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한 송이가 흐르는 물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물은 완만하게 보였지만 실상은 속도를 빨리하고 있었다. 갈 길이 멀었으므로 물은 서두르고 있었다. 수천 수만의 물들이 신음 소리를 내며 먼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꽃송이에 묻혔던 피는 이미 물결에 씻겨나가 버리고 꽃은 가벼이 떠서 흘러가고 있었다. 때로는 여울을 지나고, 때로는 돌틈을 흘러내리며, 때로는 강가에 머물기도 하다가 뒤미쳐 달려오고 거센 물결로 출렁이는 맴을 돌며 흘러 내려갔다. 강과 강은 서로 어우러져서 더 넓은 강물이 되었다. 그 강의 한가운데를 꽃 한 송이가 서서히 흘러내렸다. 밤이 내려오더니 어느 틈엔가 날이 밝았다. 먼 길을 달려온 지친 물들은 한밤중에 잠시 눈을 붙이곤 했다. 그런 때면 따라서 들꽃도 함께 잠이 들었다.
살아 있음은 하찮은 꽃 한 송이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별들은 그들이 잠들고 있을 때마다 눈을 뜨고 야경을 서 주었다. 뒤미쳐 달려오는 기세 높은 물결들이 마악 당도할 무렵이면 별들은 바람의 입을 빌어 이렇게 속삭였다.
이젠 그만 일어나야 한다. 떠날 시간이 되었어.
그러면 피로한 눈을 붙이고 곤한 몸을 뉘었던 물들은 지지개를 켜고 다시 떠나곤 했다. 그들이 떠날 때면 꽃 한 송이도 함께 길을 떠났다. 그 어떤 명예와 욕망도 부러진 꽃 한 송이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별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다 헤어지는 물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잘 가거라. 언젠가는 또다시 물이 되어 만나리라.
물은 먼 바다로 나가리라. 그리하여 파도를 이루고 햇살에 타올라 구름이 되어 언젠가는 또다시 우르릉우르릉 비가 되어 대지를 적시리라. 살아 있는 나무의 뿌리를 적시고 그래도 남은 물들은 물들의 이빨을 닦아 주면서 어깨동무를 하고 흘러 내리리라. 그 언젠가는 다시 만나리라......
쬐끔 더 남았는데 스킵하실게요~~.
최인호의 불새. 3권 마지막 두 페이지는 이렇게 읊조리고 있다. 그새 30년이 흘렀구나. 지난 1986~7년도로 기억한다. 미니시리즈로 제작돼 아주 큰 사랑을 받은 것에 고무되어 나는 소설 [불새] 1,2,3권 모두를 샀다. 드라마에 빠져 있었던 아버지와 형 그리고 나 이렇게 3인은 매주 월, 화를 기다려 허기를 채우듯 드라마를 시청하였다. 그런데 왜 지금은 3권만 남았을까. 나머지 두 권은 어디로 사라져버렸을까..... 이 책이 그나마 살아 있는 이유는 이렇게 대미를 장식하는 영후의 마지막 씻김굿 때문이다. 2005년 정도에는 동어반복이 많다고 생각했던 건지 저자는 2권으로 압축하여 세상에 다시 내놓았다. 유달리 난 현주가 쏜 총에 맞아 죽은 영후의 처연하고 쓸쓸한 방백이 좋다.
영후란 인간은 부자 친구를 괴롭혀 죽인 뒤 그 애인을 뺏으며 신분상승을 꾀하는 악이 본령인 인간이다. 이쯤 되면 드라마와 영화 불새의 모티프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불새의 모티프는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능 있는 리플리 씨]다.
프랑스 노 대가 르네 클레망이 나 죽지 않았소, 하며 뒷심을 발휘한 작품이 신예 알랭들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인 거고. 그 영화를 보고 감동한 것이 또 최인호고. 최인호는 르네 클레망의 [태앙은 가득히]에 매료되어 주말마다 재개봉관을 드나들며 수십 번도 더 봤다 한다.
나는 [불새]의 영후와 [태양은 가득히]의 리플리를 좀은 다르게 본다. 원작과는 달리 불새의 주인공 영후는 신분 상승만이 인생의 목적인 인간은 아니다. 잘 생겨 먹은 어딘가 모자란 듯한 영후란 인간은 알랭들롱보다 훨씬 본능에 충직하고 처절한 인간이다. 그리고 고독하고 센티하고 하드보일드한 지점이 여성들을 본능케 한다.
이후 불새는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이정재, 손창민 주연의 영화로도 둔갑되었다. 다시 10여 년이 흐르고 조재현, 송윤아, 차인표가 주연한 드라마가 또 만들어졌다. 이서진, 이은주의 [불새]는 일 없어요~~그거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수많은 불새가 있다. 수많은 리플리씨들이 산다. 자의든 타의든 비슷한 포맷으로 만들어진 영화나 드라마가 아주 많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