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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 44살 「紫陽書院集序」 구방심의 심즉리와 지행합일 및 주자와 왕양명의 화엄종 이사(理事) 다른 견해
2021년 4월 15일
왕양명의 학술종지를 심즉리, 지행합일, 치양지 셋으로 말하는 학자들이 전덕홍을 비롯하여 많습니다. 전덕홍은 특히 서애(徐愛)의 기록을 중시하였고 황종희조차 서애가 왕양명의 참된 제자(眞傳)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서애가 왕양명의 심즉리와 지행합일을 배워 학술을 계승하였고 심지어 유종주는 서애가 양지까지도 계승하였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지나치게 절강성 계승자들의 견해가 담겨있고 강서성 출신 계승자들의 견해는 배제되었습니다. 현재 왕양명과 양명후학의 학술을 종합하고 교판(敎判)하는 관점에서 보면, 왕양명의 학술종지가 위와 같이 셋이라고 선별하는 것은 재고하여야 합니다.
왕양명은 41살(1512) 12월 중순에 서애(徐愛)와 함께 북경에서 출발하여 소흥부에 도착하는 동안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다시 42살 10월 22일에 남경 근처의 저주(滁州) 태복시(太僕寺)에 도착하여 근무하고, 43살(1514) 4월에 남경 홍려시(鴻臚寺) 시경(寺卿)으로 승진하여 근무하다가 45살(1516) 9월 도찰원 좌첨도어사로 승진하여 남경을 떠날 때까지 학생들에게 정좌를 가르치고 또 토론을 진행하였습니다.
저주와 남경에서 강학하는 동안에 학생들과 토론하면서 주자학을 비판하였습니다. 토론과정에서 심즉리와 지행합일을 설명하였습니다.
왕양명은 44살(1515)에 쓴 「자양서원 자료집 서문(紫陽書院集序)」(乙亥, 1515)에서도 학문의 목표가 본심을 깨닫는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맹자의 구방심(求放心) 입장에서 심즉리(心外無事、心外無理、心外無學)와 지행합일을 설명하였습니다.
1. 심즉리(心卽理 : 心外無事、心外無理、心外無學)
주희(朱熹)는 『대학 장구 집주(大學章句集注)』에서 명덕(明德)이 마음의 본체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불교의 본유설과 화엄종의 이법(理法) 관계를 인용하였습니다. 주자는 “명덕은 사람이 타고난 것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불매한 허령이 중리를 본구하고 중리가 불변하되 만사를 짓는다.(明德者,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以具眾理而應萬事者也。)”고 해석하였습니다.
주자는 유가에서 말하는 명덕(明德)이 타고난 마음의 본체이며 불교의 불매한 허령(虛靈)과 동일하다고 전제하였습니다. 또 화엄종에서 말하는 이법계(理法界)와 사법계(事法界)의 상호관계를 인용하여 본심이 중리(衆理)를 본유(本有)하고, 중리가 불변하되 수연(隨緣)하여 만사(萬事)를 만든다는 것도 인용하였습니다. 주자 본인이 비록 불교를 이단이라고 배척하였으나 불교의 허령과 화엄종의 이사(理事) 관점을 빌어와서 명덕의 본체와 작용을 설명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주자는 명덕이 중리를 본유한다는 뜻에서 “구중리(具眾理)”라고 말하고 중리가 자성(自性)을 지키되 수연(隨緣)하여 만법을 이룬다는 뜻에서 “응만사(應萬事)”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물론 화엄종의 이법(理法) 관계와 단계마다의 수양공부를 다 설명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무튼지 주자는 중리가 자성을 지키되 수연한다는 설명보다는 중리를 본유하였다는 구중리 설명에 주목하였기에 이(理)가 오히려 소극적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따라서 여전히 북송시기부터 논의되었던 심대성소(心大性小) 문제에서 성소(性小)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왕양명은 주자학의 성소(性小) 문제를 해소하려고 오히려 화엄종의 심대(心大)를 인용하였습니다. 화엄종에서는 부처의 마음(心)이나 중생의 마음(心) 모두 모든 것(萬法)을 만드는데 마치 화가가 모든 것을 그리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大方廣佛華嚴經』(六十卷本),「夜摩天宮菩薩說偈品第十六」:“心如工畫師,畫種種五陰。一切世界中,無法而不造。如心佛亦爾,如佛眾生然。心佛及眾生,是三無差別。”) 그래서 왕양명은 이법계도 마음 밖에 있지 않고(心外無理) 사법계도 마음 밖에 있지 않다(心外無事)고 강조하였습니다. 심외무리(心外無理)가 바로 심즉리(心卽理)입니다. 심즉리는 사실상 화엄종의 심여공화사(心如工畫師) 뜻을 풀어서 심대(心大)를 설명한 것입니다. 사실상 왕양명이 말한 심외무리와 심외무사는 이사(理事)가 마음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마음이 이(理)를 본구하고 사(事)를 짓고 만든다는 마음의 주동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옛날부터 주자학과 양명학이 불교의 화엄종이나 천태종 어느 쪽에 가깝냐는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현재 보면 어느 쪽에 가깝냐는 문제보다는 주자와 왕양명 모두 얕은 불교 지식을 갖고 유가 경전을 이해하는 데 인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낫습니다. 왕양명의 경우에는 50살 넘어서는 대체로 『대승기신론』의 일심양문(一心兩門)을 인용하여 양지를 설명하기도 하였습니다.
2. 지행합일(知行合一)
주자는 백록동 서원의 교학(敎學) 방향과 순서에 관하여 먼저 본체를 깨닫지 못하였으나 열심히 공부하였다는 증자를 모델로 설정하고, 『중용』:“博學之,審問之,慎思之,明辨之,篤行之。”을 인용하고 학문사변(學、問、思、辨) 넷의 궁리(窮理)와 독행(篤行) 둘로 나누고 독행에는 수신(修身)에서 처사(處事)와 접물(接物)까지 넣었습니다. 따라서 궁리의 지(知)와 독행의 행(行) 둘로 나누었습니다.
왕양명은 구방심 입장에서 지(知)와 행(行) 둘의 목표가 본심을 깨닫는 것이기에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였습니다. 학문사변(學、問、思、辨) 넷의 궁리(窮理)를 유식 불교의 자량위(資糧位)에 배속하는 것도 마다하였습니다. 궁리가 선정상태에서 사색하는 가행위(加行位)라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주자처럼 지행을 선후(先後) 또는 병행(竝行)이라고 보는 견해를 반대하였습니다.-------------------------------
왕양명 『문록(文錄)』에 실린 「자양서원 자료집 서문(紫陽書院集序)」은 1515년(乙亥, 왕양명 44살)에 지었다고 분명히 기록하였습니다. 최근에 속경남 선생은 『왕양명 연보 장편』(654쪽)에서 자양서원의 신축 연도와 나기(羅玘, 1447-1519)의 「자양서원 자료집(重建紫陽書院記)」의 연도에 근거하여 왕양명의 「자양서원 자료집 서문」이 41살(1512) 3월에 썼다고 추측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청(顧清, 1460-1528)의 「자양서원 집 서문(紫陽書院集序)」를 보면 1514년(왕양명 43살)에 진사가 되어 한림원 수찬으로 근무하는 당고(唐皐)의 부탁을 받고 서문을 썼다고 합니다. 따라서 속경남 선생의 추측처럼 왕양명이 반드시 41살에 썼다고 확증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구나 왕양명 『문록(文錄)』은 왕양명 학술을 학생들이 꼼꼼하게 정리한 자료이기에 연도를 함부로 쓰거나 틀리게 쓰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문록(文錄)』에 적힌 대로 왕양명이 44살(1515)에 썼다고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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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
1、왕양명, 「자양서원 자료집 서문(紫陽書院集序)」(乙亥, 1515년 왕양명 44살)
2、朱熹, 『白鹿書院教規』
3、고청(顧清, 1460-1528), 「자양서원 집 서문(紫陽書院集序)」
1、왕양명, 「자양서원 자료집 서문(紫陽書院集序)」(乙亥, 1515년 왕양명 44살)︰
(王守仁,字伯安,餘姚人,國朝鴻臚寺卿)
출처:『朱子實紀』,卷十一.
강서성 남창부 신건현(南昌府 新建縣) 출신의 웅계(熊桂, 字世芳)가 안휘성 황산(黃山) 동북쪽에 있는 휘주부(徽州府)의 지부가 되어 행정을 펼치는 동안에 자양서원(紫陽書院)을 크게 신축하였고 주자학을 발전시키려고 휘주부 지역의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몸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휘주부에 있는 1부(府)와 6현(6縣 : 本府、歙、休寧、婺源、祁門、黟、績溪) (明、彭澤修等, 『徽州府志』(弘治十五年), 卷1)의 7개 학교 학생들은 행정 지원이 연속하지 않거나 교육이 부실화할 것을 걱정하였기에 학생 정증(程曾, 字師魯)이 자양서원의 자료를 모으고 백록동 서원 교학 규약(朱熹, 『白鹿書院教規』)을 앞에 붙였습니다. 뒷사람들에게 물려주어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출판한 뒤에 필산(畢珊, 字友梅)가 찾아와서 두 자료를 합한 까닭을 설명하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서문을 부탁하였습니다. 내가 생각하니 학술을 공부하는 방법은 백록동 서원의 규약으로도 충분합니다. 학생들을 깨워서 공부하도록 권장하는 방법은 지부 웅계의 뜻이 잘되었습니다. 서원의 흥망 역사는 학생 정증이 모은 자료가 충분합니다. 제가 무엇을 더 말하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배우기로는 “덕(德)에도 근본적인 덕이 있고 학술에도 좋은 방법의 요령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근본적인 덕을 찾아 공부하지 않고 광범위하게 마구잡이로 공부하면서 높은 경지를 기대하면 유가의 근본적인 덕을 부정하는 도교와 불교의 허적(虛寂)으로 가고, 낮은 경지를 기대하면 근본적인 덕에서 멀어지는 분열(支離)로 갑니다. 결과적으로 방황하다가 목표도 잊고 아무리 노력하여도 어떤 결실도 얻지 못합니다. 따라서 지식인의 학술은 오직 본심을 깨닫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하늘과 땅이 상하로 자리 잡고 만물을 기르는 덕(德)도 우리 마음의 밖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맹자가 “학문의 방법은 다른 좋은 것이 없고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아 깨닫는 것(求放心)이 중요하다.”고 말한 것이 요점입니다. 『중용』에서 말한 학술 방법에서 널리 배우는 것(博學)도 구방심을 배우라는 것이고, 자세히 묻는 것(審問)도 구방심을 묻으라는 것이고, 깊이 생각하는 것(慎思)도 구방심을 생각하라는 것이고, 밝게 변별하는 것(明辯)도 구방심을 변별하는 것이고, 독실하게 실천하는 것(篤行)도 구방심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화엄종에서 말하는 사법계(事法界)도 마음 밖을 벗어나지 않고 이법계(理法界)도 마음 밖을 벗어나지 않기에 구방심의 학문도 마음 밖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부자 관계와 군신 관계에서도 내 마음에 있는 인의(仁義)를 다하는 것입니다. 주자가 수신(修身)의 요점이라고 열거한 충신(忠信)은 내 마음의 충신을 말하여야 하고, 독경(篤敬)은 내 마음의 독경을 실천하여야 하고, 징분(懲忿)은 내 마음의 화나는 것을 다스려야 하고, 질욕(窒欲)은 내 마음의 욕망을 막아야 하고, 천선(遷善)은 내 마음의 착함(善)으로 가야 하고, 개과(改過)는 내 마음의 잘못을 고쳐야 합니다. 주자가 열거한 처사(處事)와 접물(接物)의 두 가지 요점 어느 것도 내 마음을 끝까지 깨달아서 떳떳하고 흐뭇하여야 합니다. 나무를 심어 기르는 것에 비유하면 마음이 뿌리이고 공부하는 것은 뿌리에 흙을 돋아주고 물을 주는 것이고 쓰러져 죽지 않도록 돌봐주고 필요 없는 가지와 잎을 쳐주는 것인데 모든 작업은 뿌리에 힘쓰는 것입니다.
주자가 만든 「백록동 서원 교학 규약(『白鹿書院教規』)」의 순서에서 첫째로 오교(五敎, 五倫)을 들고, 둘째로 학문의 순서(爲學之敘), 셋째로 수신 요점(修身之要), 넷째로 처사와 접물의 요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조목들이 각기 독립되고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주자가 평소에 가졌던 생각이겠습니까? 주자가 설명하였듯이 “공자 제자 증삼(曾參)이 비록 도(道)를 깨닫지 못하였으나 일이 겪으면서 자세히 살펴서 이해하고 힘껏 실천하기에 앞으로 어느 날에는 도(道, 忠恕)를 관통하는 깨달음이 얻을 것이다.”는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일반 학자들은 이런 조목들을 쪼개서 조각들을 따지거나 표정을 엄숙하게 하여 남들에게 위엄을 보이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으며, 끝내는 글을 외워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원이 된 뒤에 명예와 이익을 얻는 속학에 빠집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의 요청에 따라 특별히 덕의 근본을 밝혀서 서로 힘쓰려고 합니다. 아마도 실천과 강학에 요점에 관하여 주희가 다 밝히지 못한 뜻을 밝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王守仁,「紫陽書院集序」(乙亥,1515, 왕양명 44살)︰
(王守仁,字伯安,餘姚人,國朝鴻臚寺卿)
출처:『朱子實紀』,卷十一.
豫章熊侯世芳(熊桂,字世芳)之守徽也,既敷政其境內,乃大新紫陽書院以明朱子之學,萃士之秀而躬教之。於是七校之士,懼政之弗繼也,教之或湮也,而程生曾集書院之故,復弁以白鹿之規,遺後來者,使知所敦。刻成,畢生珊來致其合語,請一言之益。予惟爲學之方,白鹿之規盡矣。警勸之道,熊君之意勤矣。興廢之詳,程生之集備矣。又奚以予言爲乎?
然吾聞之:德有本而學有要。不於其本而泛焉以從事,高之而虛寂,卑之而支離,而流蕩失宗,勞而靡得矣。是故君子之學,惟以求得其心,雖至於位天地、育萬物,未有出於吾心之外也。孟氏所謂“學問之道無他,求其放心而已矣”者,一言以蔽之。故博學者,學此也;審問者,問此也;慎思者,思此也;明辯者,辯此也;篤行者,行此也。心外無事,心外無理,故心外無學也。是故於父子,盡吾心之仁;於君臣,盡吾心之義。言吾心之忠信,行吾心之篤敬。懲心忿,窒心慾,遷心善,改心過。處事、接物,無所往而非求盡吾心以自慊也。譬之植焉,心其根也,學也者,其培壅而灌溉之者也,扶衛而刪鋤之者也,無非有事於根焉爾已。
朱子白鹿之規,首之以五教之目,次之以爲學之敘,又次之以修身之要,又次之以處事之要、接物之要。若各爲一事而不相蒙者,斯殆朱子平日之意,所謂“隨事精察而力行之,庶幾一旦貫通之妙也”歟?然而世之學者,往往遂失之支離瑣屑,色莊外馳,而流入於口耳、聲利之習。故吾因諸士之請,而特原其本以相勖,庶乎操存講習之有要,亦所以發明朱子未盡之意也。
참고자료 :
『孟子、告子上』︰
仁,人心也;義,人路也。舍其路而弗由,放其心而不知求,哀哉!人有雞犬放,則知求之,有放心而不知求。學問之道無他,求其放心而已矣。
『大學』:是故君子先慎乎德。有德此有人,有人此有土,有土此有財,有財此有用。德者本也,財者末也。外本內末,爭民施奪。是故財聚則民散,財散則民聚。是故言悖而出者,亦悖而入;貨悖而入者,亦悖而出。
『程氏經說』,卷七,「論語説」,「學而」︰
有子曰︰其為人也孝弟。孝弟,順德也,故不犯上,豈復有逆理亂常之事?德有本,本立則其道充大,孝弟於其家,而後仁愛及於物,所謂親親而仁民也,故為仁以孝弟為本,論性則仁為孝弟之本。
『中庸』:“博學之,審問之,慎思之,明辨之,篤行之。”
朱熹,『論語集註』,「里仁第四」︰
子曰參乎!吾道一以貫之。曾子曰唯。
集註︰聖人之心,渾然一理,而泛應曲當,用各不同。曾子於其用處,蓋已隨事精察而力行之,但未知其體之一爾。夫子知其真積力久,將有所得,是以呼而告之。曽子果能黙契其指,即應之速而無疑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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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陽明,「紫陽書院集序」(乙亥, 1515, 왕양명 44살):
出處:『王陽明 全集』
* 아래 글에서 붉은색은 위의 글과 다른 부분입니다.
豫章熊侯世芳之守徽也,既敷政其境內,乃大新紫陽書院以明朱子之學,萃七校之秀而躬教之。於是校士程曾氏采摭書院之興廢爲集,而弁以白鹿之規,明政教也。來請予言以諗多士。夫爲學之方,白鹿之規盡矣;警勸之道,熊侯之意勤矣;興廢之故,程生之集備矣。又奚以予言爲乎?
然予聞之:德有本而學有要,不於其本而泛焉以從事,高之而虛無,卑之而支離,終亦流蕩失宗,勞而無得矣。是故君子之學,惟求得其心。雖至於位天地,育萬物,未有出於吾心之外也。孟氏所謂“學問之道無他,求其放心而已矣”者,一言以蔽之。故博學者,學此者也;審問者,問此者也;慎思者,思此者也;明辯者,辯此者也;篤行者,行此者也。心外無事,心外無理,故心外無學。是故於父,子盡吾心之仁;於君,臣盡吾心之義;言吾心之忠信,行吾心之篤敬;懲心忿,窒心欲,遷心善,改心過;處事、接物,無所往而非求盡吾心以自慊也。譬之植焉,心其根也;學也者,其培擁之者也,灌溉之者也,扶植而刪鋤之者也,無非有事於根焉耳矣。
朱子白鹿之規,首之以五教之目,次之以爲學之方,又次之以處事、接物之要。若各爲一事而不相蒙者,斯殆朱子平日之意,所謂“隨事精察而力行之,庶幾一旦貫通之妙也”歟?然而世之學者,往往遂失之支離瑣屑,色莊外馳,而流入於口耳聲利之習。豈朱子之教使然哉?故吾因諸士之請,而特原其本以相勖。庶幾乎操存講習之有要,亦所以發明朱子未盡之意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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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朱熹, 『白鹿書院教規』:
父子有親,君臣有義,夫婦有別,長幼有序,朋友有信。
右五教之目。堯舜使契爲司徒,敬敷五教,即此是也。
學者學此而已,而其所以學之之序,亦有五焉,其別如左:
博學之,審問之,慎思之,明辨之,篤行之。
右爲學之序。學、問、思、辨,四者所以窮理也。若夫篤行之事,則自修身以至於處事、接物,亦各有要,其別如左:
言忠信,行篤敬,懲忿窒欲,遷善改過。
右修身之要。
正其義,不謀其利,明其道,不計其功。
右處事之要。
己所不欲,勿施於人。行有不得,反求諸己。
右接物之要。
熹竊觀古昔聖賢所以教人爲學之意,莫非使之講明義理,以修其身,然後推以及人,非徒欲其務記覽、爲詞章,以釣聲名、取利祿而已也。今人之爲學者,則既反是矣。然聖賢所以教人之法,具存於經。有志之士,固當熟讀深思而問辨之。苟知其理之當然,而責其身以必然,則夫規矩禁防之具,豈待他人設之而後有所持循哉!近世於學有規,其待學者爲已淺矣,而其爲法又未必古人之意也。故今不復以施於此堂,而特取凡聖賢所以教人爲學之大端,條列如右而揭之楣間。諸君其相與講明遵守而責之於身焉,則夫思慮云爲之際,其所以戒謹而恐懼者,必有嚴於彼者矣。其有不然,而或出於此言之所棄,則彼所謂規者,必將取之,固不得而略也。諸君其亦念之哉!
요약 :
五教:五倫
爲學之序:學、問、思、辨(窮理), 行(篤行)
篤行之事:修身、處事、接物
修身之要:言忠信,行篤敬,懲忿窒欲,遷善改過
處事之要:正其義,不謀其利,明其道,不計其功
接物之要:己所不欲,勿施於人。行有不得,反求諸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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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고청(顧清, 1460-1528), 「자양서원 집 서문(紫陽書院集序)」
출처 : 顧清(1460-1528),『東江家藏集』,卷二十,「紫陽書院集序」︰
신안군(新安郡, 南直隸 徽州府) 군수 웅계(熊桂)가 자양서원을 중건하였고 준공되자 서원의 학생 정증(程曾, 字師魯)가 벗들에게 말하길 “자양서원은 송나라 시기부터 건립과 폐지가 자주 일어났고 이곳저곳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규모는 오늘 중건한 것이 가장 잘 갖추어졌고, 서원 터의 위치도 오늘이 가장 뛰어납니다. 후세 사람들을 가르쳐서 새롭게 깨우치도록 하고 교육을 향상하여 풍속을 개선하려는 의지와 열의는 웅계 군수가 가장 큽니다. 옛날 노나라 희공(僖公 재위 기간 : 기원전 659-기원전 627)이 희공 17년(기원전 643년)에 제후의 국립학교 반궁(泮宮)을 세웠고 나라 사람들이 칭송하였고 『시경』(詩經、魯頌、泮水)에 기록이 남았습니다. 그렇지만 현재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즉후(即侯?)의 사례가 있고 자료를 분류하여 편집하는 것도 주자가 남강군(南康軍)에 부임하여 백록동 서원을 복구하고 지은 백록동 학규의 사례를 따를 수 있습니다. 뒷사람들이 기록하여 영원히 남기는 것은 어찌 자양서원에서 공부하는 우리 학생들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자의 문집과 『주자실기(朱子實紀)』 및 비석의 비문, 공문서에 있는 기록 등 자양서원에 관련된 자료를 베껴서 4권으로 나누었습니다. 또 송나라 이래로 유학자들의 제문과 서문, 계문, 명문, 시를 모아 부록으로 만들어 뒤에 붙였습니다. 서적의 이름을 『자양서원집(紫陽書院集)』이라고 지었습니다. 자양서원 안에서 판각하기에 앞서 휘주부 흡현(歙縣) 출신 한림원 수찬 당고(唐皐, 1469-1526, 1514년 진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당고는 자양서원 출신으로서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 명단에 이름을 올린 사람입니다. 나에게 원고를 보여주고 정증(程曾)의 의도를 알려주고 서문을 부탁하였습니다.
성현의 학술은 천지의 성쇠와 함께 유행하기에 학술이 잘되고 못되고 끊어지고 이어지는 것도 사실상 시대의 흥망성쇠에 달려있습니다. 춘추전국 시기에는 공자와 맹자가 나왔으나 세상에 쓰이지 않았고 진시황은 공자와 맹자의 서적을 모두 불태웠습니다. 그런데 한고조가 회남왕 경포(淮南王 黥布)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는 길에 기원전 195년 11월 산동성 곡부에 있는 노남궁(魯南宮, 魯泮宮)에서 머물 때 신배공(申培公)의 주선으로 공자에게 제사를 올렸습니다. 그래서 한나라가 유가를 국학으로 삼아 400년 동안 유지하였던 명맥이 바로 곡부에 있습니다. 주자는 송나라의 공자이며 맹자입니다. 북송시기 여러 유학자의 학술을 주자가 집대성하였으나 주자학 금지(禁學)가 가태 연간(嘉泰, 1201-1204)과 개희 연간(開禧, 1205-1207)의 교체시기에 가장 심하였는데 관직에서 몰아내고 감금하여 편안한 날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명나라에 와서는 주자학이 크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성현을 반드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나라 말기와 한나라, 송나라 말기와 명나라를 비교하면 성현의 학술이 흥하고 망하는 결과가 어떤지 아주 잘 나타납니다! 작은 산(山)이나 좁은 강물(水)도 문인이나 시인들이 가는 것에는 호사가들이 누가 갔다고 이름 짓고 산수의 풍경을 노래하여 전해오는 작품들이 아주 많습니다. 휘주부 흡현은 주자의 조상이 살던 고향이며 더구나 주자를 제사 지내는 사당은 남쪽지방의 궐리(闕里, 공자의 주거지)인데 자양서원의 흥망성쇠도 시대의 운세에 달려있기에 주자 학술도 천지의 성쇠와 함께 유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휘주부 지부 웅계의 배움은 계승한 것이 있기에 급선무를 잘 알았고 학생 정증(程曾)이 자양서원의 기록들을 모아 영원토록 좋은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는 제사가 이어지고 제사 노래가 끊이지 않도록 하고 주자의 성명경의(誠明敬義) 학술은 쇠퇴하지 않고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 저 같은 평범한 사람은 여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으나 당고(唐皐) 때문에 서문을 지어 서적 앞에 이름을 올려 여러 현인과 나란히 하였는데 평생에 가장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지부 응계이며 자가 세방(世芳)이며 남창부 신건현(新建縣) 출신이며 현재 산동성 좌참정입니다. 학생 정증(程曾)은 자(字)가 사로(師魯)이며 열심히 공부하며 과거시험에 매달리지 않고 저술도 많고 저술도 많은데 『자양서원집(紫陽書院集)』은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청(顧清, 1460-1528), 「紫陽書院集序」:
출처 : 顧清(1460-1528),『東江家藏集』,卷二十。
新安郡守熊侯(熊桂),重作紫陽書院。成,院之諸生程君師魯,言於其黨曰︰“書院,自宋來興替不常,遷改非一。考其規制,未有如今日之備,其形勢,未有如今日之勝,至於作新佑啟、崇教善俗之心,亦未有如侯之盛者。昔魯僖興學,邦人頌之,列於聖經,今誠不能及,已有如即侯之故,類而輯之,如南康白鹿之例,使嗣而來者有述焉,以永於弗墜,斯豈非遊於是者之責乎?”乃考諸紫陽遺文、『朱子實紀』,以至金石之所刻、公牘之所具,凡關於斯院者,手編錄之,分爲四卷。又取宋以來,儒先奠享之文,與夫序啟銘詩之類,別爲附錄,以次其後,總名之曰『紫陽書院集』。將刻梓院中,而告於翰林修撰唐君守之(唐臯,1469-1526,1514年(乙亥)進士),守之自書院而登名者也,間以示予,且傳師魯意,屬爲之序。
惟聖賢之道,與天地相爲流通,其顯晦絕續,實關時之否泰。春秋戰國有仲尼、子輿而不用,秦人並與其書焚之,而過魯一祀,漢家四百年之命脈,於是乎在。紫陽夫子(朱子),亦宋之宣父、孟軻也。諸儒之學,至夫子集其大成,而學禁之嚴,乃獨甚於嘉泰、開禧之際,放黜廢錮,殆無寧日,蓋直至我朝,而後始大行焉。將所謂聖賢者,道固若是,而衰周之與炎漢,晚宋之與皇明,得失之效,不亦昭哉!其甚明邪。一山一水,文人墨客之所遊歷,好事者猶或指而名之,歌詠而傳之,至累牘連篇而不厭。況新安朱子之舊鄉,而紫陽之祠,實南方之闕里,其廢與興,關乎時運,而其爲道與天地相爲流通者哉!
熊侯學有本源,故能知所先務,程君又能裒集其事,以風示於無窮。今而後使俎豆之常新、弦歌之相續,誠明敬義之學,不替而愈隆,夫庸知非此之助,而予因守之(唐臯)以得掛名篇首,與諸賢齒,亦豈非平生之至幸哉!熊侯,名桂,字世芳,洪都新建人,今爲山東布政司左參政。程君,名曾,其字曰師魯,力學慕古,不徇時名,所著述甚富,此蓋其一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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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顧清(1460-1528),『東江家藏集』
「四庫提要」︰
清(顧淸,1493年進士),學端行謹,砥礪名節,當正德時,諫疏凡十數上,嘉靖初,力請停遣旗校,於時政皆有所獻替。其詩清新婉麗,天趣盎然;文章簡練,淳雅自嫻,法律當時。何(何景明,1483-1521)、李(李夢陽,1473-1530)崛興,文體將變,清獨力守先民之矩矱,雖波瀾氣焰,未能極俶奇偉麗之觀,要不謂之正聲,不可也。在茶陵一派(李東陽,1447-1516)之中,亦挺然翹楚矣。
乾隆四十四年九月恭校上。
唐臯(1469-1526),字守之,號心庵(一作新庵),別號紫陽山人。南直隸徽州府歙縣巖鎮(今安徽黃山市徽州區巖寺鎮)人。明正德年間狀元,官至侍講學士兼經筵講官。曾奉旨出使朝鮮,是中朝交流史上的重要人物之壹。『明史稿』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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