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장 28-29절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부활은 마지막 세상 끝날 때의 부활입니다. 죽은 사람이 모두 심판을 받기 위해 다시 살아나게 되는 부활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믿는 자는 그 믿음으로 인하여 영생의 부활을 맞이 할 것이다.
John 11:25-26 New Century Version (NCV)
Jesus said to her,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Those who believe in me will have life even if they die. And everyone who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Martha, do you believe this?”
- 교회는 무엇을위하여 기도해야 하는가?
예수 승천 이후 사도들의 행전에는 많은 기사들을 증거하고 있다.
성령 충만한 교회가 세워지고 성령 하나님은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셨다(행 2:43). 그들이 베푼 초자연적인 기사는 그들이 가르치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강력한 표적이 되었으며, 열네 개의 기적 사화가 소개되어 나온다. 그 첫 번째 기적 사화가 앉은뱅이를 일으킨 이야기이다.
이 사람의 나이는 사십여 세(행 4:22), 40년이 넘는 세월, 날마다 그는 성전 문 앞에서 구걸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일어나 사람들이 메고 문 앞에 내려놓고, 하루 종일 구걸하다가, 시간이 되면 다시 가족들이 메고 가는 삶이 죽을 때까지 이 사람이 기대할 수 있는 삶이었다. 오랜 세월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했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성전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은 이 사람을 잘 알았다(10).
그는 미문이라 불리는 성전 문 앞에서 구걸했는데, 미문은 성전의 동쪽 주 입구, 니가노르문이라 불리는 문으로 23m의 높이의 이중문으로 내부는 동으로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고, 외부는 문 전체가 금과 은으로 덮인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이었다.
이 아름다운 문을 통과하여 성전 안뜰에 들어가는 수많은 사람을 바라보며,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미문을 통과하여 성전 안뜰로 결코 들어가서는 안 되었다. 건강한 두 다리로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왜 나면서부터 저주를 받은 걸까? 유대인들은 이런 혹독한 저주는 죄 때문이라 생각했고, 이 사람 역시 자라면서 자신의 죄 혹은 부모의 죄 때문이라는 오명에 시달리면서 적지 않은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다.
여기서 베드로가 한 말,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과연 베드로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베드로와 요한에게 있는 이것이 우리에게도 있는가? 매일 스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오늘날 그리스도의 증인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사명을 따라 필요한 이들에게 반드시 주겠다는 결단을 하게 되길 기도한다.
교회가 기도한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고쳤다는 이유만으로 잡힌 게 아니다. 핵심은 앞서 글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어떤 권세>로 능력을 행하느냐인데 베드로와 요한은 나사렛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앉은뱅이를 낫게 했다고 했고, 이는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도전이 되었다. 그들의 신앙관, 그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요구하는 신앙관에 따르면 나사렛은 선한 게 나올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칭하려면 모든 율법을 지켜내고, 가난과 독립 같은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것이 또한 구원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인간이 구원을 얻을 유일한 이름"이라고 전했고, 이를 인해 사람들이 (남자만) 오천 명이 더 믿게 되었다. 이건 종교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도전이었다. 그들의 신앙은 물론이고 유대교와 유대인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이 오히려 백성들의 신앙이 되고 있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표면적으로만 보면 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와 요한이 붙잡혀 있으니 풀려나기를 기도한 것 같지만 본질은 더 깊은 의미가 있다. 교회가 기도한 것은 예정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치 주기도문처럼.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3:28)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면 따라오는 성령 충만
교회는 단지 베드로와 요한의 육신이 구속된 상태에서 풀려나기를 구한 게 아니다. 이 성경을 통해 우리는 교회가 육신의 문제 해결을 하나님께 간구한 게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기도한 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래야 한다. 세상과 사회의 정치문제나 성도들 삶의 문제는 교회의 본질적 관심 대상이 아니다. 그런 문제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면 다 해결되는 종속된 문제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은 단지 하나다.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그 하나다. 그 목적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표현하시겠다는 것이며, 표현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십자가를 지는 낮아짐이다. 하나님께 그런 성품이 있다는 걸 나타내시려는 게 사람을 향한 단 하나의 뜻이다.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를 바로 읽었다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이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들 성경을 자기중심적으로 읽어서 이게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어둡다고 하신다.
앉은뱅이를 고치는 능력의 근원인 나사렛 예수를 믿는 믿음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낮아지는 하나님의 성품이자 그리스도의 본성 이것이 사람인 나에게 이루어져야 하는 단 하나의 하나님의 뜻임을 믿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바로 이걸 믿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게 바로 나의 정체성이며, 내 인생의 의미이자 목적이란 걸 믿는 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다. 교회는 이걸 구하는 공동체다.
놀라운 건 교회가 이것을 구했더니 성령이 충만해졌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교회에 모여 성령의 충만을 구한다. 그러나 이 성경에서 보듯 성령은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그 자체다. 성령은 기적을 일으키는 신비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되도록 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말씀하신다. 성령은 사람이 나사렛 예수를 믿게 하시는 분이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게 바로 성령 충만
따라서 교회와 사람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 사람이 믿어야 하는 유일한 이름을 구할 때 응답하시고, 그렇게 사람이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게 되는 그것이 성령의 충만이다. 즉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사람의 삶이고, 결과지 성령 충만 그 자체를 목적으로 구하는 대상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한 그 뜻을 주기도문의 의도대로 구하면 성령은 그저 충만해진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고, 하나님의 영이 본성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 이상으로 충만할 수는 없다.
교회는 많은 것들을 구한다. 심지어 사회 참여를 사명으로 여기고 정당을 만들기까지 한다. 또 가난한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무료로 급식한다. 그리고 이런 활동을 하는 교회가 더 발전하고 동참하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능력이 나타나기를 구한다. 사람들이 동경하는 일들이 교회에 가서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사례가 많아지기를 바라고, 얼마 간의 성공을 전도할 때 사람들에게 전한다.
오늘날 교회가 기도하고 힘쓰는 모든 건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면 자연스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활동들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게 있다. 바로 사람을 향해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그렇게 된다는 걸 이어서 전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으면 이제는 이웃을 구원하고 가정을 복음화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 선교대사명 입니다. 이 사명을 반드시 감당하여야 합니다.
나만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기뻐할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에스겔 선지자는 제사장 가문의 출신으로 바벨론 포로 초기 때 활동하였던 제자장인 동시에 예언자입니다.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3차례 포로로 잡혀갑니다. 에스겔은 1차로 포로로 잡혀 왔습니다. 바벨론에 온 후, 포로 생활 5년째 되던 해에 소명을 받고 여러 가지 상징과 비유로써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유다가 완전히 망하고 난 후에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심과 회복을 선포하면서 백성들이 회개를 통한 신앙회복을 위하여 그들이 깨우치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 에스겔3:17-19절
복음을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면 그와 함께 살았던 사람은 주님의 명령 불이행에 따른 심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왜냐 신명기32:35에서 하나님은 보수의 하나님이시라고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에 문책받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 으報酬(보수)는 내 것이라 이그들의 失足(실족)할 그 때에 갚으리로다 ᅢ그들의 患難(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當(당)할 그 일이 速(속)히 臨(임)하리로다- 신명기32:35
|
최소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책망을 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이웃- 늘 한집에서 마주보는 형제들,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내 배우자, 식탁에서 얼굴을 마주 대하며 즐겁게 식사를 하는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그들이 무지 막지한 가운데 자신의 삶의 결국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운명하였다면 우리는 더더욱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이웃은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부터 멀리 있는 미지의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손에서 그들의 피 값을 찾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 두렵고 떨리는 말씀 앞에 어떤 마음으로 서 계십니까?
우리나라 형법을 보면 자살 방조에 관한 처벌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자살을 하려는 사람을 도와서 자살을 용이하게 하거나 자살을 시도하여 의식을 잃은 사람을 구호하지 않은 경우 자살을 방조한 것으로 보고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명시되어 있습니다.
인정법에서도 죽음에 처하는 사람을 살려라고 하는데 하물며 주님에 제자의 길을 가시는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는 죽으나 사나 오직 주님을 위하여 내 안에 계신 주님과 함께 동행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이 새벽에 기도합니다.
-dhleepaul
주님 다시오시는 날까지 구원받은 우리가 생명의 부활로 나아갈 때, 저들은 심판의 부활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게 될 심판이 무서우면 무서울수록 가장 가까이에 있는 우리는 그가 구원받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지를 주님 앞에 대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태를 통하여 주신 선교명령을 되새긴다.
16절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절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절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장 16절에서 20절)
대한예수교장로회 만나교회담임 이덕휴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