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낙타
마가복음 10장 21-25절『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이 이야기는 부자가 예수님께 다가가 영생에 대해서 물을 때, 예수님과 부자와의 사이에 있었던 대화 내용이다. 예수님은 먼저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부자는 자신이 모든 계명을 잘 지켰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부자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는 슬픈 기색을 하고 근심하며 떠나가니, 예수님이 낙타와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하신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문자적으로 읽으면서 표면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것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의미를 깨달아야만 한다. 우선 표면적인 이야기는 계명을 잘 지킨다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어야 하나님 나라를 들어간다고 이해를 한다. 돈을 포함한 물질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이야기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부자는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부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예수가 선의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마가복음 10장 17-18절『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하다고 말씀하신다. 교회 사람들은 예수를 신으로 받들지만, 오직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한 분이라는 말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심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부자는 계명을 잘 지켰다고 말을 한다. 교회 사람들은 죄를 짓는지 항상 계명에 비추어 자신을 돌이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명을 잘 지키므로서 자신은 하나님 나라를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는 조건은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통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동물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장차 오실 여인의 후손인 메시야를 발견했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성경은 동물의 희생제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은 것임을 나타내며, 죄인 역시 동물이 죽을 때 함께 죽은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을 한다. 특히 로마서 6장 6-7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휘파게 ὕπαγε) 네게 있는(에케이스 ἔχεις) 것(호사 ὅσα)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프토코이스 πτωχοῖς)에게 주라(막10:21)』
표면적으로 이해하면, 이것을 이행할 자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팔아야 할 대상은 부자(교회 사람)가 가지고 있는 육적인 자아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9장 23-24절에서『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휘파게는 물러나다, 은둔하다, 떠나다 라는 의미다. 우리 말은 가서 라고 되어 있는데, 자신의 정체성에서 육적 자아를 떠나라는 것이다. 에케이스는 붙잡다, 소유하다, 보관하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호사는 ~만큼 이라는 양을 나타낸다. 교회 사람으로 상징되는 부자가 가지고 있는 것은 탐욕으로 대변되는 육적 자아이다. 이 육적 자아를 팔아(제거해) 버리고 나면, 영적 자아를 얻게 된다. 이 영적 자아를 다른 사람들(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이다.
비진리에서 떠나 진리를 깨닫고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나누어 주라는 말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진리의 말씀인데, 부인하는 대상은 육적 자아이고, 부인하는 주체는 영적인 자아인 것이다. 프토코이스는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난한 자이다. 하나님 나라를 떠나 죄인됨을 깨닫는 자를 상징한다.
육적 자아가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식하면 이 사람은 율법 속에 있는 자가 된다. 그러나 영적 자아에 있는 사람은 율법에서 벗어나 복음 속으로 들어가는 자가 되는 것이다. 율법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는 것이다. 그러면 복음의 기쁜 소식이 전해진다. 그게 바로 부활인 것이다. 육체가 죽어서 이루어지는 부활이 아니라, 현재 부활이 이루어진다. 현재 십자가에서 죽는 자가 현재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활이 바로 하늘의 보화인 것이다.『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도와 부활을 전하는 길이다.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기 위한 길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을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막10:25) 평행구조로 보면, 부자와 하나님 나라, 낙타와 바늘귀로 연결된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어려운 것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대조한다.
부자로 상징되는 교회 사람들이 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기가 어려운가? 예수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자기가 믿는 믿음과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이 있는데, 자기가 믿는 믿음은 율법 속에 갇혀 있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은 성령으로 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낙타는 율법을 상징한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바늘귀는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어야 하며, 이를 표현한 것이 세례이다. 세례는 죽고 부활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물세례는 죄에 대해서 죄의 몸이 죽고, 불세례는 옛혼(가죽옷)을 태우고, 성령세례로 세 혼(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이 부활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어야만 그리스도의 재림도 이루어진다. 그래서 심령 속에서 천국이 다가오며, 천년왕국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재적 부활과 재림을 믿는다는 것은 오늘날 교리로 볼 때 이단에 가까운 내용이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 사람들은 부활과 예수님의 재림을 먼 미래에 있을 사건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이 재림하면 부활하고, 천년왕국이 세워지고, 신도들은 예수와 더불어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칠년 대환란이 있으므로, 먼저 공중재림이 이루어지고 휴거도 나타나고, 칠년 환란이 끝나면 예수님이 지상재림하여 통치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칠년 환란에 대해서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중에 하나를 믿는다. 이는 마치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권능을 가지고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세상을 통치하는 분으로 생각하고, 제자들 중에는 누가 크냐 라는 다툼까지 생겨났던 것과 같은 모양이다. 여전히 육의 눈으로 성경을 바라보고 영적인 눈은 감겨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