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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성탄절을 준비하고 싶다(1)
2024년 11월 10일 / 마 1:23
1. 죄 사함을 받기 위하여
초대교회 성도들 사이에 비밀리에 자신을 나타내는 암호가 하나 있었다. 물고기 한 마리를 그려서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냈다. 헬라어로 물고기라는 단어가 익두스(ιχθυs)이다. 이 물고기라는 단어의 첫 자로 시작되는 단어들이 Ιησουs(이에수스) Χριστουs(크리스투스) Θεοs(데오스) Υιοs(휘오스) Σωτηρ(소테르)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의 구주이십니다.’라는 뜻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나 오늘날의 성도들이나 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고백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신앙고백이다. 이것이 성경전체의 핵심이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자 하는 특별하신 뜻이고, 이것이 우리가 고백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이다.
또 우리의 구원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처럼 말씀으로 하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이 땅에 보내셨다.
본문 말씀에 예수님의 이름의 뜻을 구원자라고 하시면서 그 구원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이라고 하셨다. 성경에서 구원이란 결국은 죄에서 구원을 말한다. 노예생활에서 구원, 포로생활에서 구원, 질병에서 구원, 가난과 고통에서 구원 등을 말하지만 결국은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아야 한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죄’라고 하면 아담과 하와가 처음으로 지은 죄 때문에 우리가 이런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여 그들의 죄를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결국은 우리 자신들도 그 영향을 받아서 흉악한 죄에 물들어져 있고, 늘 죄를 지으면서 살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다 죄가 있고 그 죄는 정말로 멸망하고 남을 정도로 흉악하고,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반드시 자신이 죄인인 줄 알고 그 죄를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나와야 한다. 예수님께서 대신 지신 십자가가 내가 짊어져야 할 형벌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 소망이 없다.
사람들은 종교적이고 외형적인 죄만 생각한다.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 주초를 금하지 못한 것 교회에 충성을 하지 못한 것 이런 것들을 죄로 생각하고 그런 것만 잘하면 자신은 의롭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종교 생활을 좀 잘한다고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착각한다.
사실 그런 외형적인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죄와 비교하면 죄도 아니다. 내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온갖 욕심들 추악한 생각들이 죄이다.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남 잘되는 것 배 아파하고, 뭐든지 남보다 더 앞서려고 하고, 뭐든지 자랑하고 싶어 하고 이런저런 죄가 너무 많다. 이런 우리의 마음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죄에서 우리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도 없다. 그래서 그런 우리의 흉악한 죄에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 죄의 심각성 / 죄에 대한 심각성을 안다면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일인지 잘 알 수 있다. 병에 대한 심각성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무슨 질병이라고 하면서 무감각하게 대응한다. 질병보다 더 무서운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다. 인간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둘째 사망에 이르게 된다. 둘째 사망은 지옥이다. 지옥에 대한 설교를 잘 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지옥에 대하여 우리들이 알아야 한다.
죄로 인하여 지옥으로 /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간다고 하였는데 지옥에 대하여 잘 알면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그렇게 기쁘고 감사한 일인지를 알게 된다. 누가복음 16:19-31에는 지옥에 대한 말씀이 있다. 한 부자가 있었다. 그런데 나사로라는 거지가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불리려 하였다. 거지는 죽어서 천국의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부자는 죽어서 음부에 들어가게 된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가족들에게 보내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면 그렇게 부탁할까?
지옥 설교를 듣기 싫어하는 세상 / 전세계적으로 부흥회를 인도하셨던 김홍도 목사님은 유럽에 가서 설교하는데, 지옥에 대한 설교를 하지 말라는 부탁을 들었다. 그 이유는 유럽에서는 지옥에 대하여 법적으로 설교를 하지 못하게 한다. 사람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를 정확하게 모르게 만드는 의도이다.
예수 안의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 사도 바울은 자신의 힘으로 죄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았다. 성령이 충만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죄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성령은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지 알려 주셨다. 비유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병원에 가면 좋은 의사가 병의 진단을 할 때에 정확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요즈음에는 MRI가 있듯이 성령님은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자세히 알게하셨다.
이 세상의 질병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만약에 내가 병에 걸렸다고 한다면 스스로 질병을 해결할 수는 없다. 우리들은 죽음에 이르는 질병에 놓여 있다. 죄로 인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에서 구원받아 영생을 살게 되었다.
히 4:12-13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능력이 넘칩니다. 날이 선 칼보다도 더 날카로워 우리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나 욕망까지도 가르고 그 정체를 드러내게 합니다. 13) 하나님께서는 누가 어디에 가 있든지 그 사람들을 다 알고 계십니다. 살아 계신 우리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눈앞에 숨겨질 수 있는 피조물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우리도 우리 자신이 행한 모든 일들을 하나님 앞에서 낱낱이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18) 나는 내 육신 안에 올바른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나는 나에게 올바른 일을 하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되지 않습니다. 19) 선한 일을 하고 싶어도 되지 않고 악한 일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되지 않습니다. 20) 이제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게 사실이라면 문제는 분명해집니다. 죄가 아직도 나를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1) 나 스스로는 늘 올바른 일을 원하나 어쩔 수 없이 잘못된 일을 해버리는 이것이 인생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22) 속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고 싶어 하면서도 23-25) 내 속 깊은 곳에 어떤 다른 것이 있어서 그것이 내 마음에 분란을 일으켜 나를 누르고 아직도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나는 마음으로는 늘 기쁨으로 하나님 섬기는 종이 되기를 원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봅니다. 이제 여러분은 내 형편이 어떻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놓인 인간입니까! 누가 이 죽을 수밖에 없는 노예 상태에서 나를 해방시켜 줄 것입니까?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전 – 천국의 영생의 삶 / 예수님은 분명히 가르치셨다. 천국을 가는 길과 지옥에 가는 두 길을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다. 천국 가는 길은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즉 두 번 태어나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셨는데, 육신이 한 번 태어나고 우리 영혼이 또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죽었던 영혼이 예수님을 영접할 때 영생을 얻으며 다시 태어난다.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지옥에서부터 우리들을 건져내어 천국 삶의 세상으로 인도하여 주시기 위한 것이다.
▶ 그런데 문제는 내가 죄인이라는 죄의식이 없으면 그 이름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당시 스스로 가장 의롭다고 주장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라고 선포하셨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어떠한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지금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그 증거는 무엇일까? 자신이 죄인이라는 이 인식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만일 인식이 없으면 결코 예수님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함으로 예수의 이름만 불러도 마음에 기쁨과 감격이 일어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마 7:21-23 /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 해서 다 믿음이 깊은 사람은 아니다. 그들이 내게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22) 심판 때에 많은 사람이 ‘주님! 주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라고 말하더라도 23)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너희는 내 사람이 아니다. 물러가라, 이 악한 자들아!’
2. 임마누엘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참고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려면 성품이 같아야 한다. 많은 가정이 이혼한 이유는 결혼하고 보니 너무나 성격이 다르다. 성격 차이가 너무 심해서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 물과 기름이 안 섞이듯이 성격 차이가 나서 섞이지 않는다. 그러니 할 수 없이 헤어진다. 많은 시골 총각이 호기심 반, 연애 반으로 월남에 가서 혹은 태국에 가서 말레이시아에 가서 결혼하고 온다. 그리고 와서 조금 지나고 난 다음은 호기심도 사라지고 신기한 마음도 없어지고 나니까, 그 다음 실제 생활에 부딪히는데 말이 안 통하지. 문화가 다르지. 성격이 다르지 아주 생지옥이다. 세상에 말이 안 통하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이 어디 있을까? 성격이 다르니까 치고받고 싸우다가 이혼하고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 성격이 같아야 함께 살 수 있다. 성격과 취미가 전혀 다르면 함께 살기 어렵다. 그 때문에 결혼하기 전에 오랫동안 사귀어 보고 성격을 알고 취미를 알고 나하고 조화가 되는지 안 되는지 보아서 최소한도 50% 이상이 되면 서로 함께 살 수 있지만, 그 이하가 되면 고통을 당하기 시작한다. 100% 성격과 취미가 맞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50% 이상만 되면 좋다. 그러나 그 이하가 되면 상당한 고통을 당하게 된다.
베드로전서 1:15-16 /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두드러진 성격이 거룩한 성격이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정욕, 타락한 문화, 썩어져 가는 구습을 가지고 사니까 하나님하고 맞을 도리가 없다. 하나님은 거룩하신데 우리 인간은 더럽고, 추하고, 불결하고, 세상 습관과 구습을 따라 사니까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없다.
모세가 양을 치다가 가시넝쿨 속에 불이 활활 타오르므로 가까이 구경하러 가니까 가시넝쿨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세야! 모세야!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발을 벗어라!’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인간의 신발을 벗어야 한다. 신발은 행위를 말하는데 행위를 회개하고 정결하게 해야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에베소서 4:22-24 /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어라
구습을 벗고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씻음을 받고 성령으로 변화되어서 새사람을 입어야 하나님과 함께 함께 살 수가 있다. 옛사람 그대로 술에 취하고 방탕하고 음란하고 세속적인 사람으로 하나님과 같이 살려고 해도 하나님이 떠나가시고 같이 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려면 하나님과 성격이 같게 하려면 우리가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공자도 하루에 3번 자신을 돌아보라고 했는데, 기독교인은 얼마나 자신을 정결케 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지? 그렇기 위해서는 늘 회개하고 늘 성령 충만을 간구해야 한다.
♬ 내 주의 보혈은 (254장) ❶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하신 주 날 오라하신다 ❷ 약하고 추해도 주께로 나가면 힘 주시고 내 추함을 곧 씻어 주시네 ❸ 날 오라 하심은 온전한 믿음과 또 사랑함과 평안함 다 얻게 함일세 ❹ 큰 죄인 복 받아 빌 길을 얻었네 한없이 넓고 큰 은혜 베풀어 주소서 ❺ 그 피가 맘속에 큰 증거됩니다 내 기도소리 들으사 다 허락하소서 (후렴)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 259장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❶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더러운 죄 희게하는 능력을 그대는 참 의지 하는가 후렴:예수의 보혈로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마음 속에 여러 가지 죄악이 깨끗이 씻기어 있는가 ❷ 주 예수와 밤낮으로 늘 함께 그대는 행동을 하는가 아무 때나 어디서나 그대는 십자가 붙들고 있는가 ❸ 주님 예수 다시 올 때 그대는 영접할 예복이 있는가 그대 몸은 거룩한 곳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됐는가 ❹ 모든 죄에 더러워진 예복을 주 앞에 지금 다 벗어서 샘물같이 솟아나는 보혈로 눈보다 더 희게 씻으라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죄와 불의로 더러워진 우리의 성품을 주님의 거룩하신 성품으로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회개하고 노력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 이제부터라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하나님과 300년을 동행한 에녹처럼 살아가자.
창 5:23-24 / 에녹은 이렇게 365년을 살았는데 24) 일생 동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분과 함께 살다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
히 11:5/ 에녹도 하나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겪지 않고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기 때문에 갑자기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있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에녹을 얼마나 흡족하게 생각하셨는가 하는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 1:11-12 / 그분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 곧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영접이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우리 삶에 모셔 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분을 영접한 후(모신 후)에 그분과의 동행이 시작된다. 이런 동행을 우리는 성전이라고 부른다. 성령의 전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에도 행복한 동행이 있고 동상이몽의 동행이 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3년을 동행했다. 예수님과 함께 자고, 먹고, 말씀을 듣고, 심지어는 귀신을 내쫓는 권세를 가지고 전도도 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과 다른 꿈을 꾸면서 예수님과 동행했다. 이런 동행은 필경 불행해지게 마련이다.
사울 왕처럼 동행하면서 끊임없이 다투는 동행도 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셔서 그분의 뜻에 순종할 때 아름다운 동행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자꾸 자기 뜻대로 살려고 할 때 동행은 행복한 동행이 되지 못한다. 신앙생활이 행복하지 못하다면 순종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행복해야 한다. 동행에는 믿음이 필수이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은 진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살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합 2:4, 롬 1:17).
아벨은 예배를 통해서 믿음을 드러내었다. 예배로 표현된 일상에서의 하나님과 동행이 아벨의 예배를 받치고 있는 기둥이다. 성도는 예배로 시작해서 예배로 끝나는 사람이다. 예배에 실패하면 모든 것이 실패하는 것이다. 예배는 공동체로 드리는 예배가 있지만 삶으로 드리는 생활 예배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 대부분을 사용하는 삶의 예배가 공동체 예배를 꽃피우는 자양분이다. 삶의 예배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주일 예배, 공동체 예배만으로 영적 생명을 유지하려고 하면 행복한 동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주일 내내 하나님과 전혀 동행하지 않다가 주일에만 먼지 속에서 하나님을 꺼내는 믿음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가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이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을, 노아는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을 요약하면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사실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믿음이 없어 흔들렸고, 그런 삶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근심하게 하는 삶이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믿음이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다. 여기에서 찾는다는 말은 부지런히, 자세히, 열심히 하나님을 향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더하기 위해 부지런히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을 말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는 믿음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믿음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은 히브리서의 문맥이나 성경 전체에서 믿음으로 산 사람에게 주시는 상은 영원한 천국입니다. 훈련의 광야에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고 끝까지 하나님을 찾고 또 찾는 삶!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의 구체적인 예가 바로 에녹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사람 에녹! 에녹의 어떤 점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도 에녹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에녹에 대한 성경 기록은 아주 적다. 에녹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곳은 히브리서를 제외하면 창세기와 유다서이다. 그리고 누가복음에는 단지 계보 중에 등장할 뿐이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었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했다. 그 당시 평균 수명이 800세 정도였기 때문에 365세에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것은 그의 믿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었고 그에게 베풀어진 상이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들림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에녹은 어떤 사람인가? 우선 창세기의 족보를 살펴보면 불경건한 가인의 계보와 아벨이 죽고 태어난 셋의 후손이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4:16-24에 기록된 가인의 계보는 업적을 중심으로 열거되었다. 그러면서 가인 문명의 본질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보호하는 것에 열을 올리는 자존의 문화요 서로 죽이고 죽는 갈등의 문화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라멕의 노래가 가장 먼저 나오는데, 이 노래의 곡명이 칼의 노래이다. 라멕은 가인의 복사판이다. 그리고 야발은 가축 치는 자의 조상,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였다고 소개하였다. 그래서 가인 문명은 처음부터 높아지고, 이름을 내며, 자존을 위해 숨 가쁘게 달려가야 하는 적자생존(適者生存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되어 사라지는 현상)의 문화였다.
반면 경건한 계보인 셋의 후손들에게는 업적이 하나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냥 족보만 쭉 열거될 뿐이다. 그리고 에녹에 와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때문에 데려가셨다는 것이다.
또 창세기 5:1에서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라고 말씀하면서 가인이 아담의 계보에 들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아담은 자기 형상을 닮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후손은 에덴의 본질에 충실한 생육하고 번성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살았다. 그런 후손 가운데 에녹이 태어났는데, 그의 믿음이 특별했다고 성경은 말했다.
에녹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이렇게 증언하였다.
유다서 1:14-15 / 아담의 칠 대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여기에서 에녹이 예언자로서 사람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삶을 히브리서 기자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에녹이 전한 심판의 메시지는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 행한 일과 그들이 행한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이다.
창세기 5:22에서는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므두셀라를 낳기 전과 후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유다서에서 말하는 심판의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히브리민족에게 있어서 이름이란 그들의 속성을 대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므두셀라라는 이름은 대단히 중요하다. 므두셀라는 문자대로 하면 ‘창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한 마을을 전복하기 위해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그 마을 입구에서 마을을 지키는 ‘므두셀라’ 즉 창을 던지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적의 마을 사람들은 ‘창을 던지는 저 사람만 없어지면 저 마을은 깨끗이 소탕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관념이 부연되어서 므두셀라라는 이름에는 언제나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When he dies, judgement comes!)’는 의미가 따라다녔다고 한다.
따라서 이런 가정이 가능하다. ‘에녹아!, 예! 하나님, 세상이 많이 악해졌지? 예, 그렇군요. 나는 거룩한 여호와이기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계속 악해지는 것을 볼 수 없다. 그러니 이 세상에 심판이 임박했다는 사인(sign)을 주마. 아들이 태어나거든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하라.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올 것이다.’
그래서 므두셀라가 출생하면서 에녹은 진실한 하나님과의 동행을 시작했다. 유다서의 말씀을 보면 이 동행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깨어 있는 선지자 혹은 예언자로서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러니까 므두셀라는 에녹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음성이요, 심판의 상징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그래서 므두셀라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했고 그래서 더욱 깨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들의 행동 즉 일과 그들의 입술의 열매인 말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노아의 홍수 심판이 언제 일어났을까?
창세기 5:25 ‘므두셀라는 백팔십 칠세에 라멕을 낳았고’, 28절에 가면 ‘라멕은 백팔십 이세에 노아를 낳았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노아는 므두셀라의 손자가 된다. 노아가 태어날 때 므두셀라의 나이는 369세였다. 므두셀라의 나이에 라멕의 나이를 더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창세기 7:11에서 ‘노아가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달 십칠일이라.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서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라고 했다. 노아가 육백세 되던 해였고, 므두셀라 나이는 969세인 그의 마지막 인생의 해에 있었다. 므두셀라가 죽자마자 심판이 임했다.
그러므로 에녹이 살았던 시대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실 정도로 문란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시대 속에서 에녹이 믿은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므두셀라를 주시면서 말씀하신 심판의 말씀을 믿은 것이다. 그래서 므두셀라가 태어난 후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람들에게 행동과 말로 인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런 삶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표현하였다. 이 말은 70인 역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번역되었다. 무려 300년 동안이다.
그러므로 에녹에게 있어서 동행이란 첫 번째로 종말론적인 신앙을 갖는 것을 의미했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현대인들이 심각한 부도덕에 빠지는 이유를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에녹은 므두셀라를 주시면서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믿었다. 그렇다고 하루 이틀 사이에 심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려 30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지속적으로 믿음 안에 거하면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면서 에녹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임박한 메시지를 붙잡고 믿음으로 나아갔다.
그런 면에서 에녹의 300년 동행은 깨어 있음의 시간이었다. 므두셀라를 낳고서 하나님과 동행했는데, 그 동행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무슨 엄청난 업적을 남기지 않았다. 단지 보이지 않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그 심판이 실재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에 합당하게 살려고 노력한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깨어 있으라 인자가 어느 경점에 올지 알 수 없다’라고 말이다. 므두셀라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고 했는데, 언제 므두셀라가 죽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므로 에녹은 이 메시지 앞에서 날마다 깨어 있어야 했다. 나날이 더 타락해 가는 세상에서 세상 풍속을 좇기를 거부하고 하나님과 동행했다.
사실 노아의 홍수는 그로부터 667년 후에 있었다. 그러니까 ‘심판이 온다’라는 메시지를 300년 동안 전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했지만, 사실 사욕적인 면에서는 나타난 성과는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을 기뻐하셨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신실한 교제를 나누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을 기뻐하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에녹의 동행은 하나님과 신실한 교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녹은 세상의 타락과 정욕에 빠진 모습을 보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에 충만하여 살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므두셀라라는 살아 있는 말씀 때문이었다. 그래서 300년을 하루처럼 하나님과 신실한 교제 가운데서 살았다.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성경은 므두셀라 이후에 그 어떤 징표도 에녹에게 주셨다는 말씀은 없었다. 특별한 은사를 주시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매일매일 만나를 주신 것도 아니다. 다만 므두셀라가 점점 자라나는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에녹은 그 심판의 징조도 전혀 보이지 않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그 사역을 신실하게 감당했다.
동행하는 믿음 /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최소한 그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원리에 충실했다. 그는 심판이 온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삶의 자세를 고쳤다. 그 믿음에 맞게 삶의 자세를 바꾼 것이다. 그 소망에 맞게 깨어 근신한 것이다. 그의 소망은 지금 우리로 말하면 영원한 천국이다. 심판 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굳게 믿는 믿음을 가졌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이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이 생활을 의미한다고 했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믿음에 합당하게 살았다는 의미이다. 엄청난 업적을 이루려고 꿈꾸지도 않았다. 다만 주신 말씀, 깨달은 말씀에 순종하면서 날마다 하나님과 행복한 동행하는 거룩한 삶을 산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샬롬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런 에녹의 삶을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신 나머지 죄악된 세상에서 더 고통을 당하지 않게 그를 데려가셨다. 죽음을 보지 않고 들려 올라간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흘러 떠내려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고 주신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더 나아가 매일 하나님과 기쁨의 교제를 나눈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믿음생활에 하나님과 신실한 동행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우리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지?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겨보며 죄악된 세상에서 경건한 삶을 살아가자.
눅 13:22-30 /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여러 동네와 마을에 들러 가르치셨다. 23) 어떤 사람이 예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 안 되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24-25) 하늘로 들어가는 문은 좁으니 그리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들어가려고 애를 써도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주인이 문을 닫은 후에는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인님,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십시오’하고 애원할지라도 주인은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하지만 우리는 당신과 함께 먹었고 당신은 거리에서 우리를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하겠지만 27) 주인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내가 분명히 말해두거니와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너희는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 못된 짓만 일삼는 자들아, 물러가라.’ 28) 너희는 밖에 서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땅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29) 그러나 세계 각처에서 온 사람들은 자기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앉을 것이다. 30) 이 짐을 명심하라. ‘지금 멸시를 받는 사람들은 그때 가서 크게 존경을 받게 될 것이며 지금 높임을 받는 사람들은 그때 가서 아무런 대우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설교를 150장 ‘갈보리산 위에’로 마감하련다.
♬ 150장 갈보리 산 위에
❶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이라 <후렴>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❷ 멸시 천대 받은 주의 십자가에 나의 마음이 끌리도다 귀한 어린양이 세상 죄를 지고 험한 십자가 지셨도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❸ 험한 십자가에 주가 흘린 피를 믿는 맘으로 바라보니 나를 용서하고 내 죄 사하시려 주가 흘리신 보혈이라
❹ 주님 예비하신 나의 본향 집에 나를 부르실 그 날에는 영광 중에 계신 우리 주와 함께 내가 죽도록 충성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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