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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집(東溪集) 조형도(趙亨道)생년1567년(명종 22)몰년1637년(인조 15)자경달(景達), 대이(大而)호동계(東溪), 청계도사(淸溪道士)본관함안(咸安)일명원도(遠道)특기사항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의 문인. 오여벌(吳汝橃), 박이장(朴而章) 등과 교유
東溪文集卷之五 / 附錄
輓詞[李皦]
妙齡才譽有詩書。投筆中年壯氣攄。
世上靑雲三品過。人間黃髮七旬餘。
龍樓未獻金酋馘。虎背還生范子疽。
賴有芝蘭盈一室。英魂泉下恨何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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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담집(石潭集) 이윤우(李潤雨)생년1569년(선조 2)몰년1634년(인조 12)자무백(茂伯)호석담(石潭)본관광주(廣州)특기사항정구(鄭逑)의 문인. 장현광(張顯光), 이언영(李彦英), 최현(崔晛) 등과 교유
石潭先生文集卷之四 / 墓誌
曾祖考進士府君墓誌
廣李起於麗末。有諱集判典校寺事。諱之直刑曹右參議兼寶文閣直提學。於公爲高祖。曾大父諱禮孫禮曹參判。大父諱克堅通禮院左通禮。考諱摯承仕郞。娶永川崔河之女。生公于上枝里第。諱德符字得之。弘治辛亥二月二十三日爲初度也。壬申中司馬。嘉靖戊戌九月十二日終。享年四十八。塟于陶唐洞子坐午向之原。先娶訓鍊院正任纘之女無子女。後夫人信川康氏。承文院判校諱仲珍之女。彰信校尉諱惕之孫。盈德縣令諱居禮之曾孫。生弘治癸丑六月十八日。終萬曆甲戌十二月初三日。享年八十二。祔于公墓下。生八男一女。長遵慶生三子。曰明復早夭。曰煕復贈左承旨。生二子。長卽潤雨生三子二女。道昌,道長,道章。朴敏修,金𥖝。次文雨。生二女李惟碩,張宗喜。曰光復贈戶曹參議。生一男榮雨軍資監主簿。以道長爲后。次迨慶生二男二女。愼復,誠復。金賚生一男榮震。李希天生一女趙光璧景陵參奉。生二男𥫃,竬。次遺慶娶李▣之女。生一男禮復。以和雨爲后。生二男道宏,道哲。次進慶娶東萊鄭有年之女。生一男心海。一女徐景𥠧武科。心海娶贈判書朴繼昌之女。生四男三女。曰惟達萬戶。曰亨胤直長出繼。生三男一女。道一。具宰。餘幼。曰惟迪生三男三女。道中。李顯一,崔道南。餘幼。曰惟逴生三男三女。道隆,道崇,道東。郭壽一,宋世弼。一幼。女長都聖兪。以愼與爲后。仲適李亨龍。生一子是松。季適韓景祚。生一子二女。瑬。李光仁,孫宗禮。徐景𥠧有一子。道立生五子二女。強仁,強義,強禮,強智,強信。權尙敏,崔節南。次遠慶娶柳壽鐵之女。生三男三女。曰心愨生員。生二子和雨。時雨生五子一女皆幼。四女崔泳,李順男無後,白元澄生二男三女弘敬,弘毅。蔡榏,都愼與。餘幼。權亨遠生一子▣▣一女柳宗慶。曰心憲無子女。曰心慜一女尹敏吉。女長孫處訥,仲洪聃壽俱無后。季蔡先正一子楨生子之海。次逢慶先娶李煥之女無子女。後娶孫霽雲之女生一男成吉。有二子一女皆幼。次遇慶訓鍊參軍。娶李漢楨之女。生二子二女。曰心一義州判官,曰心弘,曰李繼白,李檜。判官有二子。興雨生一女一子。都愼儀子幼。新雨無子女。曺以鼎無子女。呂挺生生三子四女。曰東韺,鄭𡒊,
李皦。
餘幼。心弘一女李重榮。繼白二子二女。時馨有一子。庭馨有三子。朴興緖有一女。尹之殷有子女皆幼。檜無后。次逞慶無子。女適進士金震楊生一子。大澤生三子三女。曰栥生一子鼎時。二女幼。曰宲生二男三女皆幼。曰槼生一子一女皆幼。曰崔律進士。生二男壽吾,富吾。曰李尙晉生四男皆幼。曰李時益生二男二女皆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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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암집(魯庵集) 김종일(金宗一)생년1597년(선조 30)몰년1675년(숙종 1)자관지(貫之)호노암(魯庵)본관경주(慶州)특기사항신지제(申之悌), 정경세(鄭經世), 이명준(李命俊)의 문인
魯庵先生文集卷之一 慶州金宗一字貫之甫著 / 詩
輓李光遠 皦
吾道日淪喪。君今又至斯。贒居百行首。慶有七男奇。玉洞歸雙舃。瓊林折一枝。丰資難復覩。提筆淚添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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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집(晦齋集) 이언적(李彥迪)생년1491년(성종 22)몰년1553년(명종 8)자복고(復古)호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본관여주(驪州)시호문원(文元)
晦齋先生集附錄 / [墓誌] / 晦齋李先生墓誌[李恒福]
以從弟郡守通之子應仁後。卒官司饔院判官。側室子曰全仁。判官。歷官三邑。皆有淸德。邑人立碑頌其德。娶洗馬張應機女。生四男二女。曰宜潤。隱德不仕。曰宜澄。業儒早卒。曰宜活。佐郞。曰宜潛。進士。庶子曰宜澤。女。進士趙端,參奉曺以咸。宜潤之子皗。宜澄之子皦。宜活之子皖。宜潛之子五人。長𤾧。餘幼。全仁有二子。曰浚曰淳。浚武科。官爲縣令。有二子。曰宏曰容。容爲淳後。亦武科。
李彥迪1491~1553 -應仁1535~1593- 宜潤1564~1597- 皗
李彥迪1491~1553 -應仁1535~1593- 宜澄1568~1596 - 皦- 이전(李塼,1614~?), 이채(李埰,1616~1684)
李彥迪1491~1553 -應仁1535~1593- 宜活- 皖
李宜活 | 1573 | 1627 | 驪州 | 浩然, 渾然 | 雪川 |
李彥迪1491~1553 -應仁1535~1593- 宜潛- 𤾧
李宜潛 | 1576 | 1635 | 驪州 | 炳然 | 守拙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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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천정(雪川亭)은 이의활(李宜活, 1573~1627)이 지은 정자로 경주 양동마을에 있다. 이의활은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설천(雪川)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흥해 군수(興海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손자이며,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의 문인이다. 설천정주인은 이의활의 5대손인 이헌국(李憲國, 1703~1776)을 가리키는데, 자는 만보(萬甫), 호는 금와(禁窩)이다. 《驪州李氏族譜, 1984年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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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잡기(東京雜記) : 조선 중기 문신인 이채(李埰, 1616~1684)가 1669년(현종10) 경주 부윤 민주면(閔周冕) 등과 함께 편찬하고 간행한 경주 지역의 풍물 지리지이다. 이채의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석오(錫吾), 호는 몽암(夢庵)이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현손(玄孫)으로, 1666년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76년(숙종2)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영릉 참봉(英陵參奉)과 빙고 별검(氷庫別檢)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경주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저서에 《몽암집(夢庵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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嶺南人物考 卷六 / 慶州
李應仁
李應仁字敬而, 號守菴, 驪州人。 文元公彦迪子。 中宗乙未(30,1535)生。 蔭仕, 縣監。 宣祖癸巳(26,1593)卒。
公生父郡守, 於晦齋先生爲從弟。 先生常謂從弟曰: “吾雖獨, 汝有三子, 宗祀有托矣。 吾當養一兒爲子。” 庚子秋, 欲挈去, 父母鍾愛, 辭以幼, 許第二子歸。 晦齋不從, 遂喩以重宗之義, 卽令婢負公來, 年六歲。 人問其故, 晦齋曰: “此兒慈良, 且有福相, 必有後矣。”
壬寅, 生母李氏以癘終, 公聞訃, 哭甚哀。 晦齋夫人朴氏將梨果止之, 然不顧而泣。 一日公患痢頗苦, 擧家危之, 勸肉不從。 朴夫人恐其損傷, 用雉膏和菜羹以飼, 有童言之, 自後雖菜羹, 有油氣, 則輒不近。 初, 母李氏解衣送公, 曰: “汝寢用被之。” 至是, 公每泣且摩曰: “吾母衣也。” 朴夫人撫背止其泣曰: “我汝母, 亡者卽叔母。” 公對曰: “此亦母, 彼亦母也。” 晦齋聞而奇之, 卽呈禮曹爲嗣, 公纔八歲。
爲靈山縣監, 時盧穌齋爲首相, 謂公曰: “君守二縣有聲, 且資滿, 當爲郡守。” 公曰: “才非文武, 徒以父故濫蒙天恩, 宰十室已踰涯分。 若使守大器而才分不逮, 黜罰及焉, 則是辱朝廷所以收用之意, 次辱先訓。” 朴惺撰行狀。
[주-B001] 六 : 本書 體裁에 根據할 때 아래에 編修官 姓名이 빠진 듯하다.[주-D001] 癸巳 : 底本에는 “壬辰”으로 되어 있다. 《大菴集・通訓大夫行司饔院判官李公淑人張氏祔葬墓誌銘》 및 《退堂集・司饔判官李公淑人張氏墓碣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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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윤(李宜潤)
자(字) 수연(晬然)
호(號) 무첨당(無忝堂)
생년 1564(명종 19)
졸년 1597(선조 30)
시대 조선중기
본관 여주(驪州)
활동분야 문학 > 문인
[상세내용]
이의윤(李宜潤)
1564년(명종 19)∼1597년(선조 30).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수연(晬然), 호는 무첨당(無忝堂).
조부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고 부친은 판관(判官) 이응인(李應仁)이다.
일찍이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문인이 되어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독서와 효행을 독실히 행하다가 34세에 요절하였다.
사림에서 그를 추도하여 사원을 세웠고 저술로 『무첨당선생문집(無忝堂先生文集)』이 있다.
[참고문헌]
無忝堂先生文集(李宜潤)
朝鮮人名辭書
[집필자]
김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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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재집 제45권 / 행장(行狀)
무첨당 이공 행장〔無忝堂李公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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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의윤(宜潤), 자는 수연(睟然)이며, 성은 이씨(李氏)이다. 그분의 선조는 여주(驪州)를 관향으로 하는 사람이다.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고 시호가 문원(文元)인 회재(晦齋) 선생의 손자이다. 아버지의 휘는 응인(應仁)이니 판관(判官)이며,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 장씨(張氏)이니, 연복군(延福君) 안양공(安襄公) 말손(末孫)의 후손 세마(洗馬) 응기(應機)의 따님이다. 가정(嘉靖) 갑자년(1564, 명종19) 2월 모일 월성(月城) 양좌동(良佐洞)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나이가 열 살이 되기도 전에 시부(詩賦)를 지을 수 있었다. 일찍이 문지방을 밟은 것 때문에 어머니에게 회초리를 맞은 적이 있었기에 종신토록 다시는 문지방을 밟지 않았다. 성동(成童 15세)이 되었을 때 판관공(判官公)이 신녕(新寧)을 다스렸는데, 공이 아우 의징(宜澄)과 함께 따라갔다. 관아 안의 매화나무와 대나무 숲에 손수 집 한 채를 짓고 공자, 맹자,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위판(位版)을 만들어 안치하고서 날마다 젯밥을 올리고 아침저녁으로 손을 씻고 절하였다. 이듬해 어머니 숙인(淑人)의 상을 당하여 이미 반장(返葬)하고는 시묘살이하며 삼년상을 마쳤다.
약관(弱冠 20세)에 판관공이 서울에서 벼슬살이하였기에 공이 향리의 선배에게 나아가 학문하였다. 선배가 감히 제자로 보지 않고, “조부의 자취를 이을 만하다.”라고 하였다. 판관공이 영산(靈山)을 다스릴 때, 공이 따라갔다. 시를 지어 여러 아우들을 경계하여 주색을 통렬히 끊고 자취를 거두어 놀러 나가지 않게 하였다. 고을의 선비들과 만날 때는 한결같은 뜻으로 겸손하고 공경하였으며, 청렴하고 강직하며 지혜가 넉넉하였기에 판관공이 영산에서의 의심스러운 정사를 결정함에 도와서 보익한 바가 많았다.
병술년(1586, 선조19) 별시에 응시하였다. 노소재(盧穌齋)가 당시 재상으로 있었는데 공을 불러 추천하여 음직(蔭職)을 주려 하자, 공이 향리로 내려간다고 핑계를 대고 만나지 않았다. 이로부터 드디어 학문에 뜻을 오로지 하고 〈불괴옥루잠(不愧屋漏箴)〉을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내가 나의 몸을 둠에 / 我有我身
우뚝이 만물 가운데서 태어났고 / 挺生萬物
내가 나의 본성을 받음에 / 我稟我性
성인과 동일하게 얻었네 / 與聖同得
성인이 되는 바탕은 / 作聖之基
반드시 그 홀로를 삼감이네 / 必愼其獨
삼감이란 그 무엇인가 / 愼之伊何
성과 경이니 / 曰誠曰敬
이 두 가지에 능한 사람이라야 / 能斯二者
몸이 닦이고 마음이 바르게 되네 / 身修心正
이 옥루를 돌아보니 / 睠玆屋漏
실의 서북쪽이라 / 于室西北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이며 / 人所不睹
남들이 소홀하기 쉬운 곳일세 / 人所易忽
반드시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해서 / 必須爲己
안으로 반성해 허물이 없어야 하며 / 內省不疚
마땅히 참되고 실제적인 공부에 힘써 / 當務眞實
더욱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하네 / 益加戒懼
마음의 기미가 움직이는 곳에서 / 心幾動處
그 선과 악을 살피고 / 察其善惡
사물이 응할 때 / 事物應時
그 잘잘못을 분별하여 / 辨其枉直
오직 의리를 따라 / 惟義之從
스스로 힘써 쉬지 않아야 하네 / 自強不息
얇은 얼음을 밟듯 깊은 못에 임하듯 / 履薄臨深
두려워하고 삼가기를 그치지 않고 / 戰兢不已
큰제사를 받들듯 함은 / 如承大祭
반드시 큰일을 받들 때만 하는 것은 아니고 / 不必承事
큰손님을 보는 듯 함은 / 如見大賓
반드시 문을 나갈 때만 하는 것은 아니네 / 不必出門
넘어져 자빠지는 때도 해이하지 말며 / 顚沛莫弛
다급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보존해야 하네 / 造次必存
그런 뒤라야 부끄럽지 않아 / 然後不愧
은은하지만 날로 드러나게 되고 / 闇然日章
오직 저 소인은 / 惟彼小人
선명하지만 날로 없어지네 / 的然日亡
보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라 / 莫謂不見
열 눈이 보는 바이며 / 十目所視
아는 이가 없다고 말하지 마라 / 莫謂無知
열 손이 가리키는 바일세 / 十手所指
어두운 방이 비록 그윽하지만 / 暗室雖幽
귀신이 엿보는 바이며 / 鬼神所瞰
홀로 있는 곳이 비록 은미하지만 / 獨處雖隱
천군(마음)이 이에 살핀다네 / 天君是監
감히 공경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랴 / 敢不敬畏
아 나는 욕됨이 없기를 / 嗟我無忝
무첨(無忝)은 공의 자호이다. 기축년(1589, 선조22)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의 문하에 나아가 스승으로 섬기며 《심경(心經)》을 배울 때에 뜻을 받들어 ‘언지시(言志詩)’를 지었는데, 한강(寒岡)이 매우 인정하며 마음을 오로지하고 각고의 노력을 하여 가학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칭찬하였다. 인하여 공에게 말하기를, “책을 읽는 것은 산을 유람하는 것과 같으니, 반드시 두루 다닌 뒤에 그 맛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공이 허리띠에 써서 마음에 새겼다.
공이 27세에 〈원조오잠(元朝五箴)〉을 계승하여 지었는데, 잠은 잃어버려 전하지 않는다. 그 서문에 대략 말하기를, “나의 선조 회재(晦齋) 선생이 정덕(正德) 정축년(1517, 중종12) 새해 아침 27세가 되어 다섯 편의 잠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셨으니, 첫째 〈외천잠(畏天箴)〉, 둘째 〈양심잠(養心箴)〉, 셋째 〈경신잠(敬身箴)〉, 넷째 〈개과잠(改過箴)〉, 다섯째 〈독지잠(篤志箴)〉이다. 지금 내 나이가 또한 27세이고, 오늘이 또한 새해 아침이니 마땅히 그 뜻을 계승하기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에 감히 계승하여 지어서 새해의 다짐으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이해 가을 향시에 합격하여 서울로 갔는데, 장사랑(將仕郞)이란 일자(一資)의 벼슬을 가지고 온 서리(書吏)가 있어 말하기를, “아버지의 품계가 끝까지 올라가면 자식에게 대신 더하는 것이 관례이다.”라고 하니, 공이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임진년(1592, 선조25) 왜적이 크게 침입하여 노략질하니, 공이 어버이를 모시고 난리를 피하였다. 비록 달아나 숨어 있는 가운데서도 힘을 다해 맛난 음식 제공하기를 빠트리지 않았다. 계사년(1593, 선조26) 여름 판관공(判官公)이 전염병에 걸리자 공은 밤낮으로 애를 태우며 대변을 맛보고 하늘에 기도하며 지극함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몸소 시신을 염습(殮襲)하였으며, 부신(附身)과 부관(附棺)은 한결같이 오직 예에 맞게 하여 유감이 없게 하였다. 왜적이 바야흐로 고을의 경내에 있었기 때문에 땅을 파서 가매장하고 그 곁에서 거적을 깔고 시묘살이하며 바람과 이슬을 피하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곡하고 제수를 올렸는데, 비록 위급한 상황이라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공 또한 전염병에 걸려 마른 나무처럼 매우 여위었으나, 장례를 치르기 전 무릇 8개월 동안 여전히 죽만 먹었다. 얼마 뒤 전쟁은 그칠 기미가 없고, 크게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상황을 보자 형제는 돈주머니를 털어 일꾼을 사서 장례를 지냈다. 애초에 시묘살이하며 삼년상을 마치고자 하였으나 양식은 끊어지고 왜적 또한 사방에서 위협하였기에 집으로 반혼(返魂)하였다. 종들이 서로 잇따라 굶어 죽었으나 오히려 정성을 다해 아침저녁으로 신위(神位) 앞에 음식을 차려 올리기를 하루도 그만두지 않았다. 당시 공은 나이가 겨우 서른 남짓이었으나 수염과 머리카락은 이미 하얗게 변한 것이 많았다. 삼년상이 끝나자 살길이 매우 어려웠으나 초하루와 보름, 시제(時祭), 예제(禰祭 아버지의 사당에 지내는 제사)는 오히려 그만두지 않았다.
집안은 대대로 청빈하고 아우와 누이가 많았는데, 공이 물려받은 밭과 종을 나누어 주었다. 아우 의징(宜澄) 또한 효성스럽고 우애로운 사람이었다. 판관공이 일찍이 공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너희 형제가 만약 예제(禮制)를 다한다면 반드시 몸이 상하여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아우가 공과 함께 예제를 지키다가 너무 고생하여 삼년상을 마치고 1년이 지나자 곧 세상을 떠났다. 공이 선친의 말을 애통하게 생각하였고, 명절과 제삿날이 이를 때마다 눈물을 비 오듯 흘렸다. 아우를 잃은 뒤에는 인간 세상에 소홀하여 뜻이 없더니, 안색과 모습이 더욱 초췌해지고 이로 인하여 병들어 눕게 되었다.
당시에 명나라 군사들이 크게 이르렀는데, 판관(判官) 민항(閔沆)은 무인이어서 교만하고 사나우며 선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공에게 각 읍(邑)의 군량을 거두어들이면서 위협과 노여움을 더하여 독려하기에 이르렀다. 공이 어쩔 수 없이 병든 몸을 이끌고 왕복하다가 마침내 병이 위독해져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바야흐로 병이 심해졌을 때 배를 먹고 싶어 하였으나, 아들이 구할 수 없자 석류를 대신 드렸다. 공이 오열하며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임종하실 때 이 석류를 먹고 싶어 하셨는데, 나의 효성이 읍죽(泣竹)에 부끄럽게도 구해 드리지 못했으니, 내가 차마 먹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무당이 기도하는 소리가 내당에서 나오는 것을 듣고 노하여 말하기를, “어찌 선조의 집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며 명하여 쫓아내게 하였다.
당시에 명나라 군대가 증산(甑山)에서 왜적을 포위하였는데, 혹 승전보를 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다행히 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이 소식을 들었으니, 죽어 저승에서 알려 드릴 수 있겠구나.”라고 하였다. 이는 대개 판관공이 임종할 때 나라가 회복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인하여 조용히 여러 아우들에게 말하기를, “장부가 전귀(全歸)하니 무엇을 슬퍼하겠느냐. 훗날 결혼 안 한 두 아우를 장가보내고, 내 아이 하나를 길러 집안을 유지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라고 하고는 인하여 생을 마쳤으니, 만력(萬曆) 정유년(1597, 선조30) 12월 모일이었으며 공의 나이 겨우 34세였다. 당시 왜적의 기세가 매우 급박하여 7일 지난 무술년(1598, 선조31) 정월 5일 송도산(松濤山) 부유(負酉 동향)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용모가 단정하고 기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고요하고 담박하여 욕심이 적었고, 빼어나고 영리하여 도(道)에 가까웠다. 정 선생(鄭先生 정구(鄭逑))이 일찍이 그 굳은 절개를 칭찬하였으며, 송암(松庵) 김면(金沔) 또한 단정하고 고아한 선비라고 여겨 이별할 때마다 반드시 다정하게 눈길을 보냈다.
평소 생활할 때는 항상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바르게 하였다. 새벽에 어버이께 문안 인사를 하고 저녁에 어버이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오직 옛 성현의 글을 가까이하였다. 특히 《소학(小學)》과 《심경(心經)》 등에서 체득하여 징험하고자 하였다. 경(敬)을 잡아 지키고 마음을 보존함에 조금도 게으른 적이 없었으며, 삼가고 조심해서 오직 혹시라도 마음이 달아날까 염려하였다. 일찍이 어느 하루는 책을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피곤해 잠들었는데, 곧바로 시 한 수를 지어 스스로 경계하였다.
상달(上達)은 하학(下學)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다만 받들고 순종하여 뜻을 어기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대답하고 진퇴(進退)하는 사이에 기운을 온화하게 하고 용모를 부드럽게 하여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점이 있었다. 술과 음식 만드는 방법을 널리 구하여 손수 베껴 써서 책 한 권을 만들어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였다. 아울러 침 놓고 약 쓰는 방법을 배워 의술(醫術)의 이치를 다 알았다.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예절에 무릇 의심스러운 절목이 있으면 반드시 한강(寒岡) 선생에게 여쭙고 질정해서 시행하였다. 여러 아우들에게 우애가 있어 마치 수족(手足)과 같이 하였다. 비록 학문을 권장하기 위해 아우들을 매질하기도 하였으나 곧바로 눈물 흘렸다.
공은 평소 고상한 취향이 있었다. 문원공(文元公)이 일찍이 집의 서쪽 산허리에 영귀정(詠歸亭)을 지었는데, 비바람에 쓰러졌다. 공이 형강(兄江)의 별장에 정자를 다시 짓고 작은 배를 마련하여 정자 아래를 왕래하며 거문고 하나와 낚싯대 하나를 가지고 노년을 마칠 계획으로 삼고자 하였다. 세상의 난리를 만나 뜻은 있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아 하늘이 이미 공에게 이와 같은 자질과 학문과 행실을 주었으면서도 오히려 장수하여 그 뜻과 학업을 끝마칠 수 있게 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부인은 창녕 조씨(昌寧曺氏) 도사(都事) 광익(光益)의 따님이다. 17년을 함께 살면서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 대하듯 하였다. 아들 하나가 있으니 참봉 주(皗)이며, 딸 하나는 대군사부(大君師傅) 최동집(崔東㠍)에게 시집갔다. 주의 아들 돈(墩)은 직장(直長)이고, 현(垷)은 교관인데 양자로 나갔고, 그리고 광(垙)이다. 최동집의 아들은 위남(衛南)으로 생원이다. 돈의 아들은 덕종(德種), 덕중(德重)이며, 서자는 덕용(德用), 덕봉(德鳳)이다. 현의 아들은 덕순(德純), 덕신(德新)이다. 광의 아들은 덕함(德咸)이다. 덕종의 아들은 성중(誠中)으로 직장이다. 덕순의 아들은 민중(敏中)으로 학행(學行)이 있었으며, 그다음으로 징중(徵中), 생원 경중(敬中), 정중(政中)이다. 덕신은 정중을 양자로 삼았으며, 서자로 득중(得中), 복중(復中)이 있다. 덕함의 아들은 익중(益中), 겸중(謙中), 입중(立中), 정중(正中)이다. 성중의 아들은 헌조(憲祖), 헌익(憲翼)이다. 헌조는 정하(鼎廈)를 양자로 삼았고, 정하는 원상(元祥)을 양자로 삼았는데 전 참봉(前參奉)이다. 원상의 아들은 재정(在正)이다.
참봉군(參奉君)이 공의 유사와 박대암(朴大庵)이 지은 묘지명, 권 희정공(權僖靖公)이 지은 묘갈명을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 주고 행장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며 말하기를, “우리 월성(月城) 인사들이 공을 경모함이 쇠하지 않아 선조 문원공(文元公)의 곡강묘(曲江廟)에 공을 올려 제향하고자 의논하였습니다. 대개 공을 드러내 밝힌 것이 이미 지극합니다만 오직 빠진 것이 행장이니 감히 행장 지어 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회재(晦齋) 선생은 한 세상에 쉽게 나오지 않을 큰 현인으로, 위로는 고정(考亭 주자(朱子))의 학문을 이었습니다. 공은 그분의 손자가 되니 이미 선조의 영광을 배태(肧胎)하고 또 남긴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 급박하고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반드시 인(仁)에 의거하였으며, 선조의 아름다움을 따르고자 생각하였습니다. 이와 같다면 비록 생을 누린 것이 길지 않고 뜻과 학업을 끝까지 마치지 못한 바가 있지만, 그분이 지은 시와 잠(箴), 그리고 평소 생활할 때 날마다 볼 수 있었던 행실을 살펴보면, 문원공(文元公)의 훌륭한 모범을 공이 실로 잘 본받았습니다. 마땅히 고을의 인사들이 이런 의논을 두어 감추어진 덕과 숨겨진 빛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행장을 짓는 일은 내가 감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어서 굳게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이 일은 예를 갖추어 기존의 글에 의거하는 데 불과하여 반드시 나의 말에서 중요한 것을 취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삼가 여러 믿을 만한 분들의 글에 의거하여 대략 위와 같이 은괄(櫽括)하였다.
[주-D001] 회재(晦齋) 선생 : 이언적(李彦迪, 1491~1553)으로, 본관은 여주,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이다. 현 경상북도 경주 출신이다. 원래 이름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령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다. 중종 때 과거로 출사하였으나 김안로(金安老)의 집정을 반대하다가 쫓겨난 후 귀향하여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김안로 사후 다시 관직에 나아갔으나 명종 때 윤원형(尹元衡)의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다시 강계(江界)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졸하였다. 조선 성리학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후 이황의 학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문묘에 배향되었고, 경주 옥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술로 《회재집》,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등이 있다.[주-D002] 응인(應仁) :
이응인(李應仁, 1535~1592)으로, 본관은 여강(驪江), 자는 경이(敬而), 호는 수암(守庵)이다. 경주(慶州)에 거주하였다. 벼슬하여 여러 고을을 맡아 다스렸고 부임하는 곳마다 선정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승지(承旨)에 증직되었다.[주-D003] 연복군(延福君) …… 후손 : 《무첨당집》의 행장과 가장에는 “연복군 안량의 현손[延福君安良之玄孫]”으로 되어 있다. 장말손(張末孫, 1431~1486)의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경윤(景胤), 호는 송설헌(松雪軒),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옥산군(玉山君) 장안량(張安良, 1395~1478)의 아들이며, 예천(醴泉)에 거주하였다. 이시애(李施愛)의 반군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적개 이등공신(敵愾二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1482년(성종13) 연복군에 봉해졌다. 장안량은 일명 중지(重智)이며, 그의 아들 5형제가 크게 현달하여 옥산군에 추봉되었다.[주-D004] 의징(宜澄) :
이의징(李宜澄, 1568~1596)으로, 자는 형연(炯然), 호는 양졸당(養拙堂)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부모상을 당하자 매우 슬퍼하며 삼년상을 마쳤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형제가 차례로 죽으니 나라에서 이 사실을 듣고 호역(戶役)을 감면해 주었다.[주-D005] 시를 …… 하였다 : 시는 《무첨당집》 권1의 〈절구 한 수를 읊어 스스로 경계하고 인하여 두 아우에게 보여 주다.[吟一絶而自警, 因示兩弟.]〉이며, 주색을 경계하는 내용이다.[주-D006] 노소재(盧穌齋) : 노수신(盧守愼, 1515~1590)으로,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ㆍ이재(伊齋)ㆍ암실(暗室)ㆍ여봉노인(茹峰老人),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이조 좌랑에서 파직되어 순천(順天)에 유배되었다가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으로 가죄(加罪)되어 진도(珍島)로 옮겨져서 19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선조(宣祖) 즉위 후 영의정에까지 기용되었다. 저서에 《소재집(蘇齋集)》이 있다. 충주(忠州)의 팔봉서원(八峰書院), 상주(尙州)의 도남서원(道南書院)ㆍ봉산서원(鳳山書院), 진도(珍島)의 봉암사(鳳巖祠), 괴산(槐山)의 화암서원(花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주-D007] 불괴옥루잠(不愧屋漏箴) : 《무첨당집》 권1에 수록되어 있다. 서문(序文)에 따르면 정해년(1587, 선조20)에 지은 것으로, 《중용장구》 제33장에 “《시경》에 ‘네가 홀로 방 안에 있을 때를 살펴보건대, 방 귀퉁이에도 부끄럽지 않다.’ 하였다.[詩云, 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라고 한 내용을 읽다가 두려운 마음이 일면서 감흥이 있어 잠을 지었다고 한다.[주-D008] 그 홀로를 삼감 : 원문은 ‘신기독(愼其獨)’인데, 《중용장구》 수장(首章)에 “숨는 것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고 세미한 것보다 더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하였으며, 《대학장구》 성의장(誠意章)에는 “이른바 뜻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자기(自欺)함이 없는 것이다. 악을 미워하되 악취를 미워하듯 하고 선을 좋아하되 미색(美色)을 좋아하듯 하는 것을 자겸(自謙)이라 한다. 이 때문에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所謂誠其意者, 毌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謙. 故君子必愼其獨也.]” 하였다.[주-D009] 옥루(屋漏) : 방의 서북 모퉁이로, 중류(中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인데 집안에서 가장 깊숙한 곳이다. 고대에 혈거나 움막 생활을 할 때 지붕의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햇빛과 바람을 통하게 하고 낙숫물도 빠지게 한 데서 유래하였다.[주-D010] 안으로 …… 하며 : 원문은 ‘내성불구(內省不疚)’로, 군자의 신독(愼獨)을 말한다. 《논어》 〈안연(顔淵)〉에 “내성불구하다면 걱정하고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內省不疚, 夫何憂何懼?]”라고 하였고, 《중용장구》 제33장에 “《시경》에 ‘물에 잠겨 숨어 있어도 그것 역시 잘 보이기만 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내성불구를 함으로써 양심에 거리낌이 없게 하는 것이다.[詩云: 潛雖伏矣, 亦孔之昭. 故君子內省不疚, 無惡於志.]”라는 말이 나온다.[주-D011] 스스로 …… 하네 : 《주역》 〈건괘(乾卦) 상(象)〉에 “하늘의 운행이 굳세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는다.[天行健, 君子以, 自彊不息.]”라고 한 것을 원용하였다.[주-D012] 얇은 …… 않고 : 《시경》 〈소아 소민(小旻)〉에 “전전긍긍하여 깊은 못에 임하듯이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하라.[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라는 구절을 원용한 말이다.[주-D013] 큰손님을 …… 아니네 : 《논어》 〈안연〉에서, 중궁(仲弓)이 인을 묻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문을 나갔을 때에는 큰손님을 뵙는 듯이 하며, 백성에게 일을 시킬 때에는 큰제사를 받들듯이 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한다.[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라고 한 것을 원용하였는데, 주희는 집주에서 전자를 ‘경을 주장함[主敬]’으로 보고, 후자를 ‘서를 행함[行恕]’으로 보았다.[주-D014] 넘어져 …… 하네 : 《논어》 〈이인(里仁)〉에 “군자는 밥 먹는 동안이라도 인의 정신을 어겨서는 안 되니, 아무리 다급한 때라도 이 인에 의거해야 하고, 넘어져 자빠지는 때라도 반드시 이 인에 의거해야 한다.[君子無終食之間違仁, 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라는 공자의 말을 원용하였다.[주-D015] 은은하지만 …… 없어지네 : 《중용장구》 제33장에 “《시경》에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덧입는다.’ 하였으니, 이는 문채가 너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은은하되 날로 밝아지고, 소인의 도는 선명하되 날로 없어진다.[詩曰 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故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라고 한 데서 원용한 말이다.[주-D016] 열 …… 바일세 : 모든 사람이 삼엄하게 주시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대학장구》 전(傳) 6장에 “증자가 말하기를 ‘열 개의 눈이 지켜보는 바이고 열 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바이니 얼마나 삼엄한가.’ 하였다.[曾子曰,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라고 한 데서 원용한 말이다.[주-D017] 아 …… 없기를 : 저본의 ‘차아(嗟我)’는 《무첨당집》의 행장과 동생 이의혼(李宜渾)이 지은 가장, 그리고 《무첨당집》 권1 〈불괴옥루잠(不愧屋漏箴)〉에는 ‘서기(庶幾)’로 되어 있다.[주-D018] 무첨(無忝) : 북송(北宋)의 학자 장재(張載)의 〈동명(東銘)〉에 “옥루에 부끄러움이 없게 함이 욕되게 함이 없는 것이다.[不愧屋漏爲無忝]”에서 취하였다. ‘무첨’은 《시경》 〈소완(小宛)〉에 “일찍 일어나고 밤 늦게 자서 너를 낳아 주신 분을 욕되게 하지 말라.[夙興夜寐, 無忝爾所生.]”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부모를 욕되게 하지 말라는 뜻이다.[주-D019] 언지시(言志詩) : 자신의 뜻을 말한 시로, 이의혼이 지은 가장과 청대 권상일(權相一)이 지은 묘갈명에 따르면, 《무첨당집》 권1의 〈한강 선생이 주자 시의 “일용무여공 상간구노력”으로 운을 나누어 시를 지으라고 명하셨는데 ‘일(日)’ 자를 얻었다.[寒岡先生以朱子詩‘日用無餘功相看俱努力’, 命分韻, 得‘日’字.]〉라는 시이다. 주자의 시는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 8수 중 관선재를 읊은 것이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책 짊어지고 어디에서 오셨는가? 오늘 아침 자리를 함께했네. 날마다 공부하느라 여력이 없으니, 서로 함께 노력하세나.[負笈何方來, 今朝此同席? 日用無餘功, 相看俱努力.]”[주-D020] 책을 …… 한다 : 가장과 권상일(權相一)이 지은 묘갈명에는 “책을 읽는 것은 산을 유람하는 것과 같다. 혹 산을 반도 오르지 못하고 중지하는 자도 있고, 혹 산을 두루 다니면서도 그 의취를 알지 못하는 자가 있으니, 반드시 그 산수의 의취를 알아야 비로소 산을 유람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讀書如遊山. 或有登山未半而止者, 或有歷遍而不知其趣者, 必也知其山水之趣, 方可謂之遊山.]”라고 하였다.[주-D021] 허리띠에 써서 : 중요한 말을 잊지 않도록 허리에 맨 띠에 적어 두는 것으로, 공자가 충신(忠信)과 독경(篤敬)에 관해 말하자 “자장(子張)이 공자의 말을 띠에 썼다.[子張書諸紳]”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論語 衛靈公》[주-D022] 원조오잠(元朝五箴) : 이언적이 27세 되던 해 정월 초하루에 사람의 도리를 다하여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해 준 바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각오를 피력하면서 지은 것으로, 《회재집(晦齋集)》 권6에 수록되어 있다.[주-D023] 일자(一資) : 보잘것없이 조그마한 벼슬을 이르는 말이다. 장사랑은 종9품의 최하위 관직이다.[주-D024] 아버지의 …… 것 : 원문은 ‘부자궁즉자대가(父資窮則子代加)’이다. 자궁(資窮)은 당하관(堂下官)의 최상급인 사람을 말한다. 정3품에는 당하관과 당상관이 있는데, 정3품 당하관은 당하관으로서는 더 이상 승진할 수 없는 것이 예이므로 계급이 다 찼다는 뜻이다. 대가(代加)는 자궁 등의 이유로 본인에게 직접 가자(加資)할 수 없을 때 아들ㆍ사위ㆍ동생ㆍ조카 등에게 자기 대신 그 품계를 받게 하는 것을 말한다.[주-D025] 대변을 …… 기도하며 : 유검루(庾黔婁)의 효행을 본받아 실천한 것으로, 대변을 맛본 것은 아버지 병세의 차도를 알기 위해 대변이 쓴지 단지 확인한 것을 말하며, 하늘에 기도한 것은 매일 저녁마다 북극성에 부친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기를 빈 것을 말한다. 《南史 庾黔婁列傳》[주-D026] 부신(附身)과 부관(附棺) : 부신은 염을 할 때 쓰는 수의와 이불 같은 의금(衣衾)의 도구이고, 부관은 장례를 지낼 때 쓰는 명기(明器 부장품)와 용기(用器 고인이 쓰던 일반 물품) 등이다.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상을 당하면 3일 만에 빈(殯)을 하는데, 시신과 함께 관에 넣는 물건은 반드시 정성스럽고 신실하게 하여 후회를 남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 3개월이 지나 장사를 지내는데, 관곽(棺槨)과 함께 부장하는 물품들은 반드시 정성스럽고 신실하게 하여 후회를 남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子思曰: 喪三日而殯, 凡附於身者, 必誠必信, 勿之有悔焉耳矣. 三月而葬, 凡附於棺者, 必誠必信, 勿之有悔焉耳矣.]”라고 하였다.[주-D027] 반혼(返魂) : 장례 후에 신주를 모시고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오는 의례를 말한다. ‘반우(返虞)’, ‘흉제(凶祭)’라고도 한다.[주-D028] 아우가 …… 떠났다 :
《무첨당집》 권1에 아우의 죽음을 애통해하면서 지은 〈제사제 의징 문(祭舍弟 宜澄 文)〉이 있다.
[주-D029] 민항(閔沆) : 《선조실록》 32년 6월 12일 기사에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경주 판관(慶州判官) 민항은 위인이 용렬하여 아무 하는 일 없이 국록만 축내고 있는 데다가 본부(本府)의 기생과 간통하여 인륜을 어긴 일이 많으니, 파직시키소서.”라고 하자, 파직하라고 답한 기사가 있다.[주-D030] 읍죽(泣竹) : 삼국 시대 오(吳)나라에서 맹종(孟宗)의 어머니가 늙고 병들어 위독하였는데, 겨울철에 죽순을 먹고 싶어 했으나 이때는 땅이 얼어서 죽순이 없었다. 맹종이 대숲에 들어가서 슬피우니 이윽고 땅 위로 죽순 두어 줄기가 나와, 이것을 캐어 가지고 돌아와서 죽을 끓여 드리자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三國志 吳志 孫皓傳 裴松之注》 이와 관련하여 한림순출(寒林筍出), 맹종죽(孟宗竹), 읍죽(泣竹) 등의 성어가 있다. 여기서는 맹종과 같은 효성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한다는 뜻이다.[주-D031] 전귀(全歸) : 부모가 온전히 낳아 주신 몸을 자식이 손상하지 않고 온전히 보전하고서 죽는다는 뜻이다. 《예기》 〈제의(祭義)〉에, 증자(曾子)의 제자인 악정자춘(樂正子春)이 증자에게 들은 말을 전하여 말하기를, “부모가 자식을 온전히 낳아 주셨으니 자식이 몸을 온전히 하여 돌아가야 효도라고 이를 수 있다. 몸을 훼손하지 않으며 몸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 온전히 한다고 이를 수 있다.[父母全而生之, 子全而歸之, 可謂孝矣. 不虧其體, 不辱其身, 可謂全矣.]”라고 하였다.[주-D032] 김면(金沔) : 1541~1593. 본관은 고령,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庵)이다. 조식(曺植)을 사사하고,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조종도(趙宗道), 곽준(郭䞭), 문위(文緯) 등과 함께 거창과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593년 1월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충청도ㆍ전라도의 의병과 함께 김산에 주둔하여 선산(善山)의 적을 격퇴할 준비를 하던 중 갑자기 병에 걸려 죽었다.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07년(선조40) 이조 판서가 더해졌다. 고령 도암사(道巖祠)에 제향되었다. 그의 행적을 기록한 《송암실기》가 있다.[주-D033] 시 …… 경계하였다 : 가장에 따르면, 이 시는 《무첨당집》 권1의 〈양진재에 홀로 앉아 글을 보는데 한참 지나자 졸음이 몰려오기에 절구 한 수를 지어 스스로 경계하다.[獨坐兩進齋看書 良久爲睡魔所侵 因書一絶以自警]〉이다.[주-D034] 상달(上達)은 하학(下學)으로부터 시작한다 : 하학은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운다는 말이요, 상달은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한다는 말이다. 《논어》 〈헌문(憲問)〉에, 공자가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탓하지 않고,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우면서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니, 나를 알아주는 것은 하늘일 것이다.[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其天乎!]”라고 하였고, 《근사록》 권4 〈존양류(存養類)〉에 정호(程顥)가 “성현의 수많은 말씀들도 그 요점을 살펴보면 단지 사람으로 하여금 놓친 마음을 단속해서 다시 사람 몸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그 마음을 찾아서 위를 향해 나아간다면 그것이 곧 공자가 말씀하신 대로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우면서 위로 하늘의 이치를 체득하는 일이 될 것이다.[聖賢千言萬語, 只是欲人將已放之心約之, 使反復入身來. 自能尋向上去, 下學而上達.]”라고 하였다.[주-D035] 형강(兄江) : 지금의 형산강으로, 경상북도 경주에서 시작하여 동북쪽으로 흘러 포항의 영일만으로 흘러드는 강이다.[주-D036] 광익(光益) : 조광익(曺光益, 1537~1578)으로,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가회(可晦), 호는 취원당(聚遠堂)ㆍ죽와(竹窩)이다. 상주(尙州) 함창(咸昌)ㆍ영천(永川)에 거주하였다. 호익(好益)의 형이며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78년(선조11) 강동으로 좌천된 동생 호익을 만나려고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로 내려갔다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가 정문을 내려 표창하게 하였다. 오봉서원(五峰書院)과 청효사(淸孝祠)에 제향되었으며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 기재되었다. 저서로는 《취원집(聚遠集)》이 전한다.[주-D037] 최동집(崔東㠍) : 1586~1661.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진중(鎭仲), 호는 대암(臺巖)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봉림대군(鳳林大君 훗날 효종(孝宗))이 심양(瀋陽)에 인질로 잡혀갈 때 사부로 임명되었으나 미처 따라가지 못하였고, 이후 명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팔공산(八公山)의 농연(聾淵) 가에 은거하여 종신토록 나오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숭정처사(崇靖處士)라고 칭하였다. 저서에 《대암집》이 있으며, 《입재집》 권28에 〈대암집서〉가 있다.[주-D038] 박대암(朴大庵) : 박성(朴惺, 1549~1607)으로,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응(德凝), 호는 대암,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대구(大邱) 현풍(玄風)ㆍ청송(靑松)에 거주하였다. 정구(鄭逑)와 배신(裵紳)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김성일(金誠一)의 참모로 종사했고, 정유재란 때 조목(趙穆)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하였다. 사포서 사포(司圃署司圃), 공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대암집(大庵集)》이 전한다. 《대암집》 권3에 〈무첨당 이공 묘지명(無忝堂李公墓誌銘)〉이 있다.[주-D039] 권 희정공(權僖靖公) : 권상일(權相一, 1679~1759)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 시호는 희정이다. 〈사칠설(四七說)〉을 지어 이(理)와 기(氣)를 완전히 둘로 분리하고, 이는 본연의 성이며 기는 기질의 성이라고 주장했다. 저서로는 《청대집》, 《관서근사록집해(觀書近思錄集解)》와 《일기(日記)》 30여 권이 있다. 죽림정사(竹林精舍), 근암서원(近嵒書院)에 향사되었다. 《청대집》 권12에 〈무첨당 이공 묘갈명(無忝堂李公墓碣銘)〉이 있다.[주-D040] 곡강묘(曲江廟) : 곡강은 흥해(興海)의 옛 이름으로, 곡강서원(曲江書院)을 말한다. 곡강서원은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남송 3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1607년(선조40) 이언적(李彦迪)을 주벽으로 하고 조경(趙絅)을 함께 배향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훼철되었다.[주-D041] 은괄(櫽括) : 기울어지고 굽은 것을 바로잡는 기구로, 굽은 것을 잡는 것을 은(檃)이라 칭하고 모난 것을 잡는 것을 괄(括)이라 한다. 《회남자(淮南子)》 〈수무훈(修務訓)〉에 “그 굽은 것이 바르게 되는 것은 은괄의 힘이다.[其曲中規, 櫽括之力.]”라고 하였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김숭호 (공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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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李塼)
[진사] 현종(顯宗) 3년(1662) 임인(壬寅) 증광시(增廣試) [진사] 2등(二等) 22위(27/100)
자(字) 대방(大方)
생년 갑인(甲寅) 1614년 (광해군 6)
합격연령 49세
본인본관 여주(驪州)
거주지 경주(慶州)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부모구존 자시하(慈侍下)
[부(父)]
성명 : 이교(李皦)
품계 : 장사랑(將仕郞)
[안항(鴈行)]
제(弟) : 이채(李埰)[進]
제(弟) : 이훈(李塤)
제(弟) : 이동(李埬)
제(弟) : 이내(李)
제(弟) : 이기(李垍)[進]
제(弟) : 이구(李坵)
[출전]
『신축증광사마방목(辛丑增廣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의산古602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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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李埰)
[진사] 현종(顯宗) 7년(166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10위(15/100)
자(字) 석오(錫吾)
생년 병진(丙辰) 1616년 (광해군 8)
졸년 갑자(甲子)(주1)【補】 1684년 (숙종 10)
향년 69세
합격연령 51세
본인본관 여주(驪州)
거주지 경주(慶州)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기타 연벽(聯璧[兄弟同榜]):弟 李垍
부모구존 자시하(慈侍下)
[부(父)]
성명 : 이교(李皦)
품계 : 종사랑(從仕郞)
[안항(鴈行)]
형(兄) : 이전(李塼)[進]
제(弟) : 이훈(李塤)
제(弟) : 이련(李堜)
제(弟) : 이래(李)
제(弟) : 이기(李垍)[進]
제(弟) : 이구(李坵)
[주 1] 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출전]
『병오식년사마방목(丙午式年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朝26-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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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암집(葛庵集) 이현일(李玄逸)생년1627년(인조 5)몰년1704년(숙종 30)자익승(翼昇)호갈암(葛庵)본관재령(載寧)시호문경(文敬)특기사항홍여하(洪汝河), 정시한(丁時翰), 이유장(李惟樟) 등과 교유
葛庵先生文集別集卷之五 / 行狀 / 氷庫別檢李公行狀
公諱埰。字錫吾。驪州人。今居慶州之良佐里。
曾祖諱應仁通訓大夫司甕院判官。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妣某封某氏。
祖諱宜澄。承仕郞。妣某封某氏。
父諱皦。從仕郞。妣孺人鄭氏,孺人孫氏。
李氏爲東州著姓。高麗鄕貢進士世貞之後。入本朝。有諱蕃。自延日移居慶州。卒。贈左贊成。生諱彥迪。以道德行誼。爲百世師。官至左贊成。諡文元。則今所謂晦齋先生是也。無子。承旨公以從父弟子爲之後歷典三邑。遺愛在民。承仕公遊寒岡鄭先生之門。有聲稱。早卒不大著。從仕公以孝行稱鄕里。屢登薦書。竟不仕。三世事蹟。具載東京志。公生有異質。年八九歲時。從從祖郡守公宜活學。郡守公亟稱之曰。世吾家者必此兒也。旣成童。通經史。能作七言句詩。會州設夏課以取士。有欲爲公求速化者。恐其未熟程文。請借手於人。爲必售計。公不肯曰。夏課亦國試也。吾初進取。豈可假他手以欺有司。遂以己作應選。識者韙之。始沙西全公湜尹東京。愛公才敏。歸以孫女。嘗語人曰。吾於東京。得一奇寶。蓋指公也。自是交遊日廣。華問彌彰。屢捷鄕解。省試輒報罷。年五十。始補上舍生。丙辰冬。以泮薦除英陵參奉。不就。明年丁巳。再調氷庫別檢。皆不赴。當是時。諸宰有以學行遺逸薦公者非一。公笑曰。所謂遺逸者。乃隱居求志。不要聞達者之稱。豈從事科場。勤苦而無成疾病淹滯。衰退屛伏者之謂。無其實而得其名。可羞之甚也。因再赴場屋。以避其名。人或勸之仕。則輒掩耳曰。吾少爲親養。應擧覓官四十餘年。白首契闊。蹭蹬不遇。豈非命耶。何苦以六十之年。屈首靦顏。以重違心拂志之羞乎。凡三被恩除。皆不應命。始公以故里少幽閒之趣。移居令人全氏墓下安溪里。至是築室居第之傍。圖書花卉以自娛。聚族人及鄕里子弟。敎誨課督。非甚病不輟也。嘗於京邸。遘痘甚危。賴素與交洪君世亨晝夜看護。飮食藥餌扶養之。得不死。後數年。遭伯氏上舍君戚。又居繼妣孫夫人憂。執喪過苦。遂致榮衛大傷。癸亥冬。感疾彌留。明年夏。疊遭小功兄弟之喪。哀傷疾轉劇。公自知不起。召諸子謂曰。喪事稱家之有無。吾家本寒素。汝曹當量力所及而爲之。不宜妄有營求爲厚葬計也。但死喪急遽之際。人鮮以禮將事。汝曹須節哀致謹。不使有幽明之憾可也。以七月四日。遽啓手足。春秋六十九。其年冬十月三日。葬于慈仁縣廣石山亥向之原。其窆也。送者數百人。爲文以祭者甚衆。前娶全氏。贈吏曹判書汝霖之曾孫。贈左議政號沙西公湜之孫。四山監役克恬之女。有至性。事舅姑謹。安貧耐苦。不以家務累君子。以妨其遊學。先公三十三年卒。葬安溪里艮山之原。禮當合祔。而年月不利。未果也。後娶朴氏。贈判書毅長之曾孫。縣令瑜之孫。承仕郞文立之女。公凡兩娶。有子五人。長德玄卽全出。壬戌生員。有文行。曰德齊亦進士。曰德袤,曰德言,曰德褒。皆後夫人之子。德玄有一女。適士人吳尙澂。德齊有丈夫子一人。德袤有一男一女。皆幼。公資性樂易。坦夷明白。其處己接物。少無表襮之異。未嘗稱人之惡。而樂道人之善。視人患難窮厄。經營周捄。必盡其力。人有非違。諄諄誨諭。以故鄕人有疑。必就公而決。雖閭閻愚夫。有所質問。必曰李爺李爺云。公以未及承事先夫人爲至痛。奉繼母孫氏。極其誠孝。及丁憂。歲適大侵。公竭誠盡力。葬不踰時。祀祭不失其節。有人所難能者。公有一兄五弟。居必聯床。食輒分味。怡怡和悅。四十年如一日。中歲以後。相繼零落。存者又各散處。公不勝鴒原花樹之懷。悲痛愁思。形諸言色。撫敎孤姪。恩意周洽。族黨之在同里者。自功緦以下。至袒免之親。愛敬敦睦。未嘗有忤。每擧張公藝書百忍字以進之意。爲子孫取法之地。諸子侍側。色笑從容。怡然終日。至有過。呵責不少貸也。公淸疏淡泊。未嘗經營產業。爲子孫計。所居不蔽風雨。妻子不免饑寒。常引分自釋。終無怨尤切蹙之意。公治擧子業。有百中之藝。得雋場屋者屢。一時輩流皆自以爲不可及。公不以是自喜。嘗作書戒其子弟曰。歷觀前代儒賢。以繼開爲己責。經濟爲己任。赫赫照人耳目。與穹壤終始。有爲者亦若是矣。天之賦與吾人。豈有古今豐嗇之異哉。余以先正耳孫。不能自力爲學。枉費工程於翰墨爭勝之場。落在俗學科臼中。遲暮蹉跎。漫無所成。非但墜失先訓爲可懼。生爲男子。虛老虛死者。是誰之愆。窮廬悲歎之餘。私自述言。以責男子事業于一家子姪若來世雲仍矣。公退步卑牧。非欲以大言夸世者。而其語如此。亦可以見其志之所存矣。爲詩文。平淡蕭散。類其爲人。有遺文如干卷藏于家。公於書無所不讀。至中庸孟子。用功尤多。雖疾病沈澌之餘。聽諸生讀書必訂其謬而正其讀。公才華地望。其取科第登顯仕。宜若摘髭拾芥。而數奇不遇。未得究其用而死。識者恨之。然嘗聞古之人。有以未能世其祿爲憂者。朱子謂之曰。苟能誦法先德遺風。不替其志節。則所以世其家者。孰大於是。彼區區之外物。何足道哉。推極其言。公庶幾焉而又何恨。公遊吾伯仲間。最親且久。玄逸自早歲。已嘗識公。而接緖論豁蒙蔽之益爲多。自吾伯仲淪謝。所望於公者尤切。間不十年。公又至此。玄逸旣痛公之不幸。未及見用於昭代。又傷吾儕之不幸而遽失此老也。公之嗣子德玄以公行事。授玄逸序次。將以求志於作者。玄逸謝不能。而其請不已。顧念分義。不得終辭。乃就德玄所論纂具著其大者如右。謹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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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당집(退堂集) 유명천(柳命天)생년1633년(인조 11)몰년1705년(숙종 31)자사원(士元)호퇴당(退堂), 은퇴당(恩退堂), 청헌(靑軒)본관진주(晉州)
退堂先生文集卷之三 / 碣銘 / 故氷庫別檢蒙庵李公墓碣銘
昔韓文公題貞曜先生墓曰惟其大翫於詞而與世抹摋。盖悼其蘊抱奇才。終未大鳴國家之盛也。不佞於鷄林李錫吾氏。亦有此感焉。何則錫吾氏少劬書。本之庸孟。參以子史。覃思結撰。咄咄逼古。於聲律天得也。不勞搯擢胃腎。而自中繩尺。平淡蕭散。浸淫陶謝之風。出而卄登解額。輒見左於公車。遅暮之年。躑躅上舍。譬之切切秋蛩。吟叫於草間。九臯之唳。未能登聞於天。此古今文苑之所以流慟者也。資性敏悟。神彩溫雅。處己接物。絶去邊幅之修餙。臨事持論。快若一刀之兩段。名能守家法。繼妣孫氏疾亟。方困於床笫。猶力疾省侍。時其膳藥。及不諱。歲適大侵。人無顧視。躬營葬祭一以禮。公倫七人。接閈羣居。寢必共枕。爨必通槖。日夕怡怡。克盡花樹之樂。伯子公先謝。不禁終鮮之痛。丙夜輒獨出偏坐。長作悲咽聲而涕隨而涔涔焉。其孝友於家庭如此。學究輩有疑必來而咨。公與之語道理。辨古今事當否。衎衎無倦。委巷之氓。事有曲直。不之官而之公曰惟李公耳。其見信於鄕里又如此。平生不事家。蔬食堇堇也。常引黔婁不慽慽於貧賤之語。以爲終身符。此非不佞之駕說。乃葛菴李徵君玄逸云。公諱埰字錫吾。貫黃驪。勝國時鄕貢進士世貞。乃鼻祖也。入我鮮至中明朝。有諱彦迪以道德行誼。爲世儒宗。官贊成謚文元。學者尊之以晦齋先生。卽公高祖也。曾祖諱應仁司饔判官。祖諱宜澄承仕郞。考諱皦從仕郞。妣河東鄭氏。比三世皆以孝行載在東京志。百行之原。自是家傳之旨訣歟。公生丙辰圽甲子。得年滿七除一。奉窆于慈仁巳坐之原。死之日。顧言曰死喪之威。人鮮以禮將。兒曹輩須節哀致謹。俾無憾於大事。君子以爲正終。甞以學行遺逸。屢登薦剡。一命英陵參奉。再調氷庫別檢。皆不就。乃適來適去者也。平居所修辭頗多。如近體絶句之作。皆人口相傳以熟者。裒爲數袠。目以蒙庵博粲錄。藏于巾衍。蒙庵乃別署也。亦甞曰男子事業。在於學問。不在於詞華。推演其義。作爲一轉語。以遺子姓。其志之不專於擧業可知已。公元妣沃川全氏。監役克恬之女。大司憲沙西公湜之孫。沙西公曾尹東京。獨視偉公曰寧馨兒。眞瓌器也。仍以子之子歸之公。全孺人濡染法門。早承鞶訓。安貧耐苦。不以契𤄃之有亡累君子。盖有孟光之志云。先公三十三年卒。葬在安溪里。子德玄司馬直長。全孺人出也。有一女吳尙徵。繼室務安朴氏。承仕郞諱文立之女。曰德齊進士。曰德袤,德言,德褒四人。皆朴孺人出也。德齊德袤各有男女幼。不佞雅與二難游。猥爲兩世役。始銘判官公。已又爲公表樂丘。惧筆退言耄。不能發揮世德之萬一。噫。銘曰。
文元耳孫。一蠧外閥。胚胎前光。戌削風骨。餘事篇章。格律高絶。龍泉在匣。霜鍔遽折。蔚彼靑霞。埋沒玄宅。哀生未就。用表斯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