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의 한쪽 자락에 달아서 다른 자락에 달린 고리나 구멍에 걸리게 하는 것이 단추다. 용도는 저고리나 남자들의 바지를 여미게 하는 역할이다. 단추는 옷의 종류만큼 모양과 크기가 다양하다. 같은 둥근 모양이라도 용도에 따라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 단추를 고정시키는 단추 구멍은 고리로 된 것은 하나이지만 보통은 단추를 고정 시키는 구멍이 둘이나 네 개인 것이 많다.
단추의 용도는 무엇보다 옷을 입고 벗는데 편리함이다. 단추가 없다면 매번 옷고름을 풀고 매는 일이 보통 불편한 것이 아니다. 인류가 처음에는 가죽이나 천 같은 것을 몸에 감고 다녔다. 그러다가 활동하기 편리한 모습으로 변천되면서 벗고 입는 편리함 까지 추구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입고 벗는데 편리하도록 처음에는 띠 같은 것으로 허리를 통으로 동여매어 사용하다가 고름이 생겨나고 이어서 단추와 지퍼가 생겨났다. 단추는 주로 의복을 여미거나 고정하는 데 사용하지만, 최근에는 디자인을 위한 소품으로 사용되면서, 장식으로 옷의 모양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도 쓰인다.
우리들 세대는 옷고름이 달린 옷을 일상생활 의복으로 입은 마지막 세대다. 그러한 옷을 중우 적삼이라 불렀다. 손질하기가 어렵고 빨래를 하여도 때가 잘 지워지지 않고 양잿물로 삶아 빨아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나일론 옷감으로 이내 바뀌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솜을 넣어 만든 무명 솜바지는 내의 없이 입어도 추운 줄을 몰랐다.
단추가 달린 옷을 입은 우리들은 새 옷 일 때는 다르지만 가지런하게 같은 모양의 단추가 달린 옷 입는 일이 드물었다. 그것은 당시 놀이 문화가 몹시 격렬했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친 후유증 때문인지 거친 놀이가 많았다. 남자 아인들이 주로 하는 놀이는 가이생이라 불리는 놀이였다. 가이생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놀이 이름 앞에 붙여서 불렀다. 오장어 가이생, 십자 가이생 등으로 불렀다. 심지어는 글로 표현하기 곤란한 가이생도 있었다. 가위 바위 보자기 게임을 통해 이기는 팀은 오징어 모양의 그림 안에 서서 오징어 발부분에서 오징어 귀까지 가면 승리하는 게임이었다. 그 게임의 주공격 방법이 진 팀이 오징어 귀와 몸통사이의 좁은 곳을 지키다가, 오징어 그림 안에 있는 사람을 모두 끌어내면 이기는 게임이다. 원래 가이생은 한 칸은 좁게 한 칸은 넓게 사다리처럼 그려놓고 좁은 곳을 지키던 술래가 맨 꼭대기 칸에 상대팀이 도착하기 전에 끌어내는 게임이다.
소를 몰고 산에 가서 풀을 뜯기며 놀 때는 ‘고상 받기’ 놀이를 하며 놀기도 했다. 고상 받기 놀이는 주로 모래밭이나 잔디 위에서 해야 다칠 위험이 적었다. 제목 그대로 상대가 항복을 해야 끝이 나는 게임이다. 요즈음 스포츠에 견주면 격투기 같은 게임이디. 그 심한 몸싸움에 단추가 붙어있을 까닭이 없다.
그 시절 우리들이 자주하며 놀던 대표적인 게임 몇 가지을 나열한 것은 이러한 격한 놀이에 단추가 남아 날 수가 없었다. 한번 놀 때 마다 단추가 한 두 개씩은 떨어져 사라졌다. 그러다보니 어머니는 바느질 바구니를 뒤져 그래도 비슷한 단추로 달아 주고자 하였으나 언제나 크기도 색깔도 제 각각 이었다. 지금은 단추 파는 곳이 있어 맞는 단추가 없으면 모조리 바꿔서 달아줄 수도 있으나 그 당시 시골에서는 단추 구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어머니는 솜바지와 저고리도 만들었지만 여름옷은 황토빛깔 삼베 조각으로 소매가 짧은 콩테소매 옷을 직접 만들어 주었다. 어떨 땐 이어진 천 조각이 디자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단을 배우지 아니 했어도 그럴싸한 모양의 옷이 만들어 졌으나 단추만은 제 각각이었다. 색깔도 총천연색 이지만 모양도 다양했다. 군복에서 모아둔 커다란 녹색 단추, 헌 교복에서 모아둔 금빛 나는 금속성 단추, 노타이라 불렀던 여름 남방에서 모아둔 검고 작은 단추, 누나 오바에서 모아둔 검은 빛깔의 커단란 단추 등 네 개의 단추 가운데 같은 것이 하나도 없을 때도 있었다.
일학년 겨울 방학이 다가올 무렵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것이 춥다고 검은 색으로 물들인 무명천으로 솜바지저고리를 손수 지어 입혀 학교에 보냈다.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저고리는 고름으로 앞을 여며서 끄를 때 쉽게 끄를 수 있도록 매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사실 저고리는 한번 입고 나가면 벗을 일이 거의 없어서 잠 잘 때 벗으면 그만 이었으나 바지는 달랐다, 뛰어 다니다보면 대님이 풀어져 통바지가 되기가 일쑤다. 일학년이 작은 손으로 대님을 감아서 매듭을 지어 묶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님도 대님이지만 하루에도 수없이 사용해야 하는 허리띠는 또 달랐다. 지퍼와 단추와는 달리 소 대변을 볼 때 외에도 흘러내리거나 헐거워 질 때 수시로 끌러서 다시 매야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1학년이라 고개 너머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삽지거리에 서서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눈을 떼지 못하고 보고 있던 어머니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징검다리를 건너던 내가 바지춤을 부여잡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머니가 살펴주지 못하여 혼자서 맨 허리띠가 고리 지어 매지 못하고 그냥 홀쳐매어서 허리띠도 풀지 못하고 다급한 나머지 바지에다 볼일을 보고 만 것이다. 어머니도 단단히 묶여진 허리띠를 풀 수가 없어 이빨로 겨우 풀고는 번쩍 들어 들쳐 업고 집으로 향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결석이라는 것을 했다. 마침 아랫집에 사는 입이 싼 영순이가 보지 않아 오줌싸개라는 놀림은 면할 수 있었다.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