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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권의 기원"의 계속입니다.
이 기사의 전편에서, 1789년의 프랑스 혁명 이후, 농민이라는 신분에서 국민・ 시민이 된 프랑스 인들의 애국심을 활용해 나폴레옹이 전 유럽의 정복을 시도했지만, 영국이 다른 유럽국가와 반 프랑스 동맹을 만들어 저지해, 1815년에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것에 대해 썼다. 그 후,프랑스를 깨고 유럽 최강이 된 영국은, 유럽 대륙 국가들이 단결하지 못하도록, 또는 한 나라가 특출나게 강해지지 않도록, 각국의 힘의 대립을 유지하는 균형전략(밸런스 오브 파워)을 외교력과 첩보 등을 전개해, 1914년의 제 1차 대전까지,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의 패권체제(팍스 브리태니카)를 실현했다.
여기에서 의문이 든다. 왜 영국은 프랑스를 타도한 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군사력으로 유럽에 대한 지배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외교력과 첩보 등을 활용한 균형상태의 유지라는 까다로운 전략을 채택했을까. 군사력이 아니라 외교 · 첩보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비용적으로 저렴하기 때문에, 영국식의 방식이 효율이 좋기때문이라는 대답이 바로 나오지만, 그렇다면 영국의 뛰어난 외교 첩보력의 원천은 어디에 있었는가. 우수한 외교관이나 스파이를 열심히 육성하는 진부한 방식이라면, 프랑스나 스페인 등과 같은 당시의 다른 유럽 국가들도 영국 수준으로 다른 나라를 조종하는 책략을 했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않았다.
이 의문에 대한 내 나름의 답은 "유대인 네트워크"다. 중세 이후의 유럽에서,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던 것은, 무역 결제라는 금융망을 가졌던 유대인뿐으로, 그들은 금융능력을 활용해 각국 정부로부터 자금 조달을 맡아, 각국 정부의 내부 사정에 정통했다.
▼ 유대인을 중용한 영국
유대인 네트워크라고 해도, 관계하고 있었던 것은 유대인 중에서도 극히 소수인 금융무역업자 뿐이다. 당시의 유대인의 90% 이상은, 동유럽, 러시아에서 주로 농민(농노)으로 있던 "아슈케나지"(독일계)라고 불리는 사람들로, 그들은 네트워크와 관계는 없었다 (9세기의 하자르 칸 국에서 개종한 사람들). 상업 네트워크에 들어가 있던 것은, 환 지중해 무역권인 북아프리카, 남유럽에서 서유럽으로 퍼져나갔던 "스화라디"(스페인계)라고 불리는, 총수가 수만 명 정도였던 소수파 유대인으로, 그들은 서구의 많은 나라에서 탄압받아, 각 도시의 폐쇄된 거주구역(게토)에 살고 있으면서도, 금융과 무역, 재정 운영의 능력을 키워, 궁정 유태인으로서, 각국 정부에게 은밀하게 중용되고 있었다.
프랑스와 스페인, 오스트리아와 같은 당시 유럽의 유력 국가는, 모두 가톨릭 국가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로서 탄압의 대상이었다. 이에 대해 영국은 16-17세기의 종교개혁, 청교도 혁명의 흐름 속에서, 개신교에 친근감을 가진 유대인과의 정치적 친밀감을 높혔다. 경제적으로도, 영국은 무역에 주력했기 때문에, 같은 개신교 유대인 동맹체였던 자유무역을 하던 네덜란드 공화국과의 경쟁도 있어서, 영국 핵심부에서는 적극적으로 유대인을 받아들였다.
영국의 유대인 중에서도, 특히 로스 차일드는 힘이 있고, 18세기부터 영국 · 프랑스 · 독일 등에 네트워크를 만들었던 그들은 사실상, 영국 정부의 일부로서 기능해, 19세기의 팍스 브리태니커의 성공에 기여했다. 산업혁명 이후의 유럽에서는, 자본가에게, 유럽 각국이 전쟁만 하고있는 상황(각 국에 전비를 빌려주고 돈을 버는 전략)보다, 전유럽이 정치적인 안정이 계속되어, 경제가 발전해 소비와 산업화가 확대하는 편이 벌이가 컸다.
19세기부터 현재까지, 영국은 세계 최강의 첩보력을 가지고 있으며, 극히 일부의 기능만으로 국가를 존속시키고있다 (경제의 주력인 금융도 첩보 기술이 중요한 업종이며, 유대인의 산업이다). 영국의 MI6(SIS), 미국의 CIA, 이스라엘의 모사드라는 세계 3대 정보기관은, 모두 영국 첩보기관에서 파생된 것이다. 미국,영국, 이스라엘은 모두, 유대인의 힘으로 발전한 나라이기도 하다. 소련의 KGB도 강력한 첩보기관이었지만, 러시아에서는 중세부터 경제는 유대인의 담당이었다(18세기까지, 모스크바에서는 "저먼 타운"이라고 불린 게토의 유대인 상인이 대 유럽 무역을 쥐고 있었다).
첩보기관의 기원이 유대인 자본가의 네트워크라면, 그들은 정치 모략만이 아니라, 금융 모략을 수행할 능력도 있을 것이다. 전쟁과 정변뿐만 아니라, 시세의 폭락, 폭등 등의 배후에는, 첩보기관이 움직이고 있다고 의심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 효율적인 국가체제의 시행착오
영국이 균형전략을 통해 유럽의 패권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첩보와 금융의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사용하여, 영국이 유럽 대륙 국가의 정치를 외부에서 조종할 수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에 한정하지 않고 "네트워크"를 다룰 수있는 세력은, 여러 국가의 정치를 조종해, 세계를 간접적으로 지배할 수있게된다. 이 같은 "네트워크"의 존재를 전제로 다시 생각하면, 국제정치는, 상식적으로 고찰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특징을 띤다. 제대로 된 논의에서 배제되어왔던 음모론을 시야에 넣지 않을 수 없게된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전 유럽으로 퍼져, 농민이 도시 노동자로, 농노가 시민으로 전환되어, 왕후 귀족과 교회의 지배가 무너져,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영향력이 있는 국민국가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어떠한 국가체제가 효율적인가 하는, 많은 실험적인 발안과 실천이 이루어졌다. 또한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는, 산업혁명으로 강해지고, 교통혁명에 의해 이동시간을 단축한 유럽이, 세계를 시장과 원료 생산지로서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체제가 확립되었다. 국가의 정치경제 체제와 마찬가지로, 국제적인 정치경제 체제에 대해서도, 분석과 토론과 실험적인 실천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움직임도 "정사"로서는, 별다른 배경도 없이 우발적으로 새로운 정치철학이 나와, 혁명과 개혁이 이뤄졌다는 단조로운 이야기가 되었다(학교의 세계사는 정말로 지루하다). 이러한 정사는 명분 만으로 쓰여져, 국가체제와 국제정치 체제에 외부로부터 영향을 미치는 세력 등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네트워크"의 관여를 가정하면, 단조로운 이야기의 이면에 숨어있는 다이내니즘을 통찰할 수있다.
예를들어 프랑스 혁명은, 자본가들이 도시 주민과 농민을 선동하고 궐기시켜, 왕후 귀족과 교회라는 그때까지 국가운영이라는 특권을 가졌던 세력을 무너뜨리고, 국민국가라는, 애국심으로 뒷받침된 납세제도로 재정이 강화되는 국가체제를 확립했다는 의미가 있을 것 같다. 프랑스 이외의 국가들의 왕후 귀족은 국민국가가 되는 것에 저항했지만 자본의 논리에 따르지 않을 수 없어, 절충책으로 입헌 군주제가 만들고, 국민국가 제도는 전세계에 확대되었다.
전편에서,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 건국은, 프랑스 포위망의 일환으로서 영국이 1815년의 비엔나 회의에서 "예약"한 것이라고 썼는데, 이것도 자본의 논리에서 보면, 이탈리아와 독일에게 국민국가를 만들어 투자대상으로 강화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독일 통일의 핵심이 된 프러시아는 18세기 후반부터 유대인의 이민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 경제를 발전시켜 국가재정을 흑자로 전환해, 성공했다.(당시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 재정은 적자였다). 1880년대, 비엔나의 변호사와 물리학자의 60%는 유대인이었다. 나치 이전의 독일은 유대인에게 의존하는 나라였다 (제조업는 독일인이지만, 금융과 지식관련 산업은 유대인이라는 상황을 파괴하기 위해, 나치스는 유대인을 수용소에 넣었다).
19세기의 유럽에서는, 공산주의에서 파시즘까지의 다양한 정치의 철학적 사고와 활동적인 실천이 개화했지만, 이것도 국가경제 성장의 속도를 과제로 하는 자본의 논리에 부합해, 자본가가 선호하는 전개였다. (자본가와의 분업체제인가, 혁명가, 사상가에는 유대인이 많다)
국가의 실질적인 정치전략으로서 살펴보면, 공산주의(사회주의)는, 국민을 형성할 수 있을 때까지 국내가 결속되지 못하는 지역에서, 사람들을 "인민"으로 결속시켜, 유사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수법이며, 국민의식이 형성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고를 줄일 수있다. 파시즘은, 이미 형성된 국민국가로, 정부에 대한 결속을 강제적으로 강화하는 터보엔진같은 수법이다(파션은 이탈리아어로 "결속"이라는 뜻). 유럽 내에서 뒤늦게 국민국가가 된 이탈리아와 독일이, 선발 국가를 따라잡기 위해 이 파시즘을 도입하였다.
자본주의를 싫어하는 사회주의 국가에게, 자본가가 투자할 것인가 라는 의문이 나올 것 같지만, 그 상식은 명분에 불과하다. 사회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가 대립한 것은 1947년 이후의 냉전시대 뿐이며, 그 이전에는 소련과 서방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 미국의 독립과 산업혁명
1776년의 미국의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 건국도, 국제정치의 실험이라는 면에서 관찰하면 흥미롭다. 미국이 독립한 시기는,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영국의 산업생산이 증가하기 시작해, 미국이 영국에서 산업혁명의 파급을 억제당해, 영국 제품의 시장이라는 상태에 만족하거나, 미국 스스로가 산업혁명을 채택해 산업화해 나갈 것인가 라는 갈림길이었으며,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므로서, 영국 제품을 강매당하는 것을 저지해, 독자적인 산업국이 되는 길을 나아갔다. 미국에 투자한 자본가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지원했을 것이다.
이 건에서는, 자본가라는 것은 친 영국 일변도가 아니라, 영국이 득이 되지않는 국가전략을 고집하면 영국을 버리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있다. 실제로 19세기 말, 영국의 경제력이 그늘이 지기 시작하자, 국제 자본가의 중심지는 런던에서 뉴욕으로 이동해, 뉴욕의 자본가들은 패권을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전시키려고, 두 번의 대전을 유발했다.
독립 당시, 미국의 심장부는 보스턴이었다. 하지만 그 후, 미국 경제의 중심은 뉴욕이 되어, 금융 자본가의 거점은 모두 뉴욕이다.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아마도, 뉴욕이 한때, 유대인 자본가의 전략에 의해 세계 최초의 자유무역으로 번영하던 네덜란드의 북미 거점인 "뉴 암스테르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뉴 암스테르담의 유대인들은, 네덜란드가 영국에게 패해 뉴 암스테르담이 영국령이 되어 뉴욕으로 개명된 후에도 그 도시에 계속 거주해, 미국이 독립할 시점에는 유대인의 거점이 되었다.
보스턴을 거점으로 하는 개신교와 뉴욕을 거점으로 하는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도 성경을 중시하고 친밀성이 있어, 미국은 독립 때부터, 전 유럽적인 유대인 네트워크의 확대된 부분으로서 기능하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있다.
그러나 미 중추의 사람들은, 독립 직후부터 영국이 형성했던 균형전략에는 말려들지 않고, 독자적인 영향권을 형성하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그 상징이, 1823년의 먼로 선언이다. 이 선언은 "중남미는 미국의 영향권이기 때문에, 유럽 국가들은 중남미의 정치에 개입하지 마라. 그 대신 미국도 유럽의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 중남미 독립의 균형전략과 먼로 선언
중남미 지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였으나, 1808년에 나폴레옹 전쟁으로 스페인이 프랑스에게 정복되어, 스페인이 중남미를 지배할 수 없게되자, 그 틈에 중남미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나, 1811년 베네수엘라(그란 콜롬비아)를 시작으로, 1822년까지 중남미 각지에서 독립이 선언되었다.
당시의 중남미는, 브라질이 포르투갈 령, 그외 대부분은 스페인 령으로, 브라질은 하나의 거대한 국가로 독립했지만, 스페인 령은 여러 국가로 분열되어 독립했다. 왜 분열되었는가. 내 추측으로는, 영국이 "비슷한 정도의 크기를 가진 나라들을 대항시켜 균형상태를 만든다"는 패권전략의 일환으로서, 중남미를 분할한 상태에서 독립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나폴레옹 전쟁 때, 스페인은 프랑스에게 정복되었지만, 포르투갈은 영국의 지원을 받아, 정부가 식민지인 브라질 의 리우데자네이루에 피난해 있었다. 종주국에서 분리된 스페인 령은, 영국의 모략으로 분할되어 독립했지만, 브라질에는 나폴레옹 전쟁 후, 포르투갈 왕세자가 국왕이 되는 형태로 형식적으로 독립해, 분할되지 않았다.
당시 중남미의 최대 무역 상대국은, 종주국인 스페인이 아니라, 국제 무역 전체의 상당 부분을 잡고 있던 영국이며, 중남미는 경제적으로 영국의 영향이 강했다. 원래 콜럼버스 등이 15세기에 중남미까지 탐험을 한 것은, 스페인이 기독교를 강화할 목적으로 유대인 추방령을 발해, 유대인 자본가(스화라디)는 탐험비용을 내서 신천지를 찾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흐름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중남미로 이민온 사람들 가운데는 유대인이 많아, 그들은 무역과 경제를 쥐고, 스페인계(크리올)의 엘리트와 함께 식민지 경영을 움직이고 있었다(현재의 중남미 국가도 마찬가지다).
중남미에서는, 유대인의 경제적 영향력이 크고, 영국과의 경제관계가 강화되면, 영국이 무역 독점권의 강화를 노려 중남미을 독립시킬 때, 균형전략에 따라, 대륙 내의 충돌상태가 생기도록 분할적인 독립을 유도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영국은, 중남미 지역의 유력자에 대해, 제각각 독립을 지원하면 될 뿐이었다.
중남미의 독립 전쟁의 영웅으로서, 그란 콜롬비아의 시몬 볼리바르와 아르헨티나의 호세 데 산 마르틴이 유명하지만, 볼리바르는 외교관으로서 영국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고, 산 마르틴은 독립 전쟁의 지원을 위해 1812년에 유럽에서 아르헨티나로 돌아올 때, 영국에 있던 중남미 독립운동 조직과 회의한 후, 영국 군함을 타고 아르헨티나에 상륙했다. 영국은, 중남미의 독립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810-20년대에 중남미는 독립했지만, 나폴레옹이 추방되어 일단락되고, 부활한 스페인 정부는, 중남미의 재식민지화를 획책해, 신정부가 생긴 프랑스와 결탁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 세기에 영국과의 식민지 쟁탈전에 패배해 북미에서 철수한 프랑스는, 신대륙 지배의 부활이 꿈이었다. 영국은 이런 움직임을 방지하기 위해, 장기인 자신의 균형전략으로, 미국에게 호소해 미국과 영국이 손을 잡고, 스페인과 프랑스의 목적을 번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미국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먼로 대통령의 미국 정부는, 영국의 권유를 거절하고, 단독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에 대해 경고했다. 이것이 먼로 선언이다. 이 선언은 동시에 영국에 대한 적대적인 경고이기도 했다. "영국을 포함한 유럽 국가들은, 중남미의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영국에 대해 "남북 미주를 균형전략에 기반하는 영국 패권의 범위 내에 넣지 말라. 남북 미주는 미국의 영향권이다" 라고 요구하고 선언한 것이었다.
영국은, 모처럼 중남미를 영국식의 균형전략으로 독립시켰지만, 미국에 어부지리를 빼앗겨 버렸다. 영국은, 유럽에서의 자립(독립)을 선언하는 미국에게 "고립주의" 라는 딱지를 붙였다. 하지만, 그 후 30년이 지나자, 미국은 공업화에 의해 고도성장해서 경제대국이 되어, 드디어 영국을 능가하는 국력을 가지게되었다.
먼로 선언으로 시작한 미국의 독자적인 세계전략은 그 후,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영국으로부터의 패권탈취 시도, 영국이 유발한 냉전에 의해 그 시도가 좌절 된 것, 그리고 그 후의 닉슨, 레이건, 현 부시의 공화당이라는 세 정권의 그림자 다극주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이번에도, 며칠도 넘게 고심하고 쓴 것에 비해서는, 1차 대전에도 도달하지 못해, 다극주의의 핵심부분을 설명하는데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패권과 유대인 네트워크와의 관계는, 왜 이스라엘이나 네오콘 등의 유대인들이, 그토록 패권과 전쟁, 국가 체제의 창설과 파괴, 정권 전복 등의 모략에 능한 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이번에는, 18-19세기의 세계사(유럽사)를 특화해 분석하고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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