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히 남기고픈 말이 있으나 여건상 일단 유보. 단지 고발은 아닐 것이다. 여성이 만들어지듯 남성이 어찌 만들어지는지, 배제와 혐오가 아니라 남성의 성장과 질곡에 대한 성찰의 자리는 왜 쉽지않고 소외되는지 사람들은 너무도 무심하다. 남성을 정죄하는 것이 페미니즘은 아니다. 늑대이든, 꽃뱀이든 고발하는 것은 시작의 시작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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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 두고 온 너희들이 생각난다.
모두들 분노가 치민다고 한다. 나도 며칠째 잠을 쉬이 이루지 못했다. 처음엔 닥치는대로 청원을 하고 눈이 빠지도록 뉴스를 보고 시시각각 드러나는 사건 내용을 퍼날랐다. 누가 뱃속에 손을 넣어 휘저은 것처럼 속이 뒤집히며 미슥거렸고 관자놀이가 시큰할 만큼 두통이 왔다. 어제부턴 왜인지 온몸의 관절 하나하나가 쑤셔서 통증이 있을 때마다 온신경이 곤두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너희들이 떠오른다. 그때 내가 무얼 더 했어야 했나. 뭘 할 수 있었을까. 찝찝하게 넘겼던 장면들, 툭 던져진 말 한 마디가 오늘 내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처음 젠더교육을 시작했을 때 나는 시범적으로 여학생들을 따로 모아 수업했다.
10대여성들이 성과 몸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길 바랐다. 그런데 교실 밖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너희들은 수업이 끝나고 나오는 나에게 몰려와 소리질렀다.
"왜 여자만 성교육해요? 이건 역차별이야!"
정말 너희의 바람이 이뤄졌는지, 몇 달 후 나는 너희만 따로 모아놓고 수업을 하게 됐다.
너희가 같은 반 여학생들에게 몇 년간 외모품평을 심하게 하며 "그 얼굴로 왜 사냐? 내가 네 얼굴이면 자살하겠다"고 말했다더라.
친구들은 너희의 말에 깊이 상처받았지. 그래서 너희는 '긴급처방'으로 내 수업을 듣게 되었다.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자 너희는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했다.
"체육시간에 여자애들은 그늘에 쉬게 하고 우리만 더운데 땀 흘리면서 축구하라고 해요! 남자들이 역차별 당한다구요!"
너희는 남자라 득 보는 게 하나도 없고 오히려 남자라는 이유로 무거운 책상 나르기, 더러운 쓰레기 치우기만 시킨다며 한참 투덜거렸다.
그런데 다음 주제인 '몸'에서 너희는 할 얘기가 없다고 해 진도가 잘 안나갔다.
'내 몸에서 마음에 안드는 곳을 표시해보라'고 하자 너희는 백지를 냈다.
"저 정도면 괜찮은 것 같은데요? 키 작은 거 빼고? 근데 키는 고등학교 가면 클 거니까~"
나는 여학생들이 표시한 부분을 모아놓은 그림을 보여주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빼곡했고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너희들은 의아해하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 몸에 대해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됐을까? 하는 나의 질문에 너희 중 하나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자존감이 낮으니까 남의 눈만 의식하지. 부모님이 주신 몸인데 소중하게 여겨야지."
나는 의연한 척 했지만 사실 조금 놀랐고, 무서웠고, 슬펐다.
하지만 너희가 계속 그런 식으로 약자를 탓하길 원치 않았기에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
결국 너희는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고 조롱하는 것은 나쁘고 상처를 주는 일'이라는 답을 스스로 만들었다.
너희가 배움을 계속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으면 좋겠다. 나는 아직 너희를 잊지 않았는데, 너희도 그 수업에서 너희가 찾은 답을 기억하면 좋겠다.
너희는 가끔 생각지도 못한 말로 나를 당황시켰다.
친구들 모두 연애 얘기만 할 때 너희 친구 하나는 연애 절대 안하겠다고 선언했지. 내가 이유를 묻자 그 친구는 단호히 말했다.
"여자는 다 꽃뱀이잖아요."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는데 그 친구는 꽤 구체적으로 답했다. '부자인 남자 꼬셔서 등처먹고 사기치는 여자.'
실제로 꽃뱀을 본 적이 있냐, 본 적도 없는데 왜 그렇게 굳게 믿냐, 너는 누군가 등처먹을 만큼 부자이거나 앞으로 부자가 될 예정이냐, 아니라면서 왜 너한테 꽃뱀이 접근할 거라 걱정하냐, 등등 내가 끈덕지게 묻자 너는 결국 "아잇 몰라요!" 하고 가버렸다.
나는 너의 다정다감한 모습과 따뜻한 웃음, 친구들을 잘 챙겨주는 성격을 보았는데 너는 왜 여자를 그렇게 보게 됐을까.
너는 왜 여자를 증오하듯이 말할까. 너는 지금도 여자를 경멸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하고 있을까?
너희는 나를 보며 페미라고 수군거리고 메갈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대뜸 나에게 '갓건배(미러링하는 여성게임유튜버)'를 아느냐며 갓건배를 죽이겠다고 방송한 남성유튜버들의 구독자라고 했다. 그 방송들이 너무 재미있다고 했다.
그 남성유튜버들은 갓건배로 추정되는 여성의 집에 찾아가 갓건배든 아니든 죽여버리겠다고 라이브방송을 하며 후원금을 걷었다. 또 다른 방송에서는 큰 공구들을 집어던지며 갓건배 **년 보지에 다 쑤셔버린다고 욕을 했다.
초등학교 2~3학년으로 보이는 남자아이들도 갓건배에게 욕하며 협박하는 방송을 따라 만들어 올렸다.
초등남아들에 의한 '엄마몰카'가 보도되기 직전 무렵이었던 것 같다.
나는 너희에게 나도 그 방송을 다 봤고, 그건 재밌는 게 아니라 폭력이고 범죄라고 했다. 너희가 느끼는 '재미'가 무엇일까.
나는 너희가 교실에서 '재미'로 하는 '농담'이 가끔 소름끼친다.
성매매여성에 대한 낙인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성매매 관련 기사에 쓰인 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주자 옆의 여학생에게 "저거 너 닮았다"고 낄낄거린 너희들.
생리컵을 보고 "저도 오줌 참을 때 쓰게 하나만 주세요" 하며 낄낄거린 너희들. 수업 활동지에 '여자는 박히고 아파하고 신음한다, 남자는 흥분하고 핥고 싼다'고 쓰며 낄낄거린 너희들.
여교사의 수업 도중 "선생님 저 자위 하고 싶어요!" 라고 함께 외쳤다는 너희들.
무례한 태도는 사춘기의 반항으로, 상대방에 대한 모욕은 청소년기 남자아이의 짓궂음으로, 일상화된 폭력은 남성적 특징으로, 어른들은 너희를 그렇게 해석하고 케어해주었다.
그리고 오늘 문득 생각났다.
수업 내내 책상 위에 발을 올린 채 나에게 메갈년이라고 했던 너, "소라넷은 아직 있어요. 절대 안 없어져"라고 했지.
거기가 어디였을까. 혹시 그곳이었을까. 어제 '내 미래 꿈은 박사가 되는 것'이라며 학교 여자화장실 불법촬영물을 공유했다는 남고생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내가 만난 너희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너희는 누구를 보며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 참고로 위 사례 대부분은 중학교 1~2학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