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안나 성당 - 골고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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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나 성당은 올리브 동산쪽으로 나 있는 스테파노 성문(사자문)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교회가 예수님 강생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면서 구세사 안에서 이루어진 성모님의 업적에 대해서도 소중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성모 마리아의 부모인 성 요아킴(Joachim)과 성녀 안나(Anna)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일체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기원 후 170-180년경에 쓰여진 “야고보 원복음서”는 비록 교회에서 위경으로 간주하지만, 마리아의 부모와 탄생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하여 야고보의 원복음서를 비롯한 몇몇 외경과 전승을 바탕으로 5세기 말부터 안나의 집터라고 추정되는 벳자타 연못가를 거룩한 곳으로 여기기 시작하였다. 성모 마리아는 안나와 요아킴의 자녀로 태어났는데, 예루살렘 성전과 가까운 “양의 우물” 인접한 곳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 “마리아 탄생성당”(오늘날의 성 안나 성당)을 건립하고, 성당 축성일인 9월 8일에 성모 탄생 축일을 지내왔다.
그 후 이 성당은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괴 되었다. 1130년경 십자군의 볼드윈 1세 부인 아르메니안 여왕 아르다(Arda)는 수도원에 거금을 기부하고 두 개의 교회를 짓도록 하였다.
성 안나 성당은 성모님이 태어난 동굴 위에 지어 성모를 낳아 준 안나에게 봉헌한 교회로 십자군 시대에 지어진 가장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이다. 특히 고딕식 둥근 지붕이 아름다우며, 음치가 노래를 해도 천상의 소리로 들릴 정도로 완벽한 내부 공간 구조를 가지고 있는 성당이기도 하다. 또한 십자군들은 벳자타 연못위에 예수님의 기적을 기억하는 작은 경당과 기념성전 근처에 거대한 수도원을 지었다.
예루살렘 라틴왕국이 멸망한 후 십자군이 지은 대부분의 기념 성전들은 파괴 되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성 안나 성당만은 그 빼어난 아름다움 덕분에 이슬람의 살라딘 장군이 파괴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릴 정도였고, 대신 무슬림 신학교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성 안나 성당은 십자군 시대에 지어진 성전 건물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성전이기도 하다. 기념성전 출입문 위쪽을 보면 아랍어로 쓰여진 현판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무슬림들이 소유했었다는 역사의 기록이기도 하다.
크림 전쟁(Crimean War, 1853.10-1856.2 : 크림 반도를 중심으로 러시아가 영국, 프랑스, 오스만 제국과 벌인 전쟁. 이 전쟁은 중동을 둘러싼 열강들의 분쟁에서 비롯된 것이나, 러시아가 투르크 제국 내 정교회 교도들에 대한 보호권을 주장한 것이 직접적인 요인이 되어 일어남. 또한 팔레스타인의 성지에 대한 러시아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권한을 놓고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분쟁 또한 주요 요인으로 작용함) 후 안나 성당은 오스만 터키 정부가 프랑스 정부에게 양도하였고, 프랑스 정부는 빠드레 비안키 수도회(Padre Bianchi-아프리카 선교 사목을 하고 있는 수도원으로, ‘빠드레 비안키’는 ‘백인 신부 수도회’를 의미한다. 흑인인 아프리카인들이 선교사 신부들을 백인 신부님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한 듯...)에 위탁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전의 중앙 제대는 예수님의 유년기를 전하고 있는 마태오와 루가 복음 사가가 전하는 상징이 조각되어 있다. 성당 우측 중간에 있는 계단을 내려가면 지하 경당이 나오는데, 성모님의 부모인 성녀 안나와 요아킴 성인이 살았던 동굴에 지은 기념 경당이다. 동굴 옆 중앙 제대는 아기 마리아에게 봉헌 하였다.
교회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까닭은 그리스도 때문이다.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고 하느님께 순명하심으로써 구세주 그리스도의 강생에 온전히 협력하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