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에서 꺼리는 것 중의 하나가 한 首 속에 같은 자를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5언절구 형태의 경우 기껏 20자, 7언절구 형이라 하더라도 28자에 불과하니 경제원칙(?)상 당연하다 여겨집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시에서 같은 자를 중복하여 쓰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시의 풍미를 높이기 위해 일부러 같은 자를 겹쳐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1. 알기 쉬운 글자의 거듭 사용
쉬운 글자가 거듭될 때는 실제로도 해석에 큰 무리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 옛날얘기 하나 붙임으로서 번잡한 설명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고려조 대정치가 김부식(金富軾)은 문장 특히 시에서는 정지상(鄭知常)에게 늘 주늑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느 봄날 그는 문득 시흥이 일어 '柳色千絲錄, 桃花萬點紅' 한련을 얻어 나름 흐믓해 하였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죽은 정지상이 나타나 느닷없이 김부식의 뺨을 후려치며 '네가 버들가지가 천가닥이고, 복사꽃이 만 송이인 걸 세어 봤어?' 하더라나요. 이렇게 따귀 덕분(?)에 탄생하게 된 멋진 구절이,
柳色絲絲錄, 桃花點點紅(유색사사록 도화점점홍)
버들 빛은 가는 가지마다 푸르고, 복사꽃은 점점이 붉구나
이렇게 같은 자를 중복하여 씀으로써 단순히 뜻을 강조하는 의미를 넘어 시적인 묘미를 살리고 풍미를 더해 주기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우선 쉬운 글자가 반복 사용된 한시를 엄선(?)하여 시대 순으로 붙여 보겠습니다.
성당(盛唐)시절 전원시의 양대산맥 왕유(王維, 701~761)의 '장마철 망천장에서 쓰다(積雨輞川莊作)' 중,
漠漠水田飛白鷺(막막수전비백로) 드넓은 논에는 백로들이 날아 들고
陰陰夏木囀黃鸝(음음하목전황리) 짙푸른 여름 나무엔 꾀꼬리가 우네
*이 시는 이가우(李嘉祐)의 시구 水田飛白鷺 夏木囀黃鸝 에 2자씩을 추가했을 뿐이라는 비난도 있으나, 오히려 원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깊은 맛과 풍미를 지기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성당(盛唐) 최호(崔顥, ?~754)의 '황학루(黃鶴樓)' 중 --이 시를 보고 李白이 더 이상 황학루를 읊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함.
白雲千載空悠悠(백운천재공유유) 흰 구름만 천년을 부질없이 유유히 (떠돈다).
晴川歷歷漢陽樹(청천력력한양수) 개인 강물에는 한양의 나무들 또렷하구나
중당(中唐)시절 맹교(盟郊, 751~814)의 '길떠나는 아들의 노래(遊子吟)' 중,
慈母手中線 遊子身上衣(자보수중선 유자신상의) 사랑하는 어머니 수중의 실, 길떠나는 자식의 윗옷
臨行密密縫 意恐遲遲歸(임행밀밀봉 의공지지귀) 떠남에 촘촘히 꿰매는 건, 더디 돌아올까 걱정하는 마음
만당(晩唐)시절 두목(杜牧, 803~852)의 '山行' 중,
淸明時節雨紛紛(청명시절우분분) 청명 시절이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路上行人欲斷魂(노상행인욕단혼) 길가는 나그네 (한잔 생각에) 애가 끊는다
고려 최고 서정시인 정지상(鄭知常, ?~1135)의 '送人' 중,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대동강 물은 언제나 마를꼬
別漏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위에 보태지니
고려 무신정권 시절 대시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여름날 즉흥적으로(夏日卽事)' 중,
簾幕深深樹影廻(염막심심수영회) 주렴장막 깊숙이 나무 그림자 돌아들고
幽人睡熟鼾聲雷(유인수숙한성뢰) 은자는 잠이 깊이 들어 우레 같이 코를 고네
여말선초의 시인 안축(安軸, 1287~1348)의 시 '강릉경포대' 중
煙波白鷗時時過(연파백구시시과) 안개속에 흰 갈매기 때때로 오가고
沙路靑驢緩緩行(사로청려완완행) 모랫길엔 나귀가 느릿느릿 가는구나
조선 세종대 황희(黃喜, 1363~1452)정승의 시 '경포대' 중,
澄澄鏡浦涵新月(징징경포함신월) 맑디맑은 경포호에 초승달이 잠기고
落落寒松鎖碧煙(낙락한송쇄벽연) 낙락송 차가운 가지에 푸른 안개 서렸구나
4육신 중 한분 박팽년(朴彭年, )의 '정부연(政府宴)' 중,
柳綠東風吹細細(유록동풍취세세) 버들은 푸르러 봄바람이 불면 하늘하늘
花明春日正遲遲(화명춘일정지지) 꽃은 밝게 피어 봄날은 참말로 더디고 더디게
조선 화담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낮잠자다 일어나(睡起)' 중
簾影深深轉 荷香續續來(염영심심전 하향속속래) 발 그림자 깊숙이 옮겨가고, 연꽃 향기 속속 다가온다
夢回孤枕上 桐葉雨聲催(몽회고침상 동엽우성최) 꿈은 외로운 베게 위에 맴돌고, 오동잎에 후둑후둑 빗소리
을사사화 때 억울하게 죽은 나식(羅湜, 1498~1546)의 시 '도봉산' 중,
曲曲溪回複 登登路屈盤(곡곡계회복 등등로굴반) 구비구비 시내를 돌아, 꼬불꼬불 비탈길 오르고 또 올라
黃昏方到寺 淸磬落雲端(황혼방도사 청경락운단) 황혼녁에 막 절에 이르니 맑은 풍경소리 구름 가에 들리네
황진이(黃眞伊, 1506? ~ 1567?)의 시 중,
悠悠憶君疑未盡(유유억군의미진) 오랫동안 그대를 생각해도 궁굼한게 한이 없네요
日日念我幾許量(일일념아기허량) 하루하루 내 생각 얼마나 하시는지
조선 중기 대학자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분속의 국화(盆菊)' 중,
貞根期永固(정근기영고) 곧은 뿌리 오랫동안 굳게 남기를 기대하고
歲歲玉欄干(세세옥난간) 해마다 옥난간에 (곱게 피어나라)
임진왜란 시 의병대장이었던 곽재우((郭再祐, 1552~1617)의 시 '비파산으로 물러나(退去琵琶山)' 중,
守靜彈琴心淡淡(수정탄금심담담) 고요함을 지켜 거문고 뜯으니 마음은 맑디말고
杜窓調息意淵淵(두창조식의연연) 창을 닫고 운기조식하니 생각은 깊고 고요하여라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선생의 '부평초(浮萍草)' 중,
百草皆有根 浮萍獨無蔕(백초개유근 부평독무체) 모든 풀에 뿌리가 있건만 부평초 혼자만 없어
汎汎水上行 常爲風所曳(범범수상행 상위풍소예) 두둥실 물에 떠서 언제나 바람에 끌려다닌다네
방랑시인 김삿갓(1807~1863)의 시 '설경' 중
飛來片片三月蝶(비래편편삼월접) 편편이 날릴 때는 3월의 나비같고
踏去聲聲六月蛙(박거성성유월와) 밟아가는 소리마다 6월의 개구리 울음
2. 이해가 잘 안되는 한자의 중복 - 의태어, 의성어
물론 쉬운 한자가 없지는 않으나. 대개 이해하기 어려운 글자를 중복 사용하는 경우 문장 중 의태어(擬態語)나 의성어(擬聲語)로 쓴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성당(盛唐) 최호(崔顥, ?~754)의 '황학루(黃鶴樓)' 중,
晴川歷歷漢陽樹(청천력력한양수) 개인 강물에는 한양의 나무들 또렷하고
芳草萋萋鸚鵡洲(방초처처앵무주) 향긋한 풀이 앵무섬에 무성하구나
성당(盛唐) 때 이백(李白, 701~761)의 '벗을 보내며(送友人)' 중
浮雲遊子意 落日故人情(부운유자의 낙일고인정) 뜬구름은 이 나그네 마음, 석양은 가는 벗의 정
揮手自茲去 蕭蕭班馬鳴(휘수자자거 소소반마명) 손을 흔들며 여기를 떠나는데, 히~잉 얼룩말이 우네
성당(盛唐) 때 두보(杜甫, 712~770)의 '登高' 중,
無邊落木蕭蕭下(무변락목소소하) 가없는 숲에는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고
不盡長江滾滾來(부진장강곤곤래) 다함없는 장강은 도도히 흐른다.
*滾 : 흐를 곤
중당(中唐) 시절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송별시(古原草送別)' 중,
離離原上草 一歲一枯榮(이리원상초 일세일고영) 무성한 들판의 풀, 한해에 한번 시들고 자라나....
又送王孫去 萋萋滿別情(우송왕손거 처처만별정) 왕손 그대를 또 보냄에, 빽빽한 (풀처럼) 석별의 정 가득
*萋 : 우거질 처
고려 한림학자 김극기(金剋己)의 '重農事' 중,
禾麻方郁郁 婦子遠依依(화마방욱욱 부자원의의) 벼와 삼대는 막 향그럽고 아내와 아들 멀리서 가물가물
鋤動田間草 阜螽跳滿衣(서동전간초 부종도만의) 호미로 밭에서 풀 매노라면 메뚜기가 뛰어올라 옷에 가득
고려 말 이곡(李穀, 1298~1351, 이색의 아버지)의 시 '칠석에 한잔(七夕小酌)' 중
笑談欸欸樽如海(소담애애준여해) 웃음소리 시끌시끌 술을 풍성한데 *欸: 한숨쉴 애
簾幕深深雨送秋(염막심심우송추) 주렴 밖 깊은 곳에는 가을을 알리는 비
여말선초 성리학자 권근(權近, 1352-1409)의 '봄날 성남에서 즉흥시(春日城南卽事)' 중,
春風忽已近淸明(춘풍홀이근청명) 봄바람 문득 그치니 청명이 가까워라
細雨霏霏成晩晴(세우비비성만청) 가랑비 부슬부슬 늦게야 날이 개는구나
*霏 : 안개 비
그의 다른 시 '금강산' 중,
雪立亭亭千萬峰(설립정정천만봉) 눈(雪) 위로 우뚝 선 수만 봉우리
海雲開出玉芙蓉(해운개출옥부용) 바다 구름 흩어지자 옥 연꽃처럼 드러나네
조선 성종대의 정치가이며 학자인 유호인(兪好仁, 1445~1494)의 '새재에 올라(登鳥嶺) 중,
凌晨登雪嶺(능신등설령) 새벽임에도 눈덮인 재를 넘노라니
春意正濛濛(춘의정몽몽) 봄 기운이 바야흐로 어렴풋이
*濛 : 가랑비 올 몽
조선 초기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시 '지리산 화개현에서 노니며(遊頭流到花開縣), 중
風蒲獵獵弄輕柔(풍포렵렵롱경유) 바람이 쏴하고 불어 부들을 부드럽게 희롱하고
四月花開麥已秋(사월화개맥이추) 음력 4월 화개현에는 보리가 이미 익었네
황진이의 정인이었던 소세양(蘇世讓, 1486 - 1562)의 시 '북경에서 즉흥적으로(燕京卽事)' 중,
春愁黯黯連空館(춘수암암연공관) 봄 시름은 암울하게 빈 객관으로 이어지고 *黯: 검을 암
歸興翩翩落故山(귀흥편편락고향) 돌아 가고픈 마음은 훨훨 고향 산천으로 가누나 *翩: 빨리 날 편
황진이(黃眞伊, 1506? ~ 1567?)의 시 중,
忙中要顧煩或喜(망주요고번혹희) 바쁠 때 얘기하면 번거로운가요 기쁜가요
喧喧如雀情如常(훤훤여작정여상) 참새처럼 재잘대도 여전히 정다운가요
*喧: 시끄러울 훤
조선 최고의 글쟁이 송강 정철(鄭澈, 1536~1593)의 '가을 밤(秋夜)' 중,
蕭蕭落木聲 錯認爲疎雨(소소낙목성 착인위소우) 우수수 지는 낙엽소리, 성근 비인가 착각하여
呼童出門看 月掛溪南樹(호동출문간 월괘계남수) 아이 불러 나가 보랬더니, 달이 시내 남쪽 나무에 걸렸다네
조선 선조때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시 '촉석루(矗石樓)' 중
長江萬古流滔滔(장강만고류도도) 강물은 만고에 출렁출렁 흐르고
波不渴兮魂不死(파불갈혜혼불사) 파도는 그치지 않고 (진주 3장사) 혼령도 죽지 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