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라면 놓쳐선 안될
[사찰성보문화재 50選]
⑯ 예산 수덕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고려시대 수미단
실물로 볼 수 있는 삼불좌상
현재불 석가여래 본존으로
동방유리광정토 주존 약사
서방극락정토 아미타여래
현재와 동ㆍ서 공간 합쳐진
삼세불 개념…한 자리 봉안
일반 예와 달리 석가여래는
대좌형 수미단에 봉안 눈길
17세기 전반 한 유파 형성
완숙 경지 수연스님 대표작
보물 제1381호 예산 수덕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고려 불화에서나 볼 수 있는
수미단이 눈길을 끈다.
아래 사진은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복장발원문(1639년).
조성연대와 사찰, 작가와 시주자를
알 수 있는 발원문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두루마기 형태의
의복도 발견되어
직물과 복식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사진제공=수덕사근역성보관
수덕사는 충남 예산 덕숭산에 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대웅전(국보 제49호)이 있는 사찰로 유명하다.
일주문 편액의
‘동방제일선원(東方第一禪院)’
이라는 문구는
한국불교 선종의 맥을 상징한다.
수덕사는 시대를 훌쩍 넘어
역사의 큰 물결이 요동치던
한국 근대 불교에
새로운 획을 긋는 두 선사가 거주했던 곳이다.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을 중시한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의 선풍은
계속 이어져,
암자인 정혜사 능인선원에는
선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비구니 스님 선원인 견성암에서도
100여 명의 스님들이
화두를 잡고 참선하고 계신다.
일엽스님이 수덕사에서 출가하면서
세간에 관심이 더 모아졌다.
일엽스님은
일제 강점기의 나혜석 등과 함께
개화기 신여성 운동을 주도했던
언론인이며 시인이었던 인물이다.
1933년
만공선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여
견성암과 환희대에서 수도했다.
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처음으로 과감하게 단행했던
1박2일의 여행지였던 수덕사는
다른 사찰에서 느껴 볼 수 없는
향수를 일으키는 곳이다.
수덕사 입구의
이응로 화백의 집이었던 ‘수덕여관’에 머물렀었다.
이응로 화백이 옥고를 치를 때조차도
혼자 여관을 지켰던 화백의 부인을
내가 만났었는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그곳 역시 수덕사와 함께 내게 선명한 곳이다.
지금은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여
많은 이들에게
예술가적 감흥을 선사하는 곳이 되었다.
만공스님이 모셔온 삼세불상
수덕사 대웅전은
경내에서 가장 높은 단 위에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은 건물 자체로도
중요한 문화재이면서
한국조각사에서
매우 중요한 세 분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늘 소개할 성보,
바로 보물 제1381호
‘예산 수덕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1639년)이다.
이 삼불상은
만공스님이 수덕사를 중창 불사할 당시에
전북 남원에 있는
만행산 귀정사(歸淨寺)에서
이운해 와 봉안한 불상이다.
수덕사는
백제 사찰의 하나로 문헌에 등장하여,
현재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는 사찰이다.
<삼국유사>와 <속고승전>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고승 혜현스님이 수덕사에 주석하며
<법화경>과 <삼론>을 강의했다고 한다.
고려 시기 수덕사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주불전인 대웅전이다.
수덕사 대웅전은
1937년 전면적으로 해체 수리를 하게 되었다.
이때 고려 후기인
1308년(충렬왕 3)에 건축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대웅전 부재들 사이에
불상과 공양한 꽃, 나한들, 극락조, 비천 등을
주제로 그려진 작은 벽화들은
고려 시기의 아름다운 작품이다.
대웅전을 수리할 때 보존하고자 떼어냈는데, 안타깝게도 6·25전쟁
당시 모두 부서져 사라졌다.
그중 모사했던 그림 몇 편만 남아 있을 뿐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대웅전 이외에 취적루와 불운루라는
두 개의 누각이 있었다고 쓰여 있다.
16세기 전반까지도
큰 가람이 유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의 전쟁 통에도
다행히 대웅전은 유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공간적 개념’ 삼세불
수덕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목조삼불상과
그 안에서 나온 복장유물,
그리고 연화대좌, 수미단(須彌壇)이
일괄로 보물로 지정됐다.
이 삼불상의 존명은
현재불인 중앙의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왼쪽(향우)에
동방유리광정토의 주존인 약사여래,
오른쪽(향좌)으로
서방극락정토의 주존인 아미타여래를
함께 봉안한 석가여래삼세불이다.
삼세불이란
본래 과거불·현재불·미래불을 일컫는
시간적 개념의 삼세(三世)이다.
수덕사 삼불상은
공간적으로도 확장하여
현재의 공간과 동방, 서방의 공간이 합쳐진
삼세 불상의 개념으로 봉안된 것이다.
이러한 공간적 개념의 삼세불은
조선시대
크게 유행하였고, 사찰마다 많이 모셔졌다.
임진왜란 후
사찰의 주불전에 봉안된 삼세불상들은
대부분 커다란 불단 위에 세 불상을
각각의 대좌 위에 봉안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수덕사 삼세불상은
이와 달리 중앙의 석가여래는
대좌형 수미단(須彌壇) 위에 봉안되어 있다.
이 수미단은
고려시대 불탁(佛卓)과
그 장엄수법이 동일한 것으로,
고려시대 불탁의 특징을 보인다.
이 수미단의 기초는
일반형 불탁과 달리
대웅전 마루 밑면 약 30㎝ 지점의
초기 평면과 동일하다.
그곳에서부터
육각의 지대석이 탁자를 지탱하고 있으므로,
조성 시기는
대웅전 건립연대(1308)와 같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가여래는
당당한 어깨와
무릎을 넓게 하여 안정되어 보인다.
네모난 넓은 이마에
이목구비는 단정하고,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있다.
수인은 왼손을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옷차림은
양어깨를 다 덮는 통견(通肩)식으로 입었으나,
석가여래는 오른팔을 드러낸 모습이다.
옷주름은
몇 가닥으로 정돈되어 규칙성을 보이고 있다.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는
본존불과 모습이 흡사하다.
그러나 각각의 불상에
작가적 기량을 발휘하여
옷차림과 흐르는 옷단 등에
약간씩의 변화를 주었다.
약사여래는 왼손을 위로 하고
오른손을 아래로 하여
엄지와 중지를 맞댄 채
오른손 바닥에 약그릇을 들고 있다.
이에 비해 아미타여래는
약사불과 손의 위치를 반대로 하고 있어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완숙 경지…수연스님 대표작
삼세불상은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지만,
발견된 복장유물은
수덕사근역성보관에 따로 이운되어 있다.
복장에서는
조성연대와 사찰, 작가와 시주자를
알 수 있는 발원문을 비롯하여
17세기 초반에 간행된 목판본인
중요 전적들이 나왔다.
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두루마기 형태의 의복이 발견되어
직물과 복식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복장유물을 통해,
1639년(인조 17년)에 수연(守衍)스님과
6명의 스님들이 함께 조각한 것으로 밝혀졌다.
대표 화원인 수연스님은
17세기에
여러 스님들과 많은 불상을 조성하여
현재에도 전해진다.
서천 봉서사 아미타삼존상(1618년),
강화 전등사 대웅전 삼세불상(1623년),
나주 다보사
석가삼존상 및 16나한상(1625년),
익산 숭림사 영원전
지장보살삼존상과 명부 권속(1634년),
강화 전등사
지장보살삼존상과 명부 권속(1636년) 등이
스님이 남긴 불상이다.
발원문을 통해
삼세불상을 조성할 당시에
풍국사에 봉안했던 것이 확인됐다.
그런데 석가여래상과 약사여래상은
대웅전에 모시고,
아미타여래상은 보광전에 봉안했다고 한다.
삼존을 함께 조성했으나,
사찰의 사정으로 나누어
봉안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삼세불상은
후에 전북 남원에 있는
만행산 귀정사로 옮겨졌다가,
만공스님에 의해 다시 수덕사에 모셔졌다.
이처럼
‘수덕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17세기 전반에
하나의 유파를 형성하여 불상을 조성했던
수연스님의 완숙한 경지의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특히 고려 불화에서나 볼 수 있는
고려시대의 수미단을 실물로 볼 수 있으며,
복장물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물들은
당시 불상의 복장물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도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유물이다.
맞배지붕으로 된 단아한 대웅전에서
삼배를 올리고
대웅전을 한 바퀴 돌아본다.
그러다 마당을 내려다보면
다녀가는 사람들이
고요하고 평화롭게 보인다.
[불교신문3668호/2021년6월1일자]
이분희
/문화재전문위원·불교중앙박물관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