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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49권 / 함경도(咸鏡道) /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대동지지(大東地志)》
【사원】 옥동서원(玉洞書院) 명종(明宗) 정유년에 세웠으며, 숙종 임오년에 사액(賜額)하였다. 이계손(李繼孫) 함흥(咸興)편에 보라. 김상용(金尙容) 강화(江華) 편을 보라. 조석윤(趙錫胤) 개성(開城) 편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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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東地志 卷十九 / 咸鏡道 / 安邊
祠院
玉洞書院。 明宗丁卯建, 肅宗壬午賜額。 ○李繼孫,【見咸興。】 金尙容,【見江華。】 趙錫胤。【見開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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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肅宗) / 숙종(肅宗) 6년(1680) / 3월 초8일
이계손(李繼孫)ㆍ김상용(金尙容)의 사우(祠宇)에 사액을 청하는 상소의 사연을 시행하지 말라는 예조(禮曹)의 계목(啓目)
1. “함경도(咸鏡道) 안변(安邊)의 유생(儒生) 오우일(吳羽逸) 등이 경헌공(敬憲公) 이계손(李繼孫)과 고(故) 상신(相臣) 김상용(金尙容)을 위하여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사액을 청하여 액호를 옥동서원(玉洞書院)이라 하였습니다. 그 후로 병화(兵火)를 입어서 중도에 없어지게 되는 근심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초에 사우를 건립할 때, 이미 조정에서 액호를 하사하여 주시는 은전(恩典)을 내려주었으나, 중도에 병화(兵火)를 만나서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까지 액호를 내걸지 못하였으니, 이는 온 고을의 사자(士子)들이 함께 탄식하는 바입니다. 대개 본 고을의 서원은 근세(近世)에 창건한 것이 없으며, 사우의 액호 또한 예전에 사액을 받았습니다. 이는 새로 건립하고서 사액을 청하는 다른 서원과는 비교할 것이 못 됩니다.”라고 한 일에 근거하여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에, “계하(啓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증 경헌공(贈敬憲公) 이계손과 고 상신 김상용은 혹은 본도(本道)의 관찰사〔按節〕로, 혹은 본 고을의 수령〔宰〕이 되어서, 교화(敎化)가 없는 먼 변방 지역을 방문하여 문화(文化)를 전해주어 풍속을 계도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많은 선비들이 전후로 그의 유택(遺澤)과 여훈(餘薰)을 헤아렸으며, 백성과 선비들이 그 은혜를 마음에 깊이 느끼어 기리고 잊지 않아 사우를 건립하고 그의 위패를 모셨으니, 이는 진실로 그들의 뜻입니다. 지금 많은 선비들이 먼 곳에서 상소하여 사정을 말하며 간청하니, 더욱 존경하고 그리워하여 제사를 드려 보답하려는 그들의 정성스러운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김상용의 경우에는 이미 그가 목숨을 바친 곳에 사우를 건립하고 조정에서 사액하였으니, 거듭 시행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원에 사액을 청하는 상소에 대하여서는 이미 선조(先朝)에서 매번 그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다고 한 분부가 있었습니다. 액호를 하사하여 그 은덕을 갚는 것은 일이 중대하여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으니, 상소의 사연을 지금은 우선 그대로 두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강희(康熙) 19년 3월 초8일에 우승지(右承旨) 신(臣) 박순(朴純)이 담당하였는데, 그대로 윤허한다고 계하(啓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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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肅宗) / 숙종(肅宗) 28년(1702) / 4월 초3일
편액을 하사하여 달라는 소청(疏請)을 특별히 시행하는 건
1.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에, “계하(啓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안변(安邊)의 유학(幼學) 장홍명(張鴻溟) 등의 상소를 보니, ‘고(故) 경헌공(敬憲公) 이계손(李繼孫)이 예종(睿宗) 때 본도(本道)의 관찰사(觀察使)로 부임하여 학교(學校)를 대대적으로 일으키자, 문풍(文風)이 크게 진작되고 인재가 성대하게 일어났습니다. 예종께서 가상히 여기어 이계손에게 관작을 추증(追贈)하고 또 그의 묘소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는데, 그 사실이 모두 최립(崔岦)과 이수광(李睟光)이 기록한 실기(實記)에 기록되어 있고, 선정신(先正臣) 김종직(金宗直)도 그가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한 것을 칭송하였습니다. 안변읍(安邊邑)은 본도의 첫 경계에 위치해 있어서 교화를 가장 먼저 입었으므로 옛날부터 이계손의 사당이 있었는데, 들은 바에 의하면 임진년(壬辰年) 전에 조정에서 옥동(玉洞)이란 편액을 하사하였으나 그 액판(額板)이 전화(戰火)로 인해 훼손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내(大內)에서 하사한 《근사록(近思錄)》ㆍ《송감(宋鑑)》 등의 서적이 아직도 사당 안에 있는데, 그 책에 찍힌 어보(御寶)가 찬란하여 새로 막 찍은 것 같다고 합니다. 또 본부(本府)에서 도와주는 제물 중에 희생과 폐백의 품질과 수량을 한결같이 다른 사액서원의 사당과 동일하게 한다고 하는데, 이는 대체로 편액을 하사할 때의 구례(舊禮)를 그대로 인습한 것이었습니다. 고(故) 문충공(文忠公) 신(臣) 김상용(金尙容)과 증 찬성(贈贊成) 신 조석윤(趙錫胤)이 모두 본부에 부임하였는데, 모두 문치(文治)로 교화를 삼아 한결같이 이계손처럼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본부의 전 사림(士林)들이 상의하지 않고도 마음이 일치되어 이 두 신하의 위패를 모두 이계손의 사당에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두 신하가 혹은 순수한 충성과 큰 절개로 만고의 강상(綱常)을 수립하기도 하고, 혹은 정대한 학문과 청백한 지조로 사문(斯文)의 중망을 짊어지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이계손이 이미 선조(先朝)의 표창을 받았지만 거기에다 어진 두 신하가 아울러 한 사당에서 제사를 흠향하고 있으니, 선조에서 이미 하사한 은액(恩額)을 다시 하사하여 온 부중(府中) 사림들의 큰 소망에 부응해 주시기를 청합니다.’고 하였습니다. 북관(北關)은 경성과 매우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백성의 풍속이 무지몽매하므로 흥기하고 진작하는 방도가 타도(他道)에 비해 배나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이계손이 제일 먼저 문치의 교화를 일으키어 멀리 성화(聖化)를 선포함으로써 북방의 사람들이 감열(感悅)하고 고무(鼓舞)되어 문풍(文風)이 점점 진작되고 습속이 크게 변화되었습니다. 이에 영광스럽게도 예종조의 권장을 받아 관작을 추증(追贈)하고 제사를 하사하였으니, 여러 신하가 기록한 바가 충분히 고증되어 믿을 만합니다. 임진년 이전에 조정에서 편액을 하사하였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비록 상고할 만한 문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대내에서 하사한 서적이 아직도 서원에 있고, 거기에 찍힌 어보가 찬란하여 마치 새로 찍은 것 같다고 하니, 선왕조(先王朝)에서 일찍이 이 서원에 대하여 권고하고 우대하는 바가 실로 예사롭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김상용의 순수한 충성과 위대한 절개, 조석윤의 정대한 학문과 청렴한 지조에 있어서는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는데, 그들이 모두 본부에 부임하여 후학에게 혜택을 입히고 사문(斯文)을 흥기시키어 그 공로가 이계손을 빛나게 하였으니, 이계손과 같은 사당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실로 숭배하는 전장(典章)에 부합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신하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 다른 곳에도 있을 경우에는 지금 이 서원이 혹시 중첩해서 설립하는 예에 해당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서원을 창건한 지 이미 백여 년의 장구한 세월이 경과한 데다, 선왕조에서 특별히 서적을 하사하여 총애와 가상의 뜻을 보이셨으니 일괄적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 신하가 혹은 그 도의 관찰사로 부임하기도 하고, 혹은 그 부(府)의 부사(府使)로 부임하기도 하였으므로 그들의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이 지금까지 한 방면에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안변은 또 본도(本道)의 첫 경계에 위치해 있어서 교화를 가장 먼저 받아 인사(人士)가 빈빈(彬彬)하여 다른 고을에 비해 더욱더 융성하였으니, 본부에 서원이 있는 것은 사리 상으로나 사체 상으로나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표창하여 드러내는 방도에 있어서 마땅히 편액을 하사하여 사림의 소망에 부응해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중대한 사안이니, 임금께서 재결(裁決)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강희(康熙) 41년 4월 초3일에 좌부승지(左副承旨) 신(臣) 이민영(李敏英)이 담당하였는데, 특별히 편액을 하사하라고 계하(啓下)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에, “판하(判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교서(敎書)와 액호를 예문관(藝文館)으로 하여금 짓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그대로 윤허한다고 계하(啓下)하였다.
[주-D001] 최립(崔岦)과 …… 실기(實記) : 이는 최립(崔岦)의 《간이집(簡易集)》 9권 〈희년록(稀年錄) 경헌공관북사당사록(敬憲公關北祠堂事錄)〉 참조.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박선이 송수경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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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집(簡易集) 최립(崔岦)생년1539년(중종 34)몰년1612년(광해군 4)자입지(立之)호동고(東皐), 간이당(簡易堂)본관통천(通川)특기사항팔문장(八文章)의 한 사람. 저자의 문(文), 차천로(車天輅)의 시(詩), 한호(韓濩)의 서(書)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칭하였음
簡易文集卷之九 / 稀年錄 / 敬憲公關北祠堂事錄
李敬憲公在成廟朝己丑年間。爲嘉善大夫咸鏡道觀察使。大有治稱。及公旣卒。有近臣奉使本道。回啓言李某爲政。尤以文敎爲事。仍上道內諸生製述詞章。以徵其效。上嘉甚。下有司議所以奬公者。特贈正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藝文館大提學。且遣官致祭于墓。蓋本道與北胡。壤地民俗。知弓馬不知問學。雖爲監司者。慮不出飾邊詰兵而已。獨公以學校爲先務。請于朝。頒經籍於郡縣。擇文臣爲敎官。刷亂臣漏籍臧獲以屬之。其子弟開敏在選者。親爲講授。又設法都會。四時課試以誘帥之。今不可復詳其凡。幾期歲之間。一道大化。由北擧中生員進士比比。稍復有占大科八顯仕者。故其人戴愛公如父母。久而不衰。爲立祠堂以饗報之。公之四代孫今吏判公擧此事命岦一言。岦應而起敬曰。敬憲公其可謂眞王者之佐也。古之人有爲王佐之學者。孟子其人也。今其書尙在。可開卷而知其說也。然言則必稱。不過曰先王之政。而先王之政。初非有高遠難行之事也。如曰使民養生喪死無憾。爲王道之始。而繼之曰。謹庠序之敎。申之以孝弟之義。然言其要歸。亦非有精微難識之道也。但如曰頒白者不負戴於道路而已矣。就又求之於後。則曰道在邇而求諸遠。事在易而求諸難。人人親其親長其長而天下平。求之於前。則曰未有仁而遺其親者也。未有義而後其君者也。於是而思惟之。則敎之以親親長長。化之而親上死長。其爲邊民爲之所也切矣足矣乎否也。愚知敬憲公之爲政於咸鏡也。誠得當務之急。而咸鏡之人。爲公立之祠也。誠足勸後之來者矣。及按國乘。金文簡公宗直言於成廟曰。李某爲人得宰相體。其爲咸鏡。興學養材。至今多中科第者。夫文簡。儒先也。其稱得宰相體。豈亦許以王佐非耶。獨以多中科第。爲養材之效。其道疑若可小者然。而學記之言曰。不興其藝。不能樂學。此固三代之敎所不能去。而論升俊造之士於司徒司馬。亦自夫周之成法。特古今異宜。有不能必同也。愚於敬憲公乎無間然矣。因而請公之始末焉。則嘗以通政守江原觀察。用能荒進階嘉善。聽民借留一期。召見內殿。至欲以江原一道委之。旣而以平安道民多流移。命往巡撫。進階嘉義。洎咸鏡報政之後。又觀察平安。居數月而囹圄空虛。事聞。進階資憲云。平壤營下。設有歸厚所。多具棺槨。以賴公私。嘗歎其制意之美。庶幾王道始事。使民無憾之實着。乃聞權輿於公時。亦足信也。敬憲公之果有王佐器業。積勤彰美如此。而見任止於兵判。正憲之褒。又在身後。則君子不能不爲造物者歉焉。然吏判公曁弟某官二公。俱以世臣名卿。將繼述乃祖王佐之志之事。而於古方伯連帥之職。或屬望已優。或歷試未窮。而方國家之安危緩急。在於三邊而勤上憂。顧有識所寒心也。二公惡得以不當其責。而不思與於猷爲。以訖敬憲公之休烈乎哉。於戲丹。穴之雛。一毛足以瑞世。呑牛之子。披霧而皆斑。長公胤子應敎君。以時之寵學士。圖邊貢章。已自穎脫。屬又將廟議使海上。歸必稱旨。愚更保敬憲公之有後不已。而不能易夫王佐之說者。以謂李氏誠足以世斯學也。祠舊在界首永興,安邊等處。是本道爲永安時也。時事變遷。重以兵火。不免中廢。道內士子痛文獻之無徵。不謀而同。鳩聚財力。重建於咸興文會堂之東。益講擧闕遺之儀。可尙也已。岦拜書。
간이집 제9권 / 희년록(稀年錄) / 경헌공(敬憲公)의 관북(關北) 사당에 대한 일의 기록
이 경헌공(李敬憲公 이계손(李繼孫))이 성묘조(成廟朝) 기축년(1469, 성종 즉위년) 연간에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어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나가서 잘 다스린다는 칭송을 크게 받았다. 그러다가 공이 죽은 뒤에 근신(近臣)이 사명을 받들고 본도(本道)에 갔다가 회계(回啓)하기를, “이모(李某)는 정사를 행할 적에 특히 문교(文敎)를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하면서, 도내(道內)의 제생(諸生)이 제술(製述)한 사장(詞章)을 위에 올려 문교의 효과를 증거하였다. 이에 상이 매우 가상하게 여긴 나머지 이 안건을 유사(有司)에게 내려 공을 표창할 방도에 대해서 의논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공에게 특별히 정헌대부(正憲大夫) 의정부좌참찬 겸 예문관대제학(議政府左參贊兼藝文館大提學)이 추증되는 동시에, 관원을 보내 공의 묘소에 제사를 올리게 하는 은전이 내려졌다.
대체로 본도는 북쪽으로 오랑캐와 접경하고 있는 관계로, 백성들의 풍속 역시 활 쏘고 말 타는 것이나 알 뿐 학문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상태였으므로, 본도에 부임한 감사(監司)들도 변방을 단속하고 군대를 훈련시키는 일 이상의 것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하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만은 유독 학교(學校)에 대한 일을 급선무로 삼고는, 조정에 요청하여 경적(經籍)을 군현(郡縣)에 배포하고 문신(文臣)을 교관(敎官)으로 가려 보내도록 하는 한편, 장부에 누락된 난신(亂臣)의 장획(臧獲 노비)을 쇄환(刷還)하여 학교에 소속시켜 주도록 건의하였다. 그리고 그 지방의 총명한 자제들을 뽑아서 자기가 직접 가르침은 물론이요, 도회소(都會所)의 제도를 마련하여 사시(四時)로 과시(課試)를 보임으로써 제생들을 격려하며 이끌어 주었다.
지금 그 학교의 범례(凡例)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자세히 알아볼 수가 없지만,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는 사이에 한 지방이 크게 교화된 결과, 관북(關北)의 향시(鄕試)를 거치고 나서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는 자들이 줄을 이어 나왔고, 또 점차로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관직으로 현달(顯達)하는 사람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 지방 사람들이 공을 마치 부모처럼 떠받들어 사랑하는 마음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는 가운데, 급기야는 공의 사당을 세워 향사(享祀)하며 그 은혜에 보답하려고 한 것이다. 이에 공의 4대손인 지금의 이판공(吏判公)이 이 일과 관련하여 나에게 한마디 말을 부탁하기에, 내가 기꺼이 수락하면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경헌공이야말로 왕자(王者)를 보좌하여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이룰 수 있는 인재라고 말할 수 있다. 옛사람 가운데 왕자를 보좌할 학문에 종사한 사람이 있는데, 맹자(孟子)가 바로 그 사람이다. 지금도 그 책이 남아 있어서 책장만 넘기면 그의 주장을 알아볼 수가 있는데, 그가 말할 때마다 으레 이야기하는 내용을 들어 보면, 그저 선왕(先王)의 정사를 회복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그런데 그 선왕의 정사라고 하는 것도 원래 높고 멀어서 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라, 예컨대 “살아 있는 사람을 먹여 길러 주고,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는 데에 유감이 없게 하는 것이, 바로 왕도의 시작이다.[使民養生喪死無憾 王道之始]”라고 하는 것이고, 그런 다음에 “학교의 교육을 엄하게 실시하여 효성과 우애의 뜻을 되풀이해서 가르친다.[謹庠序之敎 申之以孝悌之義]”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목적도 알고 보면 정미(精微)해서 알기 어려운 도(道)를 터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요, 다만 “머리털이 반백이 된 사람이 길에서 짐을 지거나 이고 다니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頒白者 不負戴於道路]”라고 하는 것이다.
또 그 책의 뒷부분을 들추다 보면 “도라는 것은 가까운 데에 있는데도 그것을 멀리서 찾으려 하고, 해야 할 일은 쉬운 데에 있는데도 그것을 어려운 데에서 찾으려고 한다. 사람들마다 자기 어버이를 어버이로 제대로 섬기고 자기 어른을 어른으로 제대로 받들기만 한다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다.[道在邇而求諸遠 事在易而求諸難 人人親其親長其長而天下平]”라는 내용이 나오고, 다시 그 앞부분을 들추다 보면 “어질면서도 자기 어버이를 버리는 자는 있지 않았고, 의로우면서도 자기 임금을 뒤로 돌리는 자는 있지 않았다.[未有仁而遺其親者也 未有義而後其君者也]”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자기 어버이를 어버이로 섬기고 자기 어른을 어른으로 받들도록 가르쳐서, 백성들이 윗사람을 어버이처럼 친근하게 여겨 어른을 위해서 죽을 수 있도록 교화시키는 것[親上死長]이야말로, 변방 백성들에게 우선 먼저 베풀어야 할 절실하고도 충분한 대책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어리석은 나의 소견으로도, 경헌공이 함경도에서 행한 정사는 참으로 당면한 급선무를 알았다고 할 것이요, 함경도 사람들이 공을 위해서 사당을 세운 일 역시 참으로 뒤에 부임하는 감사들을 권면하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역사책을 상고해 보니, 문간공(文簡公) 김종직(金宗直)이 성묘(成廟)에게 “이모(李某)의 사람됨을 보건대 재상(宰相)의 체모를 얻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가 함경도에서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한 결과 지금도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라고 아뢴 내용이 눈에 띄었다. 대저 문간공과 같은 유선(儒先)도 재상의 체모를 얻었다고 일컬었고 보면, 이 역시 왕자(王者)를 보좌할 인재로 인정한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다만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것을 가지고 인재를 양성한 효과로 인용한 것을 두고, 그 도(道)가 이렇게 작을 수 있느냐고 의심할 수는 있을 법하다. 그렇긴 하지만 《예기(禮記)》의 학기(學記)에도 “조그마한 기예라도 성취하면서 흥미를 느끼게 하지 못한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학문의 길에 나아가게 할 수가 없다.[不興其藝 不能樂學]”는 말이 나오니, 이러한 점은 삼대(三代)의 학교에서도 원래 생략할 수 없었던 것을 알 수가 있고, 준사(俊士)와 조사(造士)를 사도(司徒)와 사마(司馬)에게 천거하는 내용을 또 논하고 있고 보면, 이는 또한 주(周)나라 때부터 이루어진 제도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단지 고금(古今)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로서 꼭 같을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니, 내 생각으로는 경헌공의 그 정사 역시 옛 시대와 비교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공의 행장(行狀)을 또 얻어서 살펴보건대, 일찍이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가지고 수 강원도 관찰사(守江原道觀察使)로 나갔을 적에, 구황 정책(救荒政策)을 잘 행해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오른 가운데 백성들의 청원으로 임기를 넘겨 1년 동안이나 더 머무르기도 하였는데, 그 뒤에 상이 내전(內殿)으로 공을 불러 만나 보고는 강원도 한 지방을 아예 공에게 위임하여 편의종사(便宜從事)하게 하는 은혜를 내리려고까지 하였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에는 평안도에 유민(流民)이 많이 발생하자 그 지방에 가서 순무(巡撫)하라는 명을 받고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로 올랐으며, 서두(序頭)에서 언급한 바 함경도에서 행한 공의 정사가 조정에 보고된 뒤에는 또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는데, 몇 개월이 지나는 사이에 감옥에 죄수가 없게 되었다는 보고가 올라가자 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였다고 한다.
공은 또 평양(平壤) 감영(監營)에 귀후소(歸厚所)를 설치하여 관곽(棺槨) 등을 많이 갖추어 놓고는 공사(公私) 간에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내가 일찍이 이 제도가 원래 만들어지게 된 아름다운 그 뜻을 찬탄하면서, 이는 그야말로 왕도(王道)를 실현하기 위한 첫 번째 사업으로서 백성들이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는 데에 아무런 유감이 없게끔 하는 실질적인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지방에 귀후소가 설치된 것이 바로 공의 시대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을 또한 이를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경헌공은 실제로 왕자(王者)를 보좌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추고서 그런 사업을 추진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근실하게 쌓은 업적이 이처럼 아름답게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생전에는 그저 병조 판서(兵曹判書)의 직위 정도로 만족해야 했고, 정헌대부(正憲大夫)의 품계도 죽은 뒤에야 미치게 되었고 보면, 군자가 조물자에 대해서 혐의를 두지 않을 수가 없을 듯도 하다.
그렇긴 하지만 이판공(吏判公)과 모관(某官)으로 있는 그의 아우가 모두 세신(世臣)의 명경(名卿)으로서, 왕자를 보좌하려고 한 선조의 뜻과 사업을 장차 이어받으려 하고 있다. 그리하여 옛날의 방백(方伯)이요 연수(連帥)라 할 관찰사(觀察使)와 절도사(節度使)의 직책과 관련하여, 두 분 중에 한 분은 벌써 넉넉하게 촉망을 받고 있고, 또 한 분은 차례로 재질을 발휘하면서 끝없이 발전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 국가의 안위(安危)를 생각할 때 가장 급선무로 여겨야 할 일은 바로 세 방면의 변방에 관한 일이라고 할 것인데, 임금이 돌아보며 근심하는 걱정을 계속 끼치고 있으므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기고 있는 터이다. 그러니 두 분의 입장에서 볼 때, 선조인 경헌공의 아름다운 공적을 완수하기 위해서라도 어찌 그 책임을 자신이 떠맡지 않을 수 있겠으며, 큰 계책을 세워 동참할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아, 단혈(丹穴)에서 나오는 봉황의 어린 새끼는 하나의 터럭만으로도 상서로운 세상을 표상하고, 소를 통째로 집어삼킬 기상을 지닌 범의 어린 새끼는 안개를 헤치고 나올 적에 모두 아름다운 반점(斑點)을 보여 주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판공의 윤자(胤子)인 응교군(應敎君) 역시 이 시대의 총애받는 학사(學士)로서, 변방을 안정시킬 계책을 글로 올려 이미 자신의 빼어난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한 데다 지금은 또 조정의 의논을 가지고 해상(海上)에 사신으로 나갔으니, 돌아와서는 반드시 임금의 뜻에 걸맞게 복명(復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경헌공에게 바람직한 후계자가 끝없이 나와 왕자를 보좌할 인재라는 말이 무색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내가 재삼 확인하면서, 이씨(李氏)들이 진정 대를 이어서 이 학문을 가업으로 이어 가리라고 감히 단언하는 바이다.
사당이 예전에 함경도의 중심지인 영흥(永興)과 안변(安邊) 등지에 세워져 있었으니, 이는 본도가 영안도(永安道)로 일컬어지던 때의 일이다. 그러다가 시대 상황이 급변하면서 병화(兵火)를 두 번이나 당하는 바람에 중간에 없어지는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이에 그 지방의 사자(士子)들이 문헌(文獻)의 고장임을 입증할 길이 없어진 것을 통분스럽게 여긴 나머지, 서로 꾀하지 않고도 같은 마음이 되어 자재를 모으고 힘을 합쳐 함흥(咸興) 문회당(文會堂) 동쪽에 중건을 하고는, 그동안 소홀해졌던 의례(儀禮)를 행할 방도를 더욱 강구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최립은 삼가 절하고 이 글을 적는다.
[주-D001] 예컨대 …… 것이다 : 《맹자(孟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위의 내용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주-D002] 또 …… 나온다 : 앞의 인용문은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나오고, 뒤의 인용문은 양혜왕 상에 나온다.[주-D003] 자기 어버이를 …… 것 :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임금께서 인정을 행하시면 백성들이 윗사람을 친근하게 여기면서 자기 어른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게 될 것이다.[君行仁政 斯民親其上 死其長矣]라는 말이 보인다.[주-D004] 준사(俊士)와 …… 내용 : 주(周)나라의 학제(學制)를 설명한 대목 중에 나오는 내용인데,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향학(鄕學)에서 사도(司徒)에게 천거된 뒤에 다시 국학(國學)으로 천거되어 오르는 자를 준사(俊士)라고 하고, 그중에서 학업이 뛰어나 사마(司馬)에게 천거된 뒤에 장차 등용될 자를 조사(造士)라고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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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봉집(芝峯集) 이수광(李睟光)생년1563년(명종 18)몰년1628년(인조 6)자윤경(潤卿)호지봉(芝峯)본관전주(全州)시호문간(文簡)특기사항신흠(申欽)과 교유
芝峯先生集卷之二十一 / 雜著 / 李敬憲公關北祠堂事錄後跋
不佞於乙巳歲。視篆于咸鏡之安邊。旣謁聖于鄕校訖。直校之南得一坐廢基。階級夷漫。而彷彿學宮之制。揖諸生而訪之故。諸生進曰。是故敬憲公祠宇之址也。昔公按是邦。以文敎爲帥。吾州以界首。最先蒙化。至今人習詩書禮義之敎。得免被左之歸者。繄公是賴。舊有祠以俎豆之。逮兵燹不復者十年所矣。言已。蹙然者久之。始知敬憲公之澤久而未斬也。後赴考官於定平。聚一道之士子而倂試之。其所爲詞章。楚楚可觀。其能傑然拔萃者亦不乏焉。竊喜其居弓馬之鄕。而有文華之風。苟非先輩敎導之力。豈若是彬彬乎。益驗敬憲公之化遠而不替也。夫關北地。與山戎犬牙。高麗世陷蒙古者且九十年。至恭愍朝。始復之。當公之時。其強獷汚染之習。誠有未易革者。乃能以誘掖成就爲務。使一方之人。丕變於期月之內。又能使後之爲士者。愈久而景慕。愈遠而興起。歷百年如一日。是可敬也已。蓋歸與邑之諸生。鳩材庀工。謀所以新其祠宇者。未幾去。不克果。越數載。聞咸,安二邑生。用私力次第重刱。於是慶其事之始擧。而嘉諸生之志有成也。昔文翁之守蜀。常衮之治閩。皆以文學從事。果能饗報於隔世之後。彌往而益新如公否乎。嘗聞君子之化人。以身爲敎。自家而國。公之德能及人如此。則本諸身者可見。本諸身而化行於家。由乎家而敎成於國。夫豈專一道而不咸者哉。第公官止常伯。不竟厥施于世。其可慨也。今其五代孫樞密少陵公曁昆弟諸胤。咸能世其家業。趾美紹休。將多于前烈。人以是知敬憲公之敎又行於家也。少陵公曾莅成州。亦以文敎化人。人誦其德。至豎石以紀之。若少陵公。可謂善繼述者非耶。必將朝夕致身廊廟。以卒公之志。使人稱之曰。敬憲公之敎。又因其子孫而大行於朝廷。不獨專於一時一道而止矣。豈不休哉。不佞方傾耳以竢聽焉。
지봉집 제21권 / 잡저(雜著) / 〈이 경헌공 관북사당 사록〉에 대한 후발〔李敬憲公關北祠堂事錄後跋〕
내가 을사년(1605, 선조38)에 함경도 안변(安邊)에서 수령으로 정사를 베풀 적에, 이미 향교(鄕校)에서 알성(謁聖)을 마친 뒤 향교의 남쪽으로 황폐한 터 한 곳을 발견하였는데, 그 계단은 마멸되어 평평해지기는 하였지만 학궁(學宮)의 제도와 비슷하였다. 이에 제생(諸生)에게 읍하고 그 연고를 물어보니, 제생이 나아와 이르기를,
“이곳은 고(故) 경헌공(敬憲公)의 사당이 있었던 터입니다. 옛날 공이 우리 도(道)의 관찰사가 되어 다스릴 때 문교(文敎)로써 인도하였는데, 우리 고을이 계수관(界首官)이 되는 까닭으로 가장 먼저 교화를 입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시(詩)》ㆍ《서(書)》와 예의(禮義)의 가르침을 익혀 오랑캐로 전락됨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공의 덕분입니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사당을 세워서 공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병화(兵火)를 만나 사당이 소실되어 복구하지 못한 지 십 년 정도 됩니다.” 하고는, 말을 마친 뒤 오래도록 불안해하며 근심스런 기색을 띠었으니, 내가 그제서야 경헌공의 은택이 오래되었지만 아직 사라지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후 내가 정평(定平)에 고시관(考試官)으로 갔을 적에 한 도(道)의 선비들을 모아 놓고 함께 시험을 보였더니, 그들이 지은 사장(詞章)이 빼어나 볼만하였고, 걸출하게 출중한 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에 나는 그들이 활 쏘고 말 타는 것이나 아는 지역에 살면서 문화(文華)의 기풍을 가지고 있음을 내심으로 기뻐하였다. 진실로 선배(先輩)들의 가르치고 인도한 공력이 아니라면 어찌 선비들이 이처럼 문질(文質)이 빈빈(彬彬)할 수 있겠는가. 이는 경헌공의 교화가 오래되었으나 조금도 쇠하지 않았음이 더욱 증험된 것이라 하겠다.
무릇 관북(關北)지역은 산융(山戎)과 접경하고 있는 곳으로, 고려조(高麗朝)에 몽고(蒙古)에 편입된 것이 구십 년이나 지속되다가 공민왕(恭愍王)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회복되었다. 그리하여 공의 시대에도 그 강포하고 오염된 습속은 참으로 개혁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는데, 공은 마침내 선비들을 잘 인도하여 성취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 한 지방의 사람들로 하여금 일 년 안에 크게 변하도록 하였다. 게다가 후세의 선비들로 하여금 오래될수록 더욱 경모(景慕)하게 하고 멀어질수록 더욱 흥기하게 하여 백 년의 세월이 마치 하루와 같으니, 참으로 공경할 만하다고 하겠다.
나는 본읍(本邑)으로 돌아와 고을 제생들과 재목을 모으고 장인들을 갖추어 공의 사당을 새로 짓는 방도를 도모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안변 부사를 그만두고 떠나게 되어 끝내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수년이 지나서 함흥(咸興)과 안변의 두 고을 제생들이 사적인 재력(財力)을 써서 공의 사당을 차례로 중창(重創)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으니, 이에 그 일이 비로소 거행됨을 경하하면서 제생들의 뜻이 이루어짐을 가상히 여겼다.
옛날 문옹(文翁)이 촉(蜀) 땅을 다스리고, 상곤(常袞)이 민(閩) 땅을 다스렸을 때 모두 문학(文學)으로 일삼았지만, 과연 후세 사람들이 공의 경우처럼 몇 세대를 격한 뒤에도 그 공덕에 보답하기 위해 제사 지내는 일이 갈수록 더욱 새로워졌는가.
일찍이 듣건대, 군자(君子)가 사람을 교화할 때 자신의 몸으로 가르쳐 집안에서부터 나라에까지 파급된다고 하였으니, 공의 덕화가 능히 이처럼 사람들에게 미쳤고 보면 자신의 몸에서 근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몸에서 근본하여 그 교화가 집안에서 행해지고, 또 집안을 말미암아 그 교화가 나라에서 이루어질 터이니, 어찌 한 도에만 국한되고 온 사방에 두루 베풀지 못할 분이었겠는가. 그러나 공은 벼슬이 상백(常伯)에 그치고 말아 온 세상에 다 베풀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개탄스럽다고 하겠다.
지금 경헌공의 5대손 추밀(樞密) 소릉공(少陵公)과 그 형제 및 자제들이 모두 그 가업(家業)을 잘 계승하여 선대의 훌륭함을 그대로 이음으로써 장차 선조의 공렬(功烈)보다 더 크게 세울 것이니,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로 경헌공의 가르침이 또 집안에서 잘 행해졌음을 알게 되었다.
소릉공은 일찍이 성주(成州)를 다스릴 적에 또한 문교(文敎)로 고을 사람들을 교화시키자, 고을 사람들이 그의 공덕을 칭송하여 심지어 비석을 세워 기념하기까지 하였으니, 소릉공과 같은 이는 선조의 뜻과 사업을 잘 계술(繼述)한 자라고 이를 만하지 않겠는가. 필시 장차 머지않아 의정부(議政府)의 정승 반열에 올라 경헌공의 유지(遺志)를 잘 끝냄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칭송하게 하기를, “경헌공의 교화가 또 그 자손으로 인하여 조정에 크게 행해져서 오로지 한 때와 한 도에만 베풀어지고 말 뿐이 아니다.”라고 할 것이니, 이와 같이 된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바야흐로 귀를 기울여 이런 소식이 들리기를 기다린다.
[주-D001] 이 경헌공(李敬憲公) : 이계손(李繼孫, 1423~1484)으로,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인지(引之), 시호는 경헌이다. 1447년(세종29)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한 뒤 정언, 철원 부사(鐵原府使), 대사헌, 함경도ㆍ경기도 관찰사, 병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성종실록(成宗實錄)》 15년(1484) 9월 15일에 이계손의 졸기(卒記)가 실려 있는데, 그중에 “성화(成化) 기축년(1469, 예종1)에 함경도에서 이시애(李施愛)의 난리 뒤부터 인심이 안정되지 않은 것 때문에 이계손을 관찰사로 삼아 진정시키도록 명했었다. 본도(本道)의 사람들은 본래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계손이 서적을 청구하여 자제(子弟)들을 뽑고 사유(師儒)를 가리어 가르치게 하였으며, 네 계절에 도회(都會)를 베풀어 성취되기를 권면하고 장려하니, 이로부터 본도의 자제들이 과거에 뽑히는 자가 서로 잇달았다.”라고 하였다.[주-D002] 이 …… 사록(李敬憲公關北祠堂事錄) : 간이(簡易) 최립(崔岦)이 지은 〈경헌공의 관북 사당에 대한 일의 기록[敬憲公關北祠堂事錄]〉을 가리킨다. 최립의 이 글을 살펴보면, 당시 함경도의 선비들이 옛날 이계손(李繼孫)이 함경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베풀었던 공덕을 잊지 못해 그의 사당을 함흥(咸興)의 문회당(文會堂) 동쪽에다 중창(重創)하였는데, 이에 이계손의 5대손 이상의(李尙毅)가 자신에게 이 일과 관련하여 글을 지어주기를 요청하기에 이 글을 지었다고 하였다. 《簡易集 卷9 敬憲公關北祠堂事錄》[주-D003] 내가 …… 적에 : 지봉이 1604년(선조37) 42세 때 당시 조정의 시의(時議)와 어긋나자 외직(外職)을 청하여 함경도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나가 이듬해 봄에 임소에 도착하고, 1606년(선조39) 봄에 병으로 사직하여 돌아오는데, 이때의 일을 가리킨다. 《宣祖實錄 37年 12月 26日》 《東州集 卷6 先考……行錄》 참고로 지봉이 안변 부사로 재임하는 기간 동안 지은 시들을 엮은 시집인 《학성록(鶴城錄)》이 《지봉집》 권12에 실려 있다.[주-D004] 우리 …… 됩니다 : ‘계수관(界首官)’은 한 도(道)의 으뜸이 되는 고을로, 대체로 계수관은 한 도에 4, 5개 정도가 있었다. 이계손이 본도의 관찰사로 재직하던 때에는 함경도가 영안도(永安道)로 불리던 시절이라서 안변(安邊)이 영흥(永興)과 더불어 이 도의 중심지가 되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최립(崔岦)의 〈경헌공 관북사당 사록(敬憲公關北祠堂事錄)〉을 살펴보면, “공의 사당이 옛날에는 계수관인 영흥과 안변 등에 있었는데, 이는 본도가 영안도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시대 상황이 급변하여 거듭 병화를 당하여 중도에 폐해지는 화를 면치 못하였다.[祠舊在界首永興、安邊等處, 是本道爲永安時也. 時事變遷, 重以兵火, 不免中廢.]”라고 하였다. 《簡易集 卷9 敬憲公關北祠堂事錄》 참고로 1467년(세조13) 함경도에서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함흥(咸興) 출신의 이중화(李仲和)가 이시애를 추종하여 감사와 수령을 죽이는 등 악행을 저지름에 따라 1470년(성종1)에 함흥을 유수부(留守府)에서 군(郡)으로 읍호를 강등시키고 태조 이성계의 출신지인 영흥을 부(府)로 승격시켜 또 다른 계수관인 안변(安邊)과 함께 영안도로 개칭하였다. 《成宗實錄 1年 2月 17日》[주-D005] 내가 …… 적에 : 지봉이 안변 부사로서 향시(鄕試)의 고시관(考試官)에 뽑혀 향시가 시행되는 정평(定平)으로 간 일로, 당시에 지봉이 지은 〈정평시원즉사(定平試院卽事)〉 시가 《지봉집》 권12 〈학성록(鶴城錄)〉에 실려 있다.[주-D006] 문질(文質)이 빈빈(彬彬)할 수 : 문채와 본바탕이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고 잘 조화된 군자라는 말이다. 《논어》 〈옹야(雍也)〉에 “바탕이 문채보다 지나치면 촌스럽게 되고, 문채가 바탕보다 지나치면 겉치레에 흐르게 되나니, 문채와 바탕이 조화를 이룬 뒤에야 군자라고 할 수 있다.[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빈빈’은 문과 질이 적절하게 조화된 모양이다.[주-D007] 산융(山戎) : 고대 북방(北方) 민족의 이름인데, 흉노(匈奴)의 한 부류로 북융(北戎)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북방 소수 민족의 범칭으로 쓰였다.[주-D008] 문옹(文翁)이 …… 다스리고 : ‘문옹(文翁)’은 서한(西漢) 경제(景帝) 때 인물로, 경제 말기에 촉군(蜀郡)의 태수(太守)가 되어 문교(文敎)를 숭상하여 많은 학교를 세워 성도(成都)에 문풍이 크게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무제(武帝) 때에는 천하의 군국(郡國)에 모두 학교를 세우도록 하였다. 《漢書 卷89 循吏傳 文翁》[주-D009] 상곤(常袞)이 …… 때 : ‘상곤’은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 사람으로, 덕종 초기에 복건 관찰사(福建觀察使)가 되었는데, 그 당시 민(閩) 땅 사람은 학문을 알지 못했으나 상곤이 문교(文敎)를 숭상하여 향교(鄕校)를 설치해서 친히 가르치고 인도하자 문풍(文風)이 비로소 크게 진작되었다. 《新唐書 卷150 常袞列傳》[주-D010] 공은 …… 못하였으니 : 이계손이, 벼슬이 정승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병조 판서에 그쳐 온 세상에 교화를 다 베풀지 못했다는 말이다. ‘상백(常伯)’은 주(周)나라 때 임금의 옆에서 민사(民事)를 관리하던 대신의 관직 이름인데, 조선 시대에는 육조 판서의 별칭으로 쓰였다.[주-D011] 추밀(樞密) : ‘추밀’은 요직(要職)을 이르는 말로, 조선 시대에서는 대체로 비변사 당상을 통칭하는 뜻으로 쓰였다. 최립(崔岦)의 〈경헌공관북사당사록(敬憲公關北祠堂事錄)〉을 살펴보면, 이상의(李尙毅)를 이판공(吏判公)이라 불렀고, 이상의의 연보(年譜)에 의하면, 50세인 1609년(광해군1) 2월에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는데, 이로써 볼 때 여기서는 이조 판서를 가리킨다. 《簡易集 卷9 敬憲公關北祠堂事錄》 《少陵集 年譜》[주-D012] 소릉공(少陵公) : 이상의(李尙毅, 1560~1624)로,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이원(而遠), 호는 소릉ㆍ오호(五湖)ㆍ서산(西山)ㆍ파릉(巴陵),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이우인(李友仁)의 아들로, 경헌공(敬憲公) 이계손(李繼孫)의 5대손이다. 1585년(선조18)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주서, 지평, 병조 정랑, 성천 부사(成川府使), 대사성, 도승지, 형조 판서, 이조 판서, 대사헌, 좌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소릉집》이 있다.[주-D013] 소릉공은 …… 하였으니 : ‘성주(成州)’는 평안도 성천(成川)의 별칭이다. 이상의(李尙毅)의 연보(年譜)에 의하면, 44세인 1603년(선조36) 7월에 성천 부사(成川府使)로 나가, 고을을 다스릴 때 학교를 진흥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삼고는 백성 가운데 준수한 자들을 뽑아 자신이 직접 가르치니 문풍이 비로소 진작되어, 그 이전에는 성천에서 소과(小科)와 대과(大科)에 급제한 사람이 없었는데, 부임한 지 2년 만에 소과 급제자가 나오고 이후로 소과 급제자가 잇달아 나오다가 대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른 자도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47세 되는 1606년(선조39) 2월에 임기가 차서 조정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그의 공덕을 칭송하여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를 세우고 그 비석에 ‘우국여가(憂國如家), 애민여자(愛民如子)’ 8자를 새겼다고 하였다. 《少陵集 年譜》[주-D014] 선조의 …… 자라고 : 《중용장구》 제19장에 “효라는 것은 선조의 뜻을 잘 계승하며, 선조의 사업을 잘 전술(傳述)하는 것이다.[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 김광태 (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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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56권 / 제발(題跋) / 《문회서원고사록》 발문〔文會書院故事錄跋〕
하늘과 땅 사이에 인류가 출현한 지 오래되었다. 나무 열매를 따 먹고 날고기를 씹어 먹기 시작한 이래 일만여 년을 지나 요 임금과 순 임금이 중국에 나타남에 따라 인류의 문명이 매우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북 지역은 여전히 혼돈의 세상으로 남아 있다가 단군(檀君)이 들어섰고, 천여 년이 지나 기자(箕子)가 비로소 동쪽으로 와서 팔조법금(八條法禁)을 세상에 시행하여 예의의 나라로 크게 변화하였다. 그런데도 기자조선의 북쪽 지역은 여전히 무지하고 질서가 잡히지 않아 인간의 도리와 사물의 법칙에 대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었고, 수천여 년이 지나 우리 조선이 건국하고 나서야 교화가 남북으로 미치게 되었다. 그때 마침 우리 선조인 경헌공(敬憲公)이 왕명을 받고 관찰사로 나가 처음으로 아름다운 교화를 펼쳤다. 학교를 세우고 서적을 나누어 주면서 유생들을 우대하여 배양하고 친절히 인도하였는데, 자애로운 어미가 병든 아이를 먹여 주는 정도 이상으로 정성을 쏟았다. 이에 숙신(肅愼)과 말갈(靺鞨)의 야만스런 백성이 모두 다 활을 버리고 학교에 들어가 경전을 통해 교육을 받았다. 수천 리에 뻗어 있는 이 지역이 금수에서 벗어나 인간의 도리를 지니게 되었고 오랑캐에서 문명인으로 발전한 것은 모두 다 경헌공의 공적이라 할 것이다.
아, 함경도 지방에 들어가 그 지방의 풍요(風謠)를 수집해 보니, 양반과 학구(學究)들이 아직도 공이 남긴 가르침을 지키면서 아비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아비에게 효도하며 남편은 아내에게 믿음을 보이고 아내는 남편을 위해 정절을 지키면서 경헌공의 덕분이라 칭송하였다. 또 밭을 갈고 우물을 파거나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면서도 경헌공의 덕분이라 칭송하였다. 심지어 미친 은택이 뼛속까지 스며들어도 바다에 사는 물고기가 그러하듯 백성들이 그 은택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범범하게 서원(書院)에서 제사나 받는 것과 나란히 견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함경도 지방에 경헌공이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 기자가 있는 것과 같고 중국에 요순이 있는 것과 같다. 게다가 경헌공이 함경도 지방을 순시하며 공적을 낸 것이 태조(太祖)가 그 지역에 베풀었던 은택을 계승한 것이니, 역사에 빛나는 높은 공적이 장차 세상이 끝날 때까지 함께할 것이다. 당시에 함경도 백성이 지역에 상관없이 상을 차려 제사를 올렸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병란으로 불타기도 하였다. 지금 중수를 하거나 없어지지 않은 곳으로는 함흥(咸興)의 문회서원(文會書院), 영흥(永興)의 흥현서원(興賢書院), 안변(安邊)의 옥동서원(玉洞書院)이 있으니, 내가 알고 있기에는 이 세 곳에 불과하다. 재종질손(再從姪孫)인 광환(匡煥)은 집안의 역사와 지난 일들을 많이 알고 있는데, 이 《문회서원고사록》을 지어 나에게 부쳐 주기에 그 끝에다 이 글을 쓰는 바이다.
[주-D001] 경헌공(敬憲公) : 경헌은 이계손(李繼孫, 1423~1484)의 시호이다. 이계손은 본관이 여주(驪州)이며, 성호의 8대조이다. 1447년(세종29)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1469년(예종1) 함경도 관찰사로 나가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흉흉한 민심을 진정시켰으며 학교를 세우고 유생들을 교육하여 과거 급제자를 잇달아 배출하였다. 함흥(咸興)의 문회서원(文會書院), 영흥(永興)의 흥현서원(興賢書院), 안변(安邊)의 옥동서원(玉洞書院)에 제향되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최채기 (역) |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