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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과 위무의 시학/ 김종태(시인, 호서대 겸임교수)
1.
마경덕의 시 곳곳에는 따뜻한 인간의 체취가 배어 있다. 사물, 공간, 자연, 이웃, 가족 등등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자상한 관심을 통하여 시인은 세계와 자아의 합일을 향한 동일성의 시정신을 구현한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전형적인 서정시의 품격을 잘 갖추고 있어서 읽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만든다. 그의 시어는 굴절과 왜곡을 지향하는 실험의 언어가 아니라 주관과 객관의 융합을 추구하는 서정의 언어이다. 시인은 개성 있는 시선을 통하여 세계 안에 내재한 시적 순간과 상황을 읽어낸다.
마경덕의 시선이 가장 자주 머무는 곳은 오래되어 쇠락해 가는 사물들이며 동시에 그 사물들이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들의 소멸만을 말하지 않고, 점점 더 쓸모없는 것이 되어 가고 있는 사물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준다.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일상의 공간은 낡고 빛바랜 존재들로 가득 차 있지만 시인은 소멸하는 존재를 위무하고 연민하는 상상력을 보이고 나아가 그 타락한 사물이 지닌 존재론적 의미를 다시금 읽어낸다. 시인의 등단작이면서 이번 시집의 표제시인 [신발論]은 이러한 인식 태도를 잘 보여준다.
2002년 8월 20일
묵은 신발을 한 무더기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 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 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 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신발論] 전문
이 시의 첫 구절은 시인이 쓴 일기의 한 구절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시는 수필적 문체와 시적 문체를 잘 조화시키는 작업을 시도한 셈이다. 시인이 묵은 신발 한 무더기를 버렸을 때에는 분명 '나' 는 주체였고 '신발들'은 객체였지만, 시인은 반성적 사유를 통하여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전복시킴으로써 내가 신발을 버린 행위는 곧 신발이 나를 버린 행위로 전이된다. 반 고흐의 그림 '구두' 를 논한 하이데거의 글을 빌리면, 마경덕의 신발은 스스로 존재의 은폐성을 깨고 이 세계를 향하여 그 존재성을 현현시키고 있는 중이다. 새 신발이 아닌 "묵은 신발"이 그 존재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은 일종의 역설이다. 신장 속에서 오랫동안 가려져 있던 신발의 존재성을 이제야 인식한 시인은 두 가지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첫째, 신발은 오랜 시간 동안 '나' 를 싣고 다닌 배였으므로 그 배와 '나' 의 분리로 인하여 '나' 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수단 하나를 잃게 되었다는 것이며, 둘째, 신발이 떠나는 곳은 인간의 세속 잡사가 사라진 "먼 바다"와도 같은 곳인데 '나'는 그곳으로 신발과 동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깨달음을 통하여 시인은 신발이 자신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이러한 각성은 자신에 대한 반성적 성찰로 인해 가능했다.
희고 매끄러운 널빤지에 나무가 걸어온 길이 보인다. 나무는 제 몸에 지도를 그려 넣고 손도장을 꾹꾹 찍어 두었다. 어떤 다짐을 속 깊이 새겨 넣은 것일까. 겹겹이 쟁여둔 지도에 옹이가 박혔다.
생전의 꿈을 탁본 해둔 나무, 빛을 향해 달려간 뿌리의 마음이 물처럼 흐른다.
퉤퉤 손바닥에 침을 뱉는 목공. 완강한 톱날에 잘려지는 등고 선.피에 젖은 지도 한 장 대팻날에 돌돌 말려 나온다. 죽은 나무의 몸이 향기롭다.
-[목공소에서] 전문
효용론적으로 보면 [신발론]에 나오는 신발은 원래적 소용을 다 해버린 존재이지만, [목공소에서]에 나오는 나무는 식물로서의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존재 형태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나무가 가구나 집기로 변하면 숲 속의 나무라는 본래적 존재성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시인은 읽고 있는 "나무가 걸어온 길"은 이 목공소를 분수령으로 하여 끝이 나게 된다. 겹겹이 쟁여둔 지도에서 옹이를 발견함으로써 시인은 그 나무가 걸어온 생의 질곡과 역경을 읽어내지만 나무가 탁본해 놓은 꿈은 이제 다만 "생전의 꿈"에 지나지 않음을 안다.
그러나 시인은 "빛을 향해 달려간 뿌리의 마음" 을 위로하며 나무의 전생前生을 감싸 안는 태도를 보인다. 대팻날에 말려나오는 나무의 흔적들이 향기로움으로 전이되는 순간, 죽음의 제의는 완성된다. 이 시는 정령적 세계관을 내포한다. 이와 같은 세계관은 목공소의 나무가 다른 생으로 선택한 가구를 형상화한 "열 자나 되는 몸통을 지붕 아래 세우고/방바닥에 뿌리를 내린/묵은 나무 한 그루/어깨를 안아보니/우듬지로 오르는 물소리 들린다/가구는 아직 숲을 기억하는지/발 아래 무성한 그늘을 늘어뜨리고"([오래된 가구])라는 부분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위의 시들이 사물에 관한 것이라면, 다음 시는 사물과 인간을 함께 아우르는 시선을 보여준다.
지지난 봄, 집 앞에 들어선 연립 한 동, 분양을 알리던 현수막은 바람에 시들었다. 해를 넘겨도 팔리지 않는 집. 빈방에 어둠이 살고 있다. 빛바랜 만국기를 붙들고 집이 생각에 잠기는 동안 어둠이 야금야금 집을 뜯어 먹는다. 하수구를 막고 지붕을 걷어내고 벽에 금을 긋는다. 불법 입주한 어둠은 난폭한 세입자, 뒤꼍에 모여 이 곳에 뼈를 묻자고 소곤대는 소리에 벽지가 풀썩 무너져 내렸다. 빈둥빈둥 집이 늙고 5층 꼭대기로 벽돌을 져 나르던 늙은 여자는 노임을 포기하고 떠났다. 어둠이 옥탑으로 올라간 뒤 목을 뽑고 내려다보던 건달 같은 사내도 보이지 않는다. 가래침을 뱉고 뒤꼍으로 꽁초를 던지던 사내마저 치우고, 집은 덩그렇다. 마당에 그림자를 내려놓고 잠든 빈집. 창문은 서랍처럼 닫혀있다.
-[빈둥빈둥 늙는 집] 전문
시인이 이시를 통하여 우선 들려주고자 하는 것은 "늙는 집" 에 관한 이야기이다. 완성 단계에 이른 연립 한 동이 왜 이렇게 방치되게 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를 찾을 수는 없지만, 주택으로서 소용되지 못한 채 낡아가고 있는 이 집의 모습은 음험함의 정서를 뚜렷이 환기시킨다.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나본 적도 없이 늙고 있는 이집은 결국 집의 주인이 떠나가 버린 폐가나 다름 아니다. 새 집으로서의 존재 회복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지고 결국 하수구도 막히고 지붕도 걷히고 벽은 금이 가는 상황에 이르렀다.
시인은 다시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은근슬쩍 꺼내 놓는다. "빈둥빈둥 집이 늙고 5층 꼭대기로 벽돌을 져 나르던 늙은 여자는 노임을 포기하고 떠났다. 어둠이 옥탑으로 올라간 뒤 목을 뽑고 내려다보던 건달같은 사내도 보이지 않는다. 라는 구절에서 보이듯 이들은 모두 가난한 뜨내기 인생들이다. 막노동을 하던 늙은 여자와 건달같이 지내던 사내는 둘 다 "빈둥빈둘 늙는 집" 과 같이 영락零落한 조내인데 이들은 누추한 집조차도 가져 보지 못했을 것이다. 사물에 대한 연민이 사람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이 시는 말해 준다.
2.
마경덕의 시에는 화해의 양식과 불화의 양식이 공존한다. 불화의 시정신은 시인이 그가 발 딛고 있는 세계 현실의 폐단과 불합리를 보았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며, 화해의 시정신은 그러한 세계의 비극성이 지대함에도 불구하고 그 정화의 가능성을 믿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요컨대 마경덕의 시의식은 어떠한 상황 인식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절망감에 이르지 않은 채 궁극적으로는 화해의 세계를 지향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화해의 여지와 가능성을 담보하는 것이 사랑과 연민의 시정신이다. 이러한 시정신은 여러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시인을 눈물짓게 하는 것도 사람이며 시인이 끝내 사랑할 수밖에 없는 대상도 사람이었다.
끈을 놓치면 푸드득 깃을 치며 날아간다
배봉초등학교 운동회, 현수막이 걸린 교문 앞, 깡마른 노인이 헬륨가스를 넣고 있다. 날개 접힌 납작한 풍선들. 들썩들썩, 순식간에 자루만큼 부풀어오른다. 둥근 자루에 새의 영혼이 들어간다.
풍선 주둥이를 묶는 노인. 하나 둘, 공중으로 떠오르는 새털처럼 가벼운 풍선들. 절정에 닿는 순간 팡. 허공에서 한 생애가 타버릴, 무채색의 한 줌 영혼이 끈에 묶여 파닥인다. 평생 바람으로 떠돌던 노인의 영혼도 낡은 가죽부대에 담겨있다.
함성이 왁자한 운동장, 공기주머니 빵빵한 오색풍선들, 첫 비행에 나선 수백 마리 새떼 하늘로 흩어진다. 뼈를 묻으러 공중으로 올라간다.
-[날아라 풍선] 전문
순식간에 부풀어 오른 수소 '풍선' 이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나서야 하는 상황에 있는 존재라면, 노인' 은 평생 바람으로 떠돌다 이제는 죽음 가까이에 와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 두 존재 모두 머지않아 소멸의 순간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은 마찬가지이다. 풍선에게 죽음은 곧 절정이라면, 노인에게 죽음은 절정의 의미보다는 파국의 의미를 더 크게 지닌다. 풍선은 제 꿈을 펼치기 위해서 새털처럼 가볍게 공중으로 향하고 그럴수록 죽음의 시간은 임박해 온다. 그러나 부초처럼 떠돌던 노인의 생애를 두고 새털처럼 가벼웠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바슐라르에 빌리면 인간은 하늘을 날고 싶은 공기적 상상력을 꿈꾼다. 그러나 하늘을 지향하는 역동적 상상력은 중력이라는 거대한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인간이 새나 바람처럼 이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인은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수소 풍선을 만들어 오면서 새처럼 날아가는 그 풍선을 보고 대리 만족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인은 "평생 바람으로 떠돌던" 노인이 하늘로 날아가는 풍선을 만드는 모습을 보면서 묘한 역설의 순간을 확인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로 날아간 풍선은 그것을 만들어준 노인보다 더 빨리 소멸해야 하는 운명을 지녔다. 수소 풍선의 원리가 주는 허망함은 또한 인간의 삶을 닮았다. "뼈를 묻으러 공중으로 올라간다". 라는 구절에 이르러 허무의식은 강화한다. 요컨대 이 시는 풍선의 모습과 노인의 생애를 묘하게 대비시키면서 애잔한 슬픔을 자아낸다.
"가죽부대에 담겨" 머지않아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노인의 영혼" 에 대한 연민은 [어느 날, 앞집 남자-랩(rap)풍으로]에서는 불의의 죽음을 당한 홀아비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지기도 하며, [조등]에서는 조문객 하나 없는 쓸쓸한 죽음에 대한 애도의 마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전자가 경쾌한 리듬을 구사하면서 비극적인 서사를 반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면 후자는 고도로 압축된 시행을 통하여 허전한 죽음의 공간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연기가 자욱한 돼지곱창집
삼삼오오 둘러앉은 사내들
지글지글 석쇠의 곱창처럼 달아올라
술잔을 부딪친다
앞니 빠진 김가, 고기 한 점 우물거리고
고물상 최가 안주 없이 연신 술잔을 기울인다
이 술집 저 술집 떠돌다가
청계천 하류로 떠밀려 온 술고래들
어느 포경선이 던진 작살에 맞았을까
쩍쩍 터진 등 감추며 허풍을 떠는
제일부동산 강가, 아무도 믿지 않는 얘기
허공으로 뻥뻥 쏘아 올린다
뭍으로 밀려난 고래들, 돌아갈 수 없는
푸른 바다를 끌어 와 무릎에 앉힌다
새벽이 오면 저 외로운 고래들
하나 둘, 불빛을 찾아 떠날 것이다
파도를 헤치고 무사히 섬에 닿을 수 있을지...
바다엔 안개가 자욱하다
스크루처럼 씽씽 곱창집 환풍기 돌아간다
-[고래는 울지 않는다] 전문
한때 대양을 누비는 고래처럼 활기차게 살았던 사내들이 이제는 돼지곱창집 화덕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술잔을 나누는 술고래가 되었다. 어떤 이는 앞니가 빠져 있고 어떤 이는 등이 쩍쩍 터져 있다. 그들의 모습과 행동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고단한 풍찬 노숙의 삶을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뭍으로 밀려난 고래" 라는 비유에서 알 수 있듯, 모진 삶의 이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가난과 소외뿐이었다. 그러나 거센 삶의 풍랑을 해치며 용감하고 건강하게 살아갔던 황홀했던 삶의 기억은 살아 있어 때론"돌아갈 수 없는/ 푸른 바다를 끌어 와 무릎에 앉"히는 상상도 해 보지만, 이러한 상상은 그들 가슴을 더욱 회한에 젖게 만든다. 이 술자리를 파한 후 그들이 다시금 찾아 가게 될 섬은 과연 그들 앞에 나타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시인의 시선은 어느덧 자욱한 안개에 와 닿고, 영락한 사내들을 향한 연민의 정이 깊어진다.
3.
타자를 향해 열린 사랑의 시정신을 구현하는 마경덕의 세계 인식 방법은 모성성에 대한 깊은 성찰에 이르러 더욱 밀도 있는 형이상학을 보여주게 된다. 일원론적인 시선을 통하여 죽음에서 삶을 읽어내기도 하며 삶에서 죽음의 기미를 발견하기도 하는 마경덕의 시는 생명의 원천이 여성성 혹은 모성성임을 자각하면서 생명의 시원인 모성성이 쇠락하여 가는 형상을 몹시 안타깝게 바라본다. 모성성의 쇠락에 대한 인식은 한 남자의 아내이며 두 아이의 어머니인 시인 자신에 대한 자의식과 깊은 관련을 지닌다. 스스로도 이미 여러 가지 모성적 체험을 한 시인은 죽음 가까이 다가선 어머니에 대하여 애달픈 마음을 지니고 있다.
나무도 똥을 눈다, 따신 바람 불면 겨우내 묵은 꽃똥을 일제히 싸대기 시작하는데,
오동도 동백숲, 나무 가랑이 밑에 똥덩이 널렸는데, 여기저기 용쓰는 소리 들리는데, 햐, 디딜 데 없는 똥밭이다.
이 놈들, 사람이 곁에 와도 엉덩이 까놓고 볼일 본다. 그늘에 앉은 연인들의 어깨에 철퍽, 봄마중 나온 아지매 얼굴에 철퍽,
당최 나올 것이 나오지 않는다. 변기에 앉아 연신 끙끙대는 어머니. 무엇이 그리 단단히 막혔을까. 길은 사라진지 오래. 살 길이 막막한 몸속에도 길이 있다는데, 들어가면 나올 길도 있다는데,
욕실 문 사이로 장작개비 같은 허벅지 보인다. 언제부턴가 문을 열어 두고 볼일을 보신다. 답답해, 답답해, 자꾸 문을 열어젖힌다.
붉은 동백을 다 피우신 어머니. 붉은 동백을 다 피우신 어머니. 서서히 몸이 닫히는 중이다.
-[꽃아, 뛰어내려라] 전문
'어머니'의 몸은 신진대사를 제대로 할 수 없는 '닫힌 몸'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도 아름다운 개화의 시절은 있었다. 그 시절로 인하여 현재 시인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삶이 가능하게 되었다.
아이를 낳고 길렀던 어머니의 몸은 지금 "장작개비 같은 허벅지" 를 가지게 되었고 그 힘든 모습을 보는 시인의 시선은 안타까움으로 가득 찬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붉은 동백을 다 피우신 어머니" 라고 말하면서 어머니의 생애가 지닌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서서히 몸이 닫히는 중이다". 라는 구절에 이르러 그 어조는 사뭇 잔잔해지지만 시인의 마음은 더 큰 슬픔으로 가득 찬다.
이러한 모성성에 대한 연민은 "링거를 달고 변기에 앉은 어머니. 기저귀를 갈아주는 자식놈에게 부끄러워 얼른 무릎을 붙이는, 옆구리에 두 개의 플라스틱 주머니와 큼직한 비닐 오줌보를 매단 어머니. 호스를 통해 세 개의 주머니에 채워지는 어머니의 붉은 육즙肉汁, 오십 년 간 수액을 건네준 저 고로쇠나무"([고로쇠나무]부분)라는 부분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소멸하는 모성성에 대한 애틋한 심정은 시인 자신의 모성성에 대한 자각을 통하여 더욱 간절해질 것이다.
죽을 쑤려고 호박을 자른다
뉴질랜드産 검푸른 단호박
자그만 몸뚱이, 어디에 이런 힘이 들었을까
칼날을 물고
텅,
도마에 텅, 텅,
온몸을 들이받고
돌덩이 같은 몸이 열린다
반으로 잘린 단호박 자궁
눈부신 속살
호박씨들 우굴우굴 엉겨있다
손을 넣어 끈끈한 호박씨를 긁어낸다
걸쭉한 피가 묻는다
움푹, 구덩이가 드러난다
세 번이나 도굴 당한 내 몸에도
구덩이가 파였을 것이다
-[단호박 자궁] 전문
사물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겉이 검푸른 단호박일지라도 그 속은 전혀 다른 색과 모양을 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사물의 물질적 존재성 또한 그러할진대 하물며 인간은 어떻겠는가! "걸쭉한 피가 묻는다" 라는 구절에 이르러 단호박의 몸은 인간의 몸으로 전이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몸은 늙어가고 있는 여자의 몸이며 시인 자신의 몸이다. 시인은 단호박 안에 있는 움푹 파인 구덩이를 보고 세 아이가 살다 나간 자신의 자궁을 생각한다. 자궁은 여성성의 가장 원형적인 상징이다. 이곳은 단호박의 속처럼 은밀하게 은폐되어 있다. 여성의 자궁 역시 생산의 시절을 지나가면 어쩔 수 없이 불모의 흔적을 남기고 만다. 이것은 시인의 비애이며 나아가 여성 모두의 비애이다. 그러나 이것이 비애로만 그칠 수 없다는 점을 단호박의 "눈부신 속살" 과 "우굴우굴 엉겨 있는 호박씨" 의 의미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마경덕의 시는 전통 서정시의 문법을 잘 지키면서 일상 속에서 직접 체험한 여러 국면들에 관한 형상화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서 화자와 시인은 늘 일체화한다. 그의 시는 난해하지 않으나 깊고 따뜻하여 언제나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하여 누추한 이세계의 모습을 애틋하게 껴안는다. 낡아가는 것들, 소멸하는 것들, 죽어가는 것들을 향한 시인의 태도에서 대지모성적 상상력을 자연스럽게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버림받은 사물과 상처 입은 이웃을 측은하게 여기는 사랑의 시 정신은 가족 특히 늙으신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형상화하는 시를 통하여 모성성에 대한 탐색으로 나아가기도 하였다. 자신의 모성성에 대한 천착에 이르러 마경덕 시가 지닌 형이상학은 한층 더 깊은 국면을 보여주게 된다. 세계의 불화와 인간의 불행을 모성으로 위무하는 연민의 시정신을 구현한 마경덕 시인은 앞으로도 계속 훌륭한 서정시의 전범을 튼실하게 보여주리라 믿는다. 처녀 시집이후 더욱 새롭고도 깊게 펼쳐질 시의 진경에 기대하는 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