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MKkHoyrPoqY?si=xTy2JtX1qTriTYcF
3 정념 ③
세 번째 확립은 마음(心) 그 자체에 대한 전념이다. 마음을 안다고 하는 것은 정신의 형성(心行)을 안다는 것이다. ‘형성(心行)’은 전문적인 불교 용어다. ‘형성된’ 것, 즉 다른 것으로 만들어진 것은 모두 하나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꽃은 형성이다. 화 역시 형성, 즉 정신의 형성 다시 말해서 심행인 것이다. 심행 중에 어떤 것들은 항상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보편자(遍行)’ 라고 부른다.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과 사(思)가 그것이다. 특별한 상황 아래서만 일어나는 것도 있다. 욕(欲), 승해(勝解), 념(念), 정(定)과 혜(慧)가 그에 해당된다. 심행 중 어떤 것은 정신을 고양시켜 고통을 바꾸는 데 도움을 주고(그래서 건전한 또는 이로운 심행이라고 함), 또 어떤 것들은 정신을 무겁게 만들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그래서 불건전한 또는 이롭지 못한 심행이라고 함).
수면(睡眠), 회(悔), 심(尋), 사(伺)와 같은 심행은 건전할 때도 있고 건전하지 못할 때도 있다. 심신이 휴식을 필요로 할 때 수면은 건전한 것이다. 그러나 종일 잠만 잔다면, 그것은 건전하지 못한 것이 된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뉘우친다면, 그 뉘우침은 건전한 것이다. 그러나 그 뉘우침이 앞으로 할 일에 악영향을 주는 죄의식으로 이어진다면, 그 뉘우침은 불건전한 것이다. 생각은 사물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 이로운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을 때의 생각은 이롭지 못한 것이다.
우리의 의식에는 신(信), 참(慚), 괴(傀),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 정진(精進), 경안(輕安), 불방일(不放逸), 행사(行捨)와 불해(不害)와 같이 아름다운 면도 많다. 이와 달리 불건전한 심행은 마치 뒤엉킨 실타래와도 같은 것이다. 그것을 풀어보고자 몸 둘레를 빙빙 돌며 감았다가는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마는 법이다. 이러한 심행은 번뇌(煩惱)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나와 남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올바른 길을 잃게 하므로 장애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마친 깨진 병과도 같기 때문에 물이 새거나 제구실을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유루(有漏)라고 부르기도 한다. 근본적인 불건전한 심행으로는 탐(貪), 진(瞋), 치(癡), 만(慢), 의(疑) 그리고 악견(惡見)이 있다. 이로부터 일어나는 부차적인 불건전한 심행으로는 분(忿), 한(恨), 첨(諂), 무참(無慚), 질(嫉), 간(慳), 광(誑), 복(䨱), 도거(掉擧), 해(害), 무괴(無愧), 교(憍), 혼침(惽沈), 뇌(惱), 불신(不信), 해태(懈怠), 방일(放逸), 실념(失念), 산란(散亂)과 부정지(不正知)가 있다. 불교의 유식파(唯識派)에 따르면 느낌을 포함해서 모두 51종류의 심행이 있다고 한다. 느낌은 전념의 두 번째 확립 대상이므로, 나머지 50가지는 전념의 세 번째 확립 대상의 범주에 들어간다.
하나의 심행이 일어날 때마다 있는 그대로 인지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 마음이 흔들릴 때, ‘내 마음이 흔들린다.’고 말하면 이미 전념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흔들림을 흔들림으로 인지하기 전에는 그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해 무엇이 왜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전념을 수행한다고 해서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면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흔들리는 마음은 좋은 친구다. 그 때문에 전념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마음의 흔들림이 의식에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그것은 씨앗의 형태로 장식 속에 존재한다. 심행은 모두 씨앗의 형태로 장식 속에 있다. 어떤 행동을 통해 흔들림이라는 씨앗에 물을 주면 비로소 흔들림이 의식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나타나는 모든 심행은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그것이 건전한 것이라면 전념을 통해 강화될 것이다. 불건전한 것이라면 전념을 통해 장식으로 되돌아가서 잠자코 있게 될 것이다. 마음의 흔들림은 자신만의 문제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것은 사회와 수많은 세대를 걸쳐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개인의식은 집단의식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집단의식은 개인의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둘은 따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개인의식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집단의식을 접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 선 그리고 행복이라는 관념은 동시에 사회적인 관념이기도 한 것이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패션 디자이너들은 이듬해 봄에 유행하게 될 패션을 선보이는데, 우리는 집단의식이라는 렌즈를 통해 그들이 선보인 작품을 보게 된다. 우리가 유행에 걸맞는 옷을 사게 되는 것은 집단의식이라는 눈을 통해 사물을 보기 때문이다. 아마존강 상류의 오지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런 옷을 사는데 그만한 돈을 쓰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 사람은 그런 옷이 아름답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글을 쓸 때면 우리는 집단의식과 개인의식 양자를 통해 글을 쓰게 된다.
우리는 대개 의식과 장식을 서로 다른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장식은 좀 더 깊은 단계에 있는 의식에 다름 아니다. 심행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 뿌리가 장식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념은 의식의 깊은 곳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데 도움을 준다. 51가지의 심행이 일어날 때면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고 깊숙이 들여다봄으로써 그 무상하고 상즉적인 성질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런 식으로 수행을 하면, 두려움, 슬픔 그리고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여러 가지 불길에서 벗어나게 된다. 전념을 통해 즐거움과 슬픔을 비롯한 모든 심행을 감싸 안으면 조만간 그 깊숙한 뿌리를 보게 될 것이다. 전념을 수반한 걷기와 호흡을 잠시라도 멈추지 않는다면 심행의 뿌리를 보게 된다. 전념의 빛을 그것에 쏘이면 그것의 성질을 바꾸는데 도움이 된다.
네 번째 확립은 법 그 자체에 대한 전념이다. ‘법’은 ‘마음의 대상’을 뜻한다. 각각의 심행에는 그 대상이 있어야 한다. 화가 났다면, 누군가나 무엇인가에 화를 내고 있는 것으로 그때 그 사람이나 사물은 마음이 대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누군가나 무엇인가를 기억할 때 그것은 마음의 대상이 된다. 심행이 51가지이므로 마음의 대상 역시 51가지가 된다.
새가 우는 소리를 들을 때 그 소리는 마음의 대상이 된다. 푸른 하늘을 볼 때 그것은 마음의 대상이 된다. 촛불을 보고 있으면 저것은 촛불이라는 생각이나 그 이미지가 마음에 떠오른다. 지각의 대상은 표시(能相)다. 지각에 해당하는 한문 상(相)은 표시와 마음에 해당되는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지각은 마음속에 반영된 표지, 즉 이미지다.
‘법의 구명(擇法)’은. 7각지(覺支)의 하나다. 법을 관찰할 때 다음의 다섯 가지 명상법을 행하면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도움이 된다. (1)수식관(數息觀) (2)연기관(緣起觀) (3)부정관(不淨觀) (4)자비관(慈悲觀) (5)계분별관(界分別觀).
계(界)란 무엇일까? 먼저 18개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눈(眼), 모습(色=시각의 대상)과 보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 이것을 안식(眼識)이라고 부른다. 귀(耳), 소리(聲)와 듣는 일과 연관된 의식(耳識). 코(鼻), 냄새(香)와 냄새 맡는 일과 연관된 의식(鼻識). 혀(舌), 맛(味)과 맛보는 일과 연관된 의식(舌識). 몸(身), 접촉(觸)과 접촉하는 일과 연관된 의식(身識) 마음(意), 마음의 대상(法)과 의식(意識). 이 18계 때문에 삼라만상이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8계를 깊숙이 들여다봄으로써 그것의 본질과 원천을 알게 되면 무명(無明)과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게 된다.
여러가지 계에 대한 말씀에서 부처님은 우리의 모든 걱정과 어려움은 사물의 진면목 또는 참된 표시를 볼 수 없는 데서 비롯된다고 가르치셨는데, 그 뜻은 우리는 사물의 모습을 본다 해도 그것이 가진 무상하고 상즉적인 성질을 인지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만일 두렵거나 불안하다면 그 두려움과 불안의 근저에는 아직 모든 법의 참된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18계를 자세히 살펴보고 깊이 들여다본다면, 무지를 고치고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어느 날 좌선을 하고 있는 도중 아난존자는 모든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불행은 육체 및 심리적 현상의 참된 성질을 알지 못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중에 그는 이것이 올바른 견해인지를 부처님께 여쭈어보았는데, 부처님은 그렇다고 말씀하시면서 처음으로 18계를 통찰해야 할 필요에 대해서 설명하셨다. 그때 아난이 여쭈었다. “다른 방법으로 18계를 통찰하는 것도 가능합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 육대가 그것이다.” 이것은 지,수,화,풍의 4대에 공간과 의식을 더한 것이다. 모든 육체적 현상은 6대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몸의 안팎에 있는 6대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우주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통찰력을 얻게 되면 생과 사라는 관념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은 아난에게 6계, 즉 행복, 고통, 기쁨, 걱정, 평정과 무지를 가르치셨다. 행복은 참된 것일 수도 있고, 기만적인 것일 수도 있기에 그 본질을 꿰뚫어보고는 집착을 떨쳐버려야 한다. 참된 행복은 남과 나를 살찌우고 이롭게 하는 것이다. 기만적인 행복은 일시적인 쾌락을 통해 고통을 잊게 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그 이로움은 지속될 수 없는 것이기에 실제로는 술이나 담배처럼 해로운 것이다.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이 있을 때 그것을 깊숙이 들여다본다면 우리의 행복을 되찾는 데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사실 고통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뜻함을 즐기고 고마워할 줄 알려면 추위라는 고통을 알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기쁨의 영역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그것이 진짜인지 아니면 그저 고통과 걱정을 덮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병이라고 할 수 있는 걱정은 주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평정은 늘 해야 하는 수행으로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다. 배를 타고 베트남을 탈출했던 한 여인은 망망대해에서 가지고 있던 재물을 모두 빼앗기고는 너무나 기가 막힌 나머지 자살할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상륙해 입고 있던 옷마저 빼앗긴 사람을 만나서 그가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커다란 마음의 위안을 받았다. 그는 정말로 평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평정은 자유를 가져다주고 자유는 행복의 유일한 조건이다. 마음속으로 여전히 어떤 것, 이를테면 분노, 걱정과 재물에 집착하고 있다면 자유로워질 수는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