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다음에는 욕설과 학대가 쏟아지고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 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가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장면이 나오고, 결국 그는 조롱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외침이 나온다.
블라바츠키 부인은 『비밀의 교리 Secret Doctrine』에서 그 말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설명한 이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주께서 저를 영예롭게(glorify) 하십니까!" 두 가지 번역 중 어느 것이 더 정확할지는 모르겠지만 두 가지 표현 모두에 큰 진실이 있다.
네 번째 입문의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이 완전히 홀로 남겨진다는 것이다. 먼저 그는 물질계에서 홀로 서야 하고, 모든 친구들이 어떤 오해로 그에게 등을 돌리는데, 바로 그 후 그 모든 것이 그에게 다가오지만 그 시간 동안 모든 세상이 그를 반대한다는 느낌으로 남겨진다.
그것이 그다지 큰 시련은 아닐지 모르지만 거기엔 또 다른 내면적 시련의 측면이 있다. 그는 잠시 동안 아비치(Avichi)라는 상태를 경험해야 하는데, 이는 "파동이 없는(waveless)", 즉 진동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아비치의 상태는 흔히 생각하는 (종교에서의) 지옥은 아니지만, 우주에서 절대적으로 홀로 서서 모든 생명, 심지어 로고스의 생명과도 단절된 느낌을 받는 상태이며 의심할 여지 없이 모든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경험이다. 그것은 한 순간 동안만 지속된다고 말하지만, 그 극도의 공포를 느낀 사람들에게는 영원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 수준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이 끔찍한 시련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어 보인다.
첫째는, 입문의 후보자는 아비치가 자신의 카르마의 결과로 자신에게 온다는 것에 충분히 공감할 수도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로고스와 고립되었다는 느낌으로 인한 압도적인 경악감이 사실은 환상과 유혹에 지나지 않으며, 그가 로고스와 하나라는 것을 완전한 확신으로 의기양양하게 자신이 외부의 모든 것과 완전히 분리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끔찍한 시험 앞에서 쓰러져 되돌아가서 입문을 향한 등반을 다시 시작해야 했지만, 이 끔찍한 악몽을 뚫고 굳건히 일어설 수 있는 사람에게는 이 시련 자체가 참으로 무시무시한 경험이기 때문에, 시련에 대해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라는 해석이 적용될 수 도 있지만, "주님께서 참으로 저를 영예롭게 하시는군요“라며 시련에서 승리하고 나오는 사람의 느낌을 표현할 수도 있다.
이 입문은 고통과 승리라는 기묘한 이중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입문들과는 다르다. 이전의 각 입문은 그리스도교 체계에서 탄생, 세례, 변모라는 하나의 명확한 사실로 상징되었지만, 이 네 번째 입문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사건이 필요하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힘과 그 정점에서의 모든 다양한 고통들이 이 입문의 한 측면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고, 죽음을 이겨낸 부활은 또 다른 측면을 나타내었다. 이 단계에는 항상 육체, 아스트랄, 멘탈의 고통이 있으며, 항상 세상의 비난과 명백한 실패가 있으며, 항상 더 높은 차원에서의 화려한 승리가 있지만 외부 세계에는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이 입문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독특한 유형의 고통은 입문자의 앞길을 가로막는 카르마의 지체를 제거해준다. 그리고 그가 이 역경을 인내하고 기쁨으로 견뎌내는 일은 그 자신의 인물됨을 강화하는 데 큰 가치가 있으며, 앞으로의 일에서 그가 얼마나 쓸모가 있는지를 결정하는데 도움이 된다.
따라서 실제 이 입문을 상징하는 십자가와 부활은 고대 이집트의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묘사된다.
사흘 밤낮을 맑게 지내고 사흘이 지난 후에야, 그 고대의 아직 넋이 나간 후보자는 그가 누워 있던 석관에서 일어나 피라미드나 신전의 동쪽의 바깥 대기에서 다시 태어나 떠오르는 태양의 첫 광선이 그의 얼굴에 떨어지자 긴 잠에서 깨어났다.
옛 속담에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고 했는데, 인간이 물질계로 내려가 물질의 십자가에 매이지 않았다면 부활을 얻고 영광의 면류관을 쓰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그 한계와 슬픔과 수난을 통해 승리를 얻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우리가 그 부활을 묘사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단어는 그 부활의 영광을 더럽히는 것 같고 그것을 묘사하려는 모든 시도는 거의 신성 모독으로 보이지만, 모든 슬픔, 고난과 어려움, 유혹과 시련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얻었고 지식과 내면의 힘으로 정복했기 때문에 그것들은 영원히 그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붓다께서 자신의 자유를 어떻게 선포했는지 기억해보라.
수많은 삶의 터전들
나는 슬픔 투성이의 감각의 감옥들을 초래한
그를 찾던 중에 그는 나를 붙잡아주었습니다.
나의 끊임없는 투쟁은 너무나도 극심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예배의 장막을 지은 당신!
나는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 고통의 벽을 쌓지 마시고,
기만의 집을 세우거나
진흙 위에 새로운 들보를 놓지 마시기를!
당신의 집은 무너졌고, 대들보는 갈라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망상이 지어낸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안전하게 지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