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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위임목사 주일 오전예배 설교
2020.4.26. - 마태복음의 말씀(17) : 사랑은 정의다
마태복음 5장 38 -4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아멘! 주여 찬양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한 두 달 넘게 있다 여러분 이렇게 현장에서 현장 처소에서 이렇게 뵙게 되니깐 너무나 감격스럽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십니까? (좌중 웃음)
아직도 여전히 온라인으로 드리는 우리 성도님들 계시지만,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시는 그리고 현장에서 예배드리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찬양대가 사실은 연습하기 참 어려운 환경에서 연습해서 이렇게 예배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 우리 교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 찬양 소리가 울려퍼져야 되고요, 저와 여러분의 기도 소리가 나야 되고 또 함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당장은 아니지만 조금씩 조금씩 모이는 예배를 통해 더욱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최근에 제가 사는 사택에 있는 엘리베이터 그 게시판에 이런 낙서가 있더라고요. 제가 직접 사진을 찍었습니다. 누가 이렇게 먼저 썼습니다.
'옅은 바람냄새에 두눈을 감아본다' 라는 시 한 구절을 적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이 아래에 이렇게 답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고갱이가 빠진 헛헛한 내 인생을 생각한다. 나는 어디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
이게 인터넷 요즘 댓글 댓글 쓰는 원조 아니겠습니까? 그죠? 저희들이 이렇게 예전에 담벼락에 '이 집, 개조심하세요' 하면, '너가 더 무서워' (좌중 웃음)
뭐 이렇게 낙서하는 것처럼 이게 제 인터넷 댓글 같은 그런 걸로 이렇게 써 놨는데 제가 이걸 읽고 그 밑에다가 '어디서 왔고 누구인줄 알고 싶으시면 연동교회 오십시오' (좌중 웃음) 라고 쓰려고 했다가, 우리 교회에 누가 될까봐, 쓰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코로나 19 사태로 답답한 현실과 상황 속에서 엘리베이터 공간의 낙서를 통해서라도 조금 마음을 달래보려고 했던 분들이 아닌가 생각을 해봤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가 어디서 왔고 누구인지는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그리스도의 사람이지만, 그러나 코로나 19 사태로 이 세상이 어디로 갈지 참 걱정스럽고 근심 속에 쌓여있는 저희들의 모습도 또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주 하나님 우리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지요. 혼돈의 풍랑속에서 물 위를 걸어 오신 분이 우리 주님이시고, 공허의 어둠 속에 세상에 빛을 밝혀주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그분을 믿고 살아가지요.
그렇게 주님을 붙들고 혼란과 고난의 시대를 신앙으로 이겨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옆에 있는 분들과 이렇게 인사나누기 원합니다. 신앙으로 이겨냅시다. 신앙으로 이겨냅시다. 신앙으로 이겨냅시다.
마태복음의 말씀 열일곱 번째 '사랑은 정의다' 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다름이라는 경계를 깨셨고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선입견의 장벽을 무너뜨리신 분이십니다.
정통 유대교 사회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경계를 허무신 분이시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가장 두텁게 서있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는 장벽을 무너뜨리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정신을 이어받은 경계와 장벽을 무너뜨리는 그 예수의 정신을 이어받은 초대교회와 그 사도들은 예루살렘의 경계를 깨고 그 전통과 관습에 묶여있는 예루살렘의 전통을 깨고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예수님은 지성소와 세상을 갈라놓은 오직 지성소로만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그분의 죽음으로 휘장을 찢으셔서 이제 직접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경계를 깨신 거지요.
유대인과 헬라인, 야만인, 지혜자, 모두가 예수의 복음을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늘보좌 버리시고 죽기까지 복종함으로 하늘에 있는 자, 땅에 있는 자, 땅 아래에 있는 자가 서로 갖고 있는 경계와 그 장벽을 무너뜨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무너뜨리는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교회 현실로 말씀드리면 이번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을 찍으신 분들도 계시고 미래통합당을 찍으신 분, 소수당을 찍으신 분들 계실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른 정치적 색깔로 서로 경계와 담장이 있지만 여러분 그런 색깔로 우리가 서로 나눠져서는 안됩니다.
물질로도 지금 이 코로나 사태에 전혀 물질이 부족함 없는 하루 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부유한 분들도 계시고, 또한 코로나 19 사태로 매출이 3분의 1, 사분의 1로 줄어들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가는 성도님들은 가난이라는 것이 지금 우리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는 부자고 누구는 가난하다고 우리 교회 안에서 갈라 앉고, 차별하고 분리하는 것이 교회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어린 자녀들이라고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기력이 없는 어르신이라고 교회가 멀리 해서는 안됩니다.
병이 있다고 교회 오지마십시오 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더 찾아가고 격려하는 것이 교회가 되어야지요. 장애있는 성도님들을 위해서는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손발을 더 움직여서 눈높이를 맞춰주는 것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런 장벽과 경계가 없어지는 곳입니다. 교회는 예수를 나의 구원자로 고백하는 장벽이 없고 경계가 없는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장벽과 경계를 무너뜨리는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이미 저와 여러분이 다 알고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게 경계와 장벽을 푸는 것이 사랑임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43절 과 44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내 가족은 사랑할 수 있지요. 이웃까지도 내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까지 사랑하는 건 참으로 힘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어떤 경계와 장벽이라도 허물고 또한 무너뜨리기 위해서 원수 사이에 쌓여있는 그 장벽을 그 경계를 무너뜨려야 한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무엇이냐?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대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솔직하게 원수를 사랑하실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면 몰라도 성인 군자라면 몰라도, 저와 여러분은 그저 그냥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내 부모를 죽인 살인범 있습니다. 내 앞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으니, 당신을 사랑합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녀를 해한 강도가 내 눈 앞에 있습니다.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어찌 내 삶을 풍비박산 만든 그런 사람이 내 앞에 있다면, 그를 어떻게 제가 사랑할 수 있을까? 여러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지금 이 시간 가장 의로운 말, 좋은 말, 지혜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로 여러분 앞에 서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여러분 원수를 사랑합시다 라는 말을 정직하게 하기가 솔직히 너무나 힘듭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제가 원수를 사랑합시다 라고 성경에 그렇게 써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원수를 사랑합시다 하는 주제로 설교를 하면 여러분 아멘하고 쉽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제가 지난주 간음하지 말라는 제목으로 설교할 때 그루밍 목사에 대한 예화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루밍 목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 그 피해자의 가족에게 그래도 그이가 목사이고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일인데 용서하고, 원수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 사랑합시다 라고 누군가 얘기한다면 여러분 그게 수용 가능한 말이겠습니까?
그게 정말 원수를 사랑하는 이야기입니까? 가깝게는요, 제가 오늘 이 '사랑' 이란 주제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지난 금요일 저녁에 아내와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아내가 자꾸 설교 때 사생활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본인과 아이들의 프라이버시를 좀 지켜 달라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저는 성도님들께 말씀을 좀 잘 이해시킬 수 있다면 이해하실 수 있도록 그런 예화를 가져오려고 하는데, 제가 뭐 똑같은 예화를 인터넷에서 찾고 책에서 찾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예화를 말씀드리면 훨씬 잘 이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제가 가끔 얘기를 하는데 아내가 참 싫어합니다.
여러분이 제 아내에게 좀 잘좀 얘기해 주십시오. (좌중 웃음)
지난 금요일에 도대체 이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도대체 이 말씀이 뭘까? 사랑이라는게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를 아주 깊이 묵상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아주 사소한 일로 제 아내랑 다투게 됐습니다. 부부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원수를 사랑합시다 라는 설교를 아주 거룩하고 신성하고 거창한 이유로 대단한 그런 방법으로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제 옆에 가장 사랑해야 하고, 가장 아껴야 할 아내를 원수로 생각하고 다투고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지금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금 시간 떳떳하게 정직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지금 사랑을 설교하는 설교자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계속해서 설교를 전하는 말씀을 전하는 자나 그 말씀을 듣는 자에게 반복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사랑하라 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 또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6 절과 47 절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너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 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예수님은 주님, 저희가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내 옆에 잘 아는 사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 사랑하고 살게 해주세요 라고 말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너희가 할 수 있는 사람만 사랑하면 그게 무슨 하늘의 상급이 되겠느냐?
야! 그건 세리도 이방인도 아니 세상 사람도 다 하는 사랑이야. 세리나 이방인도 다 할 수 있는 그 사랑을 내가 전하려고 그걸 너희들에게 명령하려고 이 땅에 하늘보좌 버리고 내려와서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까지 죽으면서 그 사랑을 내가 전하려고 했냐고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46절 47 절의 말씀입니다.
그럼 불편하지 않으세요? 참으로 불편합니다. 그냥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다가 천국에 갔으면 좋겠는데, 예수님은 그것은 세리나 이방인, 세상 사람도 다 하는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 성도, 거룩한 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다고 결심하여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저와 여러분,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사람, 성도가 되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모든 권세를 가지게 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의미를 예수님은 48절에서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리스도인이 되겠다, 성도, 거룩한 백성이 되겠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다 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살겠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가겠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그 사람을 나도 그대로 사랑하겠다 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48 절에서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라고 하시는데, 바로 온전하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45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모두 해를 통해 빛을 비추시고, 구름을 통해 비를 내리신다. 아 진짜로 선인 따로 착한 사람 따로 이렇게 하지 않으시고, 악인 선인 모두에게 빛을 비추시고 비를 내리신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온전하심 대로 우리도 그런 온전한 사랑을 할 때 그리스도 인이요 성도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습니까? 먼저 저는요, 신앙생활 참으로 어렵고 목회가 참으로 쉽지않다는 생각을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19 사태 때문에 이 목회가 신앙이 어렵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계기를 통해서 우리가 모이는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교회 안에 공동체의 교제, 영적인 친교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함께 모여서 뜨겁게 찾아갈 수 있는 그때를 더 사모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코로나 19 사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힘든 일 아닙니다. 기독교가 점점 부정적인 여론으로 굉장히 기독교가 신앙을 갖는 것이 힘든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근데 저는 그것이 힘든 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목회자로서 목회 참으로 어렵겠다, 한국 사회가 점점 기독교에 부정적으로 바뀌고 있는데 어렵겠다. 주변에서 얘기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밑바닥을 쳤습니다. 이제 교회가 새롭게 되고 개혁하고 바르고 옳은 길로 가면 저는 다시 부흥의 때가 오리라 믿습니다.
제가 연동교회 부임하고 제일 많이 들은 얘기가 연동교회 힘들지 였습니다. 그 얘기 들을 때마다 제가 항상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나도 힘들지 않다. 저 힘들려고 여기 왔습니다. 아니 연동교회라고 힘들고, 작은 교회라고 쉽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작은 교회도 개척 교회도 연동 교회도 대형 교회도 똑같이 목회자는 힘들고 아주 열심히 그 일들을 사역할 때만 그 가운데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겁니다. 하나도 힘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말씀을 읽고 제 신앙과 제 목회가 참으로 힘들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온전하신 대로 내가 온전해야 한다 라는 것이 내 삶과 피부에 너무나 가깝게 와닿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거룩한 부담감을 느낍니다. 어떻게 목회자가 될까? 어떤 목사가 될까 라고 하는 생각 이전에 내가 어떤 바른 그리스도인이 될까? 하나님의 온전하신대로 바른 성도가 될까?
그 온전하심을 닮을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될 수 있을까? 그게 더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이 표현이 너무도 영적으로 무겁고 진지하고 신중하게 제게는 다가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주님 그럴 수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 못난 목사 원수는 커녕 작은 미물도 사랑하지 못하는 존재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온전하신 대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저희 고백입니다.
매일 같이 회개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우리 주님은 한가지 방법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의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오늘 본문 38 절에서 42 절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 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내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 말씀은 두 개의 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이 말하는 정의에 대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또 다른 것은 하나님 말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정의가 또한 한 구조로 차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정의는 38 절에 나온 대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입니다. 누가 내 눈을 때리면 나도 똑같이 그 사람의 눈을 때려야 하는 것, 내 이를 하나 부러뜨리면 나도 똑같이 그 놈의 이빨을 부러뜨려야 그것이 보복적인 정의로 세상의 정의로 받아들이는 거죠.
그게 세상에선 정의라고 얘기합니다. 법대로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알려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는 조금 다릅니다. 오른 뺨을 맞았으면 나도 똑같이 그놈의 오른 빰을 때려야 되는데 예수님은 왼 뺨을 대라고 얘기하십니다.
속옷을 가져가면 똑같이 그놈의 속옷을 뺏어와야 되는데, 우리 예수님은 겉 옷을 주라고 얘기하십니다.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나중에 그 놈과 함께 다시 오리를 내가 끌고가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 이제 더 오리를 더가서 십리를 가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새롭게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바로 이 정의가 하나님 사랑을 완벽하게 이루지 못하는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모습의 하나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할 수 없다면 우리 인간은 그 사랑을 쫓아가고 닮아가기 위해 새롭게 예수님께서 주신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통해 원수를 사랑하는 법을 깨달아야 합니다.
라이놀드 리버라는 신학자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사랑의 근사치로싸의 정의, 사랑의 근사치로써의 정의.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페 라고 합니다.
여러분 아가페 이룰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에로스, 필로케 뭐 그 정도만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아가페 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아가고 쫓아가야 할 그리스도인, 성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는 조금이나마 아가페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삶 가운데 이루어내야 합니다. 근데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에 정의를 알려 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을 라인홀드 니버는 사랑의 근사치로써의 정의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어떻게 오른 뺨을 맞고 왼 뺨을 댈 수 있겠습니까? 속옷을 뺏어서 갔는데 겉 옷까지 주는 것,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는 것을 십리를 더 가자는 것이 왜 그게 정의 입니까 라고 물어볼 수 있지요.
이에 월터 윙크라고 하는 신학자 이렇게 얘기합니다. 마태복음 5장 38절에서 44절은 결코 수동적, 소극적, 체념적 태도를 가르치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이 단락은 분명 예수님의 비폭력적 방법을 보여주지만 이것은 정당한 전쟁 이론과 평화주의를 넘어선 예수의 제 3의 길을 압축적으로 제시합니다.
바로 여기서 제 3의 길은 맹목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냥 목사님이 교회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것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정당한 전쟁론, 평화주의, 세상에서 얘기하는 정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것도 아닌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정의의 방법론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왜 예수님께서 그런 세상에 정의 정당한 전쟁론 또는 맹목적인 사랑 사이에 제 3의길로서의 정의를 말씀하시면서 오늘 특별히 세 가지를 얘기하시는데 그 세 가지의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우리는 충분히 그 사랑과 정의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비 폭력적인 평화주의를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한 대 쳤어? 아, 너랑 싸우기 싫어. 한 대 더 때려.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내 속옷 가져갔어? 아 나 다투기 싫어. 내 겉 옷도 가지고 가. 그럼 바보 같은 일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나 끌고 오리를 갔어? 난 평화주의자야. 그래 싸우기 싫으니까, 내가 오리를 더 가줄게 하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세가지의 표현안에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과 정의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려고 하는 본 뜻은 무엇일까?
39절에 보시면 당시 오른 빰을 맞는 것은 하인이 또는 노예가 잘못했을 때 주인이 체벌하는 방법 중의 하나였습니다. 당시 역사적 배경에는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 주인이 오른손 등을 가지고, 손바닥이 아닙니다. 손 등을 가지고 노예나 하인의 오른 뺨을 찰싹 따귀를 때리는 것을 얘기 합니다.
그런데 지금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은 하인이나 노예가 잘못했을 때 체벌할 때 때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때리는 겁니다. 수치를 느끼게 하고 모욕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 옛날에 조선시대에도 양반이 자기들 노예와 하인들, 쌍놈이라고 하는 그 사람들을 데리고 아무 이유없이 매질을 했다고 합니다. 왜 매질을 했습니까? 내가 때리면 너는 죽어야 되는 사람들이야. 너희는 내 밑에 있는데 나한테 지배받고 있는 사람들이야.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아무 이유없이 매질을 매번 했다고 합니다.
바로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 39절 말씀입니다. 잘못해서 때리는 게 아닙니다. 모욕을 주고 수치를 주면서 너는 내 말만 들어야 돼. 넌 내가 죽으라고 하면 넌 죽어야 돼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뺨을 때린 사람은 우월한 자들이죠. 주인, 남자, 어른, 종교지도자, 당시 유대 사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뺨을 맞은 사람들은 열등한 자들입니다. 노예, 여자, 어린이, 이방인들을 말하지요. 어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유와 의미에서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세상에서 힘쓰고 목소리 큰 사람들이 만든 우열과 계급에 따라 누구는 뺨을 맞고 누구는 뺨을 때리는 시대였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회적 구조와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정의는 힘 있는 사람이 와서 뺨을 때리면 너도 가서 뺨을 때려라 라고 하는 세상적인 보복적 정의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 뺨을 때린 원수를 사랑하긴 참으로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그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왼 뺨을 대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왼 뺨을 대는 것은 오른 뺨은 당신이 나를 업신여기고 무시해서 나를 마음대로 때렸지만 왼 뺨을 때릴 때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제 내 허락을 받아야 하고 내가 또 맞아야 한다면 때리는 이유와 그 뜻을 저는 이제 알아야겠습니다 라는 그런 뜻에서 왼 뺨을 대는 것입니다.
오른 뺨은 수동적이고 무력하며 소극적이고 체념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왼 뺨은 자기의 권리를 인간 존재의 의미를 회복하는 능동성과 적극성을 상징하는 것이죠.
이에 대해서 톰라이트 라고 하는 신약 학자는 똑같이 때리면 악순환만 나을 뿐입니다. 다른 뺨을 댄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원한다면 나를 다시 때려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를 열등하게 봐서가 아니라 대등하게 보고 때려야 합니다.
40 절의 속옷 겉옷에 대한 이야기 도 41절에 오리를 가고 십리를 가는 이야기 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41절 오리를 가자고 하는 이야기에서도 이것도 역사와 배경적인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 나라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합법적인 법률 중에 하나가 뭐냐면 로마 군인이 이스라엘 땅에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식민지 한 마을에 그 사람들을 일부 차출해 가지고 군사 물품 중 아주 무거운 군사 물품들을 그들의 어깨에 짊어지게 하고 오리를 가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1.5KM 정도를 지고가게 하는 것이 합법적인 법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그냥 걸어가고 그 동네에 있는 사람들이 그 물건들을 짊어지고 가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을 얘기하는 것이 오리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근데 여기에 보시면 41절에는 예수님이 억지로 라고 하는 표현을 쓰시죠. 그것은 합법적인 겁니다. 문제가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이 억지였다 라고 얘기합니다. 어찌 되었던 예수님은 오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같이 가주라고 얘기하십니다.
원수같은 놈아, 군인들의 명령도 치가 떨리고 화가 나는데, 예수님은 그들의 말도 안되는 명령에 야! 오리 더 가줘라고 얘기하십니다.
폭력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가롯유다 열심당이었던 시몬, 그리고 베드로까지도 몇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그렇게 얘기하신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군이 오리 가자고 하면 그것은 악법과 같은 것인데 내 칼을 들고 그 로마군에 맞서 싸워야지 어떻해 오리 가자고 하는데 십리를 더 같이 가 줄 수 있느냐 이런 생각을 했겠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오리를 억지로 가게 되면 다음에 십리는 기쁨으로 가라고 얘기합니다. 오리를 갈 때는 악법이지만 그 원수 같은 사람을 따라서 가지만 그 다음 오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축복된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가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원수의 폭력과 불의에 맞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하늘나라의 또 다른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 방법이기도 하지요.
저와 여러분은 완벽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정의의 방법대로 그 원수를 대하면 그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한 젊은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지방에 몇 년동안 파견을 가게 되었습니다. 외진 곳이었습니다. 회사 직원들만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직원들과의 관계를 잘 해보려고 했는데 본인의 직속상관이 굉장히 비인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나쁜 사람, 평이 안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직속상관이 자신을 너무나 괴롭히는 겁니다. 특별히 교회 다닌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이란 이유로 더 괴롭히는 건데, 난 교회다니는 사람이 제일 싫다고 하면서 힘들게 하는 거였습니다.
계속해서 괴롭히고 부당 대우를 하니 이 집사님이 본사에 투고를 하려고 편지를 썼습니다. 이 상관이 이렇게 잘못 됐고 이런 문제가 있고 부하 직원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고 그 편지를 쓰고 잠이 들었는데, 그 날 꿈에 요셉의 대한 꿈을 꾸셨다고 합니다.
요셉 하면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요셉은 온갖 억울하고 속상한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아먹었습니다. 그런 요셉은 보디발 장군에게 충성을 다했습니다. 지극 정성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감옥의 동료들의 꿈을 해몽해 줬습니다. 그러면 밖에 나가서 이제 내 잘못을 내가 억울한 일을 풀어주겠지 생각했는데, 그들이 다 은혜를 까먹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형들에게 최선을 다합니다. 요셉은 보디발 장군에게 지극 정성으로 합니다. 감옥에 있는 동료들에게 억울하고 속상해도 그대로 최선을 다해서 대해 줍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요셉의 대한 이야기를 꿈을 다 꾸고 잠에서 깼습니다. 이 집사님이 생각해 보니 이것이 하나님의 메세지로 생각하고 투고로 썼던 편지는 버리고 그 힘들게 하고 그리스도인을 그렇게 미워하는 그 직속상관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네가 미쳤구나 라고 얘기하더랍니다. 나중에 시간이 좀 지나니 넌 내가 만나 본 사람 중에 기독교인 중에 가장 착한 기독교인 거 같다고 떠날 때에는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나는 기독교인과 교회가 싫지만 너한테 만큼은 내가 손해 보지 않고 나쁜 일 안 당해서 그래도 기독교와 하나님에 대해서 조금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집사님께서 물론 높은 상관이 직속상관이 인격적으로 좀 문제가 있고 기독교를 싫어하는 것이 참으로 불편했지만 반대편으로 봤더니 이 직속상관에게 분명히 기독교인과 아주 불편하고 부정적인 경험이 있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연민이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상관을 위해서 계속해서 중보기도를 해줬다고 합니다. 그리고 본인도 몇 년 후에 본사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발령을 받으면서 승진이 됐는데 함께 입사한 동기보다 가장 먼저 승진한 겁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바로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미워했던 그 직속상관이 자기를 추천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얘기를 하시면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사랑이 뭔지, 정의가 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라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간증 속의 집사님이 정의 운운하면서 투서를 보냈다면 그에게 승진의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승진이라는 혜택을 떠나서 그 집사님이 세상의 정의만 생각해서 그 상관을 처리하고 대면 하려고 했다면 그 상관이 잘못 가지고 있는 기독교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집사님은 왼 뺨을 됐습니다. 집사님은 겉 옷까지 주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그 상관에게 십리까지 가자고 얘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의 마음이 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뭔지 하나님의 정의가 함께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온전하신 대로 우리도 온전해야 하지만 어느 누구하나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온전한 삶을 우리가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기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에서 허락하신 제 3의 정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성취해 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사랑은 정의입니다. 정의는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것으로 저와 여러분이 이룰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은혜를 맛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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