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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넓고 맑고 그리고 더운 호수’, 이식쿨
* 이식쿨호숫가의 샛별 마을, 촐폰아타
* 도처에 산재한 ‘괵 투르크 석상’
* “샛별을 쫓아서 해가 떠오르는 동방으로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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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식쿨호숫가의 샛별 마을, 촐폰아타
고창국왕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현지지형에 밝은 관원들의 안내와 넉넉한 인력과 장비지원2)에도 불고하고 고생 끝에 능산을 넘은 현장법사의 발길은 이식쿨호수로 이어진다.
현장이 정확하게 어느 시기에 이산을 넘어 갔는지는 직접 밝히고 있지는 않았지만,『대자은전』에 “고창국을 출발하여 아커수에서 2달간이나 눈이 녹기를 기다렸다”는 기록으로 보아서는 빨라도 3월 이후가 되지 않았나 추정된다.
왜냐하면 필자 일행이 3월 초에, 현장이 넘은 베델고개 대신이 바로 옆의 천산산맥의 또 다른 고개인 토르가르트(Torugart P, 3,630m:吐爾葛特)고개를 넘을 때도아직 정상부근은 온통 폭설이 쏟아지는 설국이어서 몇 번 위험한 고비를 넘어야 했던 상황을 생각하면 적어도 그 때 쯤이나 되어야 천산을 넘는 일이 가능했으리라 여겨진다.
이 루트는 위의 ‘현장로’ 대신으로 현대에 활성화된 고개길로 카슈가르→신장의 퉈윈[托雲]마을→토르가르트 고개→키르기즈스탄의 나린(Narin)→이시쿨호수 서쪽의 발리크치(Balikchi)→토크마크→비쉬케크로 이어진다. 현재(2014년 6월) 중국과 키르기즈스탄 간의 무역이 가장 활발한 곳이어서 국제버스도 운행되지만, 그러나 외국인은 여행사를 통해 대절차를 이용하는 여행자만 통과할 수 있고, 게다가 기상변화에 따른 운행변동이 심하니 미리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고 앞에서 이미 강조한 바 있다.
현재로써 이 루트에는 현장의 체취가 묻어 있는 유적은 전혀 없다. 다만, ‘드쥬크벨리’라는 옛 실크로드의 지선인 ‘천산북로’상에 있는 중앙아시아형 고대 역참(驛站)정도가 그 흔적으로 추정해볼 수 있을 정도이다.
하여간 현장은 어느 호수가에 도착하여 '대청지'라 부르며 감격에 겨워하여 했다.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호수보다 매우 넓고 맑다는 뜻으로 한자식으로 부친 이름이다. 그리고 용과 물고기가 함께 사는 곳으로 이해하여 역시 상서로운 기운을 강조하기도 했다. 한편 『자은전』에서는 '청지' 이외에 ‘열해(熱海)’라고 부르며 "겨울에도 얼지 않는 호수" 라는 부연설명을 한 것은 이식쿨의 본래의 뜻을 부연한 차이가 있지만, 이를 종합해보면 '넓고 맑고 그리고 더운 호수" 라는 뜻이 된다.
이렇게 산길을 4백여 리를 가면 대청지(大淸池)에 이르게 된다. 둘레는 천여 리에 달하는데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는 좁다. 4방이 산에 둘러싸여 있어서 수많은 물줄기들이 교차하며 모여든다. 물은 검푸른 색을 띠었고 쓴맛과 짠맛을 함께 지니고 있다. 호탕하게 흐르는 물은 큰 파도가 사납게 일어나 물보라를 일으키며 흐른다. 용과 물고기가 뒤섞여 살고 있으며 신령스럽고 괴이한 일들이 이따금 일어난다. 그러므로 오고 가는 나그네들은 그 복을 빌며 기도를 한다. 비록 물고기가 많으나 잡지 않는다. <대당서역기>
용이 살고 있다는 대목 이외에는, 능산으로부터 이식쿨까지의 거리와 호수의 크기와 타원형의 생김새와 수질의 특징 등 현장의 기술은 대체로 정확하다.
산을 벗어나서 청지(淸池)[청지는 열해(熱海)라고도 한다. 능산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얼지 않아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고 그 물이 따뜻하다는 뜻은 아니다.]에 이르렀다. 둘레가 1,400 내지 1,500리가 되며 동서는 길고 남북으로는 좁다. 바라보니 망망하고 거센 바람이 없어도 여러 길 되는 높은 파도가 넘실거렸다. <대자은전>
▼ 크고 맑은 호수 이식쿨
▼ 촐폰아타로 가는 마슈르트카[합승차] 터미날
▼ 촐폰아타로 가는...
▼ 페가수스 게스트하우스
▼ 이식쿨의 특산품 말린 훈제송어 가판대
현장의 발길은 이식쿨에서 잠시 헤어졌다가, 다음 장의 '소엽성(素葉城)', 즉 토크마크 편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지금은 이식쿨호수의 북쪽에 있는 ‘촐폰아타(Colpon-ata)’라는 자그마한 마을로 발길을 돌려보자.
필자 일행은 론니풀레닛(Lonely Planet Travel) 책자에서 찾아낸 게스트하우스에다 우선 무거운 짐을 풀고 저녁나절 거리구경에 나섰다. 아직 초저녁인데도 거리는 성수기가 아닌 탓인지 가게들이 문을 연 곳이 별로 없어서 저녁 요기할 곳도 찾기 어려웠다. 겨우 문을 연 카페를 찾아내긴 했지만, 문제는 영어메뉴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현장법사는 “비록 물고기가 많으나 잡지 않는다.”고 했지만, 안내책자에서도 이곳의 유명한 특산품이 송어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기에 우리일행 모두 송어요리를 먹을 기대에 부풀러 있던 터라 실망감을 주체하기 어려웠지만, 메뉴에서 송어요리를 찾아 주문하기에는 우리들의 현지언어는 턱도 없이 모자랐다. 그러다가 문득 한 아이디어가 떠올라 주인장에게 펜과 종이를 빌려 우선 빈 접시를 크게 그린 다음 그 위에 물고기 두 마리와 포크 4개를 올려놓은 그림 한 장을 뚝딱 그렸다. 그랬더니, 주인장 왈, “하라쇼[OK]~”라고 대답하고, 주방에다 대고 뭐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조금 있다가 정말로 먹음직한 송어요리가 우리 테이블로 배달되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 그림으로 주문하여 맛있게 먹은 시원한 맥주를 곁들인 송어요리 정식
그렇게 맛 있는 저녁식사를 시원한 맥주까지 곁들여 마친 다음 우리는 다시 길거리에 나섰다. 그런데 정말 서쪽하늘 모퉁이에 금성(金星), 비너스(Venus)가 떠 있었다. 바로 샛별 ‘촐폰아타’의 그 ‘촐폰’이였다.
“아! 촐폰아타! 아, 샛별의 고향~”
의미심장한 이름을 가진 이 아름답고 조용한 마을에 어울리는 어떤 신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마침 우리 숙소이름이 날개달린 천마, 페가수스(Pegasus)이니 신화여행을 하기에는 제법 어울리는 곳이기에…
천문학적으로는 금성은 해와 달 다음으로 세 번째로 밝은 별로 일 년 중 몇 달 동안은 새벽녘 동쪽 하늘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나타나서 어떤 별보다 늦게까지도 보이기에 옛부터 새벽별, 샛별, 계명성(啓明星)이라 불렀다. 또한 초저녁 무렵에는 서쪽 하늘에서 가장 먼저 보여서 저녁별, 개밥바라기, 태백성, 장경성(長庚星)이라고 불렀다.
나침반이 없던 옛날에는 어둠이 깔리면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다만 붙박이 별인 북극성만이 그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금성은 하루에 두 번씩 아침 저녁으로 하늘에 나타나 유목민들에게 방향을 알려주었기에 일찍부터 유목민들의 나침반 역할을 해주던 ‘유목민의 별’이었다. 촐폰성(星)이 바로 그런 별이었다.
▼ 이식쿨의 저녁 노을/ 비록 저녁별은 볼 수 없었지만, 대신 붉은 노을이 향수를 자극하고 있었다.
서론은 그만하고 중간과정을 생략하고 필자의 한 ‘가설’의 결론부터 먼저 제시하고 이야기를 이어 가기로 한다. 고구려의 졸본성(卒本城)이나 중원의 여러 곳의 금성들(金城) 그리고 신라의 금성(金星)과 연결고리가 있어 보이는 것 같은 지명 때문에 최근에 갑자기 이곳 ‘촐폰아타’가 우리 한민족의 선조라는 환인(桓因)부족이 한 때 살았던 태초의 신시(神市)였다는 다소 신화적인 이야기가 생겨났다. 물론 아직은 역사적인 사실보다는 허구 쪽으로 무게중심이 있겠지만…
그럼 이시쿨 호숫가의 마을 ‘촐폰아타’가 우리 한민족의 원래 조상인 환인부족의 한 때의 정착촌이며 ‘신시’였다는 ‘가설’의 근거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우선 문헌으로 보면, 그것은 신라 눌지왕 때의 박제상(朴堤上, 363-419)3)이 지었다는『부도지(符都誌)』를 제시할 수 있다. 물론 이 고문서도 『한단고기(桓檀古記)』처럼 올바른 역사서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야사의 범주이기는 하지만, 일부 내용은 한민족의 뿌리를 추적해 볼 수 ‘키워드’가 될 수도 있다는 평가도 받고 있는 아주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다.
『부도지』내용은 파미르고원의 천산[칸텡그리산] 아래 마고성(麻姑城)에서 살던 배달족의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고성은 땅위에서 가장 높은 성(城)으로 천부(天符)를 받들어 지켜서 조상의 하늘을 계승하였다. 성안 사방에 네 명의 천인이 있어, 관(管)을 쌓아 놓고, 음(音)을 만드니, 첫째는 황궁(黃穹)씨요, 둘째는 백소(白巢)씨요, 셋째는 청궁(靑穹)씨요, 넷째는 흑소(黑巢)씨였다. 두 궁씨의 어머니는 궁희(穹姬)씨요, 두 소씨의 어머니는 소희(巢姬)씨였다. 궁희와 소희는 모두 마고(麻姑)의 딸이었다. <『부도지』제1장>
그러니까 이 이야기대로라면 마고성은 모계사회였다는 이야기인데, 고고학적 고증으로는 설득력이 있다고 보인다. 얼마 전에 만주벌판의 ‘요하문명(遙河文明)’4)유적지에서 ‘단군신화의 곰’으로 비정되는 곰여신[熊女神]의 거대한 조소상이 발견되어 중국을 비롯하여 한 반도의 학자들을 흥분하게 만든 사건과 연결시키면 그러하다.
그 외에도 위에서 설명한 유목민의 별, 금성의 성격과 나아가 ‘촐폰아타’의 언어학적 해석이고 다음으로 이식쿨호수가 겨울에도 얼지 않는 호수여서 겨울에도 가축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천혜의 초원지대여서 고대 유목민족들이 정착촌으로 안성맞춤의 터전이란 점이다. 그 다음으로는 현 키르기즈 민족의 상고사에 의하면 그들은 먼 옛날 바이칼호수에서 남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원(原)한민족’이라는 환인부족의 이주방향과는 반대되지만, 같은 초원의 민족들의 이용빈도가 잦은 북방의 스텝루트(Steppe R)를 이용하였다는 점도 먼 배경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정적 근거로 볼 수 있는 선사시대의 투르크식 석인상이 지금도 이시쿨호수가 벌판에 무수히 널려 있다는 점도 큰 작용을 했다.
▼ 박물관 입구 안내표지판
▼ 박물관의 맷돌과 절구통은 마치 우리 것과 같았다.
* 도처에 산재한 ‘괵 투르크 석상’
다음날 우리는 아침 일찍 근처에 있는 조그만 촐폰아타박물관으로 향했다. 어제 저녁 그 박물관 앞에 서 있는 석상들이 -마치 제주도의 돌하르방과 같아서 그런지 친근해 보이는- 몇 기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기대감으로 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박물관 대문을 열기 전부터 기다렸다.
안에는 구러시아의 공산혁명 당시의 근대 유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사이로 농경민족에 관련된 민속품도 여러 개 보였고 원시수렵도가 새겨진 암각화 사진들이 포스터 형태로 걸려 있었다. 그중 편두형 머리에 고깔모자를 쓰고 뿔이 큰 산양을 사냥하는 수렵도 사진도 보였다.
▼ 선사시대 수렵도/ 고깔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다.
물론 우리들의 눈길은 대문 밖에 서있는 것과 비슷한 몇 기의 돌하루방 같은 석인상에 머물렀는데, 설명조로 붙어있는 제목은 ‘터키석상[Turkish stone statue]’ 또는 '발발(Balbal)'이라 쓰여 있었다. 이를 한자로 음차하자면 돌궐인석상(突厥人石像)이 되는 셈이다. 크기는 대충 1m 전후의 것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석상의 얼굴 모양과 수염의 유무 그리고 두 손의 계인(契印)이 다르게 표현되어 있어서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바로 이 석상들의 건조연대와 목적이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안내인에게 물어 보아도 역시 고개만 내저을 뿐이다. 그들도 말이 안 통하는 우리들이 답답했던지 이식클의 고고학적 지도를 가리키며 그 책을 가지고 이것들이 출토된 그곳으로 가보라고 등을 떠미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으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내어 그곳으로 달려갔다. 촐폰아타에서 서쪽으로 한참을 달리다가 오르노크(Ornok)라는 마을에서 북쪽의 산기슭으로 한참을 올라가면 촌키수(Chon-kysoo)란 커다란 허허벌판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선사시대 암각화[Petroglyph]단지였다. 입구에서부터 박물관 도록에 나오는 수렵화가 새겨진 자연석이 드믄 드믄 보였으나 우리들의 목적은 따로 있었기에 모두 흩어져서 찾기 시작했다. 한참 만에 벌판 한 모퉁이에서 “심 봤다” 라는 환희에 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나는 곳으로 우리들은 모여들었는데, 정말 우리 앞에 모습을 들어 낸 것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예의 그 투르크석상과 같은 석상들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이런 석상들을 ‘발발(Balbal)’ 또는 ‘바바(baba)’ 라는 부르는데, 그 뜻은 ’조상‘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석상들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유라시아 초원을 주름잡았던 황금의 스키타이민족을 비롯하여 흉노, 몽골 같은 유목민들의 쿠르간(kurgan)이라 부르는 무덤주변이나 성스러운 곳에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네 조상묘에 세웠던, 석수(石獸), 석주, 석등 같은 나란히 세웠던 문무 석상과도 무슨 연결고리가 있어 보이는 것들이 아닐 수 없다.
한참 동안 감격에 겨워 찬찬히 그것들을 새겨보기도 하고 인증 샷도 하고 나서, 우리들은 그 석상을 그냥 조상인 ‘발발’ 대신에 배달민족의 태초의 조상이라는 ‘환인(桓因)할배상’이라고 정했다.
▼ 암각화 단지 입구
그리고 미리 준비해간 <천산다르촉>5) 깃발을 거기에 둘렀다. 그리고 그 앞에 엎드려서 오체투지의 삼배를 올리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인사말씀을 올렸다.
“먼 해동에서 찾아온 배달민족의 후손이 삼가 인사를 올립니다. 무엇보다 제수(祭需)를 제대로 차릴 수 없어서 죄송하기 그지 없습니다만…”
▼ 이식쿨호숫가의 유적지도 / 촐폰아타박물관을 비롯하여 수렵화 암각화단지, 선사거주지, 중세거주지, 수몰된 유적지, 유물출토지 등이 표시되어 있다.
박물관 도록에서는 그 석상을 ‘터키석상’이라 부르고 있지만, 우리 정서에는 돌궐인석상이 오히려 친근하다. 왜냐하면 ‘돌궐’은 그 개념이 그리 명확하지는 않더라도 우리에게는 친근감이 있는 용어이다.
터키어로는 ‘괵투르크(Gök Türk)’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그 뜻은 “하늘의 투르크‘라고 한다. 이 ’괵(Gök)‘이란 접두사가 투르크족 전체에 붙이는 일반적인 수식어인지 아니면 석인상에만 붙이는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왠지 후자일 것 같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
‘돌궐’은 ‘투르크’ 또는 ‘튀르크’의 가차(假借)식 표기, 즉 한자식 음사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는 한(漢)나라 때 북방초원의 패자인 흉노(匈奴)의 한 줄기 후예라고 한다. 또한 시대에 따라 칙륵(敕勒)ㆍ회흘(回紇)ㆍ회골(回鶻)ㆍ외올아(畏兀兒), 유오이(維吾爾) 등의 여러 호칭으로 불렸다고도 한다.
이들이 세운 나라가 바로 돌궐국인데, 6~8세기 한 때, 몽골초원과 천산산맥, 알타이산맥의 초원지대를 중심으로 살던 유목민족이 모여들어 국가형태를 이루며 당시 초원의 패자였던 유연을 멸망시키고 중앙아시아에서 만주 지방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곳을 무대로 제국을 세웠다. 그 때가 3대 칸(Khan)인, 목간카간(木杆可汗) 때였다고 한다. 그들은 처음에는 소그드(Sogd)문자를 쓰다가 후에 그 자모를 빌어 스스로의 돌궐문자6)를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그 비문을 해독한 바에 의하면 관제(官制)로는 가칸[可汗] 아래 엽호(葉護), 설(設), 특근(特勤), 사리발(俟利發), 토둔(吐屯) 등 28등급을 두었고 유목민들에게 병마를 징발했고 각종 가축에 과세를 부과하는 경제정책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런 조직과 경제력으로 세력은 강대해졌지만, 칸의 지위를 둘러싸고 동족간의 싸움이 그치지 않은 틈을 이용해 중국을 통일한 수(隋)나라는 교묘한 이간책을 써서 돌궐은 동, 서돌궐로 갈라지게 한 다음 630년 그 반쪽인 동돌궐을 수나라에 복속시키고 도독부(都督府), 도호부(都護府), 주(州) 등을 설치하여 중국에 동화시켰다.
▼ 오르콘 돌궐문자석
한편 서돌궐은 지리적으로 실크로드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각국 상인의 왕래가 끊이지 않아 경제적으로 안정되었고 또한 여러 종교가7) 만개하여 문화적으로 풍요로움을 이룬 바탕위에 사궤칸, 통엽호칸(統葉護可汗)8) 부자 대에 이르러서는 동쪽의 철륵(鐵勒) 여러 부족을 통일한 다음에 방향을 서쪽으로 돌려 중앙아시아의 쿠샨과 서방의 페르시아 등을 정벌하고 유라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지리적 중요성으로 동서 문화와 경제교류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9)
참, 하늘뫼 칸탱그리와 마고신화 그리고 촐본아타 이야기에 이끌려 시공을 초월하여 이식쿨 호반가를 거닐다 보니 우리의 메인 스토리텔링인 현장법사의 옛길을 잠시 잊은 것 같다.
“ 샛별을 쫓아서 해가 떠오르는 동방으로 떠나라.”
필자는 2010년 문화방송국 팀과 <샤먼로드>라는 다큐를 기획하여 프로를 만들어 방송한바 있는데, 그 때 자료 조사차 만주벌판의 졸본성과 요하문명의 뉴허량(牛河梁)10)유적지 그리고 이식쿨호수를 답사하였다. 다음은 그 시놉시스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여러 문헌과 현지답사 그리고 작가적 상상력에 의한 한 ‘가설’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미 널리 알려져, 이제는 새로울 것이 없는 사실이지만, 우리의 샤머니즘은 만주벌판과 몽골초원 그리고 드넓은 바이칼호수 그리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알타이산과 천산산맥을 지나는 초원루트에 사는 유목민족들의 그것과 신기하리만큼 닮았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 ‘연결고리’를 여는 열쇄는 전자일까? 후자일까?
이제 필자는 그 대답을 얻기 위해 우리 민족문화의 뿌리인 샤머니즘의 근원지를 찾는, 원초적 화두를 들고 길을 떠나기로 한다. ‘천부인(天符印)’이라는 3가지의 신물(神物)- 동경과 동검과 구슬- 을 가지고 머나 먼 북방의 초원에서부터 ‘곰의 탈’을 쓰고서 말을 타고 내려왔던 그 길 즉, <샤먼로드>를 따라 길을 떠난다. 우리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조상의 조상이라는, 단군할배와 환인할배 그리고 마고할매의 고향이라는 그 곳으로…
▼ 칸텡그리산과 이식쿨 호수 인근 개념도
아득한 옛날, 하늘의 뜻을 내려 받은 ‘슈퍼샤먼(國巫)’인 환인할배와 마고할매의 영도아래 우리 배달민족의 먼 조상들은 12개 부족으로 나누어 중앙아시아의 천산산맥 아래 신시(神市)를 중심으로 부족연합체를 이루어 오랫동안 평화롭게 살아왔다고 한다.
물론 당시의 샤머니즘은 하늘의 뜻을 땅과 인간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신성한 ‘무탁’이란 밧줄을 타고 하늘을 마음대로 오르내릴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신기(神氣)를 타고난 특수한 샤먼만의 전유물이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인구증가와 함께 급격한 기온변화로 인해 푸르렀던 초원이 황폐해지고, 가축과 사람들의 먹을거리가 모자라게 되자, 부족장들이 한데 모여 오랜 회의를 한 결과 하늘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신시에 마련된 웅장한 재천단(祭天壇)에서 신탁(神託)을 비는 제사장의 기도가 시작되었고 그래서 내려진 하늘의 뜻은 “떠나라” 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수천 년 동안의 삶의 터전인 파미르고원 아래의 무지개가 떠 있는 초원의 신시(神市), 촐폰아타를 떠나 부족별로 삼삼오오 떠났다.
그들의 방향키는 여전히 “동쪽으로 떠나라” 는 신탁의 구절대로였다. ‘노마드의 별’인 ‘촐폰성(星)’, 즉 샛별을 방향삼아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래서 그들 머리 위에는 늘 샛별이 저녁에는 저쪽하늘에, 아침에는 동쪽 하늘에 떠 있었다. 그들 부족들은 그 별을 신탁의 말씀의 증거로 삼았기에, 오랜 유랑의 길 내내 외롭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머무는 곳마다 세웠던 마을 이름을 두고 온 고향 ‘촐폰아타’에 해당되는 현지토착민 언어로 음사(音寫)하여 명명하고 후손들에게 그 의미를 잊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수천 년 동안 여러 곳의 ‘촐폰’ 류의 이름을 가진 도읍지를 거치며 마침내 소리음 보다는 뜻을 중요시하는 한자문화권에 정착하여서는 ‘촐폰아타’는 소리 대신에 ‘금성(金城 또는 金星)’이라고 의역(意譯)하여 부르게 되었다. 물론 후에 한반도에 도착해서는 우리말인 ‘샛별’ 또는 ‘서라벌’로 불렀을 것이겠지만…
그러니까 이시쿨호수가의 신시 ‘촐폰아타’는 그들의 초기 정착촌이었고 그 사이에에 산재된 ‘촐폰 류’와 ‘금성 류’의 지명들은 경유지였고 그리고 고구려의 졸본성은 유목민 ‘호모 노마드’로써의 마지막 기착지였고 그리고 신라의 경주는 유목민족에서 농경민족으로 변화하면서 세운 마지막 도읍지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참, 사족을 더 부친다면, 아직은 야사적 기록으로 취급되는 『부도지』나『환단고기』등에 의하면, 중앙아시아에서 출발하여 만주벌판의 아사달에 도착하기까지의, 이른바 환웅시대(桓雄時代)는 18세대 1,565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1) 서역(西域)은 매우 춥기 때문에 면의(面衣)90)1)․장갑․신발․버선 따위의 여러 가지도 준비했다. 그리고 황금 1백 냥과 은전 3만, 비단과 명주 등 5백 필을 법사의 왕복 20년 동안의 경비로 충당하도록 하였다. 또 말 30필과 일꾼 25명을 지급했으며,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환신(歡信)을 보내어 서돌궐(西突厥)의 섭호가한(葉護可汗)의 아문(衙門)까지 배웅하도록 하였다.<『자은전』 권1>
2) 마고신화를 기록한 『부도지』의 저자 박제상은 신라 혁거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벼슬길에 나가 보성왕 2년(403)에 시중에 등용되었다가 418년 사신으로써 고구려에 들어가 볼모로 잡혀 있던 왕의 동생을 귀국시키고 다시 일본으로 가서 역시 볼모로 잡혀 있는 왕의 아우를 데려오고 대신 죽음을 맞이한 충신으로 역사에 기록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어떤 사서에 근거하여 『부도지』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이 문헌의 사서로써의 가치를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4) 홍산문화 뉴허량[牛河梁] 유적지는 세계를 놀라게 한 신석기 말기의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곰과 관련한 유물들이 많이 나왔는데, 곰뼈와 곰의 머리, 곰발톱으로 추정되는 진흙 조소상 파편이 함께 무려 크기가 5m나 되는 곰녀상이 2기가 발굴되었는데, 이 여신상은 눈에 둥근 옥이 박혀 있어 연대 측정이 가능했다. 학계에선 그 연대를 기원전 3500년~기원전 3000년 정도로 보고 있다. 바로 우리 단기의 년대와 정학하게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할 것은 돌로 쌓은 무덤인 적석총이 여러 가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들여쌓기식 피라미드인 것이다.
6) 괵튀르크 문자, 옛 투르크 문자, 오르콘 문자라고도 한다. 오르콘 문자라는 표현은 이 문자가 쓰인 대표적인 비문이 오르콘 강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대략 8세기 무렵에 등장하여, 고대 투르크어를 적는데 쓰였다.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언어 가운데는 가장 일찍 음소-표음문자로 적힌 기록이라는 점이 특기할만하다.
7) 불교, 조로아스터교, 네스토리우스교(景敎)등이 조화롭게 전파되었다. 후에 이 바탕위에 이슬람문화로 통일되었지만...
8) 현장이 소엽성에서 만났던 그 가칸을 말한다. <자치통감/ 卷187. 唐 紀 三 / 高 祖 / 武德 二 年> 의하면 엽호칸의 행적은 뚜렷하다.
“서돌궐을 통합한 엽호가칸과 고창王이 파견사를 보내 조정에 왔다. 사궤칸은 달두칸의 손자로 나라를 세워서 동쪽으로 금산(金山)에 까지 땅을 개척했으며, 서쪽으로는 바다(西海)에 이르렀는데, 북쪽의 돌궐을 적으로 하기에 이르렀다. 도읍을 구차(龜玆)의 북쪽 삼미산에 설치했다. 사궤칸이 죽고 아들 엽호칸을 세웠는데 용감하고 지모가 있어 북쪽의 철륵(鐵勒)과 활을 쏠 수 있는 자가 수십만이었다. 오손(烏孫)의 옛 땅에 거점을 만들었다. 또 도읍을 석국(石國)의 북쪽 천천(千泉)에 두었고 서역제국을 모두 신하로 만들었다. 엽호칸은 각 지방에 사신을 보내어 주둔하여 이들을 보고 감독하고 조세를 책정하였다.”
10) 홍산문화 뉴허량(牛河梁) 유적지에서는 곰과 관련한 유물들이 많이 나왔다. 세계를 놀라게 한 신석기 만기의 여신묘에서 여신상이 출토된 곳으로 이 여신묘에서 곰 아래턱뼈와 곰의 머리, 발톱으로 추정되는 진흙 조소상 파편이 함께 나왔다. 뉴허량 여신상은 눈에 둥근 옥이 박혀 있어 연대 측정이 가능했다. 학계에선 그 연대를 기원전 3500년~기원전 3000년 정도로 본다.
흥미로운 것은 뉴허량 인근에서 돌로 쌓은 무덤인 적석총이 조사됐고, 거기서 옥으로 만든 돼지 형상의 용, 즉 옥저룡(玉猪龍)이 발굴됐다는 사실이다. 처음에 돼지 형상이라고 봤던 중국 학자들이 요즘은 옥웅룡(玉熊龍)이라고 본다. 곰이라는 말이다.
첫댓글 와우~~
몽골 쪽의 졸본은 어디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