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목사(1902-2000)
한경직(韓景職, 1903년 1월 27일(1902년 음력 12월 29일) - 2000년 4월 19일)은 해방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한국기독공보사 사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한 목회자이다. 그는 청빈하고 겸손하여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로 말한다.김명혁 목사, “한경직 목사의 위대함은 약함" 하지만 1992년 6월 18일 신사참배와 친일을 고백했다. (일본의 뜻에 따라) 신사참배를 하고, 구약 폐기 운동에 참여했으며, 군사정권에 반공 이데올로기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목회자로 평안남도 평원 공덕면 간리 마을에서 한도풍(韓道豊)과 청주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호는 추양(秋陽)이다. 영락교회를 창립하였다.
생애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출신이다. 어린 시절 기독교에 입문하여 선교사가 세운 진광소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기독교 계열 학교인 정주의 오산학교에 진학하여 10회로 졸업하고, 1919년 평양 영성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22년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이과에 입학하고, 숭실전문학교를 나온 그는 1926년 미국으로 유학하였다. 캔자스주의 장로교 계열 학교인 엠포리아 대학교를 거쳐, 1929년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대학원을 나왔다.
결핵으로 투병생활하다가 1932년 귀국하여 평양 숭인상업학교 교목 겸 교사로 활동하고, 평양 숭실대학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1933년 신의주에서 신의주 제2교회 전도사로 부임하고, 의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 생활을 하였다.
1939년 5월 보린원을 설립하고 그 운영을 1942년부터 1945년까지 하였으며, 태평양 전쟁으로 기독교가 탄압받으면서 교회 문을 닫아야 했다. 태평양 전쟁이 종전된 뒤에는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한병직, 윤하영 목사와 함께 신의주자치회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하였으나 신의주 지역에 소군정이 실시되면서 공산당 탄압으로 삼팔선 이남 지역으로 월남하였다.
월남하여 일본 천리교 경성교구본부 터를 매입하여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하였다. 1946년 베다니전도교회를 영락교회로 개명하고, 1947년 한국에서 최초로 2부제 예배를 실시하고, 일본 가마쿠라 고아원을 인수하여 영락보린원을 창설하고, 대광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49년 영락교회 석조 예배당을 신축하고, 1950년 보성여자중고등학교를 재건하고, 기독교아동복지회(CCF) 이사장을 지냈다.
이후 대한민국 장로교계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월남민 출신의 반공주의 목사로도 알려졌다.
이시기에 서북청년회 조직의 창립에 관여하였고, 서북청년회는 여성, 유아를 포함한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한국 전쟁중인 1950년, 대전에서 기독교구국회를 출범하여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53년 영락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고, 홀트양자회(현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에 추대되고, 세계선명회(현 월드비전)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1954년 영락모자원을 설립하고, 모교이자 평양에 있던 숭실대학을 재건하여 1954년부터 1958년까지 제6대 숭실대학 학장을 지냈다. 1958년 학교법인 영락학원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을 지내고, 1962년 서울여자대학 2대 이사장을 역임하고, 1967년에 숭실대학교 이사장에 올랐다.
195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1955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 문제를 놓고 박형룡의 예장합동과 한경직의 예장통합으로 갈라섰다.
1969년 영락여자신학교 설립하고, 197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하고, 1971년 장로회신학대학 4대 이사장을 추대되었다.
1973년 영락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고, 한국교회진흥원 설립하여 원장을 하고, 군복음화운동후원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그리고 아세아연합신학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74년 예장통합 서울노회 공로목사에 추대되고, 1976년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하고, 한국외항선교회 명예회장을 역임하였다.
1977년 숭실대학교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 협의회 총재에 추대되고, 1984년 (재)남강문화재단 이사장 및 고려청자헌납위원회 고문에 위촉되었다.
1985년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모교를 빛낸 영예의 동문상'을 수상하고, 1988년 군복음화운동후원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CCK) 준비위원회 대표회장을 역임하고, 세계선명회(현 월드비전) 명예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90년 사랑의쌀나누기운동 명예회장을 역임하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명예회장을 거쳐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역임하였다.
1992년 4월 29일 "노벨 종교상"으로 일컬어지는 템플턴상을 수상하였다.
1992년 6월 18일 열린 시상식 감사예배에서 그는 “일제 때 신사참배를 했는데 그 죄를 제대로 참회하지 않았다”면서 “일생의 짐이었는데 우상숭배의 죄를 이제야 참회한다”며 눈물을 흘렸다.
1997년 (사)한국군복음화운동 명예회장을 역임하고, 1998년 대한민국 건국공로장을 수훈받았다.
2000년 4월 19일 영락여자신학원 내 주택에서 향년 98세로 소천하여 이해 4월 24일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 장(葬)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한경직 목사가 남긴 재산은 말년에 타고 다녔던 휠체어와 지팡이, 겨울 털모자, 입던 옷가지, 생필품이 전부였다고 한다.
신사참배 고백
"저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앞에서 죄인이며 신사참배도 한 사람입니다" 1992년 당시 영락교회 원로 목사이던 한경직 목사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 수상 축하자리에서 이처럼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한 목사의 친일 고백은 교계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충격을 주면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지만 한국교회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북한 점령 소련군 만행 폭로
그와 윤하영 목사가 작성한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26일 소련군이 점령한 평안북도 일대의 정황을 미국에 알리고 도움을 요청한 영문(英文) 비밀청원서가 2017년 8월 발견됐다.[2] 당시 미군정 정치고문이었던 베닝호프(Merrell H. Benninghoff)에게 신의주 지역에서 소련군이 벌이는 공산주의 정치활동에 대해 알리고 도움을 요청한 내용이 적혔다. 베닝호프는 이를 미 국무부로 보내며 “38도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의 정치 활동에 관한 최초의 믿을 만한 목격자 증언”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상상을 넘어선다”며 소련군의 만행을 자세히 기술했다. “신의주에서 소련군은 (은행에서) 120만엔을 탈취했다. 가정집에 침입해 시계부터 여성복까지 귀중품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사례는 셀 수조차 없이 많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은 38선을 넘으면서 소련군에게 약탈과 강간을 당한다”고 폭로했다.[3][4]
서북청년회 조직 관여
서북청년회 조직의 창립에 관여하였고, 서북청년회는 여성, 유아를 포함한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규장문화사, 1982.)
사후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문화, 종교, 언론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