 것 같았다. 여러 가지 구절을 선정 후보에 올려놓고 며칠을 묵상하며 어떤 구절을 사제 생활의 모토(좌우명)로 삼을 것인가 고민하는데 결국 이 말씀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심정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마치 내가 선택했다기보다는 그 말씀이 나에게 다가와서 ‘여기는 내 집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후로 지금까지 나는 이따금 이 말씀을 묵상하곤 했다. ‘저 말씀이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어떻게 지금 나와 연결이 될까?’ 하며 마치 무슨 비밀을 찾듯이 궁금해 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어느덧 25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25년의 세월을 어떻게 살았는지 참으로 놀랍다. 그저 한해 한해 살아내듯이 살았던 기억밖에 없는데 벌써 25년이라니? 25주년을 맞아 다시금 25년 동안의 사제 생활을 되짚어본다. 신자들에게 우스갯소리로 ‘여자 하나만 포기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었더라!’ 하며 웃어넘기곤 했지만 실제로 나 자신에게 사제직은 간단하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사제답게’ 사는 것도 어렵고, ‘사제로써’ 사는 것도 어려웠다. 이 무게를 진작 알았더라면 결코 선택하지 못했을 것이다. 25년 세월 속에 당당함도 사라지고 떳떳함도 사라지고, 서품식 그곳에서 나 스스로 느꼈던 내 안의 순백한 마음도 그리움이 된 지 오래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이쁘면서도 마음이 아려오고 뒤에서 ‘아빠!’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아닌 줄 알면서도 돌아본다. ‘아! 내가 포기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구나! 전부였네?’ 물에 빠진 사람 구해내면 보따리 찾는다더니 별 볼 일 없는 영혼 가상히 여겨 기름 부어 사제로 삼았더니 본전 찾는 격이다.
본래 사회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우리 사회에 교회의 역할은 사회의 변혁을 통하여 정의를 실현하고 가난하고 불의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구해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신학생 때부터 사회변혁에 관심을 두던 젊은이로서 늘 빚진 마음이었기에 일본에서 소임을 마치고 돌아온 뒤 사회학을 공부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뜻밖의 입시요강이 보내왔는데 ‘심리상담대학원’이었다. 사목 생활에 도움이 되겠거니 생각했지 지금처럼 상담 사목을 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나의 길은 지금 이렇게 되었다. 2004년 8월에 졸업하여 2005년 1월 인사에 가정사목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15년, 그 사이에 본당신부도 4년 일하면서 이제는 심리상담에 잔뼈가 굵어져 제법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자신감도 얻어 이렇게 살 수 있음에 감사하고 이렇게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25년의 사제 생활 속에 “나는 언제 그렇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를 한 적이 있었던가?”라고 생각해 본다. 그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을 만큼 그 말씀처럼 살고자 했던지 되돌아보았다. 나의 사제 생활은 신학교에서 있을 때만큼 그렇게 기도하지는 못했다. ‘간절한 기도 생활’의 25년이라기보다는 ‘간절한 삶’의 25년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 듯하다. 나는 성격상 ‘무의미함’, ‘무가치함’에 대해 몹시도 지루해하고 부도덕하게 느끼고 심지어 별 의미 없이 하루를 보내면 짜증이 나고 나 자신에게 화가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늘 진지했고, 늘 깊은 생각 속에 있었기에 실없는 소리를 하는 것을 싫어했고 귀찮아하는 사람을 보면 비난을 할 정도였다. 이런 성격이 상담 공부 덕분에 순화되어 지금은 무의미 속에서 즐기고 무가치함 속에서도 편안하게 쉴 줄 아는 사람이 되었지만 25년의 세월 속에 이런 나의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열심히 한 기도 생활은 아니었지만, 한순간 한순간을 열심히 살려고 애쓴 것은 분명했다. 잘살아서 애썼다고 자평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애썼다고 자평하는 것이다. 살다 보면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울 때가 어찌 없겠는가? 신학생 때는 결코 그럴 때를 만들지 않고 살리라고 굳게 다짐하고 자신하였지만, 나의 사제 생활은 결심만큼 그렇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25년 내내 나는 나의 나약함을 짊어지고 살았던 것 같다. 나의 나약함으로 보면 나에게 사제직은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였다. 바오로 사도는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고린2 12:9b)라고 했지만 나는 자랑은 못 해도 나의 약점과 나의 나약함으로 좌절하거나 포기하지는 않겠노라고, 염치없는 마음이고 뻔뻔한 태도지만 ‘주님의 자비’에 나의 삶을 맡기는 마음뿐이었다. 나의 약점과 나약함은 나에게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간절함’의 원천이었다. 이 간절함이 내 가슴에 넘칠 때마다 나는 혼자였고 깊은 생각에 잠겼으며 회의와 미련 속에서 주저앉은 다리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곤 했던 것 같다. 주님의 자비하심이 아니시면 한순간도 버틸 수 없음을, 가상히 여기심이 나를 떠나면 나는 그냥 먼지처럼 사라질 것을, 이따금 홀로 있을 때 외로움 속에서 간절하게 느끼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에게 다가온 성경 구절은 나의 삶을 예언한 말씀처럼 느껴진다. 나의 나약함은 나를 이따금 나를 홀로 남겨두었고 나는 거기에서 당당함도 충만함도 잃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얼마나 많은 순간 스스로 비난하며 자격을 운운했던가? 그런 혹독한 순간들 속에서 비겁하게도 나는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나의 나약함을 용서하시리라’ 여기며 ‘간절한 나의 삶’을 다시금 일으켜 세웠다.
의미와 가치를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실수나 실패로도 삶을 중단시키지 않겠노라는 ‘간절함’으로 버티기도 하고 열심히 달리기도 하면서 새로운 것을 통해 배우고 자신을 좀 더 확장하려 노력했다. 나의 나약함은 나 스스로 어쩔 수 없지만 내가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좀 더 직접적으로 신자들을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사목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마냥 기도하라고 말하면서 나 스스로 맥빠지며 고개를 떨구는 그런 사제가 아니라 신자들의 마음에 한 발 더 들어가 함께 나누고 함께 치유하는 그런 사제로서 살아가고 싶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나의 나약함을 붙들고 씨름하느니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실제로 신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심리치료라는 분야에 발을 들여놓고 지금까지 빠져들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알게 된’ 일이 가장 크다. 나를 알게 된 것은 단순한 자각이 아니었다. 나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알기 전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안다는 것이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어떻게 산다? 이것은 자기 정체성과 자기 존재의 소중함에 대한 자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나를 알게 되었다.’라는 것은 전혀 새로운 통찰이었고 비로소 나에게 신앙과 영성의 길을 열어주었다. 물론 지금 내가 신앙과 영성으로 출중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달리 표현하자면 나는 나를 알게 됨으로써 내 삶은 더욱 건전해지고 내 신앙과 내 생각은 이전보다 훨씬 건강해졌다. 이것이 나의 나약함을 없애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의 나약함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큰 변화를 주었다. 아직도 나는 나의 나약함을 자랑할 만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으로 나의 인생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등학교 다닐 적 세례를 받은 나는 남들처럼 사제를 꿈꾸어 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 불현듯 찾아온 낯선 방문객처럼 그렇게 시작된 성소가 여태 이어지고 있음이 기적 같다. 나를 잘 아는 친구들도 내가 신부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터, 사제 서품 25주년을 맞은 나의 삶은 무엇하나 계획대로 된 것이 없는 불확실성의 연속이었고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의 연속이다. 앞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또 무슨 일이 있을까? 또 나는 무슨 일을 겪으며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내 삶의 불확실성과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은 나의 간절함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나약함을 보기보다 나의 간절함을 바라보며 그렇게 살고 싶다. 앞으로도 주님의 자비하심이 나를 떠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첫댓글 기도드립니다 ~~♡♡
내내~~행복하시기를.
그리고,
지금처럼 신자들(저희들)옆에 함께 하시기를 희망합니다.
신부님 25주년 축하드립니다. ♡
늘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신부님의 지나온 삶을 보는 듯 합니다.
25년, 결코 짧지않은 시간들~
마음으로 존경합니다 ~
성직자로서의 소회를 풀어주심에 신앙인으로 편안함을 느낍니다.
신부님!!! 25주년 축하드립니다!!!!
🎊🎉💐🎊🎉💐🎊🎉💐🎂😍
글을 읽으면서 신부님께서 심리상담을 공부하기로 결정하셔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그 덕분에 제가 신부님도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 저는 신부님을 알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도 신부님께서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신부님 은경축 축하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셔서 기도를 드리셨다' 이 말씀은 신부님과 상관도 있고, 연결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15년을 홀로 따로 한적한 곳에서 일하시는 모습에서 느껴지네요. 그리고 신부님 열정의 성격때문에
저 같은 사람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고요. 가끔 저는
제가 무엇이기에 그 열정을
부어주셨는지 미움보다 큰 사랑으로 키워주셨고요.
교육분석 때, 제가 ' 못한다. 안한다.' 했을 때, 사람하나 키우기가 얼마나 힘든데 그런소리 한다고 꾸중하신 말씀도 기억하고요~
2020.02.02 봉헌축일 강론
말씀에서 저는 왠지 신부님의 외로움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천년만에 오는
( 2020.02.02) 특별한 숫자라고 하네요.
저는 하느님께서 신부님께 특별한 은총을 주셨다고 생각이 듬니다.
새해에는 신부님마음에 있는
모든기도가 이루어지시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은경축을 축하드립니다.
25년을 한결같이 사제 생활 성구를 따라 사신듯 여겨지네요. 가까이 뵌지는 그리 오래 되지않았지만 추구하시는 일들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어요.
몸으로 마음으로 행동으로 기도하고 실천하셨기에 수많은 누군가에 희망을 주셨고 주님을 향하는 길을 일깨워 주셨으니 많이 힘드셨겠지만 진정 복된 사제의 길을 걸으신 것 같네요. 언제나 기도로 응원할께요....
<라자로 신부님, 고백록>
인간적인 모든 행복을 포기하셨지만
인간에게 다가간 진솔하고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왠지 울컥했습니다.
신부님, 영육간에 건강하시고 은경축 축하드립니다!!!
신부님!
신부님의 은경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신부님께서 택하신 성스런 길을 25년간 어떻게 걸어오셨는지
새삼 가깝게 느껴지는 듯합니다.
늘 실천으로 모든 이들에게
희망을 주시고자 한 모습에 감동입니다.
신부님의 간절함이
늘 신자들의 삶과 마음에
한발 더 다가가 함께 하는 사제가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건강을 빕니다
신부님 사제 25주년 축하드립니다..
저는 신부님의 글을읽고 야뽁강에서
하느님과 씨름하여 이긴 야곱이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신부님 삶을 꼭 이겨내고 헤쳐나가 승리의 영광을 볼거라 생각합니다.
김정민 라자로 신부님 은경축 축하드립니다.
신부님 강론을 들을 때 마다
숨어 있던 나를 알아가는 기쁨과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심에 감사드리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의 찐~한 라이프스토리가 가슴을 찡~ 하게 두드립니다. 모든 인간적인 것을 내던지어 ''총맞은 것처럼'' 뻥~ 뚫린 가슴이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졌슴을 신부님의 말씀. 눈길. 열정 하나하나에서 느낍니다.
저흰 신부님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포도송이 입니다. 더 건강하고 더 많은 열매를 맺어 하느님앞에 묵직하게 나아가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