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권 하관 병조(夏官兵曹) 제4 정관지속(政官之屬)
살피건대, 원전(原典)에 따르면 병조에는 대부로 참의 외에 또 참지(參知)가 있고, 낭관도 여덟 자리여서 다른 기관보다 두 자리가 더 있는데, 대개 내병조(內兵曹)에 직숙(直宿)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내병조를 별도로 한 기관으로 만들었으니 그 정원도 다른 조와 같이 함이 마땅하고 반드시 더할 것도 아니다.
생각건대, 중추부는 옛적 추밀원(樞密院)이다. 당(唐)ㆍ송(宋) 무렵에 비로소 이 관청이 기밀을 맡았고, 변무(邊務)를 총찰(摠察)하도록 되었다. 송나라 초기에 조보(趙普)가 추밀사가 되었을 때 중서성(中書省)과 함께 정권을 분담해서 서로 2부(府)라 일컬었으니, 그 직책의 중요함이 이와 같았다. 그 명칭은 지금의 중추부(中樞府)이고, 그 실권은 지금의 비변사(備邊司)가 이것이다. 지금 중추부는 이 명칭이 있으면서 그 실권은 없고, 비변사는 그 실권은 있으면서 이 명칭이 없으니, 양쪽이 그 마땅함을 잃은 것이다. 중추부는 하는 일이 전연 없어, 한가롭게 노는 사람이 녹(祿)을 타먹는 곳이 되었고, 비변사는 온갖 사무를 총괄함으로써 의정부(議政府)를 늘 닫혀 있는 아문으로 만들어버렸으니, 제도가 허물어지고 어수선해짐이 하나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또 비변사에서 총찰하는 것이 다만 변무만이 아니니 비변사라 부르는 것도 또한 마땅치 않다. 지금부터 비변사를 중추부로 만들고 편액[懸板]도 고쳐 달아서, 중추부를 명칭과 실권이 서로 합치하도록 하는 것이 일에 편당하다고 생각한다.
살피건대, 비변사 도제조(都提調)는 시임(時任)과 원임 대신이 예겸하고 제조는 육조의 판서와 대제학, 오영(五營)의 대장(大將), 사도(四都)의 유수(留守)가 예겸한다. 또 유사당상(有司堂上) 4명을 두어서 8도를 관할하도록 했는데, 1명이 2도씩 영솔(領率)하고 있다. 시임대신은 제대로 의정부가 있는데 어찌 반드시 겸무를 하고, 육조 판서도 제대로 육조가 있는데 어찌 반드시 겸하는 것인가? 나는 영사 한 자리, 판사 두 자리는 원임 대신에게 맡기고, 지사 여섯 자리와 동지사 여덟 자리는 혹 다른 관직에게 겸하도록 하거나 산관(散官)인 자에게 맡긴다. 지사 6명을 12성(省)의 구관대부(句管大夫)로 삼아서 1명이 2성씩 영솔하며, 첨지사 여덟 자리 중에 네 자리는 좌우승지(左右承旨)가 예겸하고, 네 자리는 사람을 택해, 별도로 차임해서 부제조(副提調)의 옛 직책을 맡긴다. 그리고 3공과 9경(3고 및 6경)이 비록 추부(樞府)의 관직을 겸하지 않았으나, 제대로 도당(都堂)의 회의를 주장해서 모든 문서를 회공(回公)하는 것이 추부의 대부(大夫)와 다름이 없으니, 법제가 정비되어서 명칭과 실제가 어긋남이 없다고 생각한다.
생각건대, 지금 법에 모든 노직(老職)이나, 또는 곡식을 바치고 관직을 받은 자는 비록 잡된 하천배(下賤輩)일지라도 모두 첨지(僉知)나 동지(同知)로 삼고, 한 가지 기예로써 벼슬한 자도 지사(知事)로 삼는 경우가 있어 작위(爵位)가 날고 범람해지고 귀천에 분별이 없다.
지금부터 노직이나, 곡식을 바치고 벼슬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우림위(羽林衛)의 호군(護軍)과 부호군으로 처우하고, 한 가지 기예로써 벼슬하여 공적이 있는 자는, 북한관성장(北漢管城將)으로 2품 실직(實職)을 삼아서 이들을 북한총어사(北漢摠禦使)라는 명칭으로 가서 있도록 하면 중추부가 빈 명칭으로 있는 것보다는 나으리라고 생각한다.
살피건대, 원전에, 중추부 낭관은 본시 두 자리였으나 비변사 낭관이 열두 자리나 되기 때문에 지금 비국(備局) 인원을 그대로 중추부 명칭으로 하였다.
살피건대, 사훈부란 충훈부(忠勳府)이다. 《주례》에 사훈이 하관(夏官) 소속이었으므로 이제도 그대로 하였다.
생각건대, 훈부의 대부(大夫)는 때에 따라서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며, 때에 따라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으므로 그 정원을 나타내지 않았다.
생각건대, 우리나라 초기에 충익부(忠翊府)라는 것이 있어 원종공신(原從功臣)의 관서였는데 지금은 충훈부에 합병되었다. 또 충의위(忠義衛)라는 것은, 공신의 적가장손(嫡家長孫)이 모이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천한 무리와 간사한 백성들이 가짜 족보를 만들어서, 충의위에 마구 들어간 경우가 매우 많다. 지금부터는 충의위를 선발할 적에 열 사람을 넘지 않게 하여, 본부(本府)의 원외랑으로 삼았다가 혹 의장랑(儀仗郞 : 지금의 부장)으로 전보하거나 수묘관(守墓官)으로 전보하여 지금 제도와 같이 함이 가하다고 생각한다.
생각건대, 무거원이란 지금의 훈련원(訓鍊院)이다. 군사의 재예(才藝)를 시험하고, 기술을 연습시키는 일은 본디 훈련원이 관장했는데, 다섯 영문(營門)을 건립한 다음부터 훈련원은 그냥 한가한 관청으로서 오직 무신이 의탁하는 곳이 되었을 뿐이다. 이제 문과와 무과를 3년 만에 대비(大比)할 적마다 각 200명을 뽑아서 36명씩 급제시키고 164명씩을 진사(進士)와 진무(進武)로 삼는다. 그리고 회시(會試)에는 1소(所)ㆍ2소라는 것이 없어, 문과는 공거원(貢擧院)에서 실시하고 무과는 훈련원에서 실시하므로 무거원이라 명칭하였다.
살피건대, 권지봉사와 습독관 따위는 모두 진무로 삼았다가, 공적이 있는 자는 전보시키고 그렇지 못한 자는 3년 만에 체임(遞任)한다.
생각건대, 부정(副正) 네 자리 중에 두 자리는 첨정(僉正)인데 예는 위에 적었다(병학교관은 곧 능마아낭관(能麽兒郞官)으로서 본디 하사였으나 이번에 승격시켰다).
태어시란 사복시(司僕寺)이다.
생각건대, 사복이라는 관직은 말(馬)을 관장하는 것이니 《주례》의 교인(校人)이고, 말 부리는 일을 맡은 것은 《주례》의 태어(太馭)이다. 한나라 이래로 마구(馬廐)를 관장하는 관직을 잘못해서 태복(太僕)이라 일렀는데 역대부터 이어져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 주관(周官)에는 태복이 왕의 의복과 자리를 바로잡고, 왕명(王命)을 출납(出納)하며, 또 북을 달아서 백성의 원통한 사정을 아뢰도록 하였다. 그 직무가 후세의 상서성(尙書省)과 같으면서 등문고원(登聞鼓院)을 겸했으니, 말을 관리하고 말 부리는 일을 맡은 관청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복시를 고쳐서 태어시라 했는데, 《주례》 태어 소속에는 또한 융복(戎僕)ㆍ제복(齊僕)ㆍ도복(道僕)ㆍ전복(田僕)이 있다.
생각건대, 원제(原制)에 대신이 도제조가 되었는데 대신이 말을 관장하는 것은 옛 뜻이 아닌 듯하므로 이번에는 줄였다.
생각건대, 내사복(內司僕)은 별도로 관청을 만들어서 승여(乘輿)를 관장하도록 함이 마땅하다. 또 금군(禁軍)에 겸사복(兼司僕)이라는 직명이 있는데, 당시에는 반드시 사복과 서로 연결된 관직이었으나 지금은 이미 그렇지 않으니 겸사복이라는 직명을 그대로 쓸 수 없다.
승여사란 내사복(內司僕)이다.
생각건대, 원전에 따르면 병조(兵曹)에 승여사가 있어, 노부(鹵簿)와 연(輦)ㆍ여(輿)를 관장했으나 지금은 승여에 대한 일을 내사복이 주장하고, 병조의 승여사는 마색(馬色)이라 고쳐서 역전(驛傳)을 관장할 뿐이다. 이번에는 내사복을 승여사로 만들고 제조 두 자리는 그냥 태어시 제조에게 겸하도록 하였다.
생각건대, 원편(原編)에는 위로 2품에서 아래로 9품까지 내승 관직을 못하는 품계가 없으니 또한 마땅치 않은 듯하다. 지금 그 직품을 한결같이 정해서 오르내림이 없도록 하면 체모가 더욱 무거워질 것이다.
생각건대, 말을 사양(飼養)하는 것은 나라의 큰 정사이다. 우리나라 제도에 감목관 20여 명이 여러 도에 갈리어 나가는데 혹 수령이나 변장(邊將)이 겸무하기도 하고, 혹은 별도로 관원을 차임하는데 모두 사복시에서 주관한다. 내가 주관(周官) 제도를 보니, 태어(太馭)와 양마(養馬)하는 관직은 완전히 다른데, 양마하는 관직은 목사(牧師)ㆍ유인(庾人)ㆍ어사(圉師)ㆍ어인(圉人)이 이것이다. 살곶이[箭串] 목장의 관아를 그대로 목어사(牧圉司)라 일컬어서, 8도 목장의 정사를 총괄하도록 한다. 또 여러 도의 부유한 백성 중에 해도(海島)나 산장(山莊)에 말을 사양할 만한 곳이 있는 자에게는 우리[圉]를 설치해서 말을 먹이도록 하며, 관에서 준마를 주어서, 교미 번식시킨다.
말을 길러서 1천 필이 된 자에게는 크고 날쌘 말 열 필을 택해서 본사(本司)에 납부하고 나머지는 사매(私賣)하는 것을 허가한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본사 관직을 바로 제수했다가 법대로 승진 또는 전보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 나라 풍습이 말 교미하는 것을 엄금하여 수말은 죽을 때까지 동정(童貞)을 간직하고, 암말은 한 번쯤 생산한다. 그러나 뜨거운 죽을 먹이고 따뜻한 유삼(襦衫)을 입히므로 온갖 병이 생기게 되는데, 말 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발굽을 파서 피를 쏟게 하는 단 한 가지뿐이어서, 말들은 피를 냇물처럼 흘리고 벌벌 떨며 서 있다.
이렇기 때문에 지금 큰 군과 큰 현이라도 그 경계 안에서 말 열 필을 볼 수가 없고 혹 있더라도 모두 키가 자그마한 종류여서 전마(戰馬)로 쓰일 만한 것이 없으니, 나라의 급한 정사에 말보다 더 급한 것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북방(北方)은 일찍 추워져서 말을 칠 수 없다.”고 하지만 달단(韃靼)의 말을 북새(北塞)에 매매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남방은 비습(卑濕)하고 뜨거워서 말을 칠 수 없다.” 하면서 비룡마(飛龍馬)가 탐라에서 생산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줄 모른다. 서로 통하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목어하는 일을 관장할 기관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건대, 위솔이 네 자리이면 그 중 두 자리는 부솔(副率)이며, 세마가 여섯 자리이면 그 중 두 자리는 시직(侍直)인데, 예는 위에 기록되었다.
세손(世孫)의 위종사(衛從司)는 장사(長史)로 중사 2명, 종사(從史)로 하사 2명.
생각건대, 위종사는 반드시 별도 아문을 세울 것이 아니므로 계방(桂坊)에다 붙였다.
좌액사란 도총부(都摠府)이다. 숙위대사란 도총관(都摠管)이며, 부사는 부총관이다. 집극랑은 경력(經歷)이고 폐순랑은 도사(都事)이다.
생각건대, 도총관이란 오위(五衛)의 사졸(士卒)을 전부 총괄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오위를 혁파한 지가 수백 년이 되었고, 한 졸개도 거느리지 않으면서 명칭을 오위 도총관이라 하니, 명칭과 실상이 서로 부합하지 않음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 관직제도에 명칭과 실상이 부합하지 않으면, 관직에 있는 사람이 봉직할 바를 모르게 됨은 필연의 이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총관을 숙위대사라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생각건대, 총부(摠府)의 대부(大夫)는 운검(雲劍)과 보검(寶劍)을 메고, 종일토록 시립(侍立)해야 한다. 그러므로 늙은 사람들에게는 괴롭고 힘든 일이니 나는 이후부터 50세 이상은 이 직에 차임하지 말고, 그 낭관 여섯 사람에게(중ㆍ하사 두 사람) 창을 잡고 시립하여 시위(侍衛)를 엄중하게 하도록 함이 또한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우액사란 내병조(內兵曹)이다. 도궁정은 내병조에 입직(入直)하는 대부이고, 금오랑은 내병조 낭관이다.
살피건대, 《주례》 천관(天官 : 宮正조에 보임)에, 궁정이라는 관직은 왕궁의 계령(戒令)과 규금(糾禁)을 맡아서 사시(四時)로 관부(官府)와 차사(次舍)를 비교한 다음, 판(版)을 만들어서 대비하고(지금의 성기(省記)와 같음) 저녁에는 딱다기(지금의 更鼓(직숙자의 점검)와 같다)를 쳐서 비교해서 출입하는 것을 기찰(譏察)하며 내인ㆍ외인을 분별했으니, 이것이 지금 내병조의 직장(職掌)이 아니겠는가. 생각건대, 당나라 제도를 보니 좌우금오위(左右金吾衛)가 궁중 순찰을 맡았으니 금오란 숙위(宿衛)하는 관직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은 의금부(義禁府)를 금오라고 잘못 말하는데, 의금부란 옛적 대리(大理)이고 진(秦)ㆍ한(漢) 때에는 정위(廷尉)라 일컬었는데, 옥관(獄官)을 금오라 하는 것을 어디에서 보았는지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내병조 대부는 도궁정이라 해야 마땅하고 그 낭관은 금오랑이라하는 것이 마땅하며 구차스럽게 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생각건대, 이 편에서 병조의 참지(參知) 한 자리를 줄였고 도총부에 총관 두 자리를 줄였으니 궁정(宮正) 두 자리가 많은 것이 아니며 병조에 낭관 두 자리를 줄여서 다른 조(曹)와 같게 했으니 금오랑 두 자리도 많은 것이 아니다. 나라의 재력이 본디 가난하므로 감히 관직을 증가하지 못했다.
중위사란 호위청과 별군직(別軍職)을 합쳐서 만든 것이다. 대사가 한 자리인 것은 호위대장이고(原任大臣이나 國舅 중에서 겸무한다), 별장이 두 자리인 것은 호위 별장(본디는 세자리였다)이다. 효기상시는 당상별군직(堂上別軍職)이고, 효기랑이 10명인 것은 당하별군직이며, 교련군관 네 자리는 호위청 소임군관(所任軍官) 세 자리와 별부료군관(別付料軍官) 한 자리이다. 호위군관은 본디 1천 50명이었는데 선조(先朝)에서 700명을 줄였고 이번에 또 50명을 줄인 까닭으로 300명이다.
생각건대, 호위청이란 인조(仁祖) 계해년(1623)에 창설된 것이고, 별군직이란 효종이 심양에서 돌아온 후에 8장사를 처우한 것인데 별군직도 또한 임금을 호위하는 것이니 합쳐서 하나로 하는 것이 의리에 마땅하다.
생각건대, 관직제도는 통솔되는 데가 있음이 마땅하다. 큰 벼리로써 잔 그물눈을 거느리고, 큰 줄기로써 작은 가지를 거느린 다음이라야 혈맥이 유통되고 호령에 막힘이 없게 된다. 만약 자잘한 것들이 각자 제멋대로 하여 자기 몸뚱이가 어느 관직에 매였는지도 모르고, 그 관직이 어느 관청에 예속되었는지도 모르며, 그 관청이 어느 조에 예속되었는지도 몰라서, 꼭 장수 없는 졸개처럼 각자 놀아나는 것은 한 임금이 표준을 세운 법제가 아니다. 병조 관속이 산란하여 통솔된 데가 없으니 지금 네 종류로 나누고, 종류마다 셋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삼사(三司)인데, 좌액사는 지금의 도총부이고 우액사는 지금의 내병조이며, 중위사는 지금의 호위청과 별군직을 합친 것이다. 둘째는 삼국(三局)인데, 선교국(宣敎局)은 지금의 선전청(宣傳廳)에다 무겸(武兼)을 합친 것이고 의장국(儀仗局)은 지금의 부장청(部將廳)에다 충의위(忠義衛)를 합친 것이며, 수어국(守禦局)은 지금의 수문청(守門廳)에다 성문을 지키는 장수와 비어 있는 대궐을 수호하는 장수를 합친 것이다. 셋째는 삼위(三衛)인데, 용양위(龍驤衛)ㆍ호분위(虎賁衛)는 옛 오위의 명칭이고, 우림위(羽林衛)는 우림장(羽林將)과 충장(忠壯)ㆍ충익(忠翊)을 합친 것이며, 금군(禁軍)과 내금위(內禁衛)ㆍ오위 등속이 다 여기 삼위에 합병된다. 넷째는 삼영(三營)인데, 도통영은 훈련도감이고 좌어영(左禦營)은 어영이며, 우위영(右衛營)은 금위영이다.
오직 이 삼사ㆍ삼국ㆍ삼위ㆍ삼영이 차례대로 반열을 이루어서 정연하고 어지럽지 않으면 무릇 호령이 있을 때는 몸이 팔을 시키고 팔이 손가락을 시키는 것과 같을 것이다. 평시에는 조정의 체모가 있고, 급한 때를 만나더라도 군오(軍伍)에 기율이 있어, 지금처럼 산란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어찌 별군직(別軍職)으로써 관명을 삼으며, 소임군관이라는 것으로 직명을 삼을 수 있겠는가? 창설할 때에 초초(草草)하게 한 것을 수정하지 않은 것은 조종(祖宗)의 공덕을 빛나게 하는 처사가 아니다.
선교국이란 선전청(宣傳廳)이며 그 대사는 병조판서가 예겸한다. 선전관은 본디 스물네 자리인데, 이번에도 그대로 했으나, 다만 네 등급으로 나누어서 변경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문겸은 본디 두 자리이므로 이번에도 그대로 하였다.
선령관(宣令官)이란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이며 무겸이 본디 쉰 자리인데 이번에는 서른여섯 자리로 줄여서 선교국에 합쳤다.
살피건대, 지금 과거제도는 문과에 서른여섯 사람, 무과에 서른여섯 사람으로 정해져 있다. 나라 제도에는 문과에 합격해서 처음 벼슬길에 들게 되면 삼원(三院)에 나누어 들어가는데 청족(淸族)은 승문원(承文院)으로, 서북 사람은 국자원(國子院)으로, 중인과 서족은 교서원(校書院)으로 각각 들어가게 된다. 과거에 합격한 사람 중에 세 가지 족속이 섞여 있는 까닭으로 삼원에 나누어드는 것도 또한 많고 적음이 같지 않다. 무과에 합격해서 벼슬길에 처음 들어가면, 3천(薦)으로 분간하는데 청족은 선전천(宣傳薦)에, 그 다음은 부장천(部將薦)에, 최하가 수문장천(守門將薦)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무과는 뽑는 사람이 많아져서 혹 1천 명이나 되기도 하니 조정에서 대우할 관직이 없다. 이리하여 천에는 들었으나 벼슬하지 못하고 머리가 희어지도록 그냥 넘기는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고, 처음부터 천에도 들지 못한 자는 또 백에 아흔 일곱, 아흔 여덟이나 되니, 천하에 법제가 없음이 이와 같을 수 없다.
대저 과거를 실시하여 사람을 뽑는 것은 장차 관직을 제수하려는 것인데, 실제로 관직을 제수하지 않으려면 과거는 보여서 무엇하겠는가? 하물며 씨족을 청탁(淸濁)으로 차별하는 것은 어진이를 권면하고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아니다.출신(出身)하는 당초에는 그 사람의 어짊과 우둔한 것을 묻지 않다가, 드디어 세 갈래로 분간하여 어깨를 겨루어서 나란히 서지 못하게 하는 것은 또한 무슨 의미인가? 문과와 무과를 3년 만에 대비할 적마다 36명씩만 뽑아서 교서감 정자(校書監正字) 열두 자리, 국자감 정자 열두 자리, 승문원 정자 열두 자리로써 문과 36명을 대처하고(위에 기록한 예조에 이미 적었다), 무겸(武兼) 서른여섯 자리는 선령관이라는 명칭으로써 무과(武科) 서른여섯 사람을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임기가 만료되기를 기다려서 그 재질(才質)과 학문이 탁월한 자는 홍문관(弘文館)으로 들어가게 하여 정자(正字)와 설서(說書 : 모두 8명)로 삼고, 무략(武略)이 탁월한 자는 선전관으로 승진시킨다(모두 8명). 능히 이 선발에 참여하지 못한 자 중에 문관은 체직(遞職)시켜서, 여러 관청의 별검(別檢)으로 삼기도 하며 또는 지방으로 내보내서 여러 도의 찰방(察訪)으로 삼는다. 무과는 전직해서 의장국이나 수어국에 들어가기도 하며 혹은 뽑아서 삼영문(三營門) 장관(將官)으로 삼기도 한다. 승진하여 중사(中士)가 된 후에는 특별히 옥당(玉堂)에 들어가기도 하며 특별히 선지관으로 배임(拜任)하기도 해서, 출신하는 처음부터 그 평생의 운명을 미리 단정짓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남행(南行)으로 벼슬길에 처음 드는 것도 또한 서른여섯 자리인데 무신으로서 남행되는 것은 그 길이 더 넓기 때문에 아울러 천전(遷轉)하는 법에 자세히 기록하였다.
생각건대, 선전관은 본디 왕명을 전달하는 직으로서 계라(啓螺)하는 것도 겸해서 맡았다. 그런데 상(上)ㆍ중(中)ㆍ하(下) 삼사(三士) 각 두 사람이 계라하는 것을 전적으로 관장하고, 무겸은 관장하는 일이 전연 없으면서 한갓 무신의 녹을 먹는 자리가 되었으니, 이는 매우 의의가 없는 것이다. 관직을 위해서 사람을 택한다는 말은 들었으나 사람을 위해서 관직을 설치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지금은 내취타를 무겸에다 붙이고 선령관도 겸하도록 해서 고취랑(鼓吹郞)이라 이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하여 서른여섯 사람 중에 몇 사람은 고인(鼓人)을 맡고 몇 사람은 정인(鉦人)을 맡으며 몇 사람은 취인(吹人)을 맡는데 정돈(修擧)하고 결속되도록 하여, 모두 계라에 예속시켜서 공연히 녹만 먹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하다.
의장국은 부장청(部將廳)이다. 그 제조는 병조참판이 예겸하며, 노부랑 이하는 부장인데 본디 스물다섯 자리였으나 이번에는 한 자리를 줄였다. 산개랑은 충의위에서 들어온 것이고 호장군은 의장소(儀仗所) 군사이다.
살피건대, 부장이란 오위의 오부장령(五部將領)인데 5×5=25인 까닭으로 그 수효가 스물다섯이었다. 오위는 이미 혁파되었는데, 졸개 없는 장령 자리를 무신이 녹 먹는 자리로 만들고, 옛 명칭을 그대로 쓰고 있으며 유사(有司)가 인습함으로써 법도가 무너져서 온갖 일이 진작(振作)하지 않음이 이와 같다. 부장은 맡은 일이 전연 없으니 이에 그 두 자리를 의장고(儀仗庫) 낭관으로 삼는다. 나는 부장청을 고쳐서 의장국이라 하고, 노부에 관한 일은 전적으로 부장에게 붙여서 명칭을 노부랑이라 하고, 의장에는 용봉선(龍鳳扇)과 금은조(金銀爪)가 있으니 명칭을 집선랑ㆍ집수랑이라 함이 마땅하며, 의장군을 노부랑이 거느리도록 함이 사리에 합당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생각건대, 근래의 예에 충의위에서 임사(入仕)한 자도 의장을 잡고 호가(扈駕)한 적이 있으므로 이번에는 그 네 자리를 이 국(局)에 소속시켜 명칭을 산개랑이라 하였다.
수어국이란 수문청(守門廳)인데 성문장(城門將)과 공궐장(空闕將)을 합친 것이며, 제조는 좌액사의 중대부(도총부)와 우액사의 하대부(내병조)가 예겸한다. 사문교위는 궐문 수장으로 본래 스물세 자리였으나 이제 한 자리를 증원한 것은 부장 한 자리를 줄였으므로 이것으로 충당한 것이다. 공궐호군이란 경복궁과 경희궁을 수호하는 장수이다.
살피건대, 정동문(正東門)과 정남문(正南門)은 각 4명, 동소문ㆍ서소문ㆍ돈의문ㆍ광희문ㆍ창의문은 각 2명이 파수(把守)하므로 성문 부위가 18명이다. 그리고 교위는 문마다 한 사람(北淸門은 지금 폐지되었다)씩이나 창의문에만은 없다.
공궐 수장은 그 직함을 절충장군 수어국부호군 분차 경복궁 수위관(折衝將軍守禦局副護軍分差景福宮守衛官)이라 한다.
도총관이란 용양위ㆍ호분위(虎賁衛)ㆍ우림위(羽林衛)의 도총관이다. 병조 판서가 예겸하며 그 직함은 정헌대부 병조판서 겸 용양위 호분위 우림위 도총관(正憲大夫兵曹判書兼龍驤衛虎賁衛羽林衛都摠管)이라 한다.
생각건대, 오위가 이미 혁파되어 영솔하는 장관이 없어지니, 졸개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서 산란하여 통솔됨이 없는데, 금군 700명도 장수 없는 졸개가 되었다. 이런 판에 우림장ㆍ충장장(忠壯將)ㆍ충익장(忠翊將)ㆍ겸사복(兼司僕) 등 여러 장령(將領)은 각자 흩어져서 자립하였고, 용호영(龍虎營) 당상군관(堂上軍官)과 별부료 군관 등은 또 졸개 없는 장수로서 별도 관청을 만들었다. 관제와 군제 양쪽이 모두 난잡한데 구차스럽게 이럭저럭 인습하는 것은 그 단서를 모르겠다. 각색 장령과 금군청ㆍ용호영을 섞어 합치면 장령관(將領官) 총 42명, 정령관(正領官) 96명, 금군 720명, 별부료 60명, 표하군 270명을 얻게 되는데 이것을 갈라 삼위(三衛)로 만들어서, 첫째는 용양위, 둘째는 호분위, 셋째는 우림위라 하고, 위마다 중호군 4명과 부호군 10명을 장관으로, 부사과(副司果) 8명과 부사정(副司正) 24명을 열교(列校 : 곧 禁軍 正領)로, 교련관(敎鍊官) 4명과 차비랑(佽飛郞) 20명(別付料)을 군관으로, 금군 240명을 숙위(宿衛)하는 군사로 삼는다.
이리하여 용양위는 좌액사에 숙직하면서 명정전 월랑(明政殿月廊)을 직려(直盧)로 하고, 호분위는 우액사에 숙직하면서 인정전 월랑(仁政殿月廊)을 직려로 하며, 우림위는 중금(中禁)에 숙직하는데 건양령(建陽嶺) 위쪽 이극문(貳極門) 안에 있는, 빈 행랑 하나를 주어서 직려로 만들도록 한다. 그런 다음에 병조판서를 용양위ㆍ호분위ㆍ우림위의 도총관으로 삼아 삼위를 통솔하면서 장수 하나, 군졸 하나도 보태거나 줄이지 못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숙위를 단속하며 순찰하기를 법대로 하면 천작(天作)으로 된 쇳덩이처럼 빈 틈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니, 이렇게 한다면 왕자(王者)의 법제가 설 것이다.
생각건대, 원제에는 여러 위(衛) 장령(將領)을 무대부(武大夫)로써 삼기도 하고, 잡기(雜歧)의 2품이나 3품으로써 삼기도 하였다. 이번에는 자잘하게 분간할 수가 없으니, 잘라서 법대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위마다 중호군이 네 자리이니 그 중 두 자리는 대부로써 삼고, 두 자리는 잡기로써 삼으며, 부호군이 열 자리이니 그 중 네 자리는 대부로써 삼고, 여섯 자리는 잡기로써 삼으며, 정령(正領) 이하는 아울러 예전 예대로 하고 반드시 고치지는 않았다.
생각건대, 원제에는 조사위장(曹司衛將) 두 자리는 문대부(文大夫)로써 삼았으니 이번에는 용양위 부호군 중의 두 자리는 문대부로써 삼았다.
생각건대, 원편에는 오위장이 열두 자리(그 중 두 자리를 曹司라 일컫는다), 내금장(內禁將)이 세 자리, 우림장이 두 자리, 겸사복장이 세 자리, 충장장이 세 자리, 충익장이 세 자리, 용호영 당상군관이 열여섯 자리인데, 합계하면 42명인 까닭에 삼위 호군의 수효를 42명으로 하였다.
살피건대, 원편에는 금군정(禁軍正)이 21명이고 금군영(禁軍領)이 63명으로 모두 합하면 84명이다. 이번에는 금군에다 20명을 증원한 까닭에 정(正)과 영(領)의 수효도 또한 증가되어서 삼위의 정ㆍ영을 합치면 96명이 되었다. 한 정(正)이 삼영을 영솔하고, 한 영(營)이 10명을 통솔하니 그 수효가 그렇지 않을 수 없다.
생각건대, 원편에는 금군이 700명이고 용호영 별부료 군관이 80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금군 20명을 증원하여 720명으로써 삼위에 분배하며, 별부료에 20명을 줄여서 60명으로 하고 명칭을 차비랑(佽飛郞)이라 하여, 삼위에 분배하였다. 그렇게 되면 금군 중의 20명은 서북 사람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살피건대, 원편에는, 용호영에 표하군 285명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15명을 줄여 270명으로 만들어서 삼위에 분배하였다.
생각건대, 금군 정과 영은 본디 금군의 정원 중에서 나온 것이니, 96명이라는 것도 또한 정원 중에서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건대, 원편에는, 문무 여러 신하 및 음사(蔭仕)ㆍ잡기(雜歧)의 신하로서 실직(實職)이 없는 자는, 으레 군직(軍職)에 붙여서 용양위ㆍ충무위라 일컫는다. 지금부터 문신 군직은 용양위에 붙이고, 무신 군직은 호분위에 붙이며, 음사 및 잡기 군직은, 우림위에 붙이면서, 그 관함(官銜) 위에 검교(檢校)라는 두 글자를 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군신 상대부의 군함(軍銜)은 선덕 장군 검교 용양위 상호군(宣德將軍檢校龍驤尉上護軍)이라 한다.
무신 중대부의 군함은 분무장군 검교 호분위 중호군(奮武將軍檢校虎賁衛中護軍)이라 한다.
문도 무도 아닌 하대부의 군함은 절충장군 검교 우림위 부호군(折衝將軍檢校羽林衛副護軍)이라 한다.
그 선덕ㆍ분무ㆍ절충이라는 칭호는 문무가 모두 같으나 검교라고 일컫는 것은 삼위의 본 정원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살피건대, 용양위에는 호군의 수기(手旗)로 모두 정람색기(正藍色旗)를 쓰고, 금군의 머리쓰개는 모두 남색 명주 휘양[護項]이며, 호분위에 호군의 수기로 모두 정홍색기(正紅色旗)를 쓰고, 금군의 머리쓰개는 모두 홍색 명주 휘양이며, 우림위에는 호군의 수기로 모두 정황색기(正黃色旗)를 쓰고, 금군의 머리쓰개는 모두 황색 명주 휘양이었다. 병조판서 수기의 왼편 갈고리에는 남색을, 오른편 갈고리에는 홍색을 달며, 중앙에는 황색인데 황색 기에다 삼군 삼위 사명(三軍三衛司命)이라고 적는다.
생각건대, 원전에는, 금군 700명을 칠번(七番)으로 나누고, 번마다 세정과 아홉 영이 입직(入直)하였다. 이번에도 그대로 하여 삼위에 번마다 한 정과 세 영이 삼소(三所)에 입직하는 것은 죄다 예전 법대로 하고 고친 것이 없다.
생각건대, 오위장(五衛將)이 입직하는 것은 원래 사소(四所)가 있어, 동소ㆍ서소ㆍ남소ㆍ북소라 했는데 이번에는 삼위를 이미 세웠으니 사소로 나누어서 입직하던 법은 정지함이 마땅하다.
도통영이란 훈련도감(訓鍊都監)이다.
살피건대, 기대(旗隊)를 분서(分署)하는 법에, 무릇 10명이 1대(隊)로, 3대가 1기(旗)로, 3기가 1초(哨)로, 5초가 1사(司)로, 5사가 1영(營)으로, 5영이 1군(軍)으로 되어 있다. 비록 초와 사 이상은 때에 따라 변경되기도 했으나, 그 큰 숫자는 본래 그대로이다. 무릇 한 대를 대장(隊長)과 화병(火兵)까지 합해서 계산하면 12명이 되는 것이니 1기는 36명, 1초는 108명인데 여기에 기총(旗摠) 3명을 보태면 111명이 된다. 이리하여 5초 1사는 555명이고, 5사 1영은 2천 775명이 된다.
지금 도통영이 서울 안에서 양성하는 보졸은 다만 한 영에 해당하는 수효만 남긴다(즉 25초). 또 기사 2초는 225명(보졸의 예와 같다)이며, 기병 9초는 999명으로 되는데, 만약 네 사람을 더하면 보졸과 기병을 합쳐서 4천 명이나 된다. 그들을 양병(養兵)하는 비용은 이것으로써 표준하는 것이 마땅하다. 좌어영(左禦營)과 우위영(右衛營)에 보졸이 각 25초이고 기사가 2초인데 그 수효가 3천 명씩이다(3명씩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세 영문이 서울에서 양성하는 병졸을 통틀어 계산해도 1만 명뿐이니, 비록 극히 빈약하나 지금 국력으로는 이보다 넘을 수가 없다. 위 문공(衛文公) 초년에는 혁거(革車)가 30승(乘)이었는데 만년에는 혁거가 300승이었다. 지금 우리 국력이 위 문공의 초년과 같으나, 진실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법도 있게 하면 수십 년을 지나지 않아서 부국강병이 될 것이니, 그때를 당하거든 힘을 헤아려서 증가시켜도 불가하지 않을 것이다.
옛적에는 1만 2천 500명을 1군으로 하였고, 큰 나라의 3군은 3만 7천 500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이 3군을 다 도성 안에서 양성하는 것이 아니고 온 나라 전부(田賦)를 통계해서, 여러 고을에 흩어져 있었다. 따라서 도성 안에서 병졸 1만 명을 양성하는 것은 오히려 많다 하겠다. 지금 12성(省) 감사(監司)에게 병졸 1천 명씩을 양성하도록 하고, 10로(路) 병마사(兵馬使)에게도 병졸 1천 명씩을 양성하도록 한다면 벌써 2만 2천 명이 된다. 큰 주(州)에는 3초씩을 양성하고 여러 군에는 1초씩을 양성한다면 또 수만 명이 될 터이니 어찌 큰 나라의 3군 제도뿐이겠는가? 지금 작은 현(縣)의 속오군(束伍軍)도 모두 5~6초는 되지만 양성은 하지 않고 군적에만 편입시켜서 모두 헛명부뿐이다. 헛명부에 1만 명이 올라와 있는 것은 실제 양성한 군사 10명을 두는 것만 같지 못하니, 빈약한 것을 병통으로 여길 것이 아니다. 나머지는 군제(軍制)에 자세히 기록하였다.
생각건대, 옛 제도에 큰 나라는 3군이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춘추전(春秋傳)》에 기록된 진(晋)나라와 초(楚)나라의 싸움은 모두 3군의 병력을 가지고 싸운 것인데, 중군(中軍)이 주가 되었고, 나머지 2군은 혹 상군(上軍)ㆍ하군(下軍)이라 일컫기도 하고, 또는 좌광(左廣)ㆍ우광(右廣)이라 일컬어서, 비록 그 명칭은 같지 않으나 그 군사만은 3군이었다. 우리나라 군제는 처음에는 5위를 세웠는데 만력(萬歷) 임진년(1592) 왜란(倭亂) 이후부터 5위는 없어지고, 5영이 설치되었다.
첫째 훈련도감(宣祖 임진년 후에 설치되었다), 둘째 어영(御營 : 仁祖 갑자년(1642)에 御營使가 처음 설치되었고, 孝宗 임진년(1652)에 비로소 영문을 설치하였다), 셋째 금위영(禁衛營 : 肅宗 임술년(1682)에 훈련 軍摠을 줄여서 설치했다), 넷째 수어청(守御廳 : 인조 병인년(1626)에 설치되었다), 다섯째 총융청(摠戎廳 : 인조 갑자년에 설치되었다)인데, 이것이 이른바 5영문(營門)이다. 그때에 남쪽도 적을 겨우 평정하자, 북쪽에 사단(事端)이 또 벌어져서 국운이 여러번이나 위태했는데 큰 명(命)은 겨우 이어왔다.
조정에서는 징계하는 뜻으로 계속 군영을 설치해서 4~5개나 되었는데, 한때 갑자기 만든 제도가 오랜 세대의 법이 되었다. 그러나 국력이 지탱해내지 못해서 경비가 나올 데가 없으니 백관이 녹을 먹지 못하고, 많은 서리(胥吏)도 녹을 의뢰할 데가 없으며,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니 작은 걱정이 아니다. 일찍이 금위영 사후군(伺侯軍)이 군화(軍靴)와 전동(箭筒)을 가지고 군관(軍官)을 수행하는 자를 보고, 그 요포(料布)를 물으니, 이조의 참의(參議)나 대사간(大司諫)의 녹보다 훨씬 후하였다. 나라를 다스림이 이와 같으니 폐단이 장차 어떠하겠는가? 상하에 등급이 없고 귀천도 구별이 없어, 염치가 없어지고 탐묵(貪墨)이 풍습으로 굳어졌으니 이것은 제도의 과실이다.
생각건대, 양병(養兵)하는 법으로는 정전(井田)이 첫째이고, 둔전(屯田)이 다음이며, 구부(口賦)가 또 그 다음이다. 지금은 세 가지 모두 믿을 것이 못되어 관에서 미곡과 전포(錢布)를 내어서, 수만 명의 놀고먹는 백성을 기르며, 그들의 부모와 처자들도 다 추위와 굶주림을 면하도록 하니, 그 형세가 꺾이고 굽히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해를 당하는 자는 품팔이와 비렁뱅이 같은, 호소할 데도 없는 백성과 국가의 큰 곳집뿐이니 어찌 서글프지 않은가?
지금 수어청은 이미 혁파했으나, 총융청도 없애는 것이 마땅한데, 그 두어 초(哨)는 북한(北漢)에다 붙이고, 나머지 장관은 삼군문(三軍門)에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서 차례대로 전보시키며 오직 훈련도감ㆍ어영청ㆍ금위영 세 영문만 남겨서 큰 나라의 삼군 제도를 따라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양병에 쓰이는 비용은 동서남 3교(郊)의 전지를 죄다 관전(官錢)으로 매입하여 둔전하는 것이 마땅하다. 동교(東郊)는 어영에, 남교(南郊)는 도감에, 서교(西郊)는 금영에 각각 붙이고 기내(畿內) 군민(軍民)으로서 날쌔고 건강하면서 전지 없는 자를 모집하여, 한 남정마다 전지 50부(負)를 주어 경종(耕種)하면서 군역에 응하도록 한다.
번(番)을 마치면 농사를 지어서 먹을 것을 자급하고, 농한기에는 조련(操鍊)하기를 법대로 한다면, 삼대(三代) 때에 병농(兵農)을 합일하던 제도를 거의 오늘날에 다시 보게 될 것이다. 혹 전지는 적은데 남정이 많으면 땅을 더욱 개척해서 족하게 된 다음에 그치는 것은 그만둘 수가 없다. 지금 경군(京軍)으로서 항오(行伍)에 충수된 자는 열 손가락이 부드럽고 고우며 피부가 눈빛 같이 흰데, 백보만 달려도 헐떡거리면서 정지하고, 모진 추위와 심한 더위를 견디지 못하니 이것은 쓸데없는 병졸이다. 향군(鄕軍)으로서 항오에 충수된 자는 천리나 멀리 집을 떠나서, 반 년 동안 병역을 치르는데, 비록 앉고 서며 전진하고 후퇴하는 것을 교습했으나 번을 마치는 날에는 아득히 잊어버린다. 하루 동안 빛을 쬐다가 열흘 동안 추운 것과 같아서, 복무할 만큼 연습할 수 없는데, 하물며 뒤의 상번자(上番者)는 전번의 상번자가 아님에서랴? 이러한 것은 쓸데없는 군졸이다. 반드시 경성 수십 리 안쪽에 둔전을 널리 개척해서 농사하는 자가 병정이 되고, 병정이었던 자가 농사를 짓도록 한 다음이라야 굳센 군졸이 항오에 있으므로 교습에 익숙하지 않은 자가 없게 될 것이다.
우리 선대왕이 금(禁)ㆍ어(御) 양 군영에 대해 그 폐단을 깊이 진념(軫念)하고 반드시 변통하고자 하여 사륜(絲綸)을 여러번 내렸고 자문(咨問)이 두루 미쳤었다. 그런데 당시의 좌우 신하가 아름다운 명령을 능히 거양(擧揚)하지 못해서 큰 일을 하려는 뜻을 마침내 성과없는 논의로 돌아가게 했음은, 어찌 한스럽지 않겠는가? 지금에 만약 3교(郊)의 전지를 죄다 거두어서 3영(營)에 붙인다면 나라 안이 시끄러울 것이다. 그러나 시끄럽지 않고서 능히 큰 사업을 성취시킨 사람은 천하에 없다. 능히 분발해서 임금의 일을 빛나게 할 수 있다면 그 시끄러움이야 어찌 근심할 것이겠는가? 이것은 도 있는 자와는 더불어 말할 수 있겠으나, 기름진 음식에 연약해진 사람과는 함께 수다스레 쟁론할 수 없다.
생각건대, 원편에는 도감 제조 두 자리는 호조 판서와 병조판서가 예겸하도록 되었으나 호조판서가 반드시 겸임할 것이 아니므로 줄인다.
생각건대, 대장은 나라의 막중한 소임이니, 정경(正卿 : 원편에는 종2품으로 되었다)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살피건대, 국별장(局別將)이 세 자리이고 국출신(局出身)이 150명인 것은 다른 영문에는 없는 것이다. 이 글을 엮으면서 문과 무의 수효가 서로 같도록 하였는데 3년 대비마다 200명만 뽑아 그 중에서 36명을 급제 출신으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진사(무과는 進武이다)로 삼아서 입사(入仕)하도록 허가하면, 국별장과 국출신은 저절로 감성(減省)되는 중에 들게 된다.
좌어영이란 어영청이다.
생각건대, 어영에 별부천총(別部千摠) 한 자리(永宗僉使가 겸무), 외방 겸파총(外方兼把摠) 열 자리(軍威ㆍ藍浦ㆍ古阜ㆍ衿川ㆍ長連ㆍ利川 등)가 있으니, 더욱 의미가 없고, 금위영 제도 역시 이와 같은데, 모두 개정하지 않을 수 없다.
3영 제조는 모두 병조판서가 예겸해야 된다.
우위영이란 금위영이다.
생각건대, 《대청회전(大淸會典)》그 군제를 8기(旗)로 구분했는데, 이 또한 좋은 법이다. 이제 여기에 의해 우림위는 정황색기를, 용양위는 정람색기를, 호분위는 정홍색기를 사용하여, 3위의 빛깔을 분간하고, 도통영은 갈고리에 황색기를, 좌어영은 갈고리에 남색기를, 우위영은 갈고리에 홍색기를 사용하여 3영의 빛깔을 분간하도록 할 것이며, 관성위(管城衛)는 흑색기를 사용하여 북한강(北漢江)을 지키게 하고 강화부(江華府)는 백기(白旗)를 사용하여 강도(江都)를 지키게 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하겠다.
관성위는 경리청(經理廳)인데 숙종(肅宗) 신묘년(숙종 37년, 1711)에 창설되었고, 정종조(正宗朝)에 혁파하여 총융청에 귀속시켰다.
생각건대, 수어청을 이미 폐지해서 남한(南漢)에다 귀속시켰으니, 총융청도 폐지해서 북한에다 귀속시키는 것이 마땅하겠다. 그렇다면 관성위는 별도로 한 관아를 만드는 것이 마땅하다.
지금 원편을 보니 총융청에 장관이 24명, 군관이 332명, 장초(壯哨)가 10초, 아병이 10초, 둔장병(屯將兵)이 3초, 둔아병(屯牙兵)이 3초 표하군(標下軍)이 386명이었고, 또 남양을 전영(前營)으로, 파주를 중영(中營)으로, 장단을 후영(後營)으로 하며, 또 임진과 장산은 본청에 예속시켜서, 각각 마병(馬兵)ㆍ속오(束伍)ㆍ치중(輜重)ㆍ표하군(標下軍) 따위 여러 명목이 있는데, 내 생각에는 총융청을 속히 폐지하고 그 사졸은 좌우 양영에 분속시켜 수리[修潤]를 돕도록 하고 혹 나머지가 있으면 관성위에다 붙이는 것이 일하기에 편리할 것이다. 그리고 남양 군마(軍馬)는 화성에 붙이고, 파주와 임진 군마 중 파주는 방어하는 책무가 있으니, 한 진(鎭)으로 만드는 것이 마땅하며, 장단 군마는 송경에다 붙이는 것이 마땅할 것으로 생각된다.
생각건대, 한 가지 기예와 잡기로 벼슬한 자라도 그 품계가 혹 정2품이나 종1품에 이르면 의정대신(議政大臣)과 더불어 숭록대부(崇祿大夫)라 일컬으나, 예모(禮貌)를 차려서 상대하게 되면, 한림(翰林) 같은 신진(新進)이 앉아서 읍(揖)할 뿐이니, 명실상부하지 않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다. 나의 생각에는 한 가지 기예 잡기로 벼슬한 자의 자손 중에 덕행과 문예가 있어 정사(正士)가 되었으면, 대부(大夫)로 승진시켜서 숭품(崇品)에도 구애됨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고 여긴다.
그리고 한 가지 기예와 잡기로써 벼슬한 자는 그 품계가 비록 높더라도 장군되는 것은 허락하되 대부되는 것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며, 그 종2품인 자는 분무 장군(奮武將軍)이라 하고, 정2품인 자는 선덕 장군(宣德將軍)이라 하여, 3위의 군직을 제수할 것이며, 혹 공로가 현저한 자는 특별히 관성위 총어부사(管城衛摠禦副使)를 제수하여 대사에 이르게 하며, 또 남한 산성에는 중군(中軍) 자리를 수어 부사(守禦副使)로 만들어서 이런 사람을 대우할 것이며, 혹 특지(特旨)로 목사나 태수가 된 자도 모두 장군이라 일컫고 대부라고는 일컫지 말아서 명실이 서로 어긋나지 않도록 하면 높은 이를 높이고, 어진이를 어질게 대우함에 거의 양득이 될 수 있을 것이다(강화중군도 또한 鎭撫副使로 고쳐서 이런 사람이 있도록 함이 마땅하겠다).
[주D-001]내병조(內兵曹) : 궁중에서 시위(侍衛)ㆍ의장(儀仗)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청.
[주D-002]산관(散官) : 일정한 직무가 없는 관직.
[주D-003]회공(回公) : 의정부에 회부된 공문을 의정(議政) 이하 온 관원에게 회람시키는 일.
[주D-004]노직(老職) : 80세가 넘는 관원이나 90세가 넘는 백성에게 해마다 정월에 은전(恩典)으로 주던 관직.
[주D-005]원전 : 《속대전(續大典)》 권1 비변사(備邊司) 조.
[주D-006]원종공신(原從功臣) : 각 등급의 주장이 되는 공신 이외에 작은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던 칭호.
[주D-007]능마아낭관(能麽兒郞官) : 능마아청 낭관의 준말. 능마아청은 무관(武官)의 병학(兵學)을 고사(考査)하던 관청인데 그 관청의 낭관이라는 뜻.
[주D-008]원제(原制) : 《속대전》 권1 사복시(司僕寺) 조.
[주D-009]원전 : 《속대전》 권4 경관직(京官職) 조.
[주D-010]노부(鹵簿) : 의장을 갖춘 제왕의 행렬. 임금이 거둥할 때의 의장.
[주D-011]원편(原編) : 《속대전(續大典)》 권4 경관직(京官職) 조를 가리킴.
[주D-012]달단(韃靼) : 옛날 만주 북부에 살던 몽고의 한 부족.
[주D-013]북새(北塞) : 함경도를 말함.
[주D-014]계방(桂坊) : 동궁(東宮)이 있는 곳. 또는 세자 익위사의 별칭.
[주D-015]운검(雲劍)과 보검(寶劍) : 의장에 쓰는 큰 칼.
[주D-016]관부(官府) : 관청. 백관(百官)이 있는 곳.
[주D-017]차사(次舍) : 차(次)는 여러 하리(下吏)가 직숙(直宿)하는 곳. 사(舍)는 그들이 있는 관청.
[주D-018]성기(省記) : 병조에 입직(入直)하는 낭관(郞官)이, 매일 궁궐을 경비하는 장수에게 교부하는 군호(軍號)와 각 문에 입직하는 장사(將士)의 이름을 열기하여 승정원을 거쳐서 임금에게 올리는 기록.
[주D-019]별부료군관(別付料軍官) : 조선 시대 총융청(摠戎廳)ㆍ용호영(龍虎營)에 딸린 무관직의 하나. 원래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뽑아온 군관으로서, 경상비가 아닌 별도 비목에서 요(料)를 주었으므로 이런 명칭이 생겼음.
[주D-020]별군직(別軍職) : 임금을 시위(侍衛)하고 적간(摘奸)하는 일을 맡아보던 무관직.
[주D-021]문겸(文兼) : 문신 겸 선전관의 준말.
[주D-022]내취타(內吹打) : 어전에서 피리ㆍ소라 따위를 불고, 징ㆍ바라 따위를 치는 사람들을 말함.
[주D-023]출신(出身) : 과거에 급제는 했으나 아직 벼슬하지 않은 사람.
[주D-024]남행(南行) : 과거하지 않고 조상의 공덕으로 얻는 벼슬. 음직(蔭職)과 같음.
[주D-025]계라(啓螺) : 거둥할 때에 취타하기를 임금에게 아룀. 또는 아뢰는 사람.
[주D-026]속오군(束伍軍) : 지방의 15세 이상의 양민과 벼슬 없는 양반을 골라서 조직한 군대. 평시에는 군포를 바치고 유사시에는 군역을 치르도록 했음.
[주D-027]구부(口賦) : 인구에 따라서 부과하던 세금.
[주D-028]사륜(絲綸) : 임금의 조칙(詔勅). ‘임금의 말이 실같이 나온다.’는 뜻. 《예기(禮記)》 치의(緇衣)에, “王言如絲 其出如絲”라고 보임.
[주D-029] 《대청회전(大淸會典)》 : 청 광서제(光緖帝) 때 편찬한 청나라 전제(典制)로서, 사례가 1천 220권이나 됨.
제2권 추관 형조(秋官刑曹) 제5 형관지속(刑官之屬)
생각건대, 형조에는 서리와 조례의 정원이 본디 많았는데, 이번에 여러 관청에 분립(分立)되어 각각 체모를 갖추어야 하는 까닭으로 그 정원에서 줄인 것이 있다.
생각건대, 의금부란 주관(周官)의 사사(士師)이다. 의금부는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관아이고 순찰하는 책임은 본디 없었는데, 지금 풍속에 금오(金吾)라 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앞에 보임).
생각건대, 《주례》 추관에, “포헌직(布憲職)이 나라의 형금(刑禁)을 맡아서 사방 방국(邦國) 및 도비(都鄙)를 다스려서 사해(四海)에 통했다.” 하였으니 우리나라 사헌(司憲)의 관부(官府)와 같다. 그러므로 사헌부를 추관에다 붙였다.
생각건대, 지금 사헌부는 실상 간쟁하는 책임도 겸했는바, 직장조(職掌條)에 나열함이 마땅하다.
생각건대, 암행어사란 한 나라의 수의직지(繡衣直指)로서, 이른바 외방(外方)으로 나가서 간활한 자를 치고 큰 옥사를 다스리던 자이며(옥사를 다스리는 것을 지금은 按覈御史라 이른다), 한 나라의 시어사(侍御史)는 곧 지금의 사헌부인데, 암행어사란 비록 항상 있는 관직은 아니나 헌부 관직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그 직함은 통덕랑 사헌부장헌 흠차 패서성 암행어사(通德郞司憲府掌憲欽差浿西省暗行御史)라 하여, 반드시 열두 자리로 한 것은 열두 성에 갈라서 나가기 때문이다.
생각건대, 원제에 감찰 13명이 비록 사헌부에 예속되어 있으나, 사헌부는 대간(臺諫)이 있는 관청이요, 감찰은 미관(微官)이므로 서로 통섭(統攝)되지 않으니, 벌써부터 구별했어야 할 것이다. 나는 별도로 한 원(院)을 만들고(옛 제도에는 시어사와 감찰어사가 본래부터 구별되어 있다), 한 자리 줄여서 열두 자리를 만들어, 매양 두 사람이 6조의 일과 그 조에 소속된 기관을 감찰하며, 매양 두 사람이 6부의 일을 감찰하며, 매양 한 사람이 12성의 일을 맡아서 감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릇 법을 굽히거나 뇌물을 받거나 옥송(獄訟)을 부당히 처리한 것과, 재물을 탐내어 법 아닌 짓을 한 것과, 유약하여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에 대해 감찰이 조사해서 탄핵한다면 서울과 지방이 반드시 숙연해질 것이다.
이미 한 기관을 창설해서 전적으로 이런 일을 관장하도록 했은즉 무릇 억울한 일이 있는 자는 반드시 본원에 달려와서 호소할 것이니, 그것을 능히 살피지 못할까는 걱정할 것이 없다. 도어사(都御史) 한 자리는 대사헌이 예겸하고 상사 네 사람이 이조ㆍ병조ㆍ동중부(東中部)ㆍ서중부(西中部)와 경기ㆍ사천성ㆍ열동성ㆍ송해성을 관장하며, 중사 여덟 사람이 호조ㆍ예조ㆍ공조와 동쪽 양부, 서쪽 양부와 남쪽 네 성, 북쪽 네 성을 관장하도록 함이 또한 타당하겠다.
살피건대, 원전에, “형조(刑曹)에 장금사(掌禁司)가 있어, 금령(禁令)을 관장한다.” 하였고, 《주례》 추관에, “금포씨(禁暴氏)는 서민 중에 난폭하여 힘을 믿고 억지를 쓰는 자와, 거짓을 꾸며서 금령을 범한 자, 말을 만들어 미덥지 못한 짓을 하는 자는 고발해 죄를 준다.” 하였고, 또 “무릇 나라에는 많은 백성이 모였으니 그 금령을 범한 자를 죽여서 조리돌리고, 모든 해례(奚隸)가 모여서 출입하는 것이니, 사목(司牧)이 그 범법한 자를 죽였다.” 하였으니, 이 또한 지극히 중요한 관직이다.
내 생각에는 옛적에 선왕이 제도를 세울 때에는 궁실ㆍ의복ㆍ음식ㆍ기구에도 모두 법도와 등급이 있었고 품급(品級)이 엄숙하여 감히 그 경계를 넘지 못하였는데, 지금에는 하례(下隷) 같은 천한 자도 재물이 있으면 경대부가 쓰는 물품을 구해다 쓰되 금하지 않는다. 상하에 분별이 없고 귀천에 등급이 없어 질서가 문란해서 법도가 전연 없다. 이른바 형조와 헌부에서 금란(禁亂)한다는 것도 천만 사람 중에 운수 나쁜 사람을 잡아다가 가끔 따질 뿐이다. 먼저 법의 조문을 밝혀서 백성이 피할 바를 알게 하지 않고, 뒤에는 잇따라 규찰만 하고 끝내 고치도록 하지 않으니, 백성을 어찌 징계할 수 있으며, 어찌 법이 설 수가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하나의 기관을 별도로 세워서 사치하고 참람한 것을 금지하되, 조관(朝官)이 범한 것은 헌부에 보고하고, 서민이 범한 것은 형조에 보고하여 율에 의해 엄하게 징계함을 그만둘 수 없다고 본다.
중대부 한 자리는 대사헌이 예겸하고, 하대부 한 자리는 형조 참의가 예겸하며, 안찰 네 자리는 옥당이 하는데, 이는 새로 증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헌부에 집의(執議) 한 자리와 감찰원에 감찰 한 자리를 줄였으니, 이것으로 그 직을 충수하면 증가된 것은 두 자리이다.
생각건대, 한성부(漢城府)에도 또한 금란의 명목이 있는데 지금부터는 정지시켜서, 영(令)이 여러 길로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장리서란 전옥서(典獄署)이다. 전옥과 포도(捕盜)는 명칭이 전아(典雅)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모두 더럽게 여기므로 고쳤다.
생각건대, 원편에 “전옥 제조는 형방승지(刑房承旨)가 한다.”고 되어 있는데, 내 생각에는 형조참의도 마땅히 겸무해야 한다고 본다.
토포영이란 포도청(捕盜廳)이다.
생각건대, 《주례》 추관에, “사려(司厲)는 도적이 사용한 기물과 재물을 몰수하는 것을 관장하는데, 그 물건의 종류ㆍ수량ㆍ가격을 표시해서 사병(司兵)에 넘기며 도적은 종을 삼아서 남자는 죄례(罪隷)로 보내고 여자는 용고(舂稿)로 보낸다.” 했고, 또 추관에, “장수(掌囚)의 직은 도적을 간수(看守)하는 것인데, 무릇 죄수로서 상죄(上罪)는 양손을 겹쳐서 수갑하고 착고(著錮)하며, 중죄도 수갑하고 착고하며, 하죄는 착고만 했다. 왕의 동족으로서 범법한 자는 양 손을 겹쳐서 수갑하고, 작위가 있는 자는 착고하여 단죄하기를 기다렸다.” 했는데, 포도는 추관 소속이다. 제조로서 경 1 명은 형조 판서가 예겸하며, 대사 두 자리는 좌우 청(廳) 대장이고 종사 여섯 자리는 자우에 각 세 자리인바, 나머지도 모두 이와 같이 하여 좌우로 가르는 것이다.
순경사란 순장청(巡將廳)이다.
생각건대, 《주례》 추관에, “사오씨(司寤氏)가 밤 시간을 맡아서, 별(星)로써 시간을 분간하고, 야사(夜士)에게 알려서 야금(夜禁)을 하여 새벽길 가는 자를 막고, 밤길 가는 자와 밤에 놀이하는 자를 금단했다.” 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순청은 본시 추관 소속이었으므로 지금 그대로 했다.
제조 경 한 자리는 형조 판서가 예겸하며, 부호군의 예순 자리는 문대부(文大夫)가 20명이고 무대부(武大夫)가 20명이며, 잡기(雜歧) 3품관이 20명으로 그 셋을 합친 것이다. 모두 3위(衛)ㆍ호군(護軍) 중에서 나이 젊은 자를 선발하는데, 병조에서 초계(抄啓)해서 형조에 회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문대부는 상순(上旬)에, 무대부는 중순에, 잡기호군은 하순에 각각 순행한다. 좌우 순청(巡廳)에 각 한 사람이 근무하는 것인즉, 무릇 순경사 호군이 된 자는 한 달에 오직 하룻밤만 순행할 뿐이다.
사오랑이 여섯 자리인 것은 병조 좌랑 세 사람과 형조 좌랑 세 사람을 합한 것으로, 좌우 청에 가르면 세 사람씩에 불과하다(上佐郞은 순행하지 않는다). 그 세 사람이 상순ㆍ중순ㆍ하순을 갈라 맡아, 매양 밤이 깊은 다음에 미복(微服)으로 순행하면서 순경사의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살피고, 또 불시의 사고를 살피는데, 지금의 병조 낭관이 감군(監軍)하는 법과 같게 한다.
순작랑 60명은 무겸 선령관(武兼宣令官)이 20명이고, 의장국 낭관이 20명이며, 삼위의 정령관(正領官)이 20명이다. 또한 병조에서 달마다 초계하고, 형조에 회부해서 좌우 순청에 배정하는 것은 부호군을 선정하는 법과 같다.
노고원이란 당ㆍ송 때의 등문고원(登聞鼓院)이다.
살피건대, 《주례》에 “태복(太僕)이 노고(路鼓)를 정전(正殿) 문 밖에 세우고 그 일을 관장하는데, 원통한 사정을 알리는 자를 기다리다가, 북소리를 들으면 속히 어복(御僕)에게 아뢴다.” 했다. 그리고 송 문제(宋文帝) 원가(元嘉) 원년(424)에 위주(魏主) 태무제(太武帝)가 조서하여 대궐 왼쪽에 등문고(登聞鼓)를 달아서, 원통한 일이 있는 사람이 임금에게 알리도록 하였고, 당나라 대력(大曆) 14년(779)에는 천하에 조서하여 원통한 일이 있는 자는 등문고를 치도록 했다. 송나라 경덕(景德) 4년(1007)에는 조서하여, 고사(鼓司)를 고쳐 등문고원으로 만들고, 만백성의 사정을 아뢰도록 했는데, 소식(蘇軾)의 판등문고원(判登聞鼓院)과 정이천(程伊川)의 겸판등문고원(兼判登聞鼓院)이라는 것이 모두 이 관직이었다.
명나라 때도 역시 송나라 예에 따랐는데, 우리나라도 태종(太宗) 4년(1404)에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해서 아랫사람의 원통한 사정이 통하도록 했다. 그러나 고원(鼓院)이 없고 또 북이 대궐 안에 있어서 혼금(閽禁)이 지극히 엄했다. 그러므로 오직 서울 진신(搢紳) 집 사람이 임시로 조복을 입고 들어가서 치게 된다. 먼 지방 천한 백성들이야 그 북을 한 번 만져볼 길도 없는데, 하물며 감히 치는 것이겠는가?
내 생각에는 단봉문(丹鳳門)이 편전(便殿)에서 가장 가까우니, 단봉문 밖에다 집 하나를 사고 높은 다락을 세워서 노고원(路鼓院)을 만들고, 무릇 원통한 일이 있는 자는 서장(書狀)을 품고 원에 와서 다락에 올라 북을 치면서 서장을 원랑(院郞)에게 주면 원랑은 비록 죄인과 악인의 패려하고 망령된 말이라도 각하시키는 일이 없이 그 서장을 바삐 정원(政院)에 보내서 조정의 조치를 듣도록 하는 것이 참으로 변경하지 못할 좋은 법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육자(鬻子)》에 이르기를, “우(禹) 임금은 쇠북ㆍ북ㆍ경쇠ㆍ목탁ㆍ소고(鞀鼓)를 설치해서 사방 선비를 기다렸다.”고 하였고, 《서경》에는, “요(堯) 임금이 감간고(敢諫鼓)를 설치했다.”고 했는데, 이것도 마땅히 고원에서 관장할 성격이다. 그러므로 당나라와 송나라 제도의 고원은 오직 원통한 일을 아뢸 뿐만 아니라, 또한 진간(進諫)할 사람을 오도록 하고, 간의대부(諫議大夫)에게 이 고원을 관장해서 장주(章奏)를 접수하며, 아래로 기방이술(奇方異術)에 이르기까지 직접 진술할 수 있도록 했으니, 모두 사방 총명(聰明)이 널리 통하도록 한 것이다. 다만 원통할 만한 사정이 없고 말도 채택할 만한 것이 없는 자는 조정에서 처벌하여, 만민에게 감히 실없는 말로써 임금을 속이고, 법관을 무함하지 못하도록 함이 좋겠다.
제조 두 자리는 도승지가 예겸하고 판관 두 자리는 증원한다.
생각건대, 예빈시란 주관의 사의(司儀)ㆍ장객(掌客)인데, 사의ㆍ장객이 추관에 속한 까닭에 지금도 그대로 했다(원전에는 예조 소속이었다). 또 원편에, “제조는 호조 판서가 예겸한다.”고 했으나, 이제는 형조 판서가 예겸하도록 하였다. 원편에 본래 도정이 있는데, 근래에 줄였으나 매양 빈객을 접대할 때를 당하면 반드시 분호조(分戶曹)를 차임해서 그 일을 맡기니, 도정을 줄이지 않은 것만 같지 못한바 그냥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살피건대, 2왕(二王)의 후손을 주나라에서 빈례(賓禮)로 대우하였으니 지금 신라ㆍ고려 등 전대의 제사도 또한 예빈시에서 주관하여 통솔하도록 했다.
평양 기자묘 영(箕子廟令)의 직함은, 통덕랑 예빈시 원외랑 분차기자묘영(通德郞禮賓寺員外郞分差箕子廟令)이라 하며, 다른 곳도 모두 이와 같이 한다.
기자묘 영 두 자리는 평양 사람으로 삼고, 신라 박(朴)ㆍ석(昔)ㆍ김(金) 세 조상을 합쳐서 한 묘로 만들고 그 묘의 영 두 자리는 영남하도(嶺南下道) 사람으로 삼는다. 변진가라국(弁辰迦羅國) 태조묘(太祖廟)의 영 두 자리는 황강(潢江) 서남쪽 사람으로 삼고, 고구려 태조 주몽(朱蒙) 묘의 영 두 자리는 패수(浿水) 서쪽이나 청천강(淸川江) 서쪽 사람으로 삼았다. 백제 태조 온조왕(溫祚王) 묘의 영 두 자리는 경기와 열수(洌水) 남쪽 및 사천(泗川) 서쪽 사람으로 삼고, 고려 태조묘의 영 두 자리는 송도(松都) 사람으로 삼았다. 아울러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하게 있는 자로 임시 차임하며 전보하는 법은 없다.
생각건대, 변진은 김해 수로왕(金海首露王)의 나라인바(彊域考에 자세히 기록했다), 그의 묘는 김해에다 두는 것이 마땅하다. 백제 온조왕의 도읍은 지금의 광주(廣州) 고읍(古邑)인데, 지금 사람들이 직산(稷山)을 온조왕이 도읍했던 곳이라 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또 남한산성은 일장성(日長城)으로 온조왕과는 관계가 없으니, 온조왕의 묘는 광주 고읍에다 설치함이 마땅하다.
생각건대, 동지(冬至)에 중국 가는 사신이 비록 항상 있는 관직은 아니나, 앞서 간 사신은 4월에 돌아오는데 새로 가는 사신은 6월이면 또 출발하니 그 사이는 겨우 한 달이다. 또 별사(別使)가 가끔 출발하는 일이 있으니 또한 항상 있는 관직이라 할 수 있다. 매양 행장(行裝) 차릴 때를 당하면 별도로 마을의 집을 빌려서 그 일을 다스리니, 이를 건량청(乾粮廳)이라 한다. 그 문부(文簿)를 주장하는 자를 건량판사(乾糧判事)라 하는데 사행(使行)이 출발하고 나면 없애는 것이나, 해마다 다시 설치하니 체모의 구차스러움이 이와 같을 수 없다.
또 사명(使命)을 받들게 된 신하는 외읍(外邑)에다 편지를 보내 개가죽[狗皮]ㆍ해삼(海蔘)ㆍ다리미[熨刀]ㆍ가위[交刀] 따위의 자질구레한 물품을 요구하지 않은 적이 없고, 이것을 팔아서 행탁(行橐)에 보탠다. 당당한 천승(千乘) 나라의 사명을 받들고 국경을 나서는 사신이라 하면서 이에 걸인 행세를 하며 부끄러워할 줄을 모른다. 내 생각에는 경성 안 종루 근처나 광통교 가에다 별도로 관서를 설립하여 명칭을 행인사라 하고, 그 제조는 형조 판서가 예겸하고 주부 두 자리는 사역원(司譯院) 중사가 하는 것이 마땅하며, 매년 정월[孟春]에 외읍에다 관문(關文)을 띄워서 연례(年例)로 납부하던 것을 징수하는데, 대전(代錢) 또는 토산물을 받아서 창고에 저장했다가, 새 사신이 출발하기를 기다려서, 그 잡비에 제공하도록 하면 여러 모로 조금은 발라질 것이라고 생각된다.
생각건대, 《주례》 추관에, “대행인(大行人)의 직책은 천자의 나라에서 제후의 빈객을 접대하는 것이고 제후가 천자에게 행인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했으나, 행인이 기관으로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나는 행인사를 일부러 형조에다 붙였다. 또 일본과 통신할 때에도, 그 사행(使行)을 본사(本司)에서 마련하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본다.
생각건대, 먼 지역 사람을 편하게 하는 것은 왕자의 큰 정사이다. 우리나라는 지역이 편소하여 북쪽은 2천여 리에 불과하고 남쪽은 1천 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북쪽은 모두 대륙과 연속된 지역이어서, 폐사군(廢四郡) 너머에는 왕의 덕화(德化)가 일찍이 이르지 못했다. 오직 서남쪽 바다 여러 섬이, 그 중 큰 것은 둘레가 100리나 되고 작은 것도 40~50리가 된다. 별이나 바둑알처럼 많은데다 작고 큰 것이 서로 끼여 있어 수효가 대략 1천여 개인데 이것이 나라의 바깥 울타리이다. 그런데 개벽 이래로 조정에서 일찍이 사신을 보내 이 강토를 다스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연해 고을끼리 각자 자력으로 서로 부리고 붙여서 강한 자는 많이 차지하고 약한 자는 적게 얻었다.
한 무더기 푸른 산이 분명히 이 고을 앞에 있는데 그 소속된 고을을 물으면 수백 리 밖의 아주 먼 고을에서 이를 관할하고 있다고 한다. 또 명목은 고을에 예속되었으나 실상은 다른 곳에 매여서, 혹 궁방(宮房)이 절수(折受)해갔고, 혹은 군문(軍門)에 획급(劃給) 되었으며, 혹은 고을 토호(土豪)에게 공(貢)을 실어가고, 혹은 관리와 계(契)를 만들기도 한다. 진ㆍ보(鎭堡)가 있는 곳은 수영(水營)에 매였고, 별장(別將)이 있는 곳은 경영(京營)에 매였는데, 간사한 짓이 사방에서 나와 제멋대로 백성에게 토색질을 한다. 이리하여 비록 고을에 가서 호소하고자 해도 풍파가 험해서 가자면 열흘이나 걸리고, 또는 아전들이 막아서 삼문(三門)이 지척이건만 통하기 어렵다.
그런 까닭으로 모든 해도(海島) 백성들은 비록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부굴(負屈)을 달게 여기며 관청 출입은 맹세코 하지 않는다. 모든 어장이나 염전이 한 번 세안(稅案)에 들었으면 비록 창상(滄桑)이 여러 차례 변하여도 면할 수 없고, 책맹(舴艋 : 작은 배)의 배라도 한 번 세안에 들었다 하면, 비록 주인이 여러번 바뀌어도 빠지지 못한다. 무릇 싸우다가 사람을 죽였더라도 예사로 사화(私和)하며, 타국의 배도 태반이나 숨기고 있다가 흉년이 들면 처자를 이끌고 일본에 들어가, 거짓 표류한 사람이라고 일컬어서 목숨을 부지하고, 도둑이 이르면 병기와 양식을 가지고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해서 제멋대로 병진(兵陳)을 만들어 조정 명령을 거부하기도 한다. 이는 대개 신라ㆍ고려 때부터 있었으니 그 유래가 오래다. 내가 오랫동안 바닷가에 있었으므로 그 실정을 익히 알게 되었다.
내 생각에는 별도로 한 관청을 세워서 온 나라 섬을 관장하고 그 명칭을 수원사(綏遠司)라 하여 그 판적(版籍)을 맡고 부세를 고르게 하며, 침어(侵漁)를 금단하고 질고(疾苦)를 제거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법을 세우는 초기에는 감찰어사를 분견(分遣)하되 규정을 만들어주고 여러 섬을 순행하면서 강계(彊界)를 바루고 호구를 기록하며 폐막(弊瘼)을 물은 다음, 돌아와 모여서 법제를 편저(編著)하여 여러 섬에 반포하고 그 법에 따르도록 한다. 또 3~4년마다 본사 낭관(本司郞官)을 보내 여러 섬을 암행하면서 간활한 짓을 살피며, 또 섬 백성에게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는 것은 바로 본사에 호소하도록 하여, 여러 섬 백성에게 의지할 곳이 있도록 함은 참으로 먼 곳 백성을 편하게 하는 큰 정사이다.
어떤 사람은 나라의 재력이 빈약한데 무엇으로 관직을 증설하겠느냐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섬은 우리나라의 그윽한 수풀이니 진실로 경영만 잘하면 장차 이름도 없는 물건이 물이 솟아나듯, 산이 일어나듯 하여 수원사는 장차 호조와 같게 될 참인데, 낭관 두어 사람이 어찌 능히 다 먹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나주 섬에 사는 백성을 만나서 그 고통스러운 일을 물은즉, 열두 섬에서 해마다 읍 주인에게 증여하는 곡식이 6천여 섬이고, 돈ㆍ솜ㆍ생선ㆍ건어물 따위 여러 가지 물건이 또 이와 같은 액수인데, 곧 나주 한 곳 소교(小校)가 먹는 것이라 한다. 지금 여러 도(道) 수령의 1년 동안 월름(月廩)이 비록 큰 읍이라도 1천 석이 못되는데 여수원사(綏遠司)러 고을 소교들이 먹는 것은 이와 같으니, 나라에 어찌 법이 있다 하겠는가? 다만 이 6천 석을 수원사에다 붙이더라도 풍족한 관청이 되기에 족할 것이다.
생각건대, 수원사를 이미 세웠다면, 제주와 폐사군 및 만하 6진(滿河六鎭)의 일도 또한 관장함이 마땅한바 이것은 직장편(職掌篇)에 자세히 적었다.
생각건대 제조(提調) 한 자리는 형조 참판이 예겸하고 도정(都正) 한 자리는 부제학이 예겸해서 그 권세를 중하게 하는 것이다. 안찰랑(按察郞) 여섯 자리는 경기ㆍ사천ㆍ완남ㆍ무남ㆍ황서ㆍ영남 여러 감찰에게 예겸하도록 하며, 오직 주부(主簿) 두 자리만 신규로 증설하는 것이다.
생각건대 《주례》 추관에, “상서(象胥)의 직은 만이(蠻夷)ㆍ민맥(閩貉)ㆍ융적(戎狄)의 나라들을 맡아서 왕의 말을 전하고 타일러서 화친하며, 때에 따라 빈객이 들어오면 예에 맞추어서 말을 전한다. 무릇 나고 들며 보내고 맞이하는 예절을 갖추고 폐백(幣帛)과 언사(言辭)로써 접대한다.” 했다. 역관(譯官)은 곧 상서인 까닭으로 형조에 붙였다(원전에는 예조 소속으로 되어 있다).
살피건대, 원전의 형조에 원악향리조(元惡鄕吏條)라는 것이 있는데, 그 조목에서 말한, 수령을 농락하여 권세를 제멋대로 하고 민폐를 꾸미는 자, 은밀하게 뇌물을 받고 부역을 고르게 하지 않는 자, 부세를 징수할 즈음에 부당한 재물을 거두어서 함부로 사용한 자, 양민을 마구 차지해서 숨겨놓고 부리는 자, 전장(田庄)을 많이 차지하여 백성을 부려서 경종(耕種)하는 자, 마을에 횡행하면서 백성을 침해하고 사리를 영위하는 자, 존귀한 세도 집에 아부하여 본역(本役)을 모피(謀避)한 자, 부역을 피해서 도망친 자를 촌락에 숨겨준 자, 관가의 위세에 기대어 백성을 침해한 자, 양가 여자 및 관비를 첩으로 만든 자 등은 누구든지 신고하는 것을 허가하며, 사헌부에서 죄를 따져서 벌을 주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도형(徒刑)에 해당하는 자는 영구히 본도(本道) 작은 역(驛)에 역리(驛吏)로 붙이고, 유형(流刑)에 해당하는 자는 영구히 타도(他道) 작은 역에 역리로 붙인다. 그리고 고을 수령이 그들의 범죄를 알면서도 검거해서 조사하지 않은 자는 제서(制書)를 어긴 율로써 논죄(論罪)한다고 했다. 법이 잘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법이 있어도 시행하지 않으면 법이 없는 것과 같다.
조종조(祖宗朝)에서 민생을 위해 깊이 염려한 것이 이와 같건만 지금은 이를 제쳐두고 시행하지 않으니 또한 어찌하겠는가? 내가 오래도록 민간에 있으면서 향리들의 하는 일을 익히 보았다. 그 나라를 병들게 하고 백성을 해롭게 하는 짓이 이루 형언할 수 없다. 그리하여 《향리론(鄕吏論)》 열 편을 지어서 그 폐단을 갖추어 말했거니와 진실로 이때라도 교정하지 않으면 앞으로 닥쳐올 화란(禍難)은 반드시 말하기도 어렵게 될 것이다. 나라가 다 망하고 백성이 다 죽은 다음이라야 그만둘 것이니, 내가 감히 실정에 지나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별도로 한 관청을 세워서 전적으로 열두 성(省) 향리를 관장하도록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 정원을 정하고, 그 조례를 반포하며, 그 한계를 엄하게 해서, 한 가지라도 위반하는 것이 있으면 곧 본원(本院)에서 거론하여 따지게 한다. 이렇게 한다면 거의 그 처음 발하는 불꽃을 없애고, 그 흘러가는 물살을 돌이킬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 방법 가운데 한 가지는, 전지(田地)와 백성의 수효를 요량해서 그 정원을 차등 있게 하는데, 비록 큰 읍이라도 30명을 넘지 않도록 하는 것이요, 한 가지는 향리는 세습하지 못하며 현손(玄孫) 대에 이른 다음이라야 이에 구애됨이 없게 하는 것이요, 한 가지는 향리는 한 가족이 전적으로 하지 못하도록 해서 친형제끼리 함께 될 수 없으며 8촌 안에는 세 사람을 넘지 않도록 하는 것이요, 한 가지는 이방(吏房)ㆍ창리(倉吏)ㆍ도서원(都書員)ㆍ균역리(均役吏)ㆍ대동리(大同吏) 등 무릇 돈과 곡식을 출납하는 권한이 있는 임무는 이웃 고을 아전이 와서 하도록 하여 지금 영리(營吏)와 같게 하는 것이요, 한 가지는 이방의 임무도 또한 매년 바꾸어서 모름지기 열두 해를 지난 다음이라야 이에 재임(再任)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해마다 첫봄에 아무아무가 소임으로 된 것을 모두 판에다 적어서 본원에 보고하며, 갈거나 바꾸는 일이 있을 때에도 사유를 갖추어서 급보하도록 하는데, 본원에서 차첩(差帖)을 작성ㆍ발급하며, 본원 차첩이 없는 자는 행공(行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또 어사가 각도에 갈라 나갈 때에는 반드시 본원에서 그 성, 여러 고을의 이안(吏案)을 받아서 간다. 그리하여 혹 법제에 어김이 있는 자는 어사가 밝혀서 다스린다. 수십 년을 이와 같이 하면, 그 기세가 조금 쇠해지고 간활한 짓도 조금은 그칠 것이다. 만약 한결같이 맡겨두어, 쥐나 개 같은 좀도둑으로만 여기고 금제함이 없으면 나라가 망하는 근본도 반드시 여기에 있지 않는 것이 없다. 아울러 《향리론》에 자세히 말했기에 지금 다시 기술하지 않는다.
도정은 일찍이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자로, 낭관은 아울러 옥당으로 삼는데, 반드시 청백하고 강직한 자라야 이 관직에 있을 수 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아니면 나태가 여전하여 긴하지 않은 관아를 하나 더 보탤 뿐이다.
생각건대, 저리(邸吏)의 폐단이 향리보다 심한바, 내가 어릴 때에 보니, 이른바 경주인(京主人)ㆍ영주인(營主人)이라는 것은 모두 천한 종 하급 졸개들로서 허리를 굽히고 달리면서 사역(使役)을 받드는데, 대개 그때는 늠료(廩料)가 빈약하고 권력이 성하지 못했으므로 비천한 자가 맡았던 것이다. 수십 년 이래로 세상 물정이 크게 변하고 조정 기강이 날로 무너져서 경주인 자리를 매매하는 값이 혹 8천 냥이나 되며, 영주인 자리를 매매하는 값은 혹 1만 냥에 이르기도 한다. 대개 그 역가(役價)가 날로 증가되어 남는 이익이 매우 많으므로 값이 전보다 100배나 되었다. 값이 100배인즉 이익이 100배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이익이 100배인즉 백성을 벗겨낸 물건이 100배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경저(京邸)와 영저(營邸)에는 모두 포악하고 간사한 자가 차지하고 있다. 재물이 매우 풍부하고 권력이 더욱 강해지니 백성을 벗겨내는 것도 더욱 심한바, 백성의 큰 병통으로는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렇게 되는 까닭이 넷인데, 첫째, 조정 귀신(貴臣)이 저리 자리를 사기 때문이고, 둘째, 수령이 뇌물을 받기 때문이며, 셋째, 감사가 법을 어기는 일이 많기 때문이고, 넷째, 수령이 염문(廉問)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수십 년 이래로 문무 귀신이 남몰래 저리 자리를 사들여 청지기에게 맡기고 앉아서 그 이익을 거두어들인다.
이리하여 진짜 저리는 당(堂) 위에 앉았는데 가짜 저리가 뜰 아래 엎드려서 무릇 고소하는 일이 있으면 극진하게 따르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이 경주인의 권세가 날로 더하고 달로 성해지는 까닭이다. 또 모든 저리는 수령의 집에 뇌물을 보내고 역가를 증액하도록 요청하는데, 뇌물이 다섯이면 역가도 다섯이 보태어지고, 뇌물이 열이면 역가도 열이 보태어진다. 수령은 한때 뇌물을 먹는 것뿐이지만 저리는 무궁한 이를 누리니, 이것이 경주인의 이가 날로 보태어지고 달로 성해지는 까닭이다.
수십 년 이래로 한 도를 안무(按撫)하는 신하가 망령되게 스스로 존대하게 여겨서 감영(監營)에 소용되는 여러 가지 물품을 모두 공물로 만들었다. 여러 읍 주인을 공인(貢人)으로 만들어서 책임지고 제공하게 하면서 이른바 본값은 열에 하나도 갚지 않는다. 이리하여 저리의 소원이면 극진하게 따르지 않는 것이 없어, 그들의 한없는 욕심을 채워주고 제 허물을 속죄한다. 이른바 역가미(役價米)ㆍ진상가미(進上價米)에 보태어지는 것은 있어도 줄어드는 것은 없고 아무런 제한이 없다. 심한 것은 곤전(坤殿)이 새로 임어(臨御)하고 자전(慈殿)이 위로 올라가면 새 곤전[新殿] 진상이 증가하는 것은 있어도 옛전[舊殿] 진상이 줄지는 않는다.
어사가 적발해도 가고 나면 감사가 다시 그대로 하여 백성의 말이 물끓듯 하여도 바로잡아지지 않으니, 이것이 영주인의 이익이 날로 보태어지고 달로 성해지는 까닭이다. 또 무릇 감사가 수령들의 선함과 악함을 염탐할 때는 모두 영속(營屬)을 이용하는데, 이들은 모두 영주인의 인아족당(姻婭族黨)이다. 그러므로 두루 같이 화응(和應)하여 한덩어리로 뭉친다. 그 수령이 저리에게 이로우면 아 대부(阿大夫)의 칭찬이 날로 치솟고, 저리에게 방해되면 즉묵 대부(卽墨大夫)의 나무람이 날로 성해지는데, 저리가 흘겨보면 백에 하나도 온전한 사람이 없다. 수령은 그렇게 되는 줄 알기 때문에 두려워서 벌벌 떨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따를 뿐이니 이것이 영주인의 권세가 날로 더하고 달로 성해지는 까닭이다. 양호(養戶)하고 방결(防結)해서 나라 곡식을 번롱(翻弄)하는 자가 향리보다 더 심한 사람은 없으니, 지금 고치지 않으면 끝내 후회가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서울과 지방 저리도 또한 장서원에서 주관하여 그 법제를 바로잡고, 그 횡포를 금단하는 일은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이다.
생각건대, 장례원은 본시 요직인데, 근래에 혁파하여 형조에 합병시켰다. 그러나 노예는 나라의 큰 정사이니, 별도로 한 관청을 만들어서 그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도록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시노비(寺奴婢)ㆍ역노비(驛奴婢)ㆍ관노비(官奴婢)ㆍ사노비(私奴婢)에 대해서, 모든 법금(法禁)을 정리하고 쟁송을 판결함이 마땅하다. 제조는 형조 참의가 예겸한다.
살피건대, 《주례》에, 사례(司隸)는 원래 추관(秋官) 소속으로서 죄례(罪隷)ㆍ만례(蠻隸)ㆍ민례(閩隸)ㆍ이례(夷隸)ㆍ낙례(貉隸)가 예속되었는데, 원전에 장례원을 추조(秋曹)에 붙였던 것은 근거한 데가 있었다.
생각건대, 나라 제도에 중들은 예조에 예속되었는바, 이것은 신라ㆍ고려 시대부터 내려온 법이나, 중들은 이상한 풍속에 익숙하니 장례원에서 관장함이 마땅하겠다.
생각건대, 율(律)ㆍ도(度)ㆍ양(量)ㆍ형(衡)을 한결같게 하는 것은 왕자의 대법(大法)이다. 순 임금은 선기옥형(璿璣玉衡)을 살펴서 정사를 가지런하게 하고 사방에 나가서 순행(巡行)할 때에 율ㆍ도ㆍ양ㆍ형을 한결같게 하는 것을 첫째 용무로 삼았다. 주 무왕(周武王)은 건국 초기에 제일 큰 정사가 “저울질을 조심하여, 법도를 살피는 것이다.”라고 했고, 명당위(明堂位)에서 주공(周公)이 섭정하던 초기의 제일 큰 정사를 기록하되, “예악(禮樂)을 마련하고 도량(度量)을 반포하였다.”고 했으며, 월령(月令)에는, “춘분(春分)과 추분(秋分)에 도와 양을 동일하게, 형(衡)과 석(石)을 고르게, 두(斗)와 통(筒)을 모나게, 권(權)과 개(槪)를 바르게 한다.”고 했다.
《관자(管子)》 칠법(七法)에는, “척ㆍ촌ㆍ형ㆍ석ㆍ두ㆍ곡(斛)ㆍ각(角)ㆍ양을 법이라.” 했고, 《오월춘추(吳越春秋)》에는, “우 임금이 권ㆍ형을 조절하고 두ㆍ곡을 평균하게 하는 것으로써 법도를 했다.” 하였다. 황ㆍ왕ㆍ제ㆍ패(皇王帝覇)가 비록 정당하고 간휼(奸譎)함은 같지 아니하나 다 여기에 힘을 쏟았는바, 나라의 큰 정사가 이것을 넘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도ㆍ양ㆍ형의 무법(無法)이 우리나라보다 심한 데가 없다. 한 성(城) 안이라도 저자마다 같지 않고, 한 고을 안에도 마을마다 같지 않으며, 한 마을 안에도 집마다 같지 않고, 한 집안에서도 거두고 내는 것이 같지 않아서, 그 전래되는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전들은 이것을 인연해서 간사한 짓을 부리고, 장사치는 의심하고 현혹되어 물자를 유통시키지 못하니, 묘당(廟堂)에 있는 신하는 시가(時價)를 들었으나 사방 실정을 알 수가 없고, 일을 맡은 신하는 수입을 요량해서 지출할 수가 없으며, 감수(監守)하는 신하는 문부(文簿)를 상고해서 실수(實數)를 책임지울 수 없다.
내가 일찍이 보니, 솜(棉絮) 1부대가 동쪽 집 저울로는 4근이었고 서쪽 집의 저울로는 12근이 되더니, 저자에 팔려고 한즉 32근이나 되었으며, 관청에 들어가니 무려 48근이나 되었다. 그런데 직조하는 집에 주니 도로 10근이라 하는 바, 천하에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일이었다. 내 생각에는 전적으로 한 관청을 세워서 이 일을 관장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무릇 6부와 12성의 도ㆍ양ㆍ형이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있거나 저울눈에 어김이 있는 것은 극률(極律)을 써서, 그 사람은 죽이고 그 재물은 몰수하며, 그 관원을 처벌하고 그 법령을 선포하여 온 나라 백성에게 모두 이보다 더 엄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하여야 한다. 그런 다음이라야 병제를 논할 수가 있으며 경용(經用)을 정할 수가 있을 것이다.
본사에서 해마다 저울과 자 1천 200개씩을 만들어서 12성에다 반포하면 12성에서는 해마다 저울과 자 1만 개를 만들어서 본사에 실어오고, 또 해마다 저울과 자 수만 개를 만들어서 민간에 주는데 모두 그 값을 받는다. 본사에서 또 12만 개를 6부 갈라주어서 민간 소용으로 제공, 서울과 외방 제도를 서로 비교하여 말ㆍ섬 및 평두목[槪]을 서로 같게 한다. 6부에 소용되는 것은 본사에서 만들고, 여러 성에 소용되는 것은 여러 성에서 만들되 모두 백성에게서 값을 받는다. 오직 그 사기하는 것만 때에 따라 살피는데, 모든 저울과 자ㆍ말에는 모두 도장[印章]과 표지(標識)가 있으며, 혹 개인이 만든 것은 사전(私錢)을 만든 것과 율을 똑같이 적용한다. 이렇게 하면 도ㆍ양ㆍ형 법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생각건대, 도ㆍ양ㆍ형은 형금(刑禁)의 첫째이므로 형조에 붙였다.
안찰랑(按察郞) 12자리는 감찰이 예겸한다.
생각건대, 《주례》에, 질제(質劑)와 권계(券契)를 모두 유사(有司)가 관장했는바, 그 속임수를 금하고 쟁송을 그치게 하기 위함이다. 지금 중국법은 무릇 매매하는 일이 있으면 홍계(紅契)를 요구하는데, 홍계란 인권(印券)이다. 우리나라는 모든 궁실ㆍ전원(田園)ㆍ노비에 대해서는 모두 개인 스스로 문서와 말을 만들 뿐, 일찍이 법사(法司)의 관유(關由)를 받는 일이 없다. 그러다가 사기가 탄로나고 쟁송이 일어난 다음이라야 비로소 법사에 통하는데, 법사인들 무엇으로써 그 사실을 알 수 있겠는가? 지금 마땅히 철(鐵)로 작은 판을 만들어 오직 연월일(年月日) 두어 글자 및 권계사 제준(券契司題準) 등의 글자를 쓰고, 매매하는 사람의 성명 및 물건의 명목 등을 써넣을 공간을 남겨놓는다.
그리고 그 위아래에는 용(龍)의 머리 구름(雲) 따위를 머리털같이 가늘게 새겨서 위조하지 못하도록 한 다음 단단한 종이에다 박아내어, 매양 매매하는 일이 있거나 혹 자녀에게 분급(分給)할 일이 있으면 모두 본사에 와서 문권(文券)을 청구하며, 관에서는 글자를 써넣고 도장을 찍어서 발급하는 한편, 별도 문권에다 기록해서 본사에 비치할 것이며 그 물건 값의 100분의 1을 관에다 바치도록 할 것이고, 해마다 문권 수만 장을 여러 성에 갈라주어서 서울과 지방이 모두 같게 하였다가 무릇 송사하는 자가 있으면 먼저 그 권계를 상고하여 만약 관에서 발급한 문권이 아니면 곧 접수[聽理]하지 않고 그 재물은 관에서 몰수한다.
이것 또한 왕자가 만민을 제어하는 대권(大權)이다. 방채(放債)ㆍ세대(稅貸)ㆍ전당(典當) 같은 것도 또한 문권을 받도록 하나 별도 문적에는 기록하지 않으며, 기구 같은 작은 물건으로서 값이 50냥 미만인 것은 사적인 문권으로 하는 것을 허가하나 궁실ㆍ전원ㆍ노비 따위는 비록 적더라도 허가하지 말 것이다.
제조 1자리는 형조판서가 예겸한다.
생각건대, 질제와 권계는 본시 지관(地官) 소속이었으나 법금(法禁)과 관계되는 것이므로 지금은 형조에 붙였다.
생각건대, 《주례》에, 사관이라는 관직이 있는데 물화의 출입을 맡아서 벌금을 관장하며 부세 징수에 간여했다. 무릇 관문을 통하여 나오지 않은 물화는 몰수하고 화주는 처벌했다. 이것은 《맹자》에 말한 “기찰(譏察)만 하고 부세는 징수하지 않았다.”라는 것과는 같지 않다. 예전에는 이런 법이 있었는데 다만 문왕(文王)이 시행하지 않았을 뿐이다. 당나라와 송나라의 제도는 관문과 나루터의 기금(譏禁)을 형부(刑部)에서 관장했다. 우리나라 제도에도 삼전도(三田渡)ㆍ한강도(漢江渡)ㆍ노량도(露梁渡)ㆍ양화도(楊花渡)에 도승(渡丞)이 있었는데, 지금은 별장(別將)이라 부르며 오직 관문이 설치된 곳은 없다. 내 생각에는 모화령(慕華嶺)은 서도(潟) 길목의 큰 관(關)이고, 망우령(忘憂嶺)은 영동(嶺東) 길 방면의 큰 관이며, 수유령(水踰嶺)은 영북(嶺北) 길목의 큰 관이니, 이곳에는 아울러 관방(關防)을 관장하는 관원을 두어서 기금(譏禁)하도록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큰 물화(物貨)가 출입할 때에는 1천분의 1세를 거두어서 공서 수용(公署需用)에 보충하며, 이들 관원이 모이는 관서를 형조 곁에 설치하여 3관(關)과 4도(渡) 관원이 때에 따라 회의, 평상시에는 수직(守直)하는 관원이 없고, 오직 서리와 조례만 머물러 있어서 전령(傳令)에 대비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금물(禁物)이 은밀하게 나가는 것도 또한 살핀다.
제조는 형조 참의가 예겸한다.
살피건대, 《주례》 추관에, “직금관(職金官)이 있어, 사(士)의 금벌(金罰)과 화벌(貨罰) 받는 일을 관장해서 사병(司兵)에 바쳤다.” 하였으니, 금벌과 화벌은 지금의 속전(贖錢)과 같다.
지금 제도는 속전을 모두 형조에서 징수하는데 체모를 존엄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속전은 모두 직금서가 주관해서 형조에 바치며 오직 징수한 속전의 10분의 1을 떼어서 공서의 수용을 돕도록 하여야 되겠다.
생각건대, 적몰(籍沒)한 죄인의 가산을 호조에 바치는 것은 사리에 타당하지 못하다. 내 생각에 지금부터는 적몰한 재물을 직금서가 받아서 그 전토(田土)는 통례원(通禮院)ㆍ육보서(六保署)ㆍ예빈시(禮賓寺) 같은 가난한 아문에 갈라주어서 공용에 보충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비는 장례원에 붙이고, 금ㆍ은ㆍ동철(金銀銅鐵)로 된 기구는 직금서에 붙이며 잡화(雜貨)는 모두 본사(本司)에서 발매해서 또한 가난한 기관에 갈라주는 것도 마땅하다는 것이다. 다만 옥사(獄事)에 억울함이 있어 혹 후일에라도 신설(伸雪)하게 되면 적몰한 것을 본집에 돌려줌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그 몰수한 재물을 기록한 문부는 본사에 두어서 후일에 대조하게 되는 경우에 대비하여야 된다.
살피건대, 탐장(貪贓)을 징계하는 법으로는 몰수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금부에서 그 장물(臟物)을 계산하고 직금서에 내어 맡겨서 독려 징수하도록 하여, 가난한 기관에 주거나 혹 사병시(司兵寺)에 붙여서 군기를 제조하는 것도 또한 옛 법이다.
생각건대, 장역서란 주관(周官)의 묘 대부(墓大夫)이다. 묘 대부가 나라 안 무덤 지역을 관장하여 도본(圖本)을 만들고 백성으로 하여금 씨족장(氏族葬)을 하도록 하며, 금령을 맡아서 그 위(位)를 바루고 그 도수(度數)를 관장하여 모두 사지역(私地域)이 있도록 했고, 묘지를 다루는 모든 옥송(獄訟)을 판결한다고 하였는데, 본디 춘관(春官) 소속이었으나 지금은 묘지에 관한 옥송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형조에 붙였다. 제조는 형조 판서가 예겸한다.
생각건대, 주공(周公)이 마련한 족장의 제도는 《예경(禮經)》에 기재되어서 이와 같이 분명한데, 곽박(郭璞) 이래로 풍수설(風水說)이 날로 새롭고 달로 성해져 묘역(墓域)을 널리 차지하고 길운(吉運)을 오로지 하고자 한다. 무릇 묘역 수백 보 안은 다른 사람이 와서 장사하는 것을 금하는데 혹 압맥(壓脈)이라 하며 또는 대충(對衝)이라 일컬어서, 두들겨 싸우며 파헤치기도 하여 옥송이 자주 일어난다. 내 생각에는 지금부터 족장(族葬)의 제도를 거듭 밝히고 풍수를 혹신(惑信)하는 자는 본서에서 잡아다가 징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12성에 묘지 관계의 송사에 억울하게 진 것은 바로 본서에 호소하도록 함도 또한 풍속을 바로잡고 옥송을 그치게 함에 한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생각건대 호전(戶典)에 “판목(板木) 장사는 반드시 귀후서(歸厚署) 공문[帖文]을 받는데, 공사간 관재(棺材)로 경강에 닿은 것은 귀후서에서 10분의 1을 수세(收稅)하고, 수장(修粧)하여도 관재(棺材)에 합당하지 못한 송판(松板)은 본조(本曹)에서 10분의 1을 수세한다.” 했는데, 이제부터는 귀후서에 관한 법을 장역서에 옮겨서 국내의 관곽(棺槨) 재목은 모두 본서에서 급부(給付)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다만 옛 법이 소략(疎略)하여 간사한 속임수가 날로 불어나니 조례를 정리해서 백성에게 금령을 범할 수 없게 한 다음이라야 이에 실효가 있을 것이다. 본디 귀후서에서 예장(禮葬)하는 것을 주관했으나 이것은 애영서(哀榮署)에서 주관할 것이다.
생각건대, 근세 사대부는 율서(律書)를 전혀 읽지 않는데 관직에 있으면서 법을 범하는 것이 여기에 많이 연유된다. 내 생각에는 매양 대정(大政)을 할 때에는 먼저 형조부터 율서를 시강(試講)하고, 능히 강한 자가 수령이 되도록 허가하면 거의 도움이 있다는 것이다.
[주D-001]용고(舂槀) : 용인(舂人)과 고인(槀人)의 준말. 《주례》 지관에, 용인은 제향(祭享)ㆍ빈객(貧客)ㆍ연향(燕饗) 따위에 소용되는 쌀을 관장하고, 고인은 외조(外朝)에 직숙(直宿)하는 자의 음식과, 기로(耆老)ㆍ고아(孤兒)와 왕궁을 숙위하는 경ㆍ대부의 자제의 식물(食物)과 제사에 쓸 개[犬]의 먹이를 관장한다 하였음.
[주D-002]진신(搢紳) : 벼슬한 사람을 일컫는 말.
[주D-003]편전(便殿) : 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는 집.
[주D-004]《육자(鬻子)》 : 주(周)나라 때 육웅(鬻熊)이라는 사람이 지은 책 이름.
[주D-005]분호조(分戶曹) : 나라에 중대한 일이 있을 때에 임시로 설치해서 호조의 일을 분담하던 관청.
[주D-006]2왕(二王) : 우(禹) 임금과 탕(湯) 임금을 말함.
[주D-007]천승(千乘) 나라 : 승(乘)은 병거(兵車)를 말하는 것. 제후의 나라는 병거 천 양(輛)을 제작하고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주D-008]폐사군(廢四郡) : 두만강ㆍ압록강 건너편의 여진족이 침입하는 것을 방비하기 위해서, 조선 세종 때에 최윤덕(崔潤德)을 시켜서 설치했던 여연(閭延)ㆍ자성(慈城)ㆍ무창(茂昌)ㆍ우예(虞芮) 네 고을을 단종 때에 폐지했으므로 폐사군이라 함.
[주D-009]절수(折受) : 임금으로부터 땅이나 결세(結稅)를 자기 몫으로 잘라 받는 것.
[주D-010]획급(劃給) : 몫으로 떼어서 주는 것.
[주D-011]삼문(三門) : 대궐이나 관아 앞에 있는 문으로서 정문(正門)ㆍ동협문(東夾門)ㆍ서협문(西夾門) 세 문으로 된 것.
[주D-012]창상(滄桑) :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과 같음.
[주D-013]만하 6진(滿河六鎭) : 조선 시대 세종 때에 김종서(金宗瑞)에게 두만강 가에 여섯 진을 설치하도록 시켰는데, 그 6진은 경원ㆍ경흥ㆍ부령ㆍ온성ㆍ종성ㆍ회령이다.
[주D-014]도형(徒刑) : 1~3년 복역하는 형벌.
[주D-015]유형(流刑) : 절도(絶島)나 원지(遠地)에 귀양보내는 형벌.
[주D-016]염문(廉問) : 어떤 사실을 남몰래 조사하는 것.
[주D-017]공인(貢人) :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고 값을 받아가는 사람.
[주D-018]역가미(役價米) : 경저리(京邸吏)와 영저리(營邸吏)가 역가조(役價條)로 백성에게서 받아내는 쌀.
[주D-019]진상가미(進上價米) : 진상하는 물품 값으로 백성에게서 받아내는 쌀.
[주D-020]저리에게 방해되면 ……날로 성해지는데 : 이 말은 전국 시대(戰國時代) 제 위왕(齊威王)이 즉묵 대부(卽墨大夫)를 불러서 “그대를 헐뜯는 말이 매일 나에게 들려오므로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실상은 치민을 잘했다. 아 대부(阿大夫)에 대해서는 기리는 말이 자주 들리므로 알아보니, 나의 좌우 사람에게 뇌물을 먹였던 것이고, 치민은 실상 좋지 못했다.” 하고 아 대부와 뇌물 먹은 자를 삶아 죽였다는 고사.
[주D-021]양호(養戶) :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의 조세를 대납하여 공역(公役)을 면하고 그 대신 제 집에서 종처럼 부리는 일.
[주D-022]선기옥형(璿璣玉衡) : 옛날에 천문을 관측하던 기계. 혼천의(渾天儀)라 하기도 함.
[주D-023]명당위(明堂位) : 《예기》의 한 편명.
[주D-024]질제(質劑) : 계약문서. 문서 중에 긴 것은 질, 짧은 것은 제라고 함(《주례》 天官 小宰註).
[주D-025]속전(贖錢) : 죄를 지은 자에게 처벌받는 대신 바치게 하던 돈.
[주D-026]곽박(郭璞) : 진(晋)나라 사람. 곽공(郭公)에게서 청낭서(靑囊書)라는 비서(秘書)를 받은 다음부터 오행(五行)ㆍ천문(天文)ㆍ복서(卜筮)를 환하게 알게 되었다고 함.
[주D-027]풍수설(風水說) :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기초해서 집터ㆍ무덤 같은 것의 방위와 지형의 좋고 나쁨을 분간하는 학설.
[주D-028]압맥(壓脈) : 길(吉)한 기세가 뻗쳐오는 산맥을 다른 것이 가로질러서, 그 기세를 눌러버리는 것.
[주D-029]대충(對衝) : 묘 터의 지형과 바위에 따라서 어떤 방위에는 다른 묘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곳.
[주D-030]대정(大政) : 해마다 12월에 시행하던 인사 행정.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그 규모가 컸으므로 대정이라 함.
제2권 동관 공조(冬官工曹) 제6 사관지속(事官之屬)
생각건대, 공조는 옛적 사공(司空)이니, 사공이란 공토(空土)를 맡는 것이다(馬融의 말). 가옥과 전지(田地)는 사도(司徒)에 예속되고, 산림ㆍ천택(川澤) 따위 빈 땅은 사공에 예속되었는데, 또 우관(虞官)이 있어 산택(山澤)을 관장했다(《堯典》에 “益이 짐의 우관이 되었다.” 했다). 《주례》에 산우(山虞)ㆍ택우(澤虞)를 모두 사도에 붙였는바, 예(禮)에 손익(損益)이 있었던 것인데 우리나라 제도가 산택을 공조에서 관장하도록 한 것도 또한 옛 제도이다.
생각건대, 공조란 옛날 공공(共工)이었는데(요전에 “垂를 공공으로 삼았다.” 했다), 《주례》에 동관(冬官) 1편이 없어진 것을 한(漢)나라 유사(儒士)들이 고공기(考工記)를 구해 보충했다. 그리하여 육공(六工)의 명칭은 대략 갖추어졌으나 관직 명칭은 결락(缺落)되었다. 그러므로 역대 관제(官制)에 공부(工部)가 대단히 간략한바, 이제는 산림ㆍ천택을 먼저 말하고 백공(百工)을 잇따라서 동관의 소속으로 했다.
생각건대, 《주례》에 “산우(山虞)는 산림 행정을 관장하여 11월에는 양달나무를 베고, 5월에는 응달 나무를 베었으며, 무릇 나무를 훔친 자는 형벌이 있다.” 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 제도에는 사산참군(四山參軍)이라는 것이 있어 오직 서울 사방의 산을 관장하나, 그 제도가 미비하다. 지금 12성의 명산(名山) 대악(大岳)을 모두 문적(文籍)에 기록하여, 방위(方位)를 분변하고 토질(土質)을 구별하여 식목(植木)하는 일을 관장하고, 금벌(禁伐)하는 것을 살피며, 부세를 거두어서 나라의 쓰임새를 돕는 것은 그만둘 수 없다.
생각건대, 《주례》에 명씨(冥氏)ㆍ옹씨(雍氏)가 추관(秋官)에 속해 있는데, 명씨는 함정을 만들어서 맹수를 잡아 피혁과 치모(齒毛)를 바치고 옹씨도 또한 함정을 관장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범을 잡는 일은 물론 곰ㆍ사슴ㆍ멧돼지ㆍ여우ㆍ살쾡이 따위를 잡는 것과 그 가죽ㆍ털ㆍ이빨ㆍ뿔을 주관하는 데가 없어 너무 소략하니 이를 산우시에서 주관함이 마땅하다.
생각건대, 임형이란 산우시의 속관(屬官)으로, 산우는 산림을 아울러 관장하나 임형은 그 임목(林木)만을 관리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법에는 오직 송금(松禁)이 있을 뿐인데, 특히 재목으로서 아름답고 좋은 열매를 맺는 〈오엽송(五鬣松)〉과, 노송나무[檜]ㆍ잣나무[柏]ㆍ흰 느릅나무[枌]ㆍ느릅나무[楡]ㆍ단풍나무[楓]ㆍ비자나무[榧] 등도 아름다운 재목이니, 모두 벌채에 대한 금령을 실시하고 부세를 거두어야 한다.
내가 감히 불법으로 세를 거두자는 것이 아니라, 국법이 완비되지 못한 연고로 산림과 천택은 백성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1전도 내지 않는다. 이리하여 나라의 용도가 부족하니 이에 환곡(還穀)ㆍ군포(軍布)ㆍ민고(民庫)ㆍ결미(結米) 따위 제도를 만들어서 온갖 방법으로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게 되어 환과(鰥寡)들이 곤란을 당하는 그 비참한 정상을 차마 볼 수가 없다. 균역법을 창설했으나 겨우 어염(魚鹽)과 선박에 그쳤을 뿐, 산림과 천택은 거론하지 않았고 토호(土豪)와 관리에게 그 이익을 독차지하도록 하니, 나라의 무법(無法)이 이와 같을 수 없다.
하물며 가죽ㆍ털ㆍ이빨ㆍ뿔 따위는 외국에 보내는 폐백(幣帛)과 병기 만드는 데에 긴요하게 쓰이는 것인데, 관에서 이미 수납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용도를 몰라서 다만 고기만 먹을 뿐이고 나머지는 버려서 썩히니 나라가 어찌 가난해지지 않겠는가? 내가 일찍이 《삼국지》ㆍ《남사(南史)》ㆍ《북사(北史)》를 보니, 우리나라의 초피(貂皮)와 인삼(人蔘)은 나라의 귀중한 보배라 했는데, 지금 토호와 관리가 그 이익을 독차지하여 강하면 토하고 부드러우면 삼켜서 그 해가 끝내는 백성에게 돌아오게 되는바, 임형시라는 관청을 어찌 설치하지 않겠는가? 아울러 직장편(職掌篇)에 자세히 적었다.
살피건대, 남방 여러 고을에서 산출되는 차(茶)는 매우 좋다. 내가 본 바로는 해남ㆍ강진ㆍ영암ㆍ장흥 등 모든 바닷가 고을은 차가 나지 않는 곳이 없다. 내 생각에는 차가 나는 모든 산은 지방관으로 하여금 재배하도록 하고 백성들의 초목(樵牧)을 금지하여 그것이 무성해진 뒤 해마다 몇 근씩을 임형시에 바치면 그 차를 다시 만하성(滿河省)에 보내 좋은 말을 사다가 목장(牧場)에 반급(頒給)하는 것도 또한 나라의 쓰임을 넉넉하게 하기에 족할 것이다.
생각건대, 남서 지방의 섬 중에 장산ㆍ안면도ㆍ완도 같은 곳은 솔밭과 잡목을 모두 진장(鎭將)이 주관한다. 내 생각에는 진장의 직함 끝에다 모두 임형시의 참군을 겸해서, 모두 본시에 예속되었음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임목(林木)의 성쇠를 보고하고 부세를 거두는 일은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이다. 참군(參軍)을 8명으로 한 것은 대략을 말한 것이다.
생각건대, 여러 도 사찰(寺刹)에 수목이 무성한 곳도 또한 판적(版籍)에 기록하여 본시에 간직하고 부세를 거두도록 함이 마땅한데, 다만 이런 부세를 거두는 데는 박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고 후하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
생각건대, 원편에 제언사(堤堰司)의 도제조는 삼공(三公)이 예겸하고 제조는 경과 대부 2자리였으나 지금은 택우시로 만들어서 관제(官制)를 산우시와 같게 했다.
살피건대, 《주례》에 “택우는 나라 안 천택(川澤)에 관한 정령(政令)을 관장하여 범법하는 것을 금하여, 생산되는 재물을 그 지역 사람에게 지키게 하였다가 수시로 왕부(王府)에 납입(納入)하도록 하고, 천형(川衡)도 천택에 대한 금령(禁令)을 맡아서, 범금(犯禁)한 자는 잡아서 처벌하였다.” 하였는데, 산우와 택우는 모두 중사로 장(長)을 삼았고, 임형과 천형에는 모두 하사로 장을 삼았으니, 이것은 택은 크고 천은 작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우는 큰 산마다 관원이 12명이며, 임형(林衡)도 큰 숲에는 관원이 12명이다. 택우도 큰 소택(沼澤)마다 관원이 12명이며, 천형도 큰 하천에는 관원이 12명이다. 그런즉 천하에 모든 큰 산과 큰 숲, 큰 소택과 큰 하천은 왕공(王公)이 주인이 되어서 거기에서 생산되는 산물을 거두었던 까닭에 국가가 풍족했었다.
백성은 모두 밭 100묘(畝)를 받아서 가을에 곡식이 익었어도 세가 없고 오직 공전(公田)을 가꾸어서 10분의 1만을 세로 바쳤던 까닭에 백성들의 생활도 풍족했다. 지금은 산림과 천택을 버려두고 수입하지 않으면서 오직 농사하는 백성만 벗기고 족친다. 이리하여 공사간에 쓰임이 모자라고 상하가 아울러 곤란을 받는데, 오직 탐관오리와 토호간민(土豪奸民)이 그 이를 독차지하니, 나라의 무법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우리나라에 특별히 큰 못은 없다. 그러나 의림지(義林池)ㆍ합덕지(合德池)ㆍ공골지(空骨池)ㆍ벽골지(碧骨池)에 만약 물고기를 기르고 연(蓮)을 심어서 엄하게 지키도록 하면 거기에서 나오는 수입을 관에 바치는 것도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또 모든 제언(堤堰)은 그물을 관개(灌漑)하는 백성에게 세를 부과해서 징수함이 마땅하며, 그 이를 그냥 누리도록 할 수는 없다. 다만 이런 세액은 마땅히 극히 박하게 책정하여 명목만 있게 할 것이다.
생각건대, 원편에 준천사(濬川司)의 도제조는 공이 예겸하고, 제조는 3영(營) 대장(大將)이 예겸했는데, 지금은 제조 2자리를 만들어서 병조 판서와 공조 판서가 예겸하도록 했다. 만약 서울 하천을 준설(濬渫)하게 되면 병조에서 3영에 통지하여 그 군사를 징발할 것이고 반드시 3영 대장을 제조로 삼을 것은 아니다. 준천랑 4자리는 3영문(營門) 종사관(從事官) 1명과 공조 좌랑 1명이 겸무하도록 함이 마땅하겠다.
살피건대, 우리나라 큰 하천으로서 북서쪽은 녹수(淥水 : 압록강)이고, 다음 북쪽은 살수(薩水 : 청천강), 다음 북쪽으로 패수(浿水 : 대동강), 다음 북쪽으로 저수(瀦水 : 예성강), 다음 북쪽으로 대수(帶水 : 임진강)이고, 경강은 열수(洌水 : 남북강)이며, 다음 남쪽으로 사수(泗水 : 백마강), 다음 남쪽으로 안수(鴈水 : 高山에서 발원하여서 萬頃 바다에 들어간다), 다음 남쪽은 영수(濚水 : 영산강)이다.
동쪽으로 돌아서는 잔수(潺水 : 두치강)이고, 또 동쪽에 있는 남수(濫水: 진주의 淸川)는 동쪽으로 황수(潢水 : 낙동강)에 모이며, 가장 북쪽에 있는 것은 만수(滿水 : 豆滿江)라 한다. 무릇 이 큰 하천에는 어량(魚梁)을 만들어서 물고기를 잡고, 선박이 모여드는 곳이니, 그 지역에 이익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지금 세력 있는 강변 백성이 모두 남몰래 문안(文案)을 만들어 제 물건으로 만들고, 그 세를 거두어서 스스로 넉넉하게 지낸다. 무릇 맑은 물과 흰 모래는 원래 텅 비어 있는 곳인데, 이것을 어찌 한 사람의 사유로 할 것이겠는가?
내 생각에는 12성 모든 대천(大川)에 어량 등록한 문안은 하나같이 엄금하고 사적(私籍)도 불태워서, 아울러 천형시에다 붙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장으로서 유명한 곳(洌水의 豆尾浦 같은 곳)과 선박이 모여드는 곳(潢水의 洛東 같은 곳)은 세액을 대략 정하고 천형시에 바치도록 해서 나라의 재정에 보충하는 것도 또한 적당한 방법이라는 것이다(선박은 이미 均役廳에 세를 바치고 있으나, 그 점포에도 세액이 있어야 한다).
생각건대, 원편에 “제조 1자리를 호조 판서가 예겸한다.” 하였는데, 마땅치 않은 듯하므로 이번에는 공조 판서가 예겸하도록 했다.
살피건대, 원전에 주부와 봉사(奉事)가 모두 4자리이고 감역(監役)과 가감역(假監役)이 모두 6자리인데, 이것은 백도(白徒)가 벼슬길에 들어서는 것을 위해 증설한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학행과 재예가 있으면 다른 관직에도 구애됨이 없는데, 어찌 반드시 가감역으로 제수하는 것인가? 관직을 위해서 사람을 택한다는 말은 내가 들었거니와 사람을 위해서 관직을 설치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하물며 내빙고(內氷庫)에 얼음을 저장하고 얼음을 바치는 일을, 또한 감역을 시켜서 하는 것은 매우 부당한 일이다. 이 편에 얼음을 저장하는 법은 성안에 움을 파서 하고(이에 대한 설명은 앞에 있음), 내빙고는 금원(禁苑)에 움을 파서 하고자 했으니 빙고 관원으로서 궐내에 얼음 진공(進供)하는 일을 겸할 수 있는데 또 어찌 반드시 감역을 빌려오는 것일까? 직무가 이와 같으므로 선공감 낭관 6자리를 바로 줄였는데, 나는 아직도 관직이 많다고 생각한다.
생각건대, 《춘추전(春秋傳)》에, “정덕(正德)ㆍ이용(利用)ㆍ후생(厚生)이 왕자(王者)가 정치를 하는데 큰 목적이 된다.” 하였고, 《중용(中庸)》에는, “늠록(廩祿)을 일에 알맞게 하여 온 관원을 권장한다.” 했고, 《주례》 고인직(稿人職)초에는, “그 활과 쇠뇌(弩)를 고찰해서 식록(食祿)을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한다.”고 했으며, 월령(月令)에는 “첫겨울(孟冬)에 공사(工師)에게 명해서 사공(事功)을 조사하는데, 물건마다 그것을 만든 공장(工匠)의 이름을 새겨서(그 기구에다 이름을 새김) 그 정성들였음을 고찰하며, 만든 것이 적당치 못하면 반드시 그 죄를 시행한다.” 했는바, 선왕이 모든 공장을 권장하던 것이 이와 같았다.
진실로 기예가 정교한 자에게 그 늠록을 증가하면, 사방에서 기교(機巧) 한 사람들이 장차 풍문을 듣고 모여올 것이다. 농기가 편리하면 힘을 적게 들여도 곡식은 많고, 직기(織機)가 편리하면 힘을 적게 들여도 포백(布帛)은 풍족하다. 배와 수레의 제도가 편리하면 힘을 적게 들여도, 먼 지방 물화가 정체되지 않으며, 인중(引重)ㆍ기중(起重)하는 법이 편리하면 힘을 적게 들여도 대사(臺榭)ㆍ제방(堤防)이 견고해질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말하자면 온갖 공장을 오도록 하여 재용(財用)이 넉넉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온갖 공장의 교묘한 기예는 모두 수리(數理)에 근본한 것으로서, 반드시 구(句)ㆍ고(股)ㆍ현(弦)의 예각ㆍ둔각이 서로 들어맞고 서로 어긋나는 본리(本理)에 밝은 다음이라야 이에 그 법을 깨칠 수 있을 것이니, 진실로 사부(師傅)에게 배워서 많은 세월을 쌓지 않으면 끝내 습취(襲取)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선조 때에 규장각에서 서적을 교열하였는데, 선조께서 《도서집성(圖書集成)》ㆍ《고공전(考工典)》 제240권을 내사(內賜 : 임금이 친히 내려주는 것)하였으니, 곧 기이한 기구(機具)를 도해(圖解)해서 설명한 것을 편집한 것이다. 그 후에 또 규장각 검서관(檢書官) 박제가(朴齊家)가 지은 《북학의(北學議)》 6권을 보았으며, 그 후에는 유신(儒臣) 박지원(朴趾源)이 저술한 《열하일기(熱河日記)》 20권을 보았는데 거기에 기록된 중국 기구(器具)의 제도는 보통 사람의 의견으로서 능히 추측하지 못할 만한 것이 많았다.
전 장신(將臣) 이경무(李敬懋)가 일찍이 나에게 “지금 병기로서의 화기(火器)는 모두 새로운 제도인데, 일본 조총(鳥銃)도 지금은 구식이다. 이후 남북에 사변이라도 있으면 다시 조총과 쇠도리깨ㆍ방망이 따위를 가지고 오지는 않을 것이니, 지금의 급무는 북쪽으로 중국에 가서 배우는 데에 있다.” 하였으니, 참으로 시무(時務)를 아는 말이었다. 나의 생각에는 별도로 한 관청을 설치하여 명칭을 이용감이라 하고 오로지 북쪽에 가서 배워오는 것을 직(職)으로 한다는 것이다.
제조 및 첨정 2자리는 수리에 밝고 익숙한 자를 택해서 차임(差任)하고, 별제 2자리는 눈썰미와 손재주가 있는 자를 시키며, 학관(學官) 4자리는 사역원(司譯院)과 관상감(觀象監)에서 수리에 정통하고 관화(官話)에 익숙한 사람 각각 2명을 엄선하여 해마다 북경에 들여보내어, 돈을 사용하여 그 방법을 구하거나 또는 넉넉한 값으로 그 기구를 매입할 것이다. 무릇 구들 놓기, 벽돌 굽기, 수레 만들기, 그릇 만들기, 쇠 불리기, 구리 불리기, 기와ㆍ벽돌ㆍ자기(磁器) 굽기에서 무거운 것을 끌어당기기, 무거운 물건 들어올리기, 나무 켜기, 돌 켜기, 멧돌ㆍ방아ㆍ물방아 찧기, 바람으로 멧돌돌리는 법과 홍흡(虹吸)ㆍ학음(鶴飮) 따위 제도와 모든 농기구ㆍ직기ㆍ병기ㆍ화기ㆍ풍선ㆍ물총[水銃]에서 천문역법에 소용되는 의기(儀器)ㆍ측기(測器) 등 실용에 관계되는 모든 기구는 전습(傳習)하지 않는 것이 없도록 하여 돌아와서 본감(本監)에 바치면 본감에서는 솜씨 있는 공장을 모으고 그 법을 상고하여 시험삼아 제조한다. 그리하여 성과가 있는 자는, 제조와 공조 판서가 만든 것을 고찰하고 으뜸으로 된 자는 감목관(監牧官)이나 찰방(察訪)을 제수하거나 또는 현령이나 군수를 제수한다. 그리고 큰 공이 있는 자는 승격(陞格)해서 남ㆍ북한 부사(南北漢副使)로 삼으며, 그 자손을 녹용(錄用)한다.
이와 같이 하면 10년을 넘지 않아서 반드시 성과가 있을 것이며, 나라가 부유해지고 군사도 강해져서 다시는 천하의 비웃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대부(大夫) 이기양(李基讓)이 사명을 받들고서 북경에 갔다가 목화 씨를 바르는 씨아를 구해와서 바쳤는데, 선왕이 오군문(五軍門)에 명하여 그 견본을 만들어 팔도에 갈라주도록 했으나, 명을 내리고는 곧 빈천(賓天)하여 그 일이 마침내 시행되지 못했다. 그 제도가 소박하고 성글어서 시행되지 못했으나, 한 사람이 한가하게 앉아서 바퀴만 밟아도 하루에 목화 200근은 너끈히 씨를 바를 수 있다니 또한 길쌈하는 데에 편리하고, 재화를 유통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인데 애석하게도 시행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국력이 한창 빈약한데 무엇으로써 관직을 증설할 것인가?” 하지만 나의 생각에는 국력이 빈약한 까닭으로 이 관직을 급히 설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물며 선공감에 낭관 4자리를 줄이고 서리 10자리를 줄여서 이 관청을 설치하는 것인즉, 내가 관직을 증설하는 것은 아니다.
사병시란 군기시(軍器寺)이다. 원편에는, “제조 1자리를 병조 판서가 겸무했다.” 하였으나 이번에는 공조 판서가 하고, 또 1자리는 무장(武將)이 하도록 했다.
생각건대, 군기시 낭관이 10명이나 되도록 많은 것은 녹 없는 무신을 대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6자리를 줄여서 다른 기관을 설치했다.
살피건대, 원편에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가 있는데, 도제조는 대신이 하고, 낭관 13자리는 다른 관원이 와서 겸무했다.” 했으나 근래에 다시 혁파되었다. 서울 주위 30리를 3단(段)으로 가르고, 3영문(營門)이 1단씩 맡아서 허물어지는 대로 보수하도록 했다. 이번에는 북영(北營 : 지금 曜金門 밖에 있다) 안에 있는 한 청사를 수성사로 만들어서, 그 제조는 3장신(將臣)이 예겸한다. 그리고 낭관은 3영 장관 중에서 택차(擇差)해서 겸무하도록 한다. 12성에 있는 여러 곳의 성(城)도 아울러 관할[句管]하고, 3영(營)에서 4성(省)씩 맡아서 그 완훼(完毁)를 살피고 보수하도록 단속한다.
그리하여 그 공장(功狀)과 죄장(罪狀)을 1벌은 병조에 올리고 1벌은 공조에 올려서 등급을 정하는 일은 그만둘 수가 없다.
생각건대, 《주례》에, “장고(掌固)의 관직은 성곽 구지(溝池)ㆍ수구(樹溝)를 견고하게 보수하는 일을 맡았다.” 했는데 하관(夏官) 소속이었으나 이번에는 그 일들이 영작(營作)하는 것과 관련되었고, 이용감(利用監)과 서로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공조에다 붙였다.
생각건대, 중국에서는 성을 모두 벽돌로 쌓은 까닭에 견고해서 깨뜨리기 어렵고, 또 평지에 있는 성은 모두 안팎을 겹쳐 쌓았는데, 우리나라 성은 모두 암벽을 깎고 벼랑에 기대어 쌓았으므로 한 꺼풀 안쪽은 푸슬푸슬한 흙이다. 한 사람이 긁어당겨도 손을 따라서 무너질 지경이니 이런 성을 어디에 쓰겠는가? 이용감에서 벽돌 굽는 법을 빨리 알아오는 것이 마땅하겠다. 여러 도의 변경 성은 100년을 한정하여 차례차례 고쳐 쌓을 것인데, 그전 돌은 땅에다 펴서 기초를 만들고 이에 벽돌로 쌓으면서 치첩(雉堞)도 그 법대로 설치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다.
생각건대, 연변(沿邊) 여러 성은 모두 조석(朝夕)에라도 생길지 모르는 변고에 대비하는 곳이다. 터를 잡을 때는 오직 군사를 쓰는 데에 알맞은 지세인가를 헤아리고 살필 것이다. 그런데 풍수설에 의혹된 지가 벌써 오래여서, 무릇 읍(邑) 터를 보는 자는 오직 용세(龍勢)와 수법(水法)에 얽매이고 이것에 따른다. 내가 본 바로는 서쪽과 남쪽 여러 성은 하나도 수어(守禦)할 만한 곳이 없는바, 이것도 수성사에서 알아두는 것이 마땅하겠다.
생각건대, 원전에 수성(修城)과 금화(禁火) 두 기관을 합쳐서 하나로 했으므로, 지금 역시 그대로 했다. 《주례》 추관에, “사훤씨(司烜氏)가 중춘(仲春)에 목탁(木鐸)으로 나라 안에 화금(火禁)을 경계한다.”고 했다. 그런데 소화(消火)하는 여러 기구는 이용감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지금 공조에다 붙였다.
살피건대, 근래의 예에 무릇 성안에 화재가 나면 3영문에서 달려와서 구원했다. 낭관 12자리를 이미 영문 장관으로 삼았으니 그 관서도 3곳에 설치함이 마땅하다. 하나는 북영(요금문 밖에 있다)에, 하나는 양향청(粮餉廳 : 저동에 있다)에, 하나는 수어구청(守禦舊廳 : 소정동 북쪽에 있다)에 설치한다. 또 여러 방(坊) 36곳에다 물총을 설비하고 3영에서 12곳씩 맡아서, 무릇 화재가 있으면 물총으로 소화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
생각건대, 사훤(司烜)이란 금화(禁火)하는 관직이다. 지금은 금령(禁令)이 씻은 듯 없어져서 동서북 여러 도에 산이 깊고 나무가 빽빽한 지역은 모두 불을 질러 태워서 화전을 만든다. 나라 법제에 산허리 이상을 경작하는 자는 법에 저촉하도록 되어 있는데, 법이 있어도 시행하지 않으면 없는 것만 못하다. 재목이 자라지 못하고, 금은이 나지 않으며, 무늬 있는 가죽과 이상한 뿔을 가진 짐승들이 죄다 국경 너머로 달아나니 나라가 여위고 백성이 가난해지는 그 구멍이 많다. 또 산허리 이상이라는 것도 본래 분명치 못하니 높은 산과 낮은 산이 있어 혹은 10리가 허리가 되기도 하고 100보가 허리가 되기도 하며, 10보가 허리가 되기도 하는데, 그 허리라는 한계를 누가 알겠는가? 지금 법제를 거듭 밝히는 것이 마땅하겠다. 평지에서 계산하는데 간짓대를 걸친 다음 줄을 드리워보아서 300보 이상은 개간을 허가하지 말 것이다. 깊은 산, 무성한 숲을 제 마음대로 불지른 자는, 본사에서 수탐(搜探)하거나 또는 서리를 보내 순시한 다음 벌전(罰錢)을 징수하고, 수령을 벌책함도 또한 마땅하겠다.
전환서란 주전소(鑄錢所)이다. 옛적에 구부환법(九府圜法)이라 한 것은 모두 돈 만드는 것을 이른 것이다. 지금 돈 만드는 일은 모두 영문(營門)에서 하는데, 그 제도가 만에 하나도 같지 않아서, 혹은 크고 혹은 작으며, 혹은 두껍고 혹은 얇다. 글자가 흐릿하고 분명치 못하여, 우둔(愚鈍)한 백성은 사사로 주조한 것과 분별해낼 수가 없다. 하물며 돈 형(型)에 재료를 조합하면서 거칠고 약한 물건을 섞으므로, 손에 닿는 대로 부서져서 능히 10년을 견디어내지 못한다. 이것도 또한 이용감에서 중국의 주전법(鑄錢法)을 배워 모두 전환서에서 주조할 것이다.
환법은 본디 경중이 있는데, 경중은 가벼운 돈과 무거운 돈을 말한다. 만약 한 닢 돈을 약 1만 꿰미 주조할 때에 열 닢 무게를 한 닢으로 할 것 같으면 1천 꿰미만 주조해도 작은 돈 1만 꿰미에 해당하며, 또 백 닢 무게를 한 닢으로 하면 100꿰미만 지어도 중간 돈 1천 꿰미에 해당된다. 그렇게 하면, 주조하는 데에 공비가 줄고 유통하는 데에 계산하기가 편리할 뿐 아니라, 돈 닢이 두꺼워서 오래도록 견딜 것이니 이것이 경중의 본법(本法)이다. 지금 천하 만국에 은전(銀錢)ㆍ금전(金錢)이 있고, 은전ㆍ금전 중에 또 대ㆍ중ㆍ소 3층이 있다.
나주 흑산도 사람 문순득(文淳得)이 가경(嘉慶 : 淸仁宗의 연호, 1796~1820) 신유년 겨울에 서남(西南) 바다에 표류하여, 유구(琉球)ㆍ중산국(中山國)ㆍ영파부(寧波府)ㆍ여송국(呂宋國)ㆍ안남국(安南國)을 두루 구경하고 광동(廣東) 향산(香山) 모퉁이에 이르러 해외 여러 나라 큰 장사치들을 많이 보았는데, 그들이 사용하는 돈이 대개는 이와 같았다고 하였다. 지금의 동전 한 닢 무게로써 은전 한 닢을 주조하여 동전 50을 당하고, 또 은전 한 닢 무게로써 금전 한 닢을 지어서 은전 50을 당하게 하되, 대ㆍ중ㆍ소 3층이 있도록 하면, 3종류의 금속이 총 9종류의 돈으로 되는바 참으로 9부환법이라 할 수 있겠다.
생각건대, 오금(五金)ㆍ팔석(八石)은 모두 해ㆍ달ㆍ별의 정기가 오랜 연조를 쌓아 이에 그 모양으로 엉긴 것이다. 그러므로 한 광(礦)을 파고 나면 1천 년이 지나도 회복되지 못할 터이니 이것은 한정적이기 때문에 얻기 어려운 보배인 반면, 금수(錦繡)ㆍ견포(絹布) 따위는 고치실과 양털에서 해마다 생산되니 이것은 얻기 쉬운 물건이다.
우리나라는 해마다 금ㆍ는 수천만 냥을 중국에 들여보내 금수와 견포로 바꿔오고 있다. 이것은 한정 있는 것으로써 한정 없는 것과 무역하는 것이니, 어찌 국력이 소진하여 피폐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금ㆍ은이 이미 다 없어지면 저들의 비단도 우리나라에 들여오지 못할 것이니 선명(鮮明)한 의복인들 어찌 능히 항상 입을 수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금전과 은전을 국내에 유통시키면 중국에 들어가는 것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또 금수와 견포를 절대로 무역하지 말고 이용감에서 비단 짜는 법을 배워다가 국내에 널리 퍼지도록 하면 또한 양편으로 이롭지 않겠는가? 그것을 배워 와도 능히 하지 못한다면 해어진 베옷을 입을지언정 금ㆍ은을 중국에 들여보낼 수는 없다.
전환서의 대부(大夫)와 낭관(郞官)도 또한 3영문 장신(將臣)과 장관으로 삼고 식년(式年)이 되면 돌려가면서 체임(遞任)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니, 가령 자년(子年)에 도통영(都統營) 장사(將士)가 이 관서를 맡았으면 묘년(卯年)에 좌어영(左禦營)과 교대하며, 오년(午年)에는 우위영(右衛營)과 교대하는데 유년(酉年)이 되면 도통영이 다시 맡게 되는 것이다.
살피건대, 《예기》에, “변면(弁冕)과 병기(兵器)는 사가(私家)에 간직하지 않는다.” 했는바, 곧 병기는 사사로 제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옛 제도에 오직 천자만이 악(樂)을 짓고, 율(律)을 고찰할 수 있었으며, 악기(樂器)도 사사로이 제조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병기와 악기를 다 그렇게 할 수 없고, 오직 구리[銅]로 만드는 물건만 사사로 만드는 것을 금단할 것이다. 병기인즉, 요령[鉦]ㆍ소라[鑼]ㆍ꽹과리[鐃]ㆍ징[鐲]ㆍ나팔[喇叭] 등은 모두 전환서에서 만들도록 한다. 비록 3영문의 것이라도 모두 본서(本署)에서 만들어가며 외방 12성도 모두 본서에서 가져다가 쓴다.
악기인즉 크게는 종(鍾)과 큰 쇠북[鑮], 작게는 중(僧)들이 쓰는 경쇠[磬]와 무당[巫]이 치는 요령[鉦 : 古詩에도 중들이 쓰는 작은 종을 銅磬이라 하였다]을 모두 전환서에서 만든다. 비록 장악원(掌樂院)에서 쓰는 것이라도 모두 본서에서 만들어가며, 외방 12성과 여러 사찰에서까지 모두 본서에서 가져다 쓴다. 그리고 사사로 만든 것이 있으면 사전(私錢)을 주조한 것과 똑같이 율을 적용한다. 또 병기와 악기에는 모두 구름 모양과 표지를 새기며, 또 크고 작음과 길고 짦음에서 반드시 털끝만큼의 어긋남도 없도록 할 것인데, 이것도 또한 한 제도에 대한 작은 권도이다.
관자(管子)는 세모난 띠풀로써 제후의 권세를 다 잡아당겼는데, 하물며 병기와 악기이겠는가? 그 삶이 후하면 그 업(業)에 부지런해지고, 그 업에 부지런하면 그 기술이 정묘해지는데, 이것도 또한 온갖 공장(工匠)을 오도록 하는 데에 한 도움이 될 것이다. 돈 만드는 일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혹 5년에 한 번 만들거나 10년 만에 한 번 만드는데, 이것을 믿고서 살라고 하면 주조하는 공장은 흩어질 것이다.
생각건대, 동관(冬官) 고공기(考工記)에, 장인(匠人)이 국도(國都)를 영건(營建)하면서 9구역으로 갈랐는데, 한복판을 왕궁으로 만들고, 앞면은 조정, 뒤쪽은 저자[市]로 했으며, 좌우 6향(鄕)이 둘씩둘씩 서로 마주 향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옛 제도였다. 그런데 장인이 국도를 영건하면서 지역을 사방 9리로 했으니 1구역은 사방 3리에 불과하며, 사방 3리는 9정(井)을 만들 만한 지역이다(맹자는 사방 1리를 정으로 한다 하였다).
옛 제도는 5주(州)가 향이었는데, 향은 1만 2천 500가(家)였다. 1만 2천 500가를 9정(井)에 분배하면 매정에 1천 389호(戶)가 되고(나머지가 1호이다). 1정이 900묘(畝)인즉 1농부(農夫)의 몫이 100묘이니, 1천 389호를 9농부의 몫으로 분배하면 1농부의 몫마다 154호가 된다(남는 것이 3호이다). 154호를 100묘로 분배하면 땅 1묘마다 1호 반이 되는바, 이는 1묘궁(畝宮)이라는 것이 아니다. 또 그 사이에 도랑과 둘레 길이 있다. 또 경ㆍ대부의 집은 반드시 서민의 집 제도와 같지는 않다. 그런데 국도가 사방 9리이면, 한 향이 용납[函]하는 것이 반드시 1만 2천 500가가 되지 못할 터이니 이것은 두 경서가 합치되지 않는다. 국도를 사방 9리로 한다는 것은 반드시 천자의 국도가 아닐 것이다. 또는 9리라는 것이 정전(井田)의 사방 1리와는 같지 않은 것이 있다.
이번에도 국도를 영건하는 제도는 또한 국도를 9구역으로 갈라서 왕궁이 복판에 있고 앞에는 조정이, 뒤에는 저자가 있으며, 좌우 6부(部)가 둘씩 서로 향하도록 했다. 1부를 9로 구분한 것을 9취(聚)라 하며, 1취를 9로 구분한 것을 9구(區)라 한다. 이리하여 모든 가옥을 9등으로 구분하는데 1구를 1도(堵)로 한 것은 오직 왕궁이 그러하고 관서도 또한 그런 것이 있으며, 그 나머지 사실(私室)들은 모두 1구를 개방하여 담을 쌓는다.
1구에 4도(堵) 되는 것이 갑제(甲第 2×2=4)로 되고, 1구에 9도(堵)되는 것이 을제(乙第 3×3=9)가 되며, 1구에 16도가 되는 것이 병제(丙第 4×4=16)가 되고, 1구에 25도가 되는 것이 정제(丁第 5×5=25)가 되며, 1구에 36도가 되는 것이 무제(戊第 6×6=36)가 되고, 1구에 49도가 되는 것이 기제(己第 7×7=49)가 되며, 1구에 64도가 되는 것이 경제(庚第 8×8=64)가 되고, 1구에 81도가 되는 것이 신제(辛第 9×9=81)가 되며, 1구에 100도가 되는 것이 임제(壬第 10×10=100)가 되는데, 모두 9등이다. 1구에 도가 100인 것은 매도마다 사방 10보(步)이며 사방 10보는 1묘(畝)이니, 1묘 되는 집이 최하등인바, 이것들은 거의 옛사람이 남긴 법이다. 이리하여 왕궁 좌우에 가장 가까운 9구를 갑제로 하며, 을ㆍ병ㆍ정ㆍ무ㆍ기ㆍ경ㆍ신ㆍ임을 차례대로 벌여둔다.
모퉁이 4부(部)에는 갑제를 짓지 않으며 임제가 두 줄로 있도록 한다. 또 앞에 있는 조정과 뒤에 있는 저자는 복판 열(列)에 있으며, 30보로써 경계 길을 만든다(옛 제도는 수레 7개의 폭이나 너무 좁으므로 지금은 넓혔다). 그리고 좌우 각 35보(步)를 백관(百官)이 근무하는 공서(公署)로 하며, 온갖 물화(物貨)를 매매하는 시사(市肆)로 만든다. 또 그 바깥 왼쪽 줄과 오른쪽 줄을 각각 신제(辛第)와 임제(壬第)로 한다. 이렇게 되면 9등급의 집이 총 3만 5천 272호가 되며, 또 성 바깥 6수(遂)에도 신제(辛第)가 1만 3천 122호이고, 임제(壬第)가 3만 2천 400호에서 성 안팎이 모두 8만 700호이다.
이에 갑ㆍ를ㆍ병(甲乙丙) 3등급의 집에는 대부(大夫)가 있고, 정ㆍ무ㆍ기(丁戊己) 3등급의 집에는 적사(適士)가 살며, 경ㆍ신ㆍ임(庚辛壬) 3등급의 집에는 서민(庶民)이 있도록 한다. 그리고 차라리 낮은 등급에 있을지언정 위로 참람함이 없도록 하면 왕국의 법이 이에 크게 이루어질 것이다. 아울러 조목을 표로 만들어서 다른 편에다 기록했으므로 여기서는 대략만 거론한다.
살피건대, 건국 초기에 국도를 영건할 때에 능히 구획하지 못한 것이 이와 같다. 지금에 전도사(典堵司)가 관장하도록 하는 것은 오직 현재의 6부 뿐으로서 그 가옥의 크고 작은 제도를 그 담을 보고서 분별할 뿐이다. 오직 담에 9등의 구별이 있을 뿐 아니라, 가옥의 높고 낮음, 넓고 좁음과 재목의 크고 작음, 길고 짧음으로써 각각 9등을 구분한다. 그리고 6부 안에 혹 집을 헐고 다시 세웠거나, 또는 빈 터를 차지해서 새로 건축한 것이 있으면 전도사가 살펴서 분변한다. 만약 그 담이 제9등 지역에 있는 것이면 그 가옥 제도도 또한 9등 제도로 해서 1자 1치의 털끝만큼이라도 어김없이 하며, 만약 그 담이 제6등 지역에 있는 것이면 그 가옥 제도도 또한 6등 제도로 해서 1자 1치의 털끝만큼이라도 어김이 없게 한다. 진실로 오래도록 유지하여 게으름 부리지 않고 수백 년 동안 시행한다면, 6부 민가가 비록 제도에 다 합당하지는 못하더라도 9등으로 정한 제도 안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니, 이것이 역시 제도를 고르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드시 9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릇 왕자가 입법하는 데에는 상하의 등이 있으며 귀천의 급이 있어, 거마(車馬)ㆍ의복(衣服)ㆍ기용(器用)에 그렇지 않은 것이 없는데 하물며 가옥이겠는가? 9등이라는 제도를 백성이 다 알고 있으니 우인(虞人)이 나무를 벨 때에 그 제도를 익히 알고 있어서 베고 자르는 것을 모두 9등 소용에 알맞게 하므로 허비가 없으며,제인(梯人)이 집을 지을 때에도 그 제도를 알고 지으며, 9등 가옥은 원래부터 각각의 일정한 값이 있으므로 쟁송하는 일이 없게 된다. 또 《주례》에 말한 아홉 가지 부세 명목에 방중(邦中) 부세가 한몫을 차지했다. 지금 방중 부세를 거두고자 하면서 9등 제도가 없으면 많이 거두기도 적게 거두기도 해서, 장차 만에 하나도 같지 않을 것이다. 만에 하나도 같지 않으면 그 법이 헷갈리고, 억지로 몇 등으로 가르면 그 법이 고르지 못할 것이다. 가옥 제도는 원래부터 9등으로 분간해서 1자 1치의 털끝만큼이라도 감히 어김이 없은 다음이라야 바야흐로 법도를 고르게 낼 수가 있어 왕자의 큰 법이 될 것이다.
북경에서 집을 짓는 자는, 무릇 창호를 낼 때에 먼저 문틀을 설치하고 저자에 가서 창을 사오는데 꼭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것은 왜 그런가? 그 가옥의 제도에 각자 치수가 있어, 감히 어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제인이 문틀을 동쪽 마을에 설치했고, 장수[賈人]가 창을 서쪽 저자에 진열했으나 서로 구해오면 부절(符節)을 합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이른바 도(道) 있는 나라라는 것으로, 전도(典堵)하는 관청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건대, 《주례》에 수레의 쓰임을 건거(巾車)조에 기록했으나 제조하는 방법은 고공기보다 상세한 것이 없다. 윤인(輪人)ㆍ여인(輿人)ㆍ주인(輈人)조에 상세하게 설명했고 또 거인(車人)을 말한 글에 덧붙여 말했다. 수레를 만드는 것은 동관(冬官)의 직무인데,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서 수운(水運)하기에 편리한 까닭에 예부터 수레는 없었다. 그러나 풍파에 침몰하기도 하며, 편하게 건너기가 극히 어렵고 체류하는 비용이 많아서 이익이 적다. 그리하여 상업이 흥기되지 못하고 물화도 유통하지 못한다.
나라가 여위어지고 백성이 가난해지는 것이 모두 수레가 없는 연고이다. 고을 관원이 모두 마교(馬轎)를 사용하니 사람이 고달파지고 말도 지쳐서 비용이 많이 들고, 이것을 빙자해서 부세를 더 거두니 해가 가난한 백성에게 돌아간다. 또 혼인하는 집에서 수레를 쓰지 않은즉 살림살이가 기울고, 반장(返葬)하는 길에 수레를 쓰지 않은즉 비용이 한절(限節)이 없게 된다. 혹 관(棺)을 버리고 시체를 들어내어서 두 사람이 메고 가기도 하는데, 마음이 애처롭고 슬퍼서 차마 볼 수 없는바, 수레를 쓰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군사를 일으키면 군량이 모자라기도 하는데, 만력(萬曆 : 明神宗의 연호) 임진란(1592) 같은 때에는 굶주린 백성에게 채찍질해서 군량을 나르게 했는데, 치중(輜重)을 져다나르면서 울부짖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해서 차마 볼 수가 없었으니, 수레를 쓰지 않을 수 없다. 이용감(利用監)으로부터 북쪽 중국의 수레 제도를 배워오는 것이 마땅하겠다.
새 제도를 창안하지 말고, 오직 중국 제도를 모방해서 털끝만큼의 어긋남도 없게 하여야 운행하는 데에 결점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은 헌원씨(軒轅氏) 때부터 운행했으므로 지금까지 그 병통의 연유를 연구한 것이 이미 익숙했고, 그 운용하는 데에 편리하게 되는 연유를 알아낸 것이 이미 진지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은 매양 새 제도를 창작하여 중국보다 낫고자 하면서도 혹 외바퀴를 제작하고, 혹은 세 바퀴를 만드는가 하면, 항상 먹는 밥은 짓지 못하면서도 별미(別味)부터 먼저 생각하고, 천자문도 배우지 못한 것이 가짜 인장(印章)부터 먼저 만들려 하는 꼴이니 어찌 성공하겠는가? 태평거(太平車) 한 대를 만드는 것도 일찍이 배우려 하지 않는데 다른 것이야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지금 중국에 가서 배워온 것이 익숙하거든 별도로 한 관청을 설치하여 명칭을 전궤사라 하여 모든 공사간에 소용되는 수레는 죄다 전궤사에서 제작할 것이다. 공비(工費)를 계상(計上)하고 일정한 값을 정해서 백성들에게 값을 바치고 수레를 받아가도록 할 것이며 혹 사사로 만드는 것은 엄금하는 것이 가하다. 수레에는 바퀴가 있고 바탕이 있는데 전궤사란 무엇인가? 수레의 바퀴 사이를 같게 하는 것[車同軌]은 왕자의 큰 법제이다. 두 바퀴 사이가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해서, 수레가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아서 싣는 짐의 무게도 다를 것이며, 따라서 그 값이 어떤 것은 많고 어떤 것은 적으며, 그 삯도 혹 높기도 혹은 낮기도 한데, 이런 천백 가지 병통이 모두 바퀴 사이가 같지 않은 데에서 일어나게 된다. 바퀴가 이미 같으면 수레의 크기가 같아지고, 싣는 짐의 무게도 같으며, 그 값과 그 삯도 서로 같지 않음이 없게 된다. 이와 같은즉 일정(日程)을 계산해서 이익을 따지게 되며 공장은 값을 요량하고 이익을 셈할 때, 눈에 환하게 되어 다시 의심하거나 머뭇거릴 필요가 없게 된다. 그리고 혹 부서진 수레를 수선하는 것은 사사로이 제조했다는 죄목으로 논할 것이 아니다.
가장 긴급한 것이 태평거(太平車)이다. 병거(兵車)ㆍ전거(田車)ㆍ치거(輜車)ㆍ상거(喪車) 따위 제도가 중국 수레의 제도와 다른 것은 모두 이용감에서 그 제도대로 전수(傳授)할 것이다.
생각건대, 《주례》 추관(秋官)에 “야려씨(野盧氏)가 온 나라 도로를 관장하여 4기(畿)에 이르며, 모든 도로에 수레 굴대가 서로 부딪치는 것을 차례대로 통행하도록 하며, 무릇 나라의 큰일에 도로를 자주 수리한다.” 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지극히 요긴한 관직이다. 고공기에는, “장인이 국도를 영건하면서 경도(經涂)는 수레바퀴 아홉 너비로 하고, 환도(環涂)는 바퀴 일곱 너비로 하며, 야도(野涂)는 바퀴 다섯 너비로 한다. 그리고 제후의 경도는 바퀴 일곱 너비로 하고, 작은 도시의 경도는 바퀴 다섯 너비로 한다.” 하였다.
내 생각에는 제도를 정해서 국도 안 경도는 바퀴 일곱 너비로 하고, 성문 밖의 길은 바퀴 다섯 너비로 하며, 교관(郊關) 밖 길은 바퀴 세 너비로 하여 12성에 통하도록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혹 길을 침범해서 경작한 자는 전궤사에서 살펴서 죄를 주며, 경성(京城) 안에도 술(酒)과 장(漿)을 파는 작은 저자에 의려(倚盧 : 임시 거처하기 위해 지은 집이나 천막 따위)를 지어서 길을 침범한 것을 전궤사가 살펴서 죄주는 것도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장차 수레를 통행시키고자 한다면 반드시 길부터 먼저 닦을 것인데, 무릇 12성 큰길은 반드시 숫돌같이 판판하여 기울지 않아야, 이에 수레가 통행할 수 있다. 모름지기 나루터[津]와 관문(關門)을 관할하는 관청은 사방 행상을 만날 때마다 그들에게 도로의 평측(平仄)을 물어서, 고르지 못하고 기울어져서 수레가 다니기에 불편한 곳이 있으면, 본사(本司)에 통지하고 형조에 전보하여 형조에서는 단속하는 공문을 급히 보내서 그 지방관을 죄주는 한편, 곧 수보하도록 한다. 이와 같이 한 다음이라야 비로소 넉넉하게 수레가 다닐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는 직장편에 자세히 기록했다.
생각건대, 거마와 의복을 주는 것[車服以庸]은 왕자가 착한 이를 포상하는 큰 권병(權柄)이다. 나라 제도에, 하대부는 소여(小輿)를 타고, 대부는 초헌(軺軒)을 타며, 공(公)과 고(孤)는 평교자(平轎子)를 타는데, 평교자란 안거(安車) 따위이다. 그런데, 이 4가지의 제도가 혹은 크고 혹은 작으며, 혹은 높기도 혹은 낮기도 하여 만에 하나도 서로 같은 것이 없다. 이 한 가지 일만 보아도 그 표준이 없는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이번에는 수레를 3등급으로 정해서 모두 초헌같이 하는데, 하대부가 타는 수레는 외바퀴에 높이가 어깨에 미치고(3품관이 타는 수레), 경ㆍ대부가 타는 수레는 쌍바퀴이면서 높이는 어깨에 미치며(2품관이 타는 수레), 삼공(三公)과 삼고(三孤)가 타는 수레는 3바퀴이고 높이는 땅에 닿을 듯하게 한다(1품관이 타는 수레). 여기에다 하대부는 노루 가죽을 깔고, 중대부는 사슴 가죽을 깔며, 상대부는 바다표범 가죽을 깔고, 고와 경이 타는 수레에는 범 가죽을 깔며, 대신이 타는 수레에는 표범 가죽을 까는데, 무신(武臣)은 오직 상대부만이 수레를 타며 곰의 가죽을 깔도록 하였다. 그리고 고ㆍ경ㆍ대신은 문신ㆍ무신이 다 같이 범 가죽과 표범 가죽을 사용하여 공덕 있는 이를 포장(褒獎)하면서 서로 한계를 넘지 못하게 하였다. 무릇 3등급 수레도 모두 전궤사에서 수여(授與)하였다가 그가 죽은 뒤 3년이 지나면 도로 본사에 바치는데, 이것을 다시 수리하고 칠해서 다음 소용에 대비하면 국비(國費) 계승에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국력이 한창 빈약한데 무엇으로써 관직을 증설하겠느냐?”고 하지만 군기시(軍器寺)에서 6자리를 줄여 그 3으로 전궤사를 만들고 3으로 전함사(典艦司)를 만드는데, 어찌해서 관직을 증설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제조는 공조 참판이 예겸한다.
생각건대, 원편에 “전함사가 서울과 외방 함선(艦船)을 관장하는데, 제조가 2자리이고 낭관이 5자리이며, 수운판관(水運判官) 3자리가 소속되어 있다.” 하였는데, 근래에 혁파되었다. 그 후 건륭(乾隆 : 淸高宗의 연호) 기유년(정조 13년, 1789) 겨울에 현륭원(顯隆園)을 화성에 개장(改葬)하면서 다시 주교사(舟橋司)를 설치하고 제조와 낭청(郞廳)은 다른 관직이 겸하도록 하였다. 지금은 주교사라는 명칭을 전함사라 하고 제조는 공조판서가 예겸하도록 하였다.
살피건대, 3대 적에 나라를 세운 것은 오로지 천하 한복판에 웅거하였다. 함선을 이용한 곳은 모두 동남쪽 바닷가 나라이고 왕국에 긴절하게 소용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함선 제도는 고공기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배 제도의 넓고 좁게 함과 길고 짧게 함과 뽀족하고 무디게 함과 높고 낮게 하는 데에 따라서 그 속력이 강하기도 약하기도 하여, 운행에 편리하기도 하고 지체되기도 한다. 그런데 제 마음대로 보태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여 만에 하나도 같지 않게 하는 것은 반드시 배 만드는 옳은 방법이 아니다. 나의 형 약전(若銓)이, “내가 섬 사람을 보았는데 그들이 항상 말하기를, 아무개네 배는 능히 빨리 달리는데 아무개네 배는 달리지 못하며, 아무개네 배는 작아도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는데 아무개네 배는 크지만 짐을 많이 싣지 못한다.’고 한다.” 하니, 이것은 천하에 기이한 말이다.
내가 배 만드는 것을 보니, 자[尺]를 쓰지 않고 다만 눈어림으로 하며 재목이 또 고르지 않으므로 재목에 따라서 배 모양이 달라졌다. 혹 바닥은 짧으면서 뱃전은 길고, 혹 바닥은 좁은데 보[梁]는 넓으며, 혹 몸통은 적으면서 키는 길고, 혹 몸통은 큰데 돛대는 짧다. 그리하여 머리와 꼬리가 서로 맞지 않아 배(腹)와 등(背)이 움직임에 따라 서로 당겨져서, 혹 키를 틀어도 뱃머리가 돌려지지 않고 혹 돛을 펼쳐도 뱃머리가 앞서지 않는다. 혹 1척이 우연히 법도에 근사하게 되어서 능히 달리고 능히 무거운 짐을 이겨내면 이에 괴이쩍게 여겨서, “저 배는 저와 같은데 이 배는 어찌해서 이와 같은가?” 하여 탓하기도 하지만, 배는 말(馬)이 아닌데, 어찌 능히 날램과 노둔(魯鈍)함의 구별이 있을 것이며, 건장함과 서투름의 차이가 있으리요. 어찌해서 고공기 한두 편이라도 잠깐이나마 보지 않는가?
지금 고공기를 보니, “바퀴가 높으면 사람이 능히 수레에 오르지 못하고, 바퀴가 낮으면 말이 항상 언덕을 오르는 것 같다.” 했고, 또 “바퀴는 멀리 보아서 고르게 내려앉아 있어야 하고, 가까이 보아서 땅에 조금만 닿아 있어야 한다.” 했고, 또 “곡(轂)을 멀리 보아서는 튀어나온 듯하게 함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빨리 달리도록 하려는 것이다.” 했고, 또 “곡이 작으면서 길면 좁아지고, 크면서 짧으면 견고하지 못하다.”고 했고, 또 “바퀴 높이의 6분의 1을 바퀴 테의 둘레로 하고, 속 바퀴 테를 3등분해서 그 둘을 칠(漆)한다.” 하고, 또 “곡의 길이를 5등분하여 하나만큼 안쪽으로 구멍을 판 것을 현(賢)이라 하고, 셋만큼 판 것을 지(軹)라 한다.” 했고, 또 “곡의 길이를 3등분해서 둘은 안쪽에, 하나는 바깥쪽에 있게 하여 바퀴살을 장치한다.” 했는데, 이와 같이 하는 까닭은 그 수레의 크고 작음에 따른 것이다. 모든 부속품(附屬品)도 이에 비례하고 그 차이에 맞춰 보태기도 줄이기도 하여, 싣는 힘이 세고, 가는 것이 빠르도록 한 것이다. 배 만드는 것인들 어찌 홀로 그렇지 않겠는가?
배 만드는 법은 이용감에서 중국으로부터 배워올 수 없는 것이며, 또 중국에서 배워오도록 의뢰할 수도 없다. 우리나라 연안에 표착하는 중국 배와 왜국(倭國) 배가 해마다 10여 척이나 되고, 유구(琉球)와 여송(品宋 : 루손섬) 배도 또한 가끔 표착하는데, 그 제도와 모양이 기묘하고 견고하여 능히 풍파에 출몰하면서도 파손되거나 침몰되지 않는다. 이 배들이 표착하는 즉시, 이용감 낭관을 보내 분수(分數)에 정숙(精熟)하고 솜씨 있는 공장과 같이 검사하면서 여러 가지 물품과 여러 가지 물체의 길고 짧음과 넓고 좁음과 뾰족하고 뭉툭한 것과 높고 낮음을 모두 상세하게 살펴서 그 치수를 기록한다. 그리고 소용되는 재료 및 유회(油灰)와 걸레로 배의 틈을 메우는 법과 양쪽 날개에 판자를 붙이는 제도는 모두 그 방식과 효과를 물은 다음, 우리 스스로가 모방해 만들어서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게 하면 이것이 중국에 가서 배워온 것과 같다.
이리하여 그 비례로써 크고 작은 여러 배에다 적용하며, 9등으로 분류하여 큰 배에 3등급이 있고, 중간 배에도 3등급이 있으며, 작은 배에도 3등급이 있어 그 길고 짧음과 넓고 좁음과 뾰족하고 무딘 것과 높고 낮은 차등을 모두 비례해서 차례로 줄인다. 중지상(中之上)인 배는 상지상(上之上) 배 치수의 3분의 2 비례로, 하지상(下之上)인 배는 상지상 배 치수의 3분의 1 비례로 하는데, 그밖의 것도 모두 이 비례대로 한다. 모든 공사간에 쓰는 조선(漕船)과 병선(兵船), 상인들의 배는 모두 9등 안에서 한 비례를 쓰도록 한다.
그리고 그 체재가 9등으로 정한 제도에 맞지 않는 것은 본사에서 살펴 잡아다가, 그 배는 파괴해버리고, 그 사람은 죄를 줄 것인바, 이것은 참으로 변할 수 없는 법이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배를 9등으로 한정해놓으면 나무를 베는 자가 그 등급을 요량하고 찍어서 등급에 맞지 않는 재목은 산에서 나가지 않으므로 인력을 덜게 될 것이니 그 이로움이 첫째요, 배를 고치는 자가 다른 배의 재목을 가져다가 바꿔도 부절을 합치는 것과 같을 것이니 그 이로움이 둘째요, 장사들은 실을 화물(貨物)을 요량하고 그것에 알맞은 배에 맡길 것이므로 계산이 본래 정해져 있어 배를 직접 보지 않고도 결정할 수 있으니, 그 이로움이 셋째이다. 평부사(平賦司)에서 선세(船稅)를 징수할 때에 배가 9등으로 구분되어 있은즉, 그 거두는 것이 매우 균등하여 추잡하게 억지로 정하는 허물이 없을 것이니 그 이로움이 넷째이다. 그러므로 가옥과 함선은 9등으로 제한하지 않을 수 없으며 모든 등에 맞지 않는 것은 금단할 것이니 그렇게 한 다음이라야 법제가 이룩된다.
생각건대, 위에서 논한 것은 바다에 다니는 배의 제도요, 강에 쓰는 배와는 그 제도가 같지 않으나 또한 9등으로 구분함이 마땅하다. 큰 강에는 9등의 배를 전부 전용(全用)하고 작은 강에는 중지하인 6등 배를 쓰거나, 또는 하등 배만 이용할 것이다.
살피건대, 우리나라 전선(戰船)은 만력 임진란 이래 수영(水營) 한 곳에 거느린 배가 적어도 200여 척 이하는 되지 않으며 양서(兩西)에는 이보다 조금 적었는데 이것은 곧 비상시[陰雨]에 대비한 것이었다. 그러나 차항(汊港)에 대어놓고, 모래 위에 끌어올려서 전혀 운용하지 않으면서 변고(變故)를 대비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내가 듣기로 모든 물건은 사용하지 않으면 모두 빨리 썩는다고 하는데, 문지도리[戶樞]가 좀먹지 않고, 흐르는 물이 썩지 않는 것은 이런 이치이다. 갑작스런 경보가 있으면 끌어내어서 좌충우돌하며 나는 듯이 출입하고자 하여도 지금 같은 상태로는 그렇게 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 생각에는 여러 수영의 병선제도도 또한 9등으로 구분하고 사선(私船)과 그 제도를 같게 하여 세곡(稅穀)을 조운할 수 있고, 조비(糶米)를 상판(商販)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연해 여러 백성에게 갈라 맡겨서 행상하도록 하되 오직 9등 선 2척씩을 번갈아가며 수영포구(水營浦口)에 계류해두고 1년 동안에 4차례 교대하여 쉬도록 하면 창졸간에 급한 경보가 있더라도 사방 가까운 곳의 배를 소집해서 대오를 편성할 수가 있을 것이다. 혹 변경 경보가 그리 급한 것이 아니면 비록 천리 밖에 있는 배라도 소집할 수 있으니, 때에 맞춰오지 못할 염려는 없다. 무릇 배 임자가 배를 부리는 법은, 남는 이익을 계산하여 배 임자가 10분의 2를 차지하며, 관청 배는 이와 같이 할 수 없고 모름지기 사선보다 싸게 해야 백성이 이에 원할 것이다.
그렇게 하더라도 돌아오는 몫이 또한 적지 않아서 1년 수입으로 배를 보수하는 비용이 족할 것이며, 3년 수입으로는 배를 새로 만드는 비용에도 족할 것이니, 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지금 배를 보수하거나 배를 새로 만드는 비용으로 회계에서 제감(除減)하는 것이 매우 많은데, 아전이 이로 말미암아 간사한 짓을 하고 백성이 공연한 피해를 많이 당하고 있다. 지금 백성에게 배를 이용해서 행상하도록 허가한다면 이미 이런 비용이 생기지 않고 또 빨리 썩지 않으니, 양자 모두에 편리함이 이와 같을 수 없다.
오직 전선(戰船)이라는 것은 제도가 투박하고 커서 운용하기에 불편한데, 혹 이순신(李舜臣)의 남긴 법이 본디 이와 같이 투박한 까닭으로 가벼운 왜선이 부딪치면 부서졌던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지금에 깎아서 약하게 할 수 없다. 진실로 이와 같으면 수영 포구에다 선창(船艙) 하나를 만들고 전선에 소용되는 모든 재목을 깎고 갈아서, 몇째 판자 몇째 조각이라는 것을 낱낱이 표시한 다음, 그 재목과 도구를 선창 안에다 저장해둔다. 또 배 만드는 공장 가운데 수십 명을 항상 수군(水軍)에 예속시켜서 늠료(廩料)를 주고 수용하다가 급한 경보가 있을 경우 즉시 장조(裝造)하도록 한다면 또한 미치지 못할 염려가 없을 것이다. 또 이른바 귀선(龜船)ㆍ학선(鶴船) 따위는 본디 특별한 것이니, 9등 안에 넣을 수 없다. 보통 사용하기에는 또한 불편한 것인즉 항상 수영 앞에 정박하고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달마다 조습(操習)하여 간단이 없도록 한다. 그리고 조습하는 비용은 9등 배의 세수 중에서 가져다 써도 또한 적당할 것이다.
생각건대 병선 제도는 모두 판자 지붕이 있어서 상선으로 쓰기에는 불편하다. 내 생각에는 배 위에 장치된 여러 판자는 모두 자호(字號)를 새기고 그 차례를 적은 다음 모두 못을 박아 선창에 보관해두었다가 외적의 경보가 있으면 내어서 못질하며, 평시에는 오직 조심해서 보관하되, 때에 따라 점고하면 급한 때를 당해 가져다 쓰기에 염려 없을 것이다. 지금 주교사(舟橋司)에 다리 판자도 또한 때에 따라 보관했다가 때에 따라 설치하는데, 병선판자인들 어찌 유독 그렇게 못하겠는가?
생각건대, 주교사 여러 배를 삼남(三南)에 갈라 보내서 조선(漕船)으로 쓰도록 하는데, 이것은 천하의 몹쓸 법이다. 그 선인(船人)들이 세도를 믿고 중요함을 빙자해서 간사함을 꾸미고 나쁜 짓을 자행하여 드디어 백성의 재물을 불법으로 거두어서 한없는 욕심을 채운다. 내가 오랜 세월을 연해에서 살았으므로 이런 폐단을 익히 알았다. 내 생각에는 이제부터 조선(漕船)은 고을 아전에게 제가 직접 새로 만든 좋은 배를 구해 쓰도록 하되, 동지(冬至) 전에 배의 주인과 서로 약정한 다음, 그 형편을 전함사(典艦司)에 보고하기를, “아무 지방 아무개네 배 몇 척을 본 고을 조운선으로 정했기에 본사(本司)의 인준(認準)을 청한다.” 하면, 본사에서는 그대로 허가하고 조운사(漕運司)에 통보하여 각자 판적(版籍)에 기록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무릇 12성에 있는 공사간 여러 배를 전함사에서 모두 판적에 기록하고 장표(掌標)를 갈라준 다음, 1년 동안 등록된 배를 죄다 평부사(平賦司)에 보고하면, 평부사에서는 이것으로써 세를 징수하는데, 숨겼거나 누락되었다가 평부사에 발각된 것이 있으면 그 지방관과 전함사는 모두 죄를 당하는 것이다.
견와서는 지금의 와서(瓦署)이다.
생각건대, 기와와 벽돌을 굽는 방법은 이용감(利用監)에서 북쪽으로 중국에 가서 배우고, 그 방법을 견와서에 반포하여 구워 바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또 본디 그 방법을 12성에 반포하여 각각 공창(工廠)을 건설하고 구워서 민용(民用)으로 보급하여, 그 세를 본서에 바쳐서 공용(公用)에 보충하도록 한다.
번자감은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이다. 분원 봉사(奉事)는 항상 우천강(牛川江)에 있어, 별도 관청이 되었으므로 이번에 분리하였다.
어떤 사람은 국력이 한창 가난한데 무엇으로 관직을 증설하겠느냐고 한다. 그러나 사옹원의 직장(直長) 2자리와 봉사 2자리를 줄여서 이 관서를 만든 것이니 준 것은 있으나 보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생각건대, 이후 이용감에게 유리 만드는 법을 배워올 것 같으면 또한 본감(本監)에서 주관하는 것이 마땅하며 별도 기관을 설치함은 불가하다.
직염국이란 제용감(濟用監)이다. 본디 직염을 주관했는데 근래에는 물들이는 일은 있어도 짜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례》에 전사(典絲)ㆍ전시(典枲)ㆍ염인(染人)이라는 관직이 있고, 모두 하사가 두 사람씩인데 관직을 설치해서 짜는 일도 관장하던 것이 선왕의 제도였다. 하물며 우리나라에서 짠다는 것은 명주와 베에 불과하며 비단, 무늬 비단, 양털로 된 베는 아직 짤 줄을 모르고, 해마다 금은으로 연경(燕京)에서 무역해온다. 이미 공력(工力)을 갖추지 못하면서 또 능히 검소함을 숭상하지 않고 한갓 귀중한 보물만 허비함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신이 듣건대 중국에서 비단을 만드는 데는 고치를 가리는 데 표준이 있고, 고치를 삶는 데에 수효가 있으며, 고치를 켜는 데에 방법이 있다. 켜낸 실이 거듭된 고리 여러 곳을 거치면서 바람에 마르는 까닭에 그 실이 고르면서 도타웁고 깨끗하면서 질기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실 켜는 법은 많은 고치를 서로 섞어서 크기가 서로 같지 않고, 고치를 삶는 데에 수효가 없으니 굵기와 고운 것이 고르지 않다. 실 켜는 데는 방법이 없으니 엉클어진 것을 가리기도 어렵고, 부뚜막에 말리니 처음부터 썩게 되어 있으며, 모래나 돌로 눌러두고, 감고 풀기를 여러번 하므로 인력이 허비되고 물건도 추해지는바, 이것이 모두 가르치지 않은 허물이다.
이용감에서 북쪽의 중국법을 배워서 좋은 방법을 본국(本局)에 알리는 것이 마땅하다. 본국에서는 공인(工人)을 모집하여 직조(織造)해서 내용(內用)에 공상(供上)하며, 그 방법을 여러 도에 반포해서 만백성에게 가르친다. 이렇게 하면 비단과, 무늬 비단을 모두 국내에서 가져다 쓰게 되어, 금은이 산출되는 여러 산에도 구슬픈 빛이 없어질 것이니 이것은 국책(國策) 중에 지극히 중대한 것이다. 다만 염색하는 것뿐이면 공인 한 사람만으로 족할 터인데 어찌 반드시 별도 아문을 세울 것인가?
생각건대, 《주례》에 “실 켜고 물감 들이는 관직은 본디 천관(天官)에 속해 있었다.”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그 직이 제조하는 것이므로 공조에 붙였다.
생각건대, 《주례》에 “막인(幕人)은 처소를 맡은 관직인데, 모두 천관(天官)에 속했다.” 하고 원편에는 병조 소속으로 되어 있으나 이번에는 공조에 붙였다.
생각건대, 《주례》에 “유인(囿人)은 유유(囿游)의 수금(獸禁)을, 장인(場人)은 나라의 포장(圃場)을 관장해서 과실과 외를 심는다.” 하였는데 모두 지관(地官)에 속했다. 그러나 원전에는 장원서가 본디 공조 소속이므로 이번에도 그대로 했다.
살피건대, 예부터 원유가 반드시 대내(大內)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국가에는 오직 내원(內苑)뿐이었다. 근교(近郊)에 시초장(柴草場)이 매우 많으니, 그 중에 땅이 기름진 곳을 택해서 진기한 과목과 기이한 나무를 많이 심고, 낭관(郞官)을 파견해서 감수(監守)하도록 함이 또한 마땅하다.
사연서란 장흥고(長興庫)이다. 무릇 관직에 명칭을 붙이는 법은 그 명칭을 보고 그 직장(職掌)을 알 수 있도록 한 다음이라야 백성의 들음에 의혹이 없게 된다. 장흥고에서 이미 연석(筵席)을 관장했으니 명칭을 사연이라 함이 마땅하다.
생각건대, 또 《주례》에 사연은 본디 춘관에 속해 있었고 원편에는 호조 소속이었다. 이번에는 그 직장이 전설사와 조지서(造紙署)와 근사하므로 아울러 공조에 붙였다.
생각건대, 《주례》에 연석에 등급이 삼엄한데, 우리나라에 상하가 같은 제도인 것은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생각건대, 우리나라 종이를 스스로 천하제일이라 하고 있으나, 실상은 쉽게 찢어지지 않을 뿐이다. 서적을 인출(印出)하거나 글씨를 쓰기에 좋지 못하며 그림을 그리기에도 좋지 못하다. 이용감에서 북쪽으로 중국에 가서 배워오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하여 본서에 알리고, 본서에서는 여러 도에 반포함이 또한 마땅하다. 조지서는 본디부터 공조 소속이다.
살피건대, 원편에 도화서에 전자관(篆子官) 2자리가 있었다. 나의 생각에 전자(篆子)는 화사(畵師)의 기예(技藝)가 아니다. 아울러 사자관(寫字官) 직책으로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제조는 공조 참판이 예겸한다.
생각건대, 《주례》에 회화(繪畵)하는 일이 고공기에 갖추어 보인다. 본디 동관(冬官) 소속임을 알 수 있으므로 이번에 공조에 붙였다(원전에는 예조 소속이다).
[주D-001]환곡(還穀) : 각 고을 사창(社倉)에 저장한 곡식을 봄에 백성에게 꾸어주었다가 가을에 모곡(耗穀)이라는 명목으로 일정한 이식(利息)을 붙여서 거두어들이던 곡식. 환자(還子).
[주D-002]민고(民庫) : 관청의 임시 비용으로 쓰기 위해서 백성으로부터 해마다 곡식과 돈을 거두어서 보관하던 창고.
[주D-003]결미(結米) : 논밭의 조세조로 바치는 쌀.
[주D-004]토호(土豪) : 지방에서 세력을 떨치는 호족(豪族).
[주D-005]어량(魚梁) : 물이 한 곳으로만 흐르도록 만든 다음 그곳에다 통발 따위를 놓아서 고기를 잡는 장소.
[주D-006]백도(白徒) : 원래는 훈련받지 못한 병정을 말하는 것. 여기서는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됨.
[주D-007]구(句)ㆍ고(股)ㆍ현(弦) : 직각 삼각형에서, 구는 직각을 낀 짧은 변, 고는 직각을 낀 긴 변, 현은 직각 삼각형의 사변(斜邊).
[주D-008]관화(官話) : 중국의 표준말. 청대에는 북방 말에 편중하여 북경 말을 표준으로 삼았다.
[주D-009]홍흡(虹吸)ㆍ학음(鶴飮) : 홍흡은 일종의 흡수기(吸水器)로서 사이펀(Siphon), 학음은 홍흡과 유사한 승강 기구인 듯함.
[주D-010]물총[水銃] : 소화기(消火器)의 일종.
[주D-011]녹용(錄用) : 공신 또는 충신의 자손을 기록해두었다가 채용하는 것.
[주D-012]빈천(賓天) : 존귀(尊貴)한 사람의 죽음을 이르는 말.
[주D-013]치첩(雉堞)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제 몸을 숨겨서 적을 공격하는 곳. 성첩(城堞)ㆍ여장(女墻).
[주D-014]용세(龍勢) : 용은 산맥, 산맥이 내려온 형세를 말하는 것.
[주D-015]수법(水法) : 그 터의 좌향(坐向)에 알맞도록 물이 흘러가는 것.
[주D-016]오금(五金)ㆍ팔석(八石) : 오금은 황금(黃金)ㆍ백은(白銀)ㆍ적동(赤銅)ㆍ청연(靑鉛)ㆍ흑철(黑鐵), 팔석은 주사(朱砂)ㆍ웅황(雄黃)ㆍ운모(雲母)ㆍ공청(空靑)ㆍ유황(硫黃)ㆍ융염(戎鹽)ㆍ초석(硝石)ㆍ자황(雌黃).
[주D-017]변면(弁冕) : 관(冠)의 하나. 우두머리가 쓰는 관. 《좌전(左傳)》 소공(昭公) 원년에, “吾與子弁冕端委以治民臨諸侯”라 하였음.
[주D-018]적사(適士) : 상사(上士)와 같음.
[주D-019]우인(虞人) : 옛적에 산림과 천택(川澤)을 관리하던 벼슬아치.
[주D-020]제인(梯人) : 《주례》 고공기(考工記)에 제인은 순(筍)과 거(虡)를 만드는데, 악기(樂器)를 옆으로 달도록 된 것이 순이고, 바로 세우도록 된 것이 거라 하였다. 후세에는 주로 건축 일을 하는 목공을 이름.
[주D-021]부절(符節) : 옛날에 사신이나 외관(外官)이 가지고 나가던 징표. 돌 또는 대나무를 두 쪽으로 갈라서 하나는 조정에 보관하고 하나는 본인이 가졌다가 진가(眞假)를 구별할 일이 있을 때에 두 쪽을 맞추어보았음.
[주D-022]헌원씨(軒轅氏) : 중국 고대 황제의 이름. 헌원이라는 언덕에 살았는데, 그것을 이름으로 하였음.
[주D-023]초헌(軺軒) : 종2품 이상 관원이 타던 수레. 외바퀴가 달렸고 앉는 자리는 의자처럼 꾸며져 있음. 명거(命車) 또는 목마(木馬)라 하기도 함.
[주D-024]평교자(平轎子) : 종1품 이상 및 기로소(耆老所) 당상관이 타던 남여(藍輿)의 별칭.
[주D-025]현륭원(顯隆園) : 조선 21대 영종의 아들 사도세자의 무덤. 그의 아들인 정종이 양주에 있던 무덤을 수원으로 옮겼음.
[주D-026]늠료(廩料) : 녹봉(祿俸)과 같음.
[주D-027]장표(掌標) : 일종의 등록증인 듯함.
[주D-028]연경(燕京) : 중국 북경의 옛 명칭. 춘추 시대 연(燕)나라의 수도였던 데서 나온 말.
[주D-029]내용(內用) : 대궐에서 소용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