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시기 소주(蘇州)지역 최신 유행(the newest style)은 양명학과 상관없습니다.
2020년 9월 3일
양명학은 강남지역 경제발전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대답은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고 서로 상관이 없습니다.
이 문제와 대답은 양명학 연구자가 잘 알고 있는 전제입니다.
양명학과 강남지역 경제발전의 상호관계는
막스 베버가 말하였듯이 청교도 정신이 자본주의 정신을 낳은 것도 아닙니다.
마르크스가 말하였듯이 경제발전이 사상과 철학을 낳은 것도 아닙니다.
양명학이 1520년대에 국가의 금학 조치를 받은 뒤부터 사실상 퇴출되었고 1550-60년대부터 새로 일어난 불교 중흥운동은 강남지역 경제발전에 영향을 주었을까?
대답은 양명학과 같고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고 경제발전을 이끌지도 않았습니다.
명청시기 강남지역 상품경제 발전을 주도한 사람들은 상인과 수공업자이며 수공업자의 기술 개발 및 혁신과 상인의 자본 투입 및 전국시장 네트워크 개척과 브랜드 유지 넷이 중요하였습니다. 물론 중앙정부의 조세정책과 부역정책 그리고 지방정부의 도시 시설 확충과 치안유지 등도 중요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럽의 자본주의 발전과 다른 것은 명나라 말기 지식인들이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산업에 연결하지 않고 전원생활을 꿈꾸고 시서화 또는 골동품 등 문인 생활에 치중하였습니다.
이런 눈으로 보면 명나라 중후기부터 아편전쟁까지 300년간 전국의 소비생활과 문화예술 행위의 유행을 주도한 강남지역의 소주(蘇州) 스타일은 양명학이나 불교 부흥운동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상품경제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다만 양명 후학을 비롯하여 불교 부흥을 주장한 스님과 거사들은 사회복지를 강조하였을 뿐입니다. 고아를 모아 길러주거나, 독거 노인을 돌봐주거나, 무연고 사망자를 장례 치러주거나, 교량을 놓거나, 학교(義學)을 세우는 등 사회복지와 도시 생활 개선에 돈을 냈습니다.
물론 양명학과 불교는 개개인들에게 심성에 관한 지식을 알려주고 삶의 가치를 향상하는 방법을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명청시기에 인문학이나 종교가 경제발전과 국가안보에는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현재 우리가 양명학을 연구하는 목적은 중국 유학 또는 성리학을 연구하여 공자와 맹자 또는 주자 또는 왕양명을 계승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명청시기 강남지역의 시장경제와 상품경제가 발전한 원인과 환경을 연구하는 것은 사회과학에 속합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이런 점에서 서로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한국의 현대사회에서는 명청시기 강남지역의 경제발전이 건륭 연간에 이르러 왜 정체되었고 왜 과학기술을 도입하지 못하였는지 반면교사의 대상으로 삼아 연구하고 현대 중국 강남지역과 광동지역의 시장경제 발전 시간을 명청시기까지 소급하여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현재 중국이 과거에 어떻게 발전해왔고 앞으로 어떻게 발전하여야 하는지를 가늠하기 위하여 명청시기 강남지역을 연구하는 것뿐입니다.
조선 영조 정조 시기의 실학이 어떻다 저떻다는 관점에서 중국 명청시기 강남지역 경제발전을 동경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간은 흘러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현재 한국 연구자들은 조선후기 실학 관점을 버려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한국은 중국의 전통적 발전방식 곧 소농경제와 가내수공업을 결합한 경제발전방식을 버리고 벗어난지 한참되었습니다. 명나라 멸망 이후 조선 후기의 소중화 사상도 벌써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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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에 대만대학 역사학과 석사과정을 공부할 때 명청시기 경제사와 송대 경제사 수업에서 자주 들었고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적어봅니다. 지나간 이야기이지만 중국 경제사에서 전통적 소농경제와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1950-60년대 한국 농촌 실정을 떠올리면서 글을 보시면 쉽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중국 공산주의는 서양 공장노동자의 공산주의를 배웠으나 중국의 실제상황은 소농경제의 농민을 가내수공업에 가두는 전통적 생산방식이었고 개혁개방 이후에야 외국기술과 자본을 투입하여 대량생산방식으로 바꾸었습니다.
등소평을 비롯한 실용주의 지도부가 개혁개방 실행에 앞서 오랫동안 생각하고 고심하였던 중요한 경제적 돌파(economic breakthrough)는 전통적인 소농경제를 파괴하고 새로운 시장경제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시장경제를 만들어 기술혁신과 가격 인하가 일어나야만 중국 인민들이 밥 굶고 헐벗은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옛날 이야기이지만 1970년대 중국 시골에서는 나이 찬 여자애가 입을 옷이 없어서 거의 헐벗고 살았고 누가 낡은 옷을 입고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와야만 그 옷을 입고 밖에 나갔다고 합니다.
이런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소농경제를 부수는 길밖에는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5원짜리 신발을 만드는 경우에 소농경제에서는 농민 가정이 유휴 노동력을 이용하여 차비를 아끼려고 하루 종일 시장까지 걸어가서 4-5원어치 재료를 사다가 집에서 신발을 천천히 꼼꼼하게 만들고 혹시 남은 1원은 시장에서 이것저것 구경하며 먹거리를 사먹고 조금 소비하거나 대부분을 아낍니다. 이것은 중국 사람들이 악착같이 은화를 저축하였던 경제적 동기이었습니다. 따라서 시장에서는 주로 재료를 팔고 소비재를 팔기 어려웠습니다. 이렇게 고착되고 굳어버린 소농경제 상황에서는 시장경제를 세울 수 없습니다. 이렇게 강직된 소비 상황을 깨뜨리는 방법은 시장에서 5원짜리 품질의 신발을 3원 이하로 파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농민이 직접 신발을 만드는 것보다는 시장에서 사는 것이 2원 이익되기에 신발을 직접 만들지 않고 시장에 가서 구입합니다. 5원짜리 품질의 신발을 3원에 만들려면 새로운 기술과 설비를 도입하여 대량생산하고 원가를 내리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국의 대량생산 기술과 자본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중국 경제사에서 춘추전국시기 변법을 실행한 이래로 소농경제가 발전해오다가 대략 북송시기 900년 후반부터 정체되었습니다. 1백10년 전에 내등호남(內藤湖南, 1866-1934)은 일본 경도대학의 1907년 설립된 사학과에 취직하고 1909년에 중국 근대사는 언제부터 시작할까 문제를 제기하고 송대 이후라고 대답하였고 1922년『歷史と地理』 제9권 제5호에「개괄적 당송시대관(唐宋時代觀)」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일본의 일부 중국사 연구자들이 당송변혁기를 거쳐 송대부터 근대사회를 지향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현재는 긍정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소농경제의 정체는 원나라를 거쳐 명청시기에 인구가 늘고 영토가 확장되어 시장규모가 늘었으나 소농경제는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시장 규모 확대 관점에서 보면 중국 역대 왕조가 왜 영토 야욕을 가졌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소위 땅이 넓고 물품이 많다는 지광물박(地廣物博)이라는 경제규모 확대입니다.
다만 명나라 중기부터 관청 공방에 예속되었던 수공업자에게 윤번제를 실시하고 직접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신에 은을 납부하는 방법을 실행하여 수공업자 노동력을 시장에 방출하였고 방출된 수공업자들은 살기 위하여 상품을 생산하여 시장에 내놓아 상품경제 또는 시장경제가 조금 낫게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명나라 후기 오강현 비단 방직업은 이런 소농경제 상황에서 나온 상품경제이며 실제로 시장경제는 과거보다 조금 규모가 나아졌을 뿐이며 마찬가지이었습니다. 따라서 명말청초의 시장경제 또는 상품경제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은 안됩니다.
사실상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은 북송시기 이래의 1천년간 소농경제체제를 허물어뜨리는 대담하고 혁신적인 경제정책이었습니다.
앞으로 중국은 등소평이 바랐던 대로 밥 굶지 않고 헐벗지 않는 소위 가급인족(家給人足)의 소강(小康) 경제수준을 넘어 고도산업사회로 진입하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중산층을 양성하려면 과학기술이라는 경제발전의 수단뿐만 아니라 한국의 민주사회와 시민사회를 연구해야 할 때입니다. 이런 문제는 한국이 중국에 협조할 수 있는 큰 사회적 자산입니다. 미래 중국은 인류발전을 위하여 경제력과 지식활동을 투자하는 것이 좋고 괜히 미국과 패권 다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패권을 다투는 것은 중국 지식인들이 아직 미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우리 한국사람들은 자만할 필요도 없고 현재 중국을 무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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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실행할 때 많이 망설였고, 사실상 모택동과 유소기 시절부터 발전노선에 관하여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런데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결정하는 데 가능성을 엿보았던 것은 명청시기 강남지역의 경제발전이라고 합니다. 소위 자본주의 맹아라는 것입니다.
명청시기 강남지역에서는 상인들의 조합 비슷한 조직도 있고 업종마다 연합회 같은 것도 있고 지방정부의 감독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급적 건전한 시장경제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기술을 훔치고 짝퉁을 만드는 것도 있었지만 당연히 자율적인 제재를 받았고 심지어 종교적인 저주까지 받았습니다. 이것이 명청시기 건전한 시장경제 유지의 사례입니다. 그런데 명청시기에 한족 상인과 무뢰배가 이민족들이 사는 변경지역에 가서는 노략질에 가까운 약탈 경제를 일삼아서 노동력과 여자들을 매매하고 자연자원을 싼값에 약탈하다시피 하였습니다.
명나라 중후기부터 청나라 말기까지 강남지역의 경제발전은 동아시아 경제발전의 선두이었습니다. 청나라 건륭 연간 성세(盛世)도 사실상 강남지역 경제발전의 힘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강남지역의 경제발전은 중국 전통시기 경제발전의 모델이며 특히 소주(蘇州) 지역이 주도하였습니다. 소주(蘇州)는 강소성(江蘇省) 지역을 대표하는 지방 대도시이었습니다. 소주부(蘇州府)에서도 오강현(烏江縣)과 진택현(震澤縣, 오강현에서 분리)은 강남 발전의 모델이라고 평가받아왔습니다.
강남지역은 명나라 말기 행정구역에서 8개 부(府)와 1개 주(州)를 말하며 강소성과 절강성 지역 안에 있습니다. 대체로 운하 노선과 태호(太湖) 주변지역입니다. 8부1주(八府一州)는 소주부(蘇州府), 송강부(松江府), 상주부(常州府), 진강부(鎮江府), 항주부(杭州府), 가흥부(嘉興府), 호주부(湖州府) 7개 부(府)에 남경지역 강녕부(江寧府)와 소주부에서 분리된 태창주(太倉州)입니다. 명나라 행정구역에서 보면 8부 1주 가운데 소주부, 송강부, 상주부, 진강부, 태창주는 강소성에 속하고 가흥부, 호주부, 항주부 셋은 절강성에 속하고 강녕부는 남경에 속합니다. 따라서 강남지역에서 대도시 셋이 있는데 먼저 남경이 있고 강소성을 대표하는 도시 소주와 절강성 대표도시 항주가 있습니다. 그런데 명나라 말기에는 경제력과 문화적 영향력에서 항주가 소주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현재 중국의 많은 연구자는 강소성과 절강성이 하나의 일체화된 지역이라고 강조하며 옛날부터 언어와 습속이 서로 비슷하다고 여기고 있으나 실제로는 서로 다투거나 경쟁하여왔습니다. 춘추시기에는 강소성은 오(吳)나라, 절강성은 월(越)나라이었고 삼국시기에도 서로 적대 국가가 되어 싸웠습니다. 근현대시기에도 서로 경쟁하였습니다.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양명학은 왕양명이 절강성 소흥부 여요현에서 태어났고 왕양명 아버지가 소흥부로 이사하고 왕양명도 50살에 귀향한 뒤에는 줄곧 소흥부에서 살았습니다. 양명학이 절강성 일부 지역에서는 전파되었으나 강소성 지역에서는 전파가 넓지 않고 왕간(王艮)이 찾아와서 배웠다가 독립하였습니다. 왕간은 강소성 양주부(揚州府) 태주현(泰州縣) 안풍장(安豐場) 출신입니다.
명나라 말기 1604년에 강소성 상주부(常州府) 무석(無錫) 출신 고헌성(顧憲成, 1550-1612)과 몇 사람이 주동하여 동림서원(東林書院)을 수리하고 정치여론을 형성하였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양명학을 비판하고 배척하였습니다.
원나라 말기에 강소성과 절강성 지역은 장사성(張士誠, 1321-1367)이 장악한 지역이었는데 명나라 정권을 세운 주원장(1328-1398)에 패하여 명나라 판도에 귀속되었습니다. 야사 소문에는 주원장이 장사성을 미워하여 장사성이 장악하였던 지역에 세금을 무겁게 매겼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원나라 시기에도 지역이 부유하여 세금이 무거웠습니다.




강남지역의 주요 산업은 비단 방직(絲綢業)과 면화 방직입니다. 널리 보급되어 적은 자본을 투입하여 소득을 올린 것은 면방직입니다. 청나라 말기 상해현(上海縣)에서는 심지어 경작지의 70% 넘게 면화를 재배하였습니다. 그런데 고급 산업으로서 자본과 기술을 많이 투입하여 이익률이 높았던 산업은 비단 실과 직물을 짜는 비단 방직이었습니다. 비난 방직업이 크게 발달한 지역은 소주부이었고 소주부에서도 오강현(烏江縣)이었습니다.
비단 실을 짜서 옷감을 만드는 산업은 송원시기에는 소주에서만 유행하였고 명나라 홍희와 선덕 연간(1425-1435)에 와서 오강현 현성(縣城)에 거주자들이 비단 실을 짰고 부족한 기술은 소주 기술자를 고용하여 배웠습니다. 성화와 홍치 연간(1465-1505)에는 오강현의 향촌 사람들도 비단 실 짜는 기술을 배워서 정교해졌으며 이렇게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노동자들을 고용하였고 또한 어린아이들까지도 사주업에 종사하였습니다. 옛날에도 비단 방직이 돈을 벌 수 있지만 자본이 있더라도 기술 이전은 쉽지 않았습니다.
면화 꽃을 따는 일은 예전에는 젊은 여자들이 맡았으나 이들은 비단 방직으로 옮겨가서 어린아이들이 면화 꽃 따는 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공장 안에서 일하는 젊은 여자들은 햇볕에 그을리지 않아 피부색이 하얗고 이렇게 하얀 피부색 유행이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강남지역의 면화 방직과 비단 방직 산업이 발전하면서 상품경제가 발전하고 전문적인 시장이 생기고 농민이 도시 이주가 진행되어 도시화가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곡물업, 철공업, 유흥업 등도 덩달아 일어났습니다.
명나라 홍무 연간(1368-1398)부터 소주부 오강현 인구는 대략 26-27만명 정도이며 성화 연간(1465-1487)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여 청나라 건륭 연간 오강현과 진택현의 인구는 대략 695,000명입니다. 급속하게 증가하였습니다. 물론 유동인구까지 포함하면 훨씬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명청시기 오강현의 발전 추세를 보면 비단 실 가격과 직물 가격에 달려있었습니다. 비단 실 가격이 싸고 비단 옷감이 비싸면 방직업의 수익률이 높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을 고용하여 비단 방직업을 확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차 수익률이 떨어져서 건륭 연간에는 비단 직물 가격이 명나라 가정 연간보다 30% 상승하여 노동자들의 생활이 곤란하였다고 합니다. 비단 방직업 하나만 보더라도 이때부터 경제발전은 정체되고 도시화 역시 멈추었습니다.
첫댓글 너무 많이 고쳐서 뭐가 뭔지 알기 어렵네요. 말이 많아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