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접어들면 앞서 제기한 ‘지리=풍수’라는 논지를 뒷받침하는 의미 있는 근거들을 더욱 많이 확인할 수 있는데, 계속해서 조선 시대 지리학 과거시험과 관련된 내용에 주목해 보자. 먼저 국가의 기본 법령을 정리해 놓은 경국대전(經國大典, 1466년)과 속대전(續大典, 1744년)에서는 음양과(陰陽科)의 ‘지리학(地理學)’ 분야 과시(初試, 覆試)나 취재(取才) 과목으로 청오경(靑烏經)⋅금낭경(錦囊經)⋅명산론(明山論)⋅호순신(胡舜申)⋅동림조담(洞林照膽) 등 다양한 종류의 서책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지리서 대부분은 중국의 서책들인데, 현재 시점에서 소위 풍수 경전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지리학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로 되었던 지식이 다름 아닌 풍수였던 것이다. 이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지리와 풍수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이 있는데 조선 전기의 몇몇 실록 기사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이 상서하였다. “지리(地理)로 고찰한다면 국도 장의동 문과 관광방 동쪽 고갯길은 바로 경복궁의 좌우 팔입니다. 빌건대 길을 열지 말아서 지맥(地脈)을 온전하게 하소서.”(태종실록, 13년 6월 병인.)
지리에 대한 서적이란 세상에 전하는 것이 희귀하고, 다만 서운관에 소장하고 있는 지리전서(地理全書) 몇 종과 대전(大全) 1부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지리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옛 법에 어두우면서 함부로 이해를 말하는 것은 모든 서적을 널리 상고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풍수학(風水學)이 그 관직은 있으나 아무런 실상이 없으니 실로 가탄할 일입니다. 만약 지리대전(地理大全), 지리전서, 지리신서(地理新書), 부영경(夫靈經), 천일경(天一經), 지주림(地珠林) 등의 여러 서적을 세상에 간행하고, 문사들로 하여금 이를 연구 해명하여 새로 진작해 일으킨다면, 풍수법이 세상에 밝게 되어 요사스런 말들이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세종실록, 13년 1월 정축.)
지리의 공부는 서운관에서 맡아 하는 것인데, 이제 집현전의 유신들에게 명하여 풍수학을 강명하게 하시어서 … (세종실록, 15년 7월 정축.)
땅을 선택하는 데에는 모름지기 네 가지 짐승을 보는 것인데, 이제 용(靑龍)과 범(白虎)이 갈라지기 시작한 곳이 현무(玄武)의 자리인바 …, 청룡은 …, 백호는 …, 주작(朱雀)은 …(중간생략)… 이것은 지리학의 크게 꺼리는 것이니(세종실록, 15년 7월 경진.)
풍수학의 지리서를 습독하는 자들이 혹은 나이가 5, 60을 지났으며, 또 문리(文理)를 알지 못하는 자가 매우 많아서 … (세종실록, 24년 9월 신미.)
이렇듯 지리학은 곧 풍수였고 풍수학은 곧 지리학이었던 것이다. 한때 지리학은 천문학과 구분되는 음양학(陰陽學)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다시 풍수학으로 그 명칭이 바뀌게 된다.**** 그랬다가 세조 때 다시 지리학으로 이름을 고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이후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다가 서양 문물의 도입과 더불어 서양의 근⋅현대 지리인 Geography가 소개되고 자리를 잡으면서 이제 ‘풍수’로서의 ‘지리’는 그 이름조차 Geography에 내주게 된다. 소위 서양 근⋅현대 지리인 Geography가 정상의(normal) 위상을 가지게 되면서, 동시에 곧 풍수였던 전통지리는 타자화(他者化)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현재 지리 또는 지리학이라 할 때 그것은 풍수가 아닌 서양의 근⋅현대 지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경국대전의 과시 과목으로는 이들 5책 외에 지리문정(地理門庭)⋅감룡(撼龍)⋅착맥부(捉脈賦)⋅의룡(擬龍) 등 4책이 더 있다(卷之三, 「禮典」, 諸科.). 그런데 속대전에는 이들 4책이 제외되고 새로이 탁옥부(琢玉斧)가 첨가되어 6권이 제시되어 있다(卷之三, 「禮典」, 第科.). 그리고 취재의 경우에는 경국대전에 청오경⋅금낭경⋅착맥부(捉脈賦)⋅지남(指南)⋅변망(辨妄)⋅의룡(擬龍)⋅감룡(撼龍)⋅명산론⋅곤감가(坤鑑歌)⋅호순신⋅지리문정(地理門庭)⋅장중가(掌中歌)⋅지현론(至玄論)⋅낙도가(樂道歌)⋅입시가(入試歌)⋅심룡기(尋龍記)⋅이순풍(李淳風)⋅극택통서(剋擇通書)⋅동림조담 등이(卷之三, 「禮典」, 取才.), 속대전에는 경국대전에 비해 대폭 줄어들어 과시와 거의 같은 청오경⋅금낭경⋅명산론⋅호순신⋅동림조담 등이 제시되어 있다(卷之三, 「禮典」, 取才.).
**조선시대 지리전문가는 풍수학인(風水學人), 풍수학생(風水學生), 풍수학관(風水學官) 또는 직위에 따라 지리학교수, 풍수학교수, 지리학훈도 등으로 불렸다.
***태종 6년(1406)에 십학(十學)을 설치하면서 천문, 지리 영역을 음양풍수학으로 합칭하기도 하였다.
****“육전(六典)에 천문·지리·성명(星命)·복과(卜課)를 총합하여 음양학이라 하였사온데, 이제 지리를 배우는 것을 음양학이라 하고 역상·일월·성신을 맡은 자를 천문학이라 하여, 음양과 천문이 갈려서 둘이 되었사오니 매우 이치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이제부터는 지리를 배우는 자를 예전대로 풍수학(風水學)이라 하게 하소서.”(세종실록, 20년 10월 계유.)
*****“풍수학(風水學)은 지리학(地理學)으로 이름을 고쳐서 교수, 훈도 각각 하나씩을 두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무오.)
******근대이행기 서구 근⋅현대 지리인 Geography의 수용 및 정상화 과정에 대해서는 권선정, 「풍수와 Geography의 정상화와 타자화 」, 2016년 동양학연구소 개소기념 학술발표대회: 동양학 과거를 넘어 미래로,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동양학연구소, 2016, 101-104쪽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