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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독교의 조선 전도
양 현 혜
1. 문제제기
기독교회가 국경을 뛰어 넘어 타국에 대한 전도를 교회적 과제로 삼을 때, 교회의 복음 이해는 그 어느 때보다 선명히 표면화된다. 무엇을 어떻게 전도하고 어떤 실적을 올릴 것인가 하는 선교적 숙고에는 복음에 대한 이해가 필연적으로 내재화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거기에는 선교 대상 지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라는 문제도 극명히 나타나게 된다.
식민지 시대 일본 개신교가 수행했던 조선전도는, 일본 기독교의 복음 이해와 조선에 대한 인식이 가장 선명히 표출된 사건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사건은 근대 한일 양국 기독교 교류에 있어서 고유의 문제와 한계, 그리고 연대의 가능성등이 응축되어 있는 중요한 역사적 실험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근대 한일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1876년의 강화도조약을 그 시발점으로 한다. 잘 알다시피 강화도조약은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조선을 위협하여 체결한 강제적 불평등조약이었다. 이러한 강화도조약에 대한 일본 국내의 여론은 다양했다. 조선을 공격해서 '독립국의 체면', '일국의 영예'를 보존하자는 주장, 조선을 병합하여 구미와 어깨를 겨누는 '동양의 영웅'이 되자는 주장, 또는 조선을 불만감이 많은 몰락 무사들의 영지로 하여 '일본내의 분규를 일소'하자는 주장 등 여러 논조들이 대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논조들은 '개명화'한 일본과 '몽미(蒙迷) 야만'의 조선을 대치시켜 선각(先覺)이 후각(後覺)을 응징할 필요를 외치는 점에서 모두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 정신사에서 보면 강화도조약은, 구미형의 개화를 단행한 일본에서'열아(劣亞)'의 자각이 '탈아(脫亞)', '맹아(孟亞)'의 심정에 연결되는 패턴이 넓게 침투되어 간 커다란 전기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구미에 대한 열위와 굴욕감의 출구를 도리어 가까이 있는 근린 아시아 제국에 대한 우월감과 세력 부식의 방향으로 조직하였던 근대 일본 외교의 원형을 조형하는 사건이기도 했다(1).
근대 일본의 조선전도는 일본의 이러한 조선 인식과 외교의 방향이 굳어 가는 배경속에서 진행되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일본 개신교의 조선전도가 근대 일본의 조선 멸시와 자기 세력 확대 정책과 어떠한 관계에 있었고, 당대의 조선 기독교와 어떠한 연관을 가졌는지, 또한 일본 개신교가 기독교 고유의 비판적 상대화의 정신을 가지고 일본의 국책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는지 어떤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의 문제라 하겠다.
이하에서는 근대 일본 기독교회의 양대 교파인 일본기독교회와 일본조합교회의 조선전도를 고찰하고 마지막으로 교파에 얽매이지 않았던 독립 전도자들의 조선 전도를 고찰함으로써 이러한 문제들에 접근해 보기로 하겠다.
2. 일본기독교회와 조선 전도
일본 기독교회에서 해외 전도를 주장한 최초의 논설은 1890년 T. K의 필명으로 발표된 '식민과 기독교'일 것이다. 일본인이 본의 아니게 고립된 섬에 갇혀 있던 상태에서 일본의 개국과 근대화는'호지영기(豪志英氣)'를 진작할 계기가 되었다고 먼저 이 글은 지적한다. 그리고 식민지가 "장래에 해외에 열리려고" 하는 이 시기에 일본 기독교는 영혼의 양식을 주는 것을 불교에게만 맡겨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아시아 전 지역의 전도는 우리들 기독교의 천직으로서 스스로 용감하게 짊어져야 한다"고 호소하였던 것이다(2). 이 글을 통해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일본 기독교회가 일본의 대륙 진출을 긍정하고 그것을 고취하면서 그 안에서 기독교의 협력적 역할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아시아 전도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 전도를 최초로 논한 시마누키(島貫兵太夫)는, "우리 대일본은 동양의 맹주이다. 동양의 선도자다. 종교에 있어서 정치에 있어서 교육에 있어서 예능에 있어서 기타 모든 방면에 있어서 그렇다. 동양 제국중 으뜸이다. 우리들은 지금 동양 전도책을 강구해야 할 임무가 있다. 우리들은 동양 제국을 전도해야 할 천직을 갖는다는 것이 나의 오래된 신념이다"고 주장하였다(3). 이와 같이 시마누키는 일본이 동양의 맹주로 조선 전도의 책임을 담당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조선 전도의 개시를 위해 노력했는데, 그는 일본기독교회대회에 센다이(仙台)중회의원으로 출석하여 '재조선 일본인'에게 전도할 것을 강력하게 건의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대두된 조선 전도론이 급속하게 활기를 띠게 된 것은 1894년 청일전쟁 때였다. 일본 기독교회의 지도자였던 우에무라(植村正久)는 기관지인〈복음신보〉의 권두 논설에서, 일본은 "근린 조선의 개혁에 주의하는 것이 천직"이라고 전제하면서 "전쟁은 파괴이다. 그러나 때로 어떤 점에서 이를 보면 전쟁은 실로 문명의 사자다. …… (전쟁의) 존재 가치는 그 전쟁이 문명의 사자가 될 때 가장 고귀한 것이다. 지금 우리 일본의 청국에 대한 전쟁은 바로 이 문명의 사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본이 중국에 이기는 정도에 비례하여 세계의 문명은 점점 그 울타리를 넓혀 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이 전쟁에서 일본의 위치는 "천도(天道)의 법정에 비추어 조금도 두렵거나 부끄러울 것이 없는"것이라고 확신하였다(4). 이렇게 일본을 문명 전파를 위한 사자로써 위치매김한 우에무라는 청일전쟁을 긍정하기 위해 문명론을 동원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대다수의 일본 지식인들은 서구 문명만이 유일한 문명이고 아시아에서 그 전파자는 일본이라는 낙관적 문명 확대주의에 젖어 청일전쟁을 문명 전파를 위한 의전(義戰)으로 규정하고 있었다(5). 청일전쟁을 "천도(天道)에 비추어 시인"한 우에무라도 낙관적 문명주의에 근거한 의전론에 동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청일전쟁 긍정론 속에는 그만의 독특한 부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에무라는 일본인의 대륙 식민은 권장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식민에 의한 정신의 퇴폐, 그로 인한 식민의 실패를 경계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조선에서 인류의 존귀를 무시하고 이웃 나라 사람들을 경시하고 폭악 불순한 행동을 하게 되면 설령 병력이 승리했다 하더라도 정신상의 실패는 더할 나위없는 것으로, 일본 인민은 조선에서 교육, 전도 그외 제반 계도적 사업에 대해서는 무능력의 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청일의 변란은 결코 총탄만의 싸움이 아니다. 중요한 의미에 있어서 도덕의 전쟁이다.(6)
즉, 우에무라는 일본의 해외 세력 확장을 긍정한 위에서 그것이 윤리성을 동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이렇게 윤리적 검토를 제기한 것은 청일전쟁을 의전으로 인정하고 그 근거를 문명론적 의의에 두려고 한 이상 당연한 문제 제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배후에는 세계의 문명을 낳고 그것을 인도하고 지키는 것은 기독교라는 발상이 있었다(7). 즉, 우에무라는 '서구 근대 문명 = 기독교'라는 소박하고 낙관적인 기독교적 계몽주의의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제기된 조선 전도론은 논의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재조선 일본인에 대해서조차도 실행되지 못하였다. 일본 기독교회에서 조선 전도론이 또 다시 재연된 것은 러일전쟁 개전론으로 일본 정국이 비등하였을 때였다.
1903년 일본 기독교회대회에서 우에무라는 "내년에 시기를 봐서 조선에 전도할 것"이라는 결의안을 전도국에 제출하여 결의시켰다(8). 이 결의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타카야마(貴山幸次朗) 일본기독교회 상치(常置)위원은 그 해 11월 조선으로 시찰 여행을 떠났다.《조선 견문록》에서 타카야마는, 조선인은 "돼지 움막같은 형편없는 집"에서 살고 있고 마치 일본의 신화 시대의 사람같은 외모를 하고 있으며 눈은 반쯤 죽어 있어 원기·희망·자주력을 상실한 사람들이라고 기술했다. 계속하여 그는 "이주 식민 팽창은 아브라함 이래 기독교 신도의 일대 특색"이기 때문에 크리스찬은 조선에 대이주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은 "일본을 위한 것이고 조선을 위한 것이며 그리고 동양 문명을 위한 것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크게 힘써야만" 하는 일이라고 조선전도에 대해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였다(9). 이와 같은 주장이 일본의 자기 팽창주의에 기독교적 치장을 덧붙인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즉 "우리의 실지적 세력을 부식하기" 위한다는 실질에 "한인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갱신"시킨다는 구실을 붙인 것이었다.
러일전쟁 의전론에 근거한 조선 전도론에 대하여 소수이기는 하나 반전론자들의 견해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타가와(田川大吉朗)의 글을 들 수 있다. 그는 국가가 유치할 때에는 무력을 사용해 야만적인 전쟁을 즐기지만, 성년으로 성장하면 지성을 겨루고 노년이 되면 "도덕적 윤리적으로 일변한다"는 국가관에 서 있었다. 타가와는 지금 일본은 "육해군의 위대한 기량"을 자랑하고 있지만, 국민의 성품이나 도덕, 지식과 기술의 면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따라서 기독교인은 적개심에 편동되지 말고 "동양의 천지가 전운에 쌓여도 국민 정신이 살기로 가득차도" 흔들리지 말고 끊임없이 평화의 사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고대 이래 일본 문명은 그것을 중국과 조선 내지는 구미 제국에서 전래받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10).
한편 우에무라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 전쟁을 신앙적으로 국가적으로 어떻게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그것은 청일전쟁에 관한 반성적 검토를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에무라는 "십년 전 우리나라가 청국과 싸울 때 국민은 마치 꿈속을 걷는 자와 같이, 또한 술에 취한 자들과 같이 그들과 싸웠다. …… '청국을 징벌하라'는 동요에서 대표되듯이 만용에 놀아나 소위 암중에서 한번 크게 비약하는 것을 시도해 본 것으로 국민의 복수 정신과 호전의 성벽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일어난 것과 같이 보였다"고 청일전쟁을 회고했다(11).
우에무라는 청일전쟁 의전론과 같은 얄팍한 문명론적 낙관주의를 이미 청산한 단계에 도달하였던 것이었다. 그는 일본 국민이 승전에 취해 있을 때 "승전 축제에 광분한 국민은 전혀 의식하고 있지 못하겠지만, 깊이 생각하여 보면 국민은 양치기없는 양떼와 같은 상황이다"라고 한탄했다. 그의 관심은 일본의 대륙 진출에 있지 않고 "일본은 전승의 결과로서 그 이상(理想)이 고상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타락해서 물질적 경향이 점차 강해져 위 아래가 모두 조야한 경향으로 타락해 버릴 것인가"하는 문제에 있었던 것이다(12). 즉 일본 국가의 정치적 방향은 묻지 않으나 도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예언자적 불침번이 되겠다는 입장이었다. 이것은 스스로를 '전도자'와 '사회의 목탁'이라는 두 개의 중심을 가진 타원이라고 규정한 우에무라의 자기 규정에 충실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13).
이러한 논의 속에서 일본 기독교회는 1905년 2월 11일 아키모토(秋元茂雄)라는 목사를 부산에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 전도에 착수했다(14). 그러나 조선 전도라고 해도 이 시기에 있어서는 약 3만 3천명으로 보고된 재조선 일본인들에 대한 전도에 불과했다. 일본 기독교회의 의도는 국내 전도의 연장선에서 먼저 재조선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전도를 시작하여, 그것을 거점으로 해서 조선인 전도를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1907년 일본 기독교회대회는 만주·조선 전도에 7천엔을 투입할 것을 결정하였다(15).
1910년 일본의 조선병합 후에도 재조선 일본인전도라는 일본 기독교회의 입장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1912년 최초로 서울에 일본 기독교회의 교회가 낙성되었으며 1914년에는 부산에 교회가 성립되었다. 1916년에는 신의주·목포·부산·대구·군산·용산등에 교회를 두었고 예배 출석인원 300여명, 다수의 주일학교 생도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경성의 교회가 가장 활발했던 모양으로 "예배에 123명, 적을 때도 80명미만은 안된다"는 보고가 있다(16).
그렇다면 일본 기독교회의 재조선 일본인전도 속에서 대조선인 전도는 얼마나 진행되고 있었을까? 일본 기독교회의 대조선인 전도는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노방 전도에 다소의 조선인이 동원되었다든지, 일본인의 가정 집회에 조선인이 동원되었다든지, 일본인 목사가 조선인 교회에서 설교하게 되었다든지 하는 정도에 그쳤다. 결국 일본 기독교회의 대조선인 전도는 하나의 간절한 바램의 형태로 그쳤다고 볼 수 있다.
1919년 3·1운동 후에도 일본 기독교회는 "일본인으로서 조선어에 숙달해 직접 조선인에게 전도하는 길"이 열리기를 희망하고, 또 "크리스찬 학교 교사로서 조선의 교육 사업에 헌신하는 사람"이 나올 것을 바라는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인의 위력에는 유순하게 복종하여도 그들(조선인)은 일본인의 인격에는 감복하지 않아, 한마디로 말해 일본인은 아직 조선인에 대해서 전도자로서의 신용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속에서 그 꿈은 점차로 현실성을 잃어 갔던 것이다(17).
3. 일본 조합교회의 조선전도
일본 조합교회의 조선전도 계획은 러일전쟁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조합교회의 기관지〈기독교 세계〉는 1903년 일본의 대륙 진출을 고무하고 다음해 전쟁이 일어나자 10월에 열린 종합신도대회에서 "국가의 진운에 부응하여 동양 전도를 관철할 것을 기한다"는 선언을 발표하였다(18).
이러한 움직임은 조합교회의 역사 인식과 관련되어 있었다. 조합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에비나(海老名彈正)은 1904년8월 "전후의 최선의 경영"이라는 글에서 '만주, 조선인의 일본화가 전후의 최대의 급선무'라고 주장하면서 '동화'를 위한 지도를 종교에 요구하고 있었다(19). 그가 러일전쟁을 '신국(神國)건설'을 위한 자위적 의전으로 보고 있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합교회의 러일전쟁관은 청일전쟁 의전론의 소박한 문명론적 낙관주의의 연정선상에 있었다.
조합교회의 조선전도는 이러한 교회내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개시되었다. 1903년 10월 조합교회 제19회 총회는 해외 전도를 결의하여 전도사를 조선에 파견하였고, 러일전쟁이 한창이었던 1904년 7월에 경성교회를, 그리고 1907년 10월에는 평양교회를 설립하였다(20). 이 교회들은 재조선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운영을 당면의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대조선인 전도도 겨냥하고 있었다.
1910년 조선이 완전 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여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이에 대응하여 조합교회는 공공연히 조선총독부의 동화정책에 협력을 표명하고 본격적인 조선전도를 준비하고 나섰던 것이다.
1910년 9월 1일자〈기독교 세계〉의 사설란에 "한국병합과 조선인 전도"라는 글이 등장했다. 사설의 내용을 보면, 우선 한국병합은 '한일 양국민의 행복을 완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며 한국민에게 있어서는 애석한 정이 없지야 않겠지만, 그것은 '부녀자의 인(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인은 강대국의 판도에 속한 쪽이 행복하기 때문에 따라서 한국인이 취해야할 일은 '속히 그 사상, 감정에 있어서 완전히 일본 국민과 동화 협력하는 길에 있을 뿐이며 이것이야말로 소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기독교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동화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정치가와 교육가에게만 맡길 수 없는 일이다. 인심의 통일은 종교를 두고는 결코 완전히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인데, 한국의 종교는 기독교이외는 없다. 이미 조선이 일본의 영토가 된 이상 일본의 전도는 일본인이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주의는 조선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또한 지난날 기독교가 독립 사상을 불어 배일주의를 고취한 흔적이 있다고 해 조선 전도를 꺼려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외국 선교사가 전도했을 때 이야기이고, 또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일본인의 손에 의한 조선인 전도를 하루라도 빨리 시행하여야 함을 암시하는 가장 큰 근거이다.(21)
이 논설이 주장하는 것은, 일본에 의한 조선병합은 하나님의 뜻이며 조선인에게 주어진 유일한 행복의 길이며 따라서 동화를 촉진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당연한 사명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조선인의 독립사상을 억누르고 일본 제국주의의 종교적 첨병 노릇을 스스로 담당하겠다는 의지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논설을 집필한 사람은 와타세(渡瀨常吉)였다.
와타세는 에비나문하의 한 사람으로서 1899년부터 1907년까지 8년간 일본해외교육의 위탁을 받아 경성학당의 학당장으로 근무하면서 조선에서 일어교육 보급에 종사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경성학당은 열강이 각축하는 아시아에서 조선 정부 및 구미제국과 정면 충돌을 피하면서 조용히 진출의 발판을 쌓으며, 한편으로 조선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한 군비 증강의 시간벌기를 한다는, 일본 정부의 침략정책의 전체적인 구도안에 조직된 것이었다(22).
1907년 고베(神戶)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조선을 떠나기까지 8년간 경성학당장으로 지낸 와타세의 경력은 이후의 그의 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1908년 10월부터 와타세는 조합교회의 최고 기관인 15명의 상의원(常議員) 중 한 사람으로 뽑혔고 다음해부터는 5명의 이사 중 한 사람이 되었고 나아가 기관지〈기독교세계〉의 편집위원을 겸임하는 요직에 있었다.
1910년 일본의 조선병합을 계기로 조합교회는 10월의 정기총회에서 조선인 전도 개시를 전원일치로 결의하여 조선전도부를 설치하였다. 와타세는 경성학당장의 경력이 평가되어 그 주임으로 또다시 경성에 부임하게 되었다. 먼저 그는 경성에 한양교회, 평양에 기성교회를 설립하고 이 두 교회를 조선전도의 교두보로 삼았다. 1910년 12월에는 조선에 10여개의 교회가 있었으나, 1914년에는 남부지방에서 11개 교회, 서부지방에서 4개의 교회가 일본 조합교회에 가맹하였다. 조선전도부는 이러한 급성장 추세로 1913년에서 1917년까지의 약 5년간에 교사수 22명에서 98명으로, 교회수는 45개에서 143개로, 교회원수는 3600명에서 12,060명으로, 교회 경비 6,000여원에서 17,000여원으로 증가하는 비약적인 실적을 올렸다. 당시의 일본국내의 조합교회의 세력이 교회수 113개, 신도수 20,427명이었던 점과 비교해 보면 조선전도부가 얼마나 급성장했는지 잘 알 수 있다(23).
이미 감리교와 장로교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고 일본기독교에 대한 반감도 적지 않았던 조선은 일본 기독교회가 간파한 대로 결코 용이한 선교 지역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합교회의 조선전도부가 이상스로울 정도로 놀라운 실적을 올릴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와타세는 조선전도의 첫걸음을 내딛기 위해 한국인 협력자들을 필요로 하였다. 그의 파트너가 된 한국인은 유일선·선우순·나일봉 등이었다. 유일선은 경성학당에서 와타세에게 배운 후 동지사대학 신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조선전도부가 발족하자마자 와타세의 요청에 의하여 전도 부주임이 되어 와타세의 오른팔이 되었다. 유일선은 총독부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조선 독립운동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 방해 공작을 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하면서 와타세를 응원했던 것이다. 선우순과 나일봉은 평안도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단체인 대동동지회에 기반을 두고 친일 행위를 일삼던 자들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발행의〈독립신문〉1920년 2월 5일자에 용감한 애국자들이 꼭 죽여야만 할 매국노로서 전국규모의 친일단체인‘국민협회’의 수뇌인 민원식과 더불어 선우순·유일선 등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으로부터도 와타세의 조선인 협력자들이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얼마나 극심한 증오의 대상이었는가를 잘 알 수 있다(24).
와타세는 이들 친일협력자들의 도움으로 한양교회와 기성교회를 설립했으나, 초기의 전도 성과는 미미한 것이었다. 이 때 와타세가 포착한 것은, 구미 선교사와 불화 반목하여 독립교회 설립을 지향하였으나 역부족으로 곤란에 처한 조선인 기독교인들의 존재였다. 주지하다시피 서구 중심주의에 근거한 아시아 멸시는 근대의 구미 선교사들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는데, 이 점에 있어서 재조선 선교사들도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의 우월의식은 국권이 해체되고 식민지 상태로 떨어진 근대 조선의 역사적인 상황과 맞물려 더욱 조장되었다.
식민지 종주국 일본을 거치지 않고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창구이기도 한 서구 선교사들과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는 조선 기독교 지도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의 안하무인적인 양대인화(洋大人化)에 대한 반발은 해를 거듭할 수록 축적되었다. "조선인을 일개 토민(土民) 내지 토민시 하고 교회 행정 기타에 일절 발언을 불긍(不肯)하며 소위 백인 선교사식 전제정치를 강행함에 대하여 회의를 품고" 반선교사의 기치하에 자치교회를 조직하여 교단에서 분리해 가는 움직임이 당시 조선에서는 적지 않았던 것이다(25).
전라도 지방에서 독립교회를 설립한 차학연과 평안도 지방의 최중진도 그러한 사람들이었는데, 식민지라는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의 의도인 완전 자립을 이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그들은 궁여지책 끝에 와타세와 접촉하고 가입을 타진했다. 이들은 몇가지의 신학상 목회상의 문제를 질문한 뒤 가맹을 결정했다. 반선교사의 독립교회를 지향하여 기성 교단을 일탈한 교회가 식민지 지배국의 교회인 조합교회로 숨어 들어가는 모순적 결말을 맺은 이들 자치교회 움직임은 식민지 교회의 비애를 보여준 일단면이라고도 하겠다.
어쨌든 이로 인해 와타세에게 최초의 전라북도 전도 여행의 길이 열렸고 11개소의 교회와 4~5백명의 입교인들을 얻을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조직 팽창으로 교회 지도자수가 압도적으로 부족한 가운데 와타세는 조합교회의 목사가 되는 자격이나 제반 수속을 무시하고 안수례를 행하는 등의 편법을 주저하지 않았다(26).
팽창일로에 있던 와타세에게 충청도 지역 교회의 대거 가맹이라는 호기를 덧붙여 준 것도 조선인 기독교인과 선교사의 불화가 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선교사와 후계자 문제를 놓고 반목하여 침례교 계통의 대한기독교회를 탈퇴한 신명균 등이 자신의 영향력하에 있던 공주교회를 비롯한 15개의 교회를 이끌고 1915년에 조합교회 조선전도부에 가입하였다. 이 숫자는 조합교회 조선전도부가 폐지되는 1920년까지 충청도 지방에서 가입한 교회수의 절반에 해당하는 수였다(27). 즉, 와타세는 탈선교사를 지향하여 독립하려 했으나 고전을 겪고 있던 한국인 기독교인을 포섭하는 방법으로 교세의 급작스러운 확대를 이룬 것이었다.
조선전도부의 팽창을 가능하게 한 또하나의 요인으로서 일본 정계, 특히 조선 총독부의 물심양면의 지원을 빠뜨릴 수 없다. 조선전도부는 1911년 6월부터 1916년 5월까지 약 5년간의 전도비로서 3만엔을 예정하고 있었다. 이 돈은 연간 총예산이 겨우 1만여엔에 불과한 조합교회로서는 과도한 부담이었으며, 따라서 조직운영을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기부금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28). 이에 와타세는 1913년《조선 교화의 급무》라는 100쪽 정도의 소책자를 간행하는등 적극적인 선전·강연 활동에 나섰다. 《조선 교화의 급무》에서 그는 다시 한번 조선병합을‘국가를 걸고 싸운 대분투의 결과’이고 '일등국이 되는 명예의 보장'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조선민족을 설복하는 기초는 종교이며, 종교는 단지 신앙 보급뿐만 아니라 조선인의 '반항심'을 굴복시켜 '일본국민된 자각'을 갖게 할 임무도 갖는다고 말한다. 그 임무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 조합교회의 조선전도이므로 독자들은 이 '국민적 운동'에 협력해 달라고 호소하였던 것이다.
기부금 모금에 당시의 수상 오쿠마(大 重信)가 지원을 보냈고 조선 총독 테라우치(寺內正毅)도 재계 유력자들의 동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결과 미츠비시(三菱)·미츠이(三井)·조선은행 등 재벌들이 조선전도를 위해 각 2~3만엔의 거금을 지원하는 실적을 올렸다(29). 조선총독부의 지원은 이러한 간접 지원에 그치지 않았다. 총독부 기밀비에서 연간 6천엔을 익명으로 기부하기도 했고, 헌병이나 순사를 동원하여 기독교를 믿으려거든 조합교회에 가라고 하는 등의 직접적인 압력도 없지 않았다(30).
전도의 동기뿐만아니라 전도의 방법에 있어서도 파행적인 이 조합교회의 조선전도부의 내실은 조선전도부가 세운 교회의 질을 보았을 때 보다 분명해진다. 1919년의 통계를 보면, 조선전도부 소속 교회수 150개 중 1/3을 점하는 50개의 교회가 타교파로부터의 가입이고 전임교사수는 150교회에 대해 72명으로 47.3%, 교회원 총수의 43.7% 가 미세례자였으며, 예배당을 가진 교회는 전교회수의 27.3%인 44개의 교회에 불과했다(31). 조선전도부내의 교회는 교회운영에 걸맞는 내실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이 통계로부터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조선전도부가 선전효과에만 치중해 교세 보고를 과장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며, 따라서 신빙성 그 자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또한 조선전도부내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교제나 연대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조선전도의 대상은 오직 조선인으로 한정되어 있어 조선인만이 교회를 조직하였으며, 재조선 일본인조합교회 회원들은 종래대로 일본인들만의 교회에 속해 있었다. 따라서 조선전도부내의 교역자를 보면, 1918년말 현재 교역자 68명(목사 7인, 전도사 29인, 명예전도사 11인, 전도조수 3인, 명예전도조수17인, 부인전도사 1인) 중에서 일본인은 와타세와 단 한명의 일본인 전도사에 불과하였다(32).
나아가 조선전도부의 교회내에서는 조선인 교역자 내지 신도의 자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와타세는 회원의 수입 지출을 자치에 맡기지 않고 전부 장악하여 분배·급여하는 방식을 취했으며, 본국의 조합교회 총회에 대의원을 보낼 자격도 부여하지 않았다. 또한 조합교회의 규약도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고 한다(33). 따라서 마치 조선전도부는 일본 조합교회의 인가를 받은 와타세의 개인 사업과 같은 것으로, 전도의 의도·방법·교회의 운영실태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일본 제국주의의 어용종교로서의 성격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조선전도부의 어용적 성격은 1919년 3·1독립운동에 대한 반응에서도 유감없이 나타났다. 3·1독립운동을 목격한 와타세는 즉각적으로 "조선 소요 사건과 그 선후책"을〈新人〉4월호에 기고해, 3·1운동에 참가한 조선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정신이 농후하고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이 없는 유대교도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즉, 만일 기독교인들이 산상수훈의 정신을 안다면 그들은 그런 식으로 반항해서는 않될 것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형제로서 더 포용적으로 내선일치를 대성하는 정신"에 근거하여 행동했어야만 했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건전한 신앙을 근거로 해 건전한 사상"을 배양함으로써 유다주의를 극복하고 "양민족의 새로운 영적 일치"를 달성하기 위한 조합교회의 조선전도의 의의를 더욱 강조하였다.
이러한 3·1운동관에 근거하여 조선전도부는 3·1운동을 진압하는 조선총독부에 협력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대시국 특별 운동을 개시할 방침을 정해", 인쇄물의 배포, 조합교회 포교의 확대, 지방 순회 설교를 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전도부의 시국운동은 조선총독부의 두터운 후원아래 8월말까지 계속되어 함경북도를 제외한 전국 11개도에서 강연회·환등회 등이 개최되었다(34). 와타세를 비롯한 조선전도부는 기독교를 통한 조선인의 정신적인 동화야말로 일본의 기독교인이 해야 할 종교보국(宗敎保國)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선전도부의 적극적인 '종교보국' 활동은 육군이나 조선총독부로부터 크게 평가되었다. 3·1독립운동 진압을 강행하고 있었던 조선군 참모부는 1919년 7월 14일《소요의 원인 및 조선통치에 주의해야만 할 건(件)과 군비에 관하여》라는 책자를 내부적으로 발행하였는데, 이 책자의 제2장 12의 '종교가의 활동 및 유익한 종교가의 보호'라는 항을 보면, "일본 조합교회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할 필요가 있다. 이번 소요 때 이 교회에 소속한 교도 2만중 소요에 참가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것을 보아도 종교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 수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일본 식민지배자들은 조합교회 조선전도부의 활동에 대해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고 높은 평가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35).
조선총독부와 일본육군의 조선전도부에 대한 신뢰에 힘입어 조선전도부의 정치공작 활동은, 3·1독립운동이후에는 중국의 간도, 상해, 그리고 소련의 연해주지방에까지 확대되어 갔다. 3·1운동을 계기로 이들 지방에 있던 항일 민족운동 단체들이 활성화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와타세와 조선전도부 참사인 무라카미(村上唯吉)등이 중심이 되어 상해임시정부를 염탐하여 정보를 모아 일본 육군에 제공하였고 '불령선인'(不逞鮮人)의 회유공작도 벌였다. ''불량선인'의 회유공작 중 대표적인 것은 소위 '여운형사건'이었는데, 이 사건은 조선전도부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사건으로서 그 내용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한편 이렇게 어용화한 와타세의 조선전도에 대하여 일본 조합교회 신자들이 모두 긍정적인 반응만을 표명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 조합교회내에서 와타세의 조선전도를 가장 본격적으로 비판한 것은 안나카(安中)교회의 목사 가시와키(柏木義円)였다. 그는 복음전도와 내선일체의 두 가지의 목적을 내건 와타세에 대해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을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 외에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따라서 기독교 전도의 목적은 결코 둘일 수 없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는 원래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은 조선독립의 저지가 목적이었던 만큼, 일본인이 조선인의 정신적인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주장하면서, 만일 복음 전도를 제국주의적 방편으로 삼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결단코 이를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동시에 가시와키는 조선인의 반항심을 전도에 의해 교도한다는 와타세의 논리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그는 조선에 문명 사상을 가진 기개있는 지사가 있어 인민을 고취해 후일 독립 자치의 땅을 이루려고 한다면, 진정한 종교가는 오히려 이를 초연하게 포용하고 동정해야 하는 것으로, 조선인의 반항심을 적대시하는 것은 종교가의 면모를 잃어 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36).
조합교회의 유력한 장로인 유아사(湯淺治朗)도 가시와키의 비판을 지지하면서, 조선전도부가 총독부와 일본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해 결국 "어용 종교가 되어 정부를 변호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고 그 어용화를 비판하였다. 다이쇼(大正)시대의 민권운동의 정신적 지도자로 이름높은 요시노(吉野作造)도 "정신적 사업의 경영자가 관헌으로부터 보조를 받아 관헌의 직접 간접의 지도를 받고 있어서는 진정한 인도적 사업의 발달은 기할 수 없다"고 조선전도부를 비판하였다(37).
일본 기독교회에서도 조합교회의 조선전도의 어용성을 비판하는 소리가 있었다. 대표적인 것으로서는 일본 기독교회의 목사 사토(佐藤繁彦)가 쓴 "조선전도의 위기"라는 글을 들 수 있다. 이 글에서 사토는 1919년 7월 1일자〈大阪朝日新聞〉에 게재된 "上海의 음모단 본부"라는 기사를 문제시하였다. 이것은 일본 조합교회 조선전도부의 참사인 무라카미가 상해임시정부를 정탐한 사건이었는데, 이에 대해 사토는 "종교가가 탐정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어떤 동기에서라도 버려야 한다고 믿는다"며 무라카미의 행동을 규탄하였다. "나는 일전에 조선인 전도에 종사하고 있는 모씨를 만난 일이 있는데, 그가 조합교회의 전도자로서 불식간에 조선인에 대한 인격 감정을 잃어 버리고 조선인을 열등시하여서, 마치 관리가 인민에게 임하는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면서, 이러한 수치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것은 일본인 조선전도 관계자들이 조선에 있는 서양 선교사들과 달리 조선과 조선인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사토는 고발하였다(38). 이러한 사토의 비판에 대해 와타세는 무라카미에 대해서 "그 사람은 전도부의 참사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참사라는 것은 단순히 주임의 고문에 불과한 것으로 교무 및 전도상의 책임을 갖지 않는다”고 변명하였다(39).
조선전도를 들러싼 일본 기독교내의 이러한 비판과 3·1독립운동으로 인한 조선 정세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조선전도부는 그 세력을 유지했다. 조선전도부는 1920년 4월 전도 관계자들을 소집해 대회를 열고 조선 국내에서 10만엔을 모금할 것을 결정하였다. 10월의 일본 조합교회 연차 총회에서 와타세는 조선 각지는 아직 불온하여 전도는 어려우나 현상 유지만은 문제 없으며 "어떠한 위기에 서 있어도 붕괴라는 비극적인 사태에 빠지는 일은 만의 하나라도 없으리라 믿는다"고 보고하였다(40).
그러나 조합교회는 1921년 10월 연차 총회에서 갑작스레 조선전도부를 폐지하고 조선에 있는 소속 교회를 분리 독립시켜 그 명칭을 '조선회중교회'로 변경한다고 발표하였다(41). 이러한 돌발적인 사태의 전개에 대해 조합교회측은 조선인의 정신적 각성에 의한 자치 희망을 받아들인 결과라고 해명하고 있으나 그 진상은 전혀 다른 이유에서 였다. 이유 중에는 3·1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조선인 신자가 감소한 것과 더불어 일본 기독교내의 반대 여론도 작용했으리라 생각되지만,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조선 독립운동가의 회유 및 친일화 정책의 하나로 조선전도부가 정력적으로 추진한 '여운형사건'의 실패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와 일본 육군, 그리고 조선전도부가 중심이 되어 전개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의 회유공작의 일환으로, 일본정부는 상해임시정부의 저명한 지도자중 한 사람이었던 여운형을 동경에 초대하였다. 여운형을 회유하기 위하여 일본정부는 여운형과 정부, 군, 총독부 수뇌와 회담시키고 일반인에게는 관람이 불허된 장소였던 동경의 아카사카별궁(赤坂離宮)을 참관시킨 후, 당시 일본에서 최고급 호텔이었던 제국호텔에서 기자 회견을 가졌다. 그런데 동경 한복판에서 가진 이 기자회견에서 여운형은 놀랍게도 일본정부의 의도와 정반대의 연설을 하였던 것이다. 즉, 조선 독립이야말로 일본과 협조하여 동양 평화를 확실히 하는 길이며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제일의 기초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 기자회견과 아카사카별궁 참관이 문제가 되어 일본정부는 야당으로부터 정책 실패를 추궁당하고 끝내는 수상 하라(原敬)가 직접 '사죄'함으로써 사태 수습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더구나 상해에 무사히 돌아간 여운형은 친일적으로 개심하기는 커녕 더욱 정력적으로 독립운동을 계속 추진하였던 것이다(42).
이와 같은 사건 경과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전도부의 공작활동을 신뢰하여 여운형 사건을 도모했다가 정치적인 손해만 입은 일본정부 관계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반성하여 그 차원에서 조선전도부의 예산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였고, 원래 어용적 성격이 강했던 조선전도부는 이를 계기로 그 존재의 이유를 잃었다는 것이 조선전도부의 종말을 가져온 직접적인 이유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어쨌던 급전하는 상황 속에서 유일선을 회장으로 하여 조선회중교회가 된 조선전도부는 1921년 말에는 2만이라던 신자가 겨우 2,955명으로 격감했다(43). 유일선이 사망한 1937년에는 교세 겨우 450명이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하여 전대미문의 기묘한 '전도사업'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던 것이다.
4. 개인 전도자들
와타세가 기독교와 내선일체를 전하는 전도자였다면,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조선에 전하려고 했던 전도자도 있었다. 최초의 일본인 해외 기독교 전도자라고 불리워지는 노리마츠 마사야스(乘松雅休)는 와타세의 조선전도보다 15년이나 앞선 1896년에 이미 조선에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노리마츠는 프리머스파(Plymouth Brethern)의 기독교인이었다. 이 파는 1830년 다비(J. N. Darby)가 아일랜드에서 일으킨 것으로 성서 그 자체에만 중점을 두고, 조직적인 제도나 신조를 부정하며 침례와 매주 일요일 성찬식 엄수를 특징으로 하는 교파였다. 노리마츠는 이러한 입장에 서서 일본 전국에 복음을 전도하던 중, 우연히 청일전쟁으로 인한 조선인들의 수난을 전해 듣고 조선에 "순수한 은총의 복음을 선전"할 뜻을 세워, 1896년 인천에 도착하였다.
인천에 도착한 그는 조선어를 배우며 언어와 생활을 조선인과 함께 하였다. 그는 의복도 식기도 주택도 조선식으로 하였을 뿐만아니라 조선에서 태어난 그의 장남에게 오직 조선어만을 가르쳤을 정도로 철저한 현지 동화의 생활을 하였다. 기독교를 통해 조선인을 일본에 동화시키려던 와타세와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생활 양식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생할 양식을 갖고 복음을 전도하기 시작하였으나, 와타세의 생활은 결코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청일전쟁·노일전쟁등으로 배일 감정이 격해진 조선에서 일본인으로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리 환영받을 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제도나 조직을 부정하는 교파에 소속되어 정기적인 전도 지원금을 받을 수 없었던 노리마츠는 극심한 빈궁에 시달리며, 끝내 아내를 가난과 과로로 잃는 비운을 겪었다.
이러한 곤궁 속에서도 그의 복음 전파는 계속되었는데, 그 전도 내용은"하나님은 사랑이어서 죄아래 짓눌려 있는 인류를 구원하려고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셨다"는 대단히 간결한 것이었다. 그러나 곤궁과 가난 속에 있는 조선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과 가난을 함께 나누는 노리마츠의 이 간결한 멧세지는 깊은 진실성을 가지고 듣는 사람들을 압도했다.
1914년 노리마츠는 18년간에 걸친 조선전도 생활을 일단락짓고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폐결핵으로 인한 극도의 쇠약이 그 원인이었다. 귀국 후에도 그의 조선에 대한 사랑은 몇 차례의 순회 전도 여행등을 통해 지속되었는데, 1921년 임종시에는 "뼈는 꼭 조선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을 정도였다. 이러한 노리마츠의 조선전도가 조선인에게 어떠한 반향을 일으켰는지는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조선인 신도 김태희의 다음과 같은 이별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데도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 사랑에 고무되어 노리마츠형은 조선인을 사랑했습니다. 세상에는 영국인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인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노리마츠형은 조선인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조선을 사랑해 주었던 저 마음, 죽을 때까지 조선 조선 하며 하늘로 갔습니다."(44)
어떠한 선교부의 지원도 없이 오직 복음만을 전한 노리마츠의 조선전도는 그가 없이도 독립하여 신앙을 지켜가는 훌륭한 신앙의 동지들을 얻을 수 있었다. 노리마츠의 사후에도 조선에서는 김태희 등이 중심이 되어 활발한 전도를 전개하고 각지에 집회소를 확대해갔다. 이러한 활동을 계승한 한국동신회(韓國同信會)는 1984년 현재 집회소 16곳, 신도수 약 900명, 전도인수 8명으로 활동을 계속해 갔다. 조선전도부가 폐지되자 역사 속에서 곧 자취를 감춘 와타세의 조선전도와는 이 점에서도 큰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고 하겠다.
노리마츠의 조선 전도는 기독교의 복음만을 올곧게 전하려고 한 점에서 와타세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으나, 그에게도 역시 명치(明治) 일본인으로서의 한계는 있었다. 위에 있는 권위를 거역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노리마츠에게는 체제에 저항해서 싸우는 사회운동, 독립운동 등은 감히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3·1운동은 온순했던 조선인들이 갑자기 돌변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는 위험 천만한 경거망동으로밖에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험악한 정세 아래 있었던 조선의 신앙 동지들의 안부만이 걱정되었던 이 선량하고 평범했던 사람은 3·1운동을 일부 과격 분자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 독립 운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천황에 대한 소박한 존경심을 가지며 팽창을 계속하는 명치 국가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추종하고 있었던 극히 평범한 일국민으로서의 노리마츠의 한계였다(45).
그러나 노리마츠 이후의 개인 전도자들은 부조리한 식민지 지배가 한일 양국민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왜곡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결코 무지할 수는 없었다. 1934년 경상남도 보천성결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던 니시다 쇼이치(西田昌一)는 조선에서 1년 가까운 목회 생활을 하던 중 커다란 심경 변화를 경험했다. 그는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횡포와 거만함에 대해 일본인으로서 커다란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일본인으로서 한 사람 정도 조선인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 사람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고 하나님도 역시 바라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조선어를 학습하면서 조선 교회를 순회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주로 경상도 각지의 조선인 교회에 초빙되었는데, 조선어를 해독하지만 전도에는 정확을 기하기 위해 통역을 붙이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그의 전도는 1937년 1월 대구봉산정장로교회로부터 초빙을 받을 정도로 조선인 기독교인들에게 큰 신뢰를 얻게 되었다. 니시다의 일상생활은 신도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상담역이 되어 주는 것이었다. 조선 굴지의 공업지역이면서도 일본인들에게 경제활동을 완전히 장악당하고 가난과 소외속에 있던 조선인 신자와 아픔을 함께하는 매일 매일이었다. 니시다는 신사참배 문제로 많은 조선인 교직자가 투옥 내지는 휴직당한 상태에서 조선 각지의 교회를 순회하였고, 1940년에는 창녕장로교회의 목사로 초빙되었다. 이어 1943년에는 황해도 안악의 사리원감리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비상 시대를 살아가야만 했던 조선인 신도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자신들을 대변하며 보호해 주는 일본인 목사가 있다는 것이 마음 든든했던 것이다. 일본인으로서 조선의 양대 교파인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주임 목사가 되었던 것은 나시다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46).
1928년 목포에 들어와 조선전도를 시작한 또 한 사람의 일본 기독교인으로 오다 유지(織田猶次)가 있었다. 조선인의 고통·괴로움·기쁨을 함께 하며 조선인이 되자고 결심한 오다에게 조선인이 겪고 있는 식민지 통치를 몸으로 체험하게 해 준 사건이 있었다. 1931년 4월 함경도 무산에서 전도 활동을 하던 중, 조선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갑자기 경찰에 감금되어 5일간 밤낮으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 고통 속에서 오다는 조선인의 삶을 구속하고 있는 정치적 부조리를 절감하였을 뿐만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기를 위해 대신 죽으신 십자가라는 깨달음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회심의 체험 후 오다는 재조선경성성결교회 목사로 활동하는 한편, 1935년 5월부터 '조선복음기독교회'의 간판을 붙이고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여 기독교뿐만아니라 "너는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선 교회에서 신사참배 여부 문제가 최대의 이슈로 떠오르게 된 1937년 오다는 평안남도의 조선교회의 요망으로 평양숭실전문학교의 대강당에서 신사참배 반대의 설교를 5일간 하였다. 이어서 1938년 1월에는 그의 설교에 고무되어 민족운동에 참가한 평양숭실전문학교의 학생인 박중학의 체포에 연루되어 7개월간의 고문과 취조를 겪게 되었다(47).
1938년 7월 석방된 뒤에도 관헌의 감시로 인해 오다의 조선전도는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부조리한 정치에 의한 고난받고 있는 조선인에 대한 오다의 공감은 일본에 귀국한 후에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1942년 오다는 재일조선인교회인 일본기독교단 미카와시마(三河島)교회에 부임하였다. 1909년에 설립된 재일조선인교회는 1939년 종교단체법에 의해 일본 기독교단에 강제 편입되어 있었다(48).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민족운동 또는 미국인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재일조선인교회에 대한 탄압도 가중되어 1945년 8월 해방 당시에는 교회다운 교회는 겨우 18개소 밖에 남지 않았다(49).
당시 재일조선인교회 관계 목사는 오다와 박명준, 오윤태 목사 등 세 사람뿐이었다. 고난 속의 재일조선인교회와 행동을 같이 한 오다는 이름도 전영복(田永福)이라는 조선 이름으로 바꾸고 오윤태, 박명준 목사와 분투하여 1945년 11월 재일조선기독교회연합회를 발족시키고 마침내 12월 30일에는 재일조선인교회를 일본기독교단으로부터 탈퇴, 독립시켰다. 이 때 오다를 비롯한 재일 조선인교회 대표들은 일본기독교단 통리자 토미타(富田滿)에게 다음과 같은 통고문을 보냈다.
(1) 지난 1845년 11월 15일 재일본 조선기독교회 연합회가 결성됨과 동시에 일본에 있는 조선 교회는 일본 기독교단에서 탈퇴할 것을 결의하였음.
(2) 그 이유는 일본에 있는 조선 교회는 과거에 있어 조선에 있는 선교 기관과 카나다 선교부에 의하여 설립되어 매일 발전하는 도상에 있었는데 그 후 시국의 추이에 따라 관헌의 압박이 날로 더했으며 소위 내선일체의 정책에 따라 성경, 예배 용어, 기타 조선적인 일절의 언어·문자·의복·풍습까지 금지되어 조선 교회로서의 독자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 조선 교회는 생각할 여지조차 없이 일본에 있는 각 교파에 가입하여 일본적 교회로서 그 존재를 유지하도록 조치해 두었으나, 그 영향으로서 교세는 매일 쇠퇴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일본 각 교파가 합동하는 일본기독교단이 성립되었을 때 그 교단에 가입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자연적인 경로같이 보일지는 모르나 실은 모순당착적인 점이 많았고 보이지 않는 압박의 힘에 의하여 부자연적인 결말로 되어진 것은 명확한 사실인 것이다. 이번 종전과 함께 일본에 있는 조선 교회는 또다시 조선 본국의 선교 기관과 카나다 선교부와의 관계를 회복하여 조선 교회로서 본연의 태세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주신 조선 교회로서의 사명을 완수하고저 용감하게 일본 교단에서 탈퇴히기로 결의 하였음.(50)
위 내용은 재일조선인교회가 일본 교단에 편입된 과정의 부당성과 조선교회로서 본연의 자세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명백히 한 통고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다가 재일조선인교회의 독립과 재건에 적극적인 활동을 한 것은 엄청난 정치적 부조리 속에서 굴절된 삶을 강요당해온 조선인의 입장에 서서 자신의 신앙을 걸었던 그의 조선전도에 대한 열정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하겠다. 재일조선교회는 1948년 대한민국 성립과 함께 재일대한기독교총회라고 개칭하였다. 오다는 1948년 재일대한기독교 쿄토(京都)교회에 전임하여 1970년 이 교회를 사임할 때까지 29년간 재일대한기독교회의 목사로서 목회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교회에서는 문 하나를 열면 한국이라고 하여 한국어 사용을 엄수시켰다.
오다는 1980년 9월 72세로 소천하였다. 장례식은 재일대한기독교회의 합동고별식으로 올려졌고,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영광은 하나님께. 하나님은 조선 민족 구제를 위해 오다 유지(織田猶次)를 선택하셨다. 사명을 받고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주 그리스도의 인내를 갖고 민족을 사랑하여 모든 곤란을 극복해 전도의 생애를 완주하였다."
식민지 시대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피억압자의 고난과 치욕을 자신의 역사에 포함시키기 위해 고난의 종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망국의 슬픔을 민족의 창조적 재생으로 전회시키려 하였다. 오다는 이러한 조선 기독교인의 신앙을 공명하고 함께 걸었던 일본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5. 결론을 대신하여
이상으로 일본 기독교회와 일본 조합교회의 조선전도, 그리고 독립 전도자인 노라마츠·니시다·오다 등 3인의 조선전도의 내용을 고찰하였다. 이들의 조선 전도는 각각 하나의 유형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일본 기독교회에 의해 대표되는 유형은 일정한 현실 판단에 근거한 전도의 포기형이고, 조합교회에 의해 대표되는 두번째 유형은 식민지민에 대한 정신적인 폭력형이며, 개인 전도자들에서 보여지는 유형은 식민지민과의 연대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번째 유형인 식민지민과의 연대형은 일본 기독교회에서는 어느 교파에도 소속하지 못한 극소수의 예외에 불과한 '이례적'인 것이었으나, 기독교의 이념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여 준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사를 전체적으로 전망해 볼 때,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기독교의 이념의 부당성이 아니라 그 이념을 실천하는 데 실패한 점에 있었다. 이 점에서 일본 기독교회의 조선전도의 대세를 점했던 포기형과 식민지민에 대한 정신적인 폭력형도 예외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와타세는 역학적으로 압도적인 열세에 있던 식민지민을 대상으로 하여 오직 자신의 입장에 서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의 주형을 강요하였다. 그는 '이웃 사람'인 조선인으로부터 고유한 존재 의의와 삶의 양식을 박탈하고 조선인들에게 팽창을 계속하는 '대일본제국'을 위한 예종적 삶을 강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 와타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기됨에 대한 주장을 정죄하고 자기 포기와 인종(忍從)을 나타내는 '사랑'의 십자가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은 자기됨의 긍정과 자기애를 위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은 동시에 자기됨을 추구할 수 없는 모든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정당한 저항을 요구하는 '정의'의 주장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십자가는 정의의 주장을 내포하는 사랑의 십자가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신 앞에서 자기를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정립시키는 시점이면서 동시에 자기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상대화시키는 시점이기도 한 것이다.
와타세는 이러한 십자가를 자기의 시점에 있는 정의만을 절대화하여 타자에게 강요하는 근거로서 오용함으로써 타자를 '존재없는 자'로 무화(無化)시키고 있다. 즉 그의 십자가 이해는 자기 상대화의 시점을 상실하고 자기 절대화의 오류에 빠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십자가 이해는 그를 신앞에서 독립된 존재로 정립시키는 것에도 실패하게 했다. 그는 '대일본제국'과 상대적인 거리를 두고 독립한 개체가 아니라 그 안에 매몰되어 있고 그의 '정의'도 '대일본제국'의 정의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다. 와타세의 왜곡된 십자가 이해는 기독교인으로서의 그의 정체성을 극단적으로 취약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이름을 빌어 '대일본제국'의 '정의'를 실현하는 데 일조하게 했던 것이다. 결국 와타세를 중심으로 한 일본조합교회의 조선전도는 '탈아'에서 '맹아'로 나아가는 근대 일본의 대외 정책과 그 궤를 같이 하는 노선에 있었던 것이다(51).
이러한 와타세의 노골적인 '종교보국'(宗敎報國)의 조선 전도에 못지 않게 일본기독교회의 포기형도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사토와 같이 이의제기를 한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그들의 대다수는 와타세의 조선 전도를 침묵으로 묵과하였던 것이다. 그 배경에는 역사에 대한 그들의 패배의식이 있었다고 하겠다. "왜 조선인에게 전도하지 않는가"라는 오다의 질문에 재조선 일본기독교회광주교회의 목사 다나카(田中義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전도라는 것은 대화이고 감동시켜 구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은 정복자, 지배자, 말하자면 강도이며 조선인은 피정복자, 피해자이다. 그런데 일본인이 조선인에 대해 죄를 회개하라든가, 적을 사랑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조선인들은 너희들이야말로 회개하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강도가 피해자에게 7번을 70배될 때까지 용서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자네가 열심히 전도하면 어쩌면 모이는 조선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인으로부터 단물을 얻어 먹으려는 부류의 인간으로 조선인의 입장에서 보면 매국노다. 민족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조선인이다. 그런 사람들은 당신에게는 오지 않는다. 자기 민족을 팔아 먹는 부류의 인간들을 위해 무엇때문에 일생을 바쳐야 하는가.(52)
이 다나카의 대답은 일본 기독교회가 빠진 역사에 대한 패배의식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강도와 도둑의 관계로 유비되는 식민지하의 한일 관계가 가지는 정치적인 부조리 속에서 별다른 대안이나 이의제기도 못한 채 현실 타개의 실마리를 잃고 무기력 속에 빠진 것이다. 그들은 부조리라고 인식되는 상황에 대해 기독교인으로서의 뚜렷한 정체성에 근거하여 주체적으로 대응할 능력을 상실하고 상황에 패색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역사 패배주의에 빠진 것이다. 나아가 전 조선인의 매국노화를 목표로 하는 일본의 동화정책 그 자체를 비판하기보다 생존을 위해 매국노가 된 조선인에 대한 멸시감만을 대다수의 일본인과 공유하는 모순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와타세의 조선전도에 대해 침묵으로 방관한 일본기독교회가 빠진 무기력의 근본적인 원인은 여기에 있었다.
1995년은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독립 50주년을 맞는 해였다. 전후 청산과 한일 양국민의 진정한 화해와 연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소리가 그 어느때보다 높았던 한 해였다. 일본 기독교는 이 필요성에 응답하여 한일 양국민의 화해와 연대를 위한 어떠한 비젼을 제시할 수 있을까. 기독교인으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에 근거한 역사 창조의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한국 기독교는 일본 교회와 어떠한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과거 일본의 조선 전도는 적지 않은 시사를 준다. 각각의 문화 역사 공동체는 그 자체로서 양보할 수 없는 당당한 주체이며, 따라서 각 공동체의 상대적 중심성을 인정하는 자기 상대화의 겸허와 긴장에서만 참된 나눔과 연대가 가능해 진다는 평범한 진리가 한층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
(1) 芝原拓自[世界史のなかの明治維新], 岩波書店, 東京, 1977년, 200-205쪽.
(2) [福音週報], 明治23년(1890년)12월26일.
(3) [福音新報], 明治25년(1892년)10월14일.
(4) [福音新報], 明治27년(1894년)8월17일, 10월26일.
(5) 청일전쟁의 본질이 일본의 국권 유지와 확대, 아시아에서의 패권을 위한 전쟁이라는 것을 리얼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야마카타(山懸有朋)와 같은 천황제 관료들뿐이었다. 土肥昭夫[日本 敎史論], 敎文館, 東京, 1987년, 159쪽.
(6) [福音新報], 明治27년(1894년)9월14일.
(7) 池明觀‘日本基督敎會と朝鮮’, [東京女子大學附屬比較文化硏究所紀要]第39卷, 東京, 1977年, 5-6쪽.
(8) 池明觀, 小川圭治[日韓基督敎關係資料集](이하 [資料集]으로 약칭), 新敎出版社, 東京, 1984年, 46쪽.
(9) [資料集], 47-48쪽.
(10) [福音新報], 明治37년(1904년)3월10일.
(11) [福音新報], 明治37년(1904년)2월11일.
(12) [福音新報], 明治38년(1905년)1월13일.
(13) 擇正彦‘植村正久の朝鮮觀’, [三千里]제34호, 1983년5월, 東京, 45쪽.
(14) [資料集], 51쪽.
(15) [福音新報], 明治40년(1907년)10월17일, 池明觀, 전게논문, 12쪽.
(16) [基督新報], 大正5년(1916년)4월27일, 池明觀, 전게논문, 12쪽.
(17) [福音新報], 明治43년(1910년)10월6일, 池明觀, 전게논문, 13쪽.
(18) 松尾尊 ,‘日本組合敎會の朝鮮傳道’, [思想], 1968년7월호, 岩波書店, 東京, 2쪽.
(19) [新人], 1904년8월호.
(20) 松尾尊 , 전게논문, 2쪽.
(21) [基督敎 世界], 1910년9월1일.
(22) 韓晳羲, 飯沼二郞[日本帝國主義下の朝鮮傳道], 日本基督敎敎團出版部, 東京, 1985년, 73쪽.
(23) 松尾尊 , 전게논문, 8쪽.
(24) 韓晳羲 [日本の朝鮮支配と宗敎政策], 未來社, 東京, 1988년, 101-102쪽.
(25) 강신룡‘한국인 기독교인들의 구미아이교회 협력과 가입에 관한 일고찰’,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식지]제22호, 1996년1월, 53쪽.
(26) 동상, 55쪽.
(27) 동상, 57-59쪽.
(28) 松尾尊 , 전게논문, 8-9쪽.
(29) 동상, 9쪽.
(30) 土肥昭夫, 김수진역[일본기독교사], 교문사, 1991년, 189쪽.
(31) 韓晳羲, 飯沼二郞, 전게서, 112쪽.
(32) 松尾尊 , 전게논문, 12쪽.
(33) 동상, 13쪽.
(34) 姜德相 [現代史資料]제26권, みすず書房, 東京, 1967년, 474쪽.
(35) 韓晳羲, 飯沼二郞, 전게서, 119쪽.
(36) 片野眞佐子[孤憤の人: 柏木義円], 新敎出版社, 東京, 1993년, 189-214쪽.
(37) 松尾尊 , 전게논문, 12-13쪽.
(38) [資料集], 72-73쪽.
(39) 池明觀, 전게논문, 14쪽.
(40) 韓晳羲, 飯沼二郞, 전게서, 121쪽.
(41) [資料集], 77-78쪽.
(42) 韓晳羲, 전게서, 120-129쪽.
(43) 韓晳羲, 飯沼二郞, 전게서, 125쪽.
(44) 韓晳羲, 전게서, 144쪽.
(45) 동상, 141-144쪽.
(46) 韓晳羲, 飯沼二郞, 전게서, 189-193, 214-226쪽.
(47) 오다에 대해서는 織田猶次[ :朝鮮. 韓國人傳道の記錄], 日本基督敎團出版局, 東京, 1977년, 을 참고하였다.
(48) 재일대한기독교에 대해서는, 양현혜‘재일대한기독교회의 켄텍스트와 신학’, [기독교사상], 1995년9월호를 참조하기 바람.
(49) 오윤태[동경교회72년사], 혜선문화사, 1980년, 185-187쪽. 中濃敎篤[天皇制國家と植民地傳道], 國書刊行會, 東京, 1976년, 251-257쪽.
(50) 동상, 192-194쪽.
(51)鹽野和夫[日本組合敎會史硏究序說], 新敎出版社, 東京, 1995년, 99-100쪽.
(52) 韓晳羲, 飯沼二郞, 전게서, 180-181쪽.
첫댓글 오늘날의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중국선교에 뛰어든 한국교회의 선교의 모습과 한국의 개교회주의자들의 교권주의적인 정경유착의 현상과 교회안의 현상가운데서 말씀이 근간이 되지 않은 불신앙적 현상들이 교회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참고해 볼수 있는 글이라 생각하여 올려 봅니다.