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두 의학박사의 요양병원 이야기(41)
부모가 죽으면 청산에 묻고 자녀가 죽으면…
90세인 장 할머니는 심부전과 치매, 척추압박골절 등으로 3년 전에 입원하셨다. 치매 증세가 있었지만 종종 맑은 정신이 돌아오면 자주 우셨다.
“선생님, 제 아들이 죽었어요. 아들이 보고 싶어요. 아들이 보고 싶어 저승에 빨리 가보고 싶어요.”
수년 전에 죽은 아들을 기억하며 슬픔에 젖는 것이다. 평균수명이 길어져 오래 살다 보니 자녀가 먼저 죽는 경우를 종종 본다.
치매 증세가 있을 때는 아들 일을 잊어버리고 행복해 보이지만 본정신이 돌아오면 슬퍼하며 불행해지는 것이다.
이런 분을 보면 치매란 슬픔을 지닌 노령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82세인 김 할아버지는 8년 전 폐암, 신장암 진단을 받았으나 말기인지라 치료를 거부하고 4년 전부터 투석치료만 해왔다. 말기암이지만 노령에서는 진행이 늦어 아직까지 살아계신 것이다. 아내를 사별하고 큰아들 집에서 지내다가 큰아들마저 죽자 둘째 아들 집에서 살았다. 주 3회 하는 투석치료와 기력저하로 며느리가 도저히 모실 수가 없어 올해 초에 본원에 입원하였다.
올 3월에 환자가 코로나에 걸려 위독해져 큰 병원으로 모시고 가야 한다고 며느리에게 전화하니,
"선생님, 저도 코로나에 걸려 격리 중입니다. 큰 병원에 모시고 갈 사람이 없습니다. 돌아가셔도 어쩔 수 없으니 병원에서 어쨌든 알아서 해주십시오.”
듣고 보니 참으로 딱하지만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회진을 할 때 이분은 종종 말한다.
“아들이 꿈에 자주 보입니다. 아들이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지만 (말기암 진단을 받고도 8년이 지난) 지금까지 산 것을 보면 죽는 것도 복이 있어야 하는 것 같네요.”
잘 살기도 어렵지만 잘 죽기는 진짜 힘들다.
20대 후반 부산대학교병원에서 응급실 인턴을 할 때이다.
여름날이었는데 한 청년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여 들어왔다. 한두 시간이 지나니 남루한 삼베 적삼을 입은 노모가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응급실로 들어왔다. 얼굴에 덮은 흰 천을 벗겨 아들의 사망을 알리니 우리 아들일 리가 없다며 말하더니 마구 울었다.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던 노모가 울음을 잠시 그치더니 갑자기 눈에 불꽃이 튀며 악마처럼 변해 아들의 가슴을 마구 때렸다.
“잘 죽었다, 이놈아, 엄마 마음을 이렇게 아프게 하고…. 잘 죽었다, 이놈아. 엄마에게 이렇게 큰 고통을 주고 니가 살 것 같으냐? 이놈이 이제 보니 전생에 원수였구나. 원수 놈이었어.”
노모를 간신히 떼어놓으니 침상 아래 주저앉아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하염없이 울었다. 시신을 영안실로 모시고 가려고 하니 노모가 필사적으로 거부하고 얼굴에 천도 덮지 못하게 했다.
당시는 20대라 노모의 아픔을 잘 알 수가 없었지만 지금 다시 그런 상황을 만난다면 노모의 팔을 잡고 같이 울어줄 것 같다.
중학생 딸을 사고로 잃은 후배를 만난 적이 있다.
“정말로 허무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상상도 못했어요. 딸이 죽고 나니 평소 잘 못해준 것만 생각납니다. 자녀가 살아 있는 것만 해도 얼마나 행복이었는지 이제야 깨달았어요. 다른 사람과 만날 의욕도 없고, 음식을 먹을 수도 없고, 잠을 자기도 어렵고 사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고 공황상태가 몇 달이나 갔어요. 죽고 나니 그렇게 귀엽고 예뻤던 딸이 한 줌 재로 변하다니…. 자녀가 죽는 것을 겪어보니 부모님 돌아가신 것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비통했습니다.”
요양병원에 있다 보면 많은 죽음을 보지만 자식을 먼저 보내는 슬픔만큼 큰 아픔은 없을 것이다. 부모가 죽으면 청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더니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좋은 학교 못 가도 되고, 좋은 직장 못 구해도 되니 자녀들 너무 닦달하지 말고 살아있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을 때 마음껏 사랑하고 안아줄 수 있을 때 마음껏 안아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