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한국통감관저 터 (現 기억의 터)
'경술국치조약’이 체결된 장소와 관련하여, 이완용이 ‘통감관저’
로 조약문을 가져가 도장을 찍었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었으나 장소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었다. 그러던 2005년 7월, ‘통감관저’ 위치에 대한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
조선시대 이곳은 철종 시기 문신이었던 박영원(朴永元)이 지은 녹천정(綠泉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그러다가 1884년 갑신정 변으로 일본공사관이 불타자 정자를 허물고 ‘일본공사관’ 건물을 지었다. 그 후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함에 따라 이곳은 ‘통감부 청사’로 사용되었으며, 1907년 새로운 청사를 건립하자 ‘통감
관저’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1910년 8월, 이 건물 2층에서 ‘경술국치조약’이 체결되고 우리나라는 국권을 상실하게 된다.
경술국치 이후 한국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바뀌면서, 이곳 역시 통감관저에서 ‘총독관저’로 용도가 변경되고 이 기간 동안 데라우
치 초대 총독부터 7대 미나미 총독까지 이곳에서 거처하며, 식민 통치자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1939년 총독관저가 이전한 후, 경술국치조약을 기념하고 역대 통감과 총독의 유물을 전시하는 ‘시정기념관’으로 사용되었다.
광복 이후 1946년 국립민족박물관, 1953년 국립박물관 남산
분관, 1954년 연합참모본부 청사 등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시기, 건물 주변에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
청사를 세우며 통감관저로 사용되었던 건물에 대한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고 철거해버렸다.
그러던 중 2005년 7월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 이순우 소장에 의해 이 장소가 알려지게 되었고, 2010년 8월 29일, ‘민족문제
연구소’는 경술국치 100년을 맞이하여 경술국치의 현장이었음을 알려주는 표석을 세웠다. 글씨는 신영복 선생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