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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며 제17대 #아신왕 과 #훈해 (訓解), #설례 (碟禮), #홍 (洪) 등의 자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 ‘ #왕력 ’편에는, 아신왕이 제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고, 아신왕 때에 좌장(左將)으로 병권을 담당한 #진무 (眞武)가 왕의 외삼촌이라는 기록이 있음으로, 아신왕을 침류왕의 아들로 보면 침류왕의 #왕비 의 성은 #진씨 (眞)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침류왕은 #백제왕 중에서 맨 처음 불교를 공인한 왕입니다. 그는 "내가 아버님에게 배운 것은 오직 하나, 문화발전이다." 라고 말했을 정도로 침류왕은 백제의 문화발전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침류의 동생 진사(제16대)가 문화발전 보다는 호화생활 에만 관심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침류왕은 죽기 전까지 #문화발전 에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침류왕은 왕위에 오래 있지 못했습니다. 즉위 이듬해인 385년 11월에 죽었으니, 불과 19개월간의 짧은 치세였습니다. 반란의 흔적이 전혀 없는 것으로 봐서 침류왕이 병사한 것으로 추측은 하지만, 갑자기 죽은 것으로 보아서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하는 의혹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기록상으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침류왕 대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다면.384년(침류왕 1) 9월 #호승 (胡僧) #마라난타 (摩羅難陀)가 #동진 (東晋)에서 오자, 그를 맞아 궁중에 두고 예로써 받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는 마라난타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침류왕의 초청으로 왔다는 의미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라난타가 백제에 오기 두 달 전인 그해 7월에 침류왕은 동진에서 #사신 을 보냈는데, 아마도 그의 초청은 이 때 이뤄진 것으로 보입니다.
침류왕이 동진에 머물고 있던 마라난타를 초청한 이유는 개인적인 이유때문이 아닌가 하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기록에는 없지만, 만약 침류왕이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불교의 원력에 힘입어 병을
고쳐보려고 마음먹었을 수도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방인 마라난타를 지나치리만큼 극진히 대접하며 굳이 궁중에 머물게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듬해 2월에는 #한산 (漢山)에 절을 창건했고, 승려 10명에게 #도첩 (度牒, #승려임명 )을 내렸습니다. 이때 도첩을 받은 승려가 10명이나 되었다는 것은 마라난타가 입국하기 전부터 백제에 불교가 이미 전파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아마 침류왕에게 마라난타의 초청을 권유한 사람도 이때 도첩을 받은 10명의 승려 중 한 명이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마라난타 이전에 백제에 불교가 전파되어 있었다면, 그것은 #고구려 를 통해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구려는 이미 372년에 전진(前秦)의 #승려 #순도 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고, 순도는 왕자를 가르칠 정도로 환대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쉽게 고구려 전역으로 전파되었을 터이고, 국경을 맞대고 있던 #백제 에도 그 영향이 미쳤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마라난타가 입국한 지 불과 5개월 만에 도첩을 받은 열 명의 승려는 바로 고구려 불교의 영향으로 이미 불교에 심취해 있던 사람들이었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침류왕은 불교 발전의 터전을 닦았지만, 한참 후인 523년 #성왕 (제26대) 대에 이르러서야 불교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보면, 침류왕 이후 오랫동안 불교는 백제인 들에게 널리 전파되지 못한 듯합니다. 그것은 불교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던 침류왕의 치세가 길지 못한데다가, 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제16대 #진사왕 이 나이도 어린데다 놀기를 좋아하고 침류왕
측근들과 승려들을 홀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진사왕 이후 백제 조정의 혼란과 잦은 전쟁으로 인한 국력의 쇠퇴도 불교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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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bsoonhw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