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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과의 관계 내려놓음의 시험.
내려놓음.. 더 내려 놓음.. 다시 내려놓음.. 아주 내려놓음..
이러한 제목들이 만들어진 것은 처음에 내려놓은 줄 알았는데 지나보니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어서 다시 새로운 제목이 나왔을 것이다. 아니면 내려놓았다가 필요에 의해 다시 잡았던지,
내려놓은 줄 알았는데 여전히 붙잡고 있던지, 살다 보니 버릇이 되어 무의식 속에 다시 움켜
쥐고 있든지 어떤 이유이든지 한마디로 내려놓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래서 모든 것은 끝까지 가보아야 안다고 하는 말이 진리인 것 같다.
주님께서도 마지막 때에 너희 가운데서 믿음을 보겠느냐?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된다. 라고 하셨나 보다.
바울도 너희가 믿음이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여 확증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내려놓음을 시험해 보라. 움켜쥐고 있는 것이 언제 것인지?
내려놓지 못하고 집착하는 것은 무엇인지? 뿌리가 깊고 넓게 퍼져서 뽑아지지 않는 것이 있는지.
주님은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언제나 내려놓음을 시험하신다.
대부분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 내려놓고 시작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네가 부름을 받은 그 땅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라고 명하셨다.
신을 벗지 않으면 거룩한 땅을 밟을 수가 없다.
그리고 부름받은 자가 가야 할 곳, 밟아야 할 땅은 항상 회복해야 할 거룩한
땅이기 때문에 발에서 신을 벗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려놓음을 시험하신다. 그런데 문제는 이 내려놓음이 정말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태풍이 오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끄떡도 하지 않는 든든하게 박혀있는 견고함이 참으로 요지부동하다.
그러나 때를 놓치고 미루며 또 고집하면 결국 그 나무는 송두리째 밑둥이 잘려지고 그루터기만 남게 될 수도 있다.
아니면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뿌리채 뽑혀서 있던 자리를 이동하여 어느 구석에 던져질른지 모른다.
또는 혹독한 세파에 시달리며 지나가는 도적 떼들에게 가지마저 꺾여져서
앙상한 모양만 남아 볼품없게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중심을 보기 원하신다.
이미 알고 계시지만 강제로 내려놓게 하지 않으시고 자발적으로 하는 것을 좋아하신다.
다시 말해 스스로 내려놓고, 자발적인 가난한 자로, 빈 항아리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나오는 것을 바라신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빈손에 선물을 들려주시고, 가난한
심령을 부요 하게 해주시고 빈 항아리에 가득 채워주시기 원하신다.
그래서 가끔 시험하시는 것이다. 내가 진정 내려놓았나를 알도록 하신다.
권리를 포기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을 보기 원하신다.
그런데 내려놓았다는 이들도 막상 시험이 오면 본색이 드러난다.
가득 찬 속사람의 실체를 보이는 것이다. 내려놓기를 힘들어한다.
빈손 되는 것이 어렵다고 투덜거린다. 섭섭해하고 불만이 크다.
내가 왜 포기? 어떻게? 왜? 하필이면 지금? 밑바닥이 드러난다.
내려놓음, 권리포기가 그렇게 간단하게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처음과 마지막 결말을 보아야만 확인이 되는 것이라 그렇다.
많은 경우 자기도 속고 남도 속이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기적으로 때로는 무시로 기회를 주시고 시험하신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경험을 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100% 장담하다가 점점 그렇지 못한 자신을 알게 된다.
어떤 결정적 순간에 직면하면 1%도 해결되지 않은 것을 알게 된다.
사실은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은 한 가닥 남겨진 1%의 끈이기 때문에
99% 다 되었다고 생각한 자신에게 감쪽같이 속는 것이다
지금 당장 정직하게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는 정말 내려놓았나?
무엇을 내려놓았나? 내가 지금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얼마나 무엇을 이루었든지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그것을 멈출 수 있겠는가?
바다에 네 식물을 던져라. 말씀하셨는데 던질 수 있겠는가?
지금 들고 있는 것, 남은 것을 던져라. 하시면 던질 수 있겠는가?
숨을 멈춘 사람도 마지막에 움켜쥔 손을 펴줘야 하는데. 아직 힘이 넘치고
세상을 다 가져도 시원치 않은 그 강한 손에 붙잡고 있는 것을 던지라고
하시면 할 수가 있나? 글쎄??? 양손이 서로 주고받으며 눈속임 할른지 모른다.
나는 이 내려놓음에 대한 씨름을 정말 치열하게 해 보았다.
일생일대에 나의 모든 인생을 걸고 싸우는 씨름이었고 경기였다.
처음부터 나는 순전한 한마음으로 아버지 앞에서 축제가 되기를 기대하며
큰 프로젝트(교회와 유치원- 실버타운)를 진행하였다.
그동안 참으로 힘에 겨운 세월을 지내면서 충분히 연단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는 모든 것이 순조로이 진행될 것이라고 여기며 기대하였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를 기원하면서 부푼 꿈을 품고 출발하였다.
시작은 잘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출발하자마자 막히고 꼬이기 시작하더니 길이 막히고 문이 닫혔다.
결국 PDTS에 입문하였고 큰 은혜를 받고 난 후에 내려놓음을 적용하게 되었다.
새로운 비젼과 목적을 가지고 시작했던 경기라서 씨름이 아니라 축제로 진행
되기를 바라며 기대가 충만했다. 믿음의 가족들은 그 먼 거리(60키로)에서
대중교통으로 몇 차례씩 갈아타면서 두 시간 이상을 예배와 기도회를 위해서 달려왔다.
아버지와 목자인 나를 기대하고 신뢰하면서 몸과 마음으로 수고하였다.
그러나 갈수록 일은 꼬이고 지연되어 풀리지 않았다.
설상가상 임시 예배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이 경매가 진행되고 있었다.
계획한 개발 공사가 마쳐질 때까지 사용할 예배당 이전을 위해 다른 건물을
찾아보고 있을 때 PDTS를 섬기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당시에 진행되는 상황이 나를 갈등하게 했다.
DTS에서 배운 대로 주님께 묻고 음성을 듣기 위해 집중하였다.
새벽 기도시간 내면에서 종아 목회를 내려놓을 수 없겠니?
이 소리가 분명한 주님의 질문인지 다시 확인하지 않고 선뜻 새로운 부르심이 있는
것으로 여기며 일단 6개월 PDTS 간사를 하기로 위탁하였다. 그리고 예배 장소를
구하지 못하여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하고 계획한 새로운 일을 진행하면서
당분간 목회를 내려놓고 목회자 DTS를 섬기면서 준비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계획했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다양한 상황이 점점 더 어려움으로
바뀌어 씨름이 되고 영적 전쟁이 되고 말았다.
나의 고지식하고 단순함 때문에 멀리 보고 넓게 바라보지 못하는 소홀함이 있었다.
힘겨울 때, 지쳤을 때, 너무 어려워지면 상황에 밀려서 내려놓는다.
그러다가 조금 숨 쉴만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가능성이 보이면
느슨해졌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다시 움켜쥐는 것이다. 현실 상황에 따라서 실체가 드러난다.
그야말로 1%가 99%를 끌고 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게 아니라고 우기지만 결정적인 상황이 되어 마지막 도장을 찍으려고 하면
잠깐! 스톱을 시킨다. 내 속에 내가 모르는 다른 내가 있다. 결국은 승부를 내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주인으로 모신 하나님과 나 자신에게 그리고
함께 하는 이들에게 계속해서 아주 내려놓음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상황과 환경이 바뀌고
조건이 달라질 때마다 번번이 실패하는 것이 권리 포기가 아니라는 것을 경험했다.
물 위에 식물을 던졌다가 다시 잡게 되는 지루한 경기가 10년을 넘게 계속되었다.
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진행되었다. 세상에 거짓말쟁이, 사기꾼, 자연재해, 등
여러 불량한 이들과 천재지변이 연합하여 집중공격해 왔다. 오랜 기간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전진해나가지 못하였다. 그렇게 무거운 짐 지고 고통의 시간이 10년쯤
지났을 때 함께 했던 이들이 번 아웃 되었다.
결국 마음을 돌이켜 후반전에 들어서면서 두 손을 들었다.
나는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쓰러졌다가 또 일어나기를 반복하였다.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골고다로 오르는 시간을 이어갔다. 함께 해 오던 이들은 보다보다 지쳤는지
골고다에 오르는 내 곁에 다가와서 무거운 십자가를 내려놓으라고 포기하라고 하였다.
이제라도 살기 위해서 그만하고 기권하라고 강권하였다.
나는 그럴수록 더 악착같이 전심을 다 하였다. 주님과의 약속이라며 결코 내려놓을 수
없다고 버티며 집착하였다. 가진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용병선수를 선발해서
위기를 모면해 보려고 하였다. 참 힘들고 어려운 싸움이었다.
스카웃 되어 중간에 들어온 용병선수들이 도중에 도망가거나 쓰러지고 사망하기도 하였다.
믿음을 빙자하여 잘하겠다고 일을 맡은 이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떠나갔다.
현장에 관여한 사람들 가운데 급사하고 회사의 문을 닫게 되는 등 시간이 임박해 지면서
승부를 보아야 하는 순간순간 숨 막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악전고투 끝에 드디어 공사를 마치고 준공 검사를 받았다.
이제 사용을 위해 내부 시설을 하면 되었다. 힘들었지만 공사를 진행하였다.
드디어 마지막 고지가 보인다. 가깝게 한눈에 들어온다. 깃발만 꽂으면 된다.
그 순간 한발 앞에서 궁창 위의 물 폭탄이 쏟아졌다.
높이 6미터에 길이 70여 미터의 육중한 옹벽이 무너져내렸다.
그동안의 꿈이 엄청난 사건. 사고의 현장에 파묻히게 되었다.
계속 여진이 덮쳤다. 사람이 이처럼 변할 수도 있구나, 가까운 이웃이 옆집이 아니구나.
맘몬의 힘이 가깝던 관계를 깨뜨리고 신앙도 흔들어 시험에 깊이 빠지게 하는구나. 라는 것을 알게 하였다.
미래 비젼 축제의 마당을 꿈꾸며 시작하여 오랜 시간 전심으로 달려온 10년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제부터는 더욱 치열한 전쟁이 선포되고 이기기 위해 싸워야 하는 현장이 되었다.
사실 나는 39년 전 주님을 만난 후 그때 주님 앞에 중대 결단을 선포한 사실이 있다.
장래에 나의 모든 삶을 주님께 위탁하였다. 그리고 삶의 수단과 방법은 오직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살기로 결정하였다. 하나님의 공급을 믿고 재정에 대한 자유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의식주만 아니라 모든 활동 전부를 위탁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니까 항상 무에서 시작하였고 믿음을 따라 주시는 대로 사역을 진행하며 지낼 수 있었다.
공부하는 것, 생활하는 것, 목회하는 것, 건축하는 것, 움직이는 모든 것을 그렇게 살아냈다.
지금 생각해도 아무런 할 말이 없다. 모든 것이 은혜였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벼랑 끝을 함께 걸어온 가족들에게는 미안하고,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이제 이 현장을 내려놓고 포기하면 완전히 빈손이 된다. 약간 갈등의 씨름을 하였다.
억울했다. 다시 싸워야 하나? 고민하였다. 미래를 위해서 앞으로 새로운 도전을 하려면
얼마라도 가진 것이 있어야 하는데. 다시 겨룰 수 있는 정당한 방법이 있긴 한데 다시 싸워볼까?
씨름을 위한 수단 방법을 생각하며 준비하다가 이런 정도로 아버지께서 원치 않은 일이라면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고 주님의 제자로서 장렬하게 전사하자는 마음으로 정리하기로 하였다.
합법적인 정당한 방법으로 일부분 소유권을 찾고 피해 보상을 위해서 씨름을 할 수
있었지만, 사람과 겨루지 말고 하나님 앞에 손을 들자 항복하자. 하고 무언의 행동으로
아버지 앞에 오기를 부렸다. 그날 밤 아무 말 하지 않고 입을 닫은 채 밤 10시에 치열했던
백병전의 현장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철수하였다.
그렇게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아버지 아들로서 주님 제자로서 12년을 싸워온
비젼의 현장을 떠나는 나의 마음은 좀 착잡하기는 하였지만 크게 요동하지 않았다.
안정감이 있고 평안하였다. 권리 포기의 자유함이 이런 것일까?
모든 것을 송두리째 던지고 난 후에 종합적으로 재평가를 해 보았다.
왜 좋게 시작한 축제의 장이 전쟁으로 바뀌었을까 진행하는 동안
그렇게 끈질기게 씨름을 하고 긴 세월을 싸워야 했는가?
그리고 12년이 지나 이렇게 승부를 내야 했나? 차라리 처음이나
중간에 씨름이 시작되었을 때에 일찌감치 끝낼 수 있었다.
그때도 여러 차례 내려놓음을 선포했었다. 그런데 왜 내려놓으면
다시 붙잡도록 돌려주시고 또 내려놓으면 반복 돌려주셨나?
또 던지면 벽에 부닥쳐서 튀어나온 공처럼 다시 발 앞에 와 있다,
그리고 위기 때마다 피할 길을 주셨고, 또 피하도록 도와주셨다.
때때로 어찌하실 것인지 여쭈면 기다리라고 하신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기를 아! 이건 아버지께서 내가 마음으로 아주
내려놓았다는 것을 아시고 중심이 어디 있는지 보셨기 때문에
계속 지켜주시고 도와주시겠다는 싸인이라고 확신하였다.
이제 시험은 다 끝났구나 하고 어렵고 힘들었지만 멈춤 없이 계속 진행을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내려놓았다가 다시 붙들고, 포기했다가 다시 돌려받고, 또 던지고 나면 다시 돌아와
받아야 하는 일들이 반복되면서 마음에 확신하게 되었던 것은, 이 사역의 프로젝트는
하나님께서 처음 시작할 때에 기도하고 선포했던 것을 이루어 주신다는 뜻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더욱 집착하게 되었고, 반드시 성취해야 한다고 움켜쥐게 되었다.
당시 나는 결코 개인적인 욕심이나 성취욕이 아니라고 자신했다. 오히려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불신이고 불순종인 것처럼 여겨져서 두려움이 생겼었다.
내 마음대로 던지고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배신하는 불신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어려운 장애물에 막혀서 힘들어 할 때마다 아버지께 나가면
기다리라는 마음으로 응답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렵더라도
기다리면 결국은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실 것이라고 믿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결국은 마칠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일생을 살아오면서 지켰던 믿음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집착하게 된 또 하나의 결정적 동기, 이유가 있다면 일찍이 무소유로
교회를 개척하고 4년 만에 건축을 할 때 3년간 겪었던 시련과 어려움은
상상을 초월한 혹독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심하게 우겨쌈을 당하고 꺼꾸러 뜨림을 당하며 박해를 받았었다.
이웃집의 횡포로 인해 행정기관(구청, 시청) 사법부(검찰, 법원) 경찰까지 연합으로
공격해 왔다. 설상가상으로 연합수련회에서 익사 사고를 당했다.
3년간 열흘에 한 번씩 재판정에 서야 했다. 참으로 이겨내기 힘겹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두 개의 건축 회사가 부도를 내고 도주하였다.
사망에 던져진 것 같은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싸워야 했다.
오죽하면 산자락 양지쪽에 나란히 세워진 쌍묘를 보면서 그렇게 평안해 보이고 부러웠을까.
나도 숨 그만 쉬고 싶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 만에 모든 재판과, 건축을 완료하기까지
복잡했던 여러문제들이 한 달 내에 일괄적으로 정리가 되었다.
이러한 지옥훈련? 기적 경험, 거룩한 연단을 통과하도록 해 주셨던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는 새로운 사역을 풀어주시고 비젼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남양주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12년의 힘든 과정을 마지막까지
성취를 믿고 집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코 놓을 수 없다고 더욱 완고한 고집을 부렸나 보다.
당시에 돈을 생각했다면 얼마든지 불려서 처리할 수 있었다.
처음 구입했을 때 보다 고가의 매각을 청하는 이들이 있었다.
얼마든지 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거절했다.
나는 어떤 유익보다는 기도로 선포했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켜왔던 꿈의 결론은 모든 것을 아주 내려놓아야 했다.
그렇게 끝을 맺게 했다. 참 기가 막힌 결과였다.
이럴 것이면 처음에, 중간에, 내려놓았을 때 거둬가시지 않고 그때는
오히려 피할 길을 주시더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똑똑하고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난 친구와 형제들이 그 거짓말에 능한
사람을 천사처럼 보게 하셔서 속아 넘어가도록 하셨는가? 예수님을 특심으로 믿는다는
교회의 여러 직분자들이 하나같이 하나님의 일을 돕고 싶다고 했지만 말뿐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공사를 맡은 후에는 거짓말하고, 속이고, 약속을 지키지 않고,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도망하였는데 하나님은 그들의 양심 하나도 제대로 돌이키게
하실 수가 없으셨는가?
어떤 집사는 교회건축 헌당하는 것이 일생 소원이고 9년간 기도해 왔는데
나를 만난 것은 응답을 해주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응답을 이룰
수 있도록 자신에게 기회를 달라고 하였는데 그 집사에게 응답하신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셨는가? 응답하셨다가 취소하신 것인가?
그 집사를 소개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잘 알고 지내는 목회자였다. 그 목사는
그 집사가 형님 벌이 된다고 하면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적지 않은 소개비까지 챙겼는데 도대체 그들이 부르는 하나님은
어디 가신 것인가? 왜 그러한 거짓을 그대로 두셨나? 양심이라도 찔러서
그러면 안 된다고 가르쳐주실 수 없으셨나?
그들과 교제하시고 기도를 들으시며 응답하시는 분이 참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부르는 이름인가?
더하여 당시 정권이 바뀌고 부동산 법과 개발을 통제하는 여러 규제를
만들어서 행정적인 제한을 받아서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시간이 가면서 하나씩 문제들이 풀어졌다.
한두 번도 아니고 재정을 포함한 여러 문제로 벼랑 끝에서 위기를 맞이하는
고비 때마다 번번히 붙잡아 주시고 피할 길을 열어주셔서 10년 이상 진행
하도록 필요를 공급하시는 능력의 손길을 경험하게 하시고, 확신을 주셨기
때문에 나는 더욱 전심을 기울여 집착하였던 것인데. 왜 이렇게 결론이 나게 된 것인가?
마지막 쐐기꼴을 넣으셨던 그 날 비바람 쏟아지는 폭풍우를 지나가게 하시거나
멈추게 하실 수가 없으셨나? 그 높고 긴 축대가 무너져 내리기 전에 어떤 조치를
하도록 도와주실 수 없었는가? 그리고 가까이에서 도왔던 분의 마음이 갑자기
완고하게 변하여 의도적으로 재정의 문을 막아서 아무런 행위도 하지 못하게 하고
나아가 교회소유의 진입도로를 내주지 않아 당시 시가 50-60억의 훈련 쎈타를
송두리째 던지게 하였을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정상적인 사람이 그렇게 하였다고
보기 어려운 일이다. 설상가상으로 붕괴 사고로 인하여 사람들이 다치고 아래쪽
공장의 세입자는 교회를 다닌다고 했는데 엄청난 피해를 입은 교회를 향하여
그렇게 몰상식한 횡포와 포악한 행위를 하는데 그들의 신앙 양심에 반디불이라도
비춰주실 수 없으셨나? 나아가 가장 이해심이 많고 지혜와 직관이 뛰어난
가까웠던 형제의 마음은 왜 그렇게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그 자식은 비상식적으로
사고 현장을 거짓 조작하도록 두셨는가?
그리고 여전히 문제 해결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을 하는
상황이 되었고, 그 가족들은 소통의 통로를 차단하고 접근을 가로막으며 상황을
풀어가지 못하도록 문제를 꽁꽁 묶이게 하여 피해를 입은 우리의 복구 조치를 가로막았다.
아무래도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완벽한 계획을 누가 세워서 진행하도록 한 것일까?
나의 죄악을 징계하시려는 하나님의 심판이었나? 연단이었나?
현장에 등장인물들이 다 모여서 밤을 새우며 계획을 세우고 리허설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완벽하게는 못할 것이다. 이것은 분명 다른 어떤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불 수 있다.마치 욥기에 등장하는 어전회의 결정으로 욥을 사탄에게 내주어 고난을
허용하셨던 것처럼 나를 사단에게 내어주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명을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도망친 요나로 인해모든 짐보따리를
버리게 하고 요나는 풍랑이는 바다에 던져서 큰 고기에게 삼켜져 고통 중 회개하도록
하셨던 것처럼 내가 명령을 불순종하고 다른 길로 가다가 풍랑을 만난 것인가?
어찌 되었든지 합리적 원칙을 따라 진입도로와 피해 부분을 가지고 법적 다툼을
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의도적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솔직히 아버지를 향하여 약간은 씁쓸한
마음으로 오기를 부렸다. 이러한 극적인 상황이 진행될 때에는 반드시 자칭
심판관들이 등장한다. 점치는 예언가들도 다양하게 등장한다.
그들은 전생의 죄를 들먹이며 무슨 큰 죄의 문제가 있었는가?
어떤 큰 잘못을 저질렀겠지.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데 잘했으면 그럴리가 없잖아?
사랑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을텐데. 또는 빚이 많아서 그렇게 됐을 거야.
너무 욕심을 부린 것 같아. 교만했나? 결과적으로 잘 되지 못했잖아?
아직 속에 다루실 것이 있었겠지. 회개해야지 하면서 정죄하고 조롱한다.
마치 욥을 찾아왔던 세친구들이 다시 살아나 나에게 찾아와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왜 잘못이 없었겠나. 여전한 죄인인데. 사실은 털어낼 것도 별로 없는데.
아무리 명 심판이라도 당사자로서는 어느 것 하나 동의 할수 없는 것이어서
그런 판단은 더욱 고통을 준다. 그러나 생각한다. 그리고 내면을 관찰하고 분석도
해 보고 그동안의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 깊이 살펴본다.
결론은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었다면 아멘이다.
욥의 고백을 나의 고백으로 아버지께 올려 드린다.
욥42:2-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 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 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 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아버지 앞에 아주 다 내려놓을게요. 나를 받아 주세요.
그렇다면 이제 내려놓음의 시험이 끝난 것일까?
글쎄. 정말 그럴까? 계속 자신의 마음 중심을 관찰해야 한다.
십자가의 도를 마음 중심에 굳게 세우지 않으면 한쪽 손에 잡은 것을
내려놓으면 또 한 손이 다른 것을 붙잡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 순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자신을 본다.
다시 내려놓고 나면 다시 새로운 것을 잡고 집착하게 된다.
그러므로 내려놓음은 가졌던 것을 내 던지고 버리는 것으로
끝난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이 움직이는 반응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정기적 진단이 필요하다. 민감하게 깨어서 반응해야 한다.
내 손에 들려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내 마음에 품은 것은 어떤 것인지,
내가 따라가는 길은 어느 길인지, 생각과 마음의 중심을 달아보고
양심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기름을 부어야 한다.
내려놓음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나는 정말 권리를 포기했나?
마지막이 되기까지는 장담하지 말고 자신을 살피며 주의하라.
숨을 멈출 때까지는 움켜쥘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보좌 앞에 가서 여지없이 거절당할른지 모른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내려놓음의 원조 권리포기의 원조이신 예수님께 꼭 붙어 있으라.
그리고 선포하자 나의 속사람을 향하여 나는 죽었다. 그리고
또 날마다 죽노라.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 나는 천국 백성이다.
내려놓음 권리 포기의 대가는 천국을 소유하고 누리는 것이다.
내려놓음 권리 포기의 절정은 자유이며 안정감을 누리는 것이다.
마16:24 ....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